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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섭의 시네마 크리티크] ‘판타스틱 우먼’ ― 그(녀)의 권리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그(녀)로 살아가기 또는 사랑하기

작품이 시작되면 스크린은 웅장한 이과수(Iguazu)폭포의 물줄기로 채워진다. 30초가 넘게 폭포의 모습만을 포착하던 스크린에 오프닝 크레딧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후로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지던 폭포의 모습은 ‘판타스틱 우먼(UNA MUJER FANTASTICA)’이라는 제목을 끝으로 다음 쇼트로 넘어 간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이때 ‘판타스틱 우먼’이라는 제목 아래 사우나에 누워있는 남성(오를란도)의 반나체가 위치하는 것은 묘한 부조화를 제공한다. 남성의 판타스틱함 또는 판타스틱한 여성의 남성성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스토리는 단순하다. 젊은 여자(마리나)와 동거하던 늙은 남자(오를란도)가 갑자기 죽었다. 아버지뻘 되는 남자였으나 이들이 사랑을 할 땐, 그 나이차를 인식하지 못할 만큼 어색하지 않았다. 낭만적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남자가 죽은 후, 젊은 애인은 세상의 오해와 편견에 맞서야 한다. 그 여인이 트랜스젠더이기 때문에 그녀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은 더욱 잔인하고 차별적이다. 오를란도와 데이트를 하며 감미로웠던 첫 십 여분 이후, 마리나는 줄기차게 차별이라는 사회적 장벽에 직면한다. 그녀는 줄곧 자신과 오를란도의 관계가 서로 합의한 ‘정상적인 관계’였음을 주장한다. 하지만 아직 이전 이름으로 존재하는 마리나의 모든 것은 사회적으로는 비정상적일 따름이다. 

  
 
병원 응급실에서 오를란도의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마리나를 포착하는 카메라는 ‘폐기물 지역(Area Sucia)’ 앞에 있는 그녀의 앵글을 확보한다. 마치 의료 폐기물처럼 그녀가 폐기되어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회의 시선을 대변하는 듯하다. ‘마리나’라고 이름을 밝혔음에도 그녀를 ‘이 남자’로 지칭하는 경찰. 23년의 현장경력에 석사학위가 있는 베테랑 여형사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를란도의 전처인 소니아는 그녀를 괴물 ‘키메라’로까지 표현한다. 

한편, 브루노는 오를란도의 애견 ‘디아블라’의 소유권에 대해 마리나와 대화하던 중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애완동물 주인은 두 부류인데 포유류 키우는 과와 조류, 파충류 과로 나뉘죠.” 그의 말은 주목할 만하며, 또 동시에, 자기 모순적이다. 포유류와 조류, 파충류라는 세 가지 종을 언급하면서, 애완동물을 키우는 이들을 두 가지로 분류하는 의도된 무지(無知). 결국 그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트랜스젠더라는 제3의 성(性)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감독의 의도를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혹은 괴물로 존재하는 제3의 성. 브루노 일당이 마리나를 납치해 투명 테이프로 모욕하는 장면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괴물처럼 일그러진 형상. 그러나 사실 그녀는 아름답다. 폭력과 왜곡이라는 테이프를 벗기면, 어쩌면 사실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작품 전체를 통해 마리나가 요구하는 것은 단순했다.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 앞에서 그와 작별할 권리. 그를 애도할 시간. 그러나 세상은 이 소박한 바람을 거부한다. 그녀가 품었던 사랑의 성실함과 그녀가 겪는 고통은 음악 선생님 집에서 그녀가 부르는 제미니아노 자코멜리(Geminiano Giacomelli)의 아리아 ‘나는 멸시 받는 아내(Sposa son disprezzata)’로 표현된다. 늙은 음악 선생님과의 애정 전력(前歷)을 암시하는 그 장면은 상대의 나이가 많든 적든, 상대의 성(性)이 무엇이든 “사랑은 찾는다고 되는 게 아님”을, 사랑은 운명처럼 그렇게 다가오는 것임을 알려준다. 

  
 
그녀의 사랑은 필연적이지만, 세상에 맞서야 하는 사랑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리나는 다시 거리를 행군한다. 바람을 거슬러 가는 마리나의 이미지는 작품의 주제를 압축해 낸다. 그녀는 말한다. “죽을 만큼의 고통이 나를 강하게 한다.”고.  

2. 물의 이미지

기예르모 델 토로의 <셰이프 오브 워터>처럼 세바스티안 렐리오의 <판타스틱 우먼>에서도 물(水)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첫 장면부터 스크린을 꽉 채우는 ‘거대한 물’ 이과수폭포는 오를란도가 마리나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떠날 여행지였다. 그리고 그 여행 티켓을 잃어버린 곳은 핀란디아(Filandia)라는 이름의 사우나. 핀란디아는 핀란드의 스페인어 표현이다. 핀란드 인들은 자기 나라를 수오미(Suomi)라고 부르는데, 이는 ‘호수의 나라’ 또는 ‘물의 나라’라는 의미이다. 

  
 
물에는 성(性)의 구분이 없고, 모습도 구별되지 않는다. 그래서 차별도 부재한다. 제3의 성(性)인 트랜스젠더의 사회적·인간적 권리를 소재로 하는 <판타스틱 우먼>은 그래서 물에 집착한다. 마리나(Marina)라는 이름 역시 ‘항구’나 ‘(여자)선원’을 의미하며 ‘바다’ 또는 ‘물’과 연관성을 갖는다. 이과수폭포를 포착하는 다양한 앵글은 모습의 구별 없는 물의 본질을 표현하려는 감독의 의도를 노출시킨다. 그래서 인정받지 못하는 두 연인은 그곳으로의 여행을 계획했다. 그런데 그 계획이 티켓을 분실함으로써 위기를 맞았다. 물의 나라인 사우나는 차별 없는 물을 담고 있지만, 그곳의 입장에는 성(性)이 구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맥거핀처럼 작품을 이끌던 오를란도의 사물함에는 결국 아무 것도 없다. 구별과 차별은 이토록 허무한 것일까? 

  
 
3. 마리나 ... 그리고 판타스틱

남자였던 다니엘은 성전환 수술을 통해 마리나로 개명했다. 그러나 아직 그녀의 사회적인 이름은 다니엘. 사람들도 그녀를 남성으로 대한다. 그녀의 이름처럼 성(性)도 아직 결론지어지지 않은 상태. 이러한 모호함은 그녀의 사회생활에도 반영된다. 그녀는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와 밤무대 가수를 겸업하고 있으며, 대중가요 싱어인지 오페라 가수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사실, 그녀는 이런 구별 또는 차별에 도전한다. 당당히 맞선다. 그래서 그녀는 생물학적 요인을 뛰어 넘어 더욱 판타스틱하다. 

  
 
작품의 스토리 전개 역시 현실과 판타스틱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래서 죽은 오를란도는 몇 번에 걸쳐 살아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세차장과 게이 바(bar)에서 마리나를 바라보더니, 결국에는 자신의 화장장으로 그녀를 인도하여 마지막 작별을 허용해 준다. 과연 판타스틱 한 것은 ‘판타스틱 우먼’뿐이었을까? 오를란도는 거의 하나의 삶을 경험한 인물이다. 그는 이 세상이 얼마나 이성애 중심적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트랜스젠더를, 그것도 딸 같은 나이의 마리나를 선택해 사랑해왔다. 그리고 결국 그는 유령(fantasma)의 모습이 되어 판타스틱(fantástico)하게 부활했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라틴아메리카의 문화 전반에 이미 깊숙이 침투해 버린 것이다. 

4. 그(녀)의 권리, 애도

결국 마리나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오를란도를 떠나보낸다.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그녀의 권리를 판타스틱한 방식으로 얻어낸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애견 디아블라도 얻어냈다. 작품을 마무리하는 공연 직전 침대에 나체로 누운 마리나의 다리 사이에 남녀를 구별 짓는 생식기 대신 거울이 있고, 그 거울을 통해 마리나의 얼굴이 비춰지는 장면은 감독의 노골적인 의도이다. 그 쇼트에 함께 들어 있는 디아블라의 모습은 마리나가 결국 사회와의 투쟁을 통해 자기 자신을 얻어냈음을 의미한다. 공연을 위해 나서는 그녀는 이제 바지를 입고 있다. 그리고 헨델의 ‘라르고(Largo)’를 노래한다. “이런 그늘은 없었네. 이 세상 그 어느 나무 그늘보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우며 이토록 감미로운 그늘. 이런 그늘은 없었네.[...]” 

  
 
이제껏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스스로 여자임을 증명하고자 작품 내내 긴 머리에 치마를 고집했던 마리나. 그녀는 이제 머리를 묶고, 바지 차림으로 당당히 오를란도를 애도한다. 자신을 지켜주었던 나무 그늘처럼 감미로운 사랑의 대상이었던 오를란도. 그녀는 이 아름다운 노래로 그를 보낸다. 


* 사진 출처: 네이버 - 영화 – 판타스틱 우먼 - 포토

글: 정동섭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연구자. 현 전북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서울대 교류교수,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 초빙교수, 전북대 인문학연구소장 역임. 『돈 후안: 치명적인 유혹의 대명사』, 『20세기 스페인 시의 이해』등의 저서와 『바람의 그림자』, 『돈 후안 테노리오』, 『스페인 영화사』등의 번역서가 있음.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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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0-09

조회수7,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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