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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한나>(Hannah,2017) - 슬프고 외롭고 고독한 노년의 감옥

 
 
슬픔, 가슴속 울부짖음

와이드 스크린 한쪽 끝에서 기괴하고 이상한 소리를 가슴 저 밑바닥에서 끌어올려 내뱉는 한나(샬롯 램플링), 그 소리는 마음속에 침전된 아픔을 끄집어내 애처로운 울부짖음으로 들려 묘한 슬픔을 자아낸다. 한나는 자신의 소리내기를 끝내고,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이의 소리를 처연한 눈빛으로 듣는다. 

연극 연습을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도착해, 음식을 준비하고 남편과 함께 식사한다. 여느 집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이지만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소리 때문이다. 그때까지 들리는 소리는 지하철 소리, 열쇠 놓는 소리, 음식 끓는 소리. 작게 들리는 TV 소리가 전부다. 저녁 식사 중 전구가 수명을 다해 암전이 되었을 때도 둘은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 한나는 어둠 속에서 묵묵히 밥을 먹고, 한나의 남편은 새 전구를 가져와 묵묵히 갈아 끼운다. 이후에도 그 집안은 오직 설거지하기 위해 틀어놓은 물소리로 가득 채워진다. 

밤에 잠들기 전 남편 등을 마사지하고, 양복을 입고 나갈 채비를 하는 남편을 기다리던 한나가 머리를 빗고 남편과 함께 말 한마디 없이 차를 타고가 도착한 곳은 감옥이다. 남편이 분명 죄를 지었으니 감옥에 들어갈 텐데, 무슨 죄를 지었는지 영화는 설명해주지 않는다. 와이드스크린의 긴 화면에 끊임없이 세로줄을 만들어내는 미장센을 통해 감옥에 간 남편만 쇠창살에 갇힌 게 아니라 한나도 현실의 벽에 갇혀있음을 보여준다. 혼자 대사 연습을 하면서 그녀는 혼자 되뇐다. “넌 생각하고 말하지 않아. 내가 함께했던 남자처럼” 한나는 남편이 지은 죄를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계속 떠오른다.

  
 
그러던 어느 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시몽 엄마라고 밝힌 여자의 방문에 한나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염치도 없냐”라며 현관문을 열 것을 요구한다. “아들이 매일 밤 침대를 적신다”라고 말하여 격렬하게 문을 열라고 요구하지만 한나는 그저 고개만 떨어뜨리고 서 있다. 그리고 다음 날 천정에 물이 샌다. 위층에서 아이들이 집안 가득 넘치게 만든 물, 주황색 물감을 묻히고 놀고 있는 아이들. 그 물이 아래로 흘러내린 것이다. 주황색 물감을 지우려 손을 빡빡 씻어보지만 지워지지 않는다. 남편은 아마 아동 성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다.

외로움, 신뢰를 잃은 사랑이 남긴 흔적

면회를 하러 간 남편이 “모두 내가 그랬다고 믿어”라는 말하지만 한나는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정말 남편이 소아 성애자이고, 아동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자신이 인정해버리는 순간 자신의 삶도 송두리째 뽑힐 것 같은 느낌, 마지막으로 붙잡고 싶은 실 날 같은 희망, ‘남편이 아니라잖아, 남편은 아닐 거야. 아니, 정말 아니어야 해.’ 그러나 집에 돌아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쉽게 잠들지 못하는 한나. 죽어가는 식물에 물을 주고 썩은 나뭇잎을 떼어내며 살리려 시도한다. 그러나 결국 살리지 못하고 깜박거리는 가로등이 있는 거리 안쪽의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살리지 못한 식물을 버리는 한나.

  
 
지금 그녀의 심정은 연극 대사 연습을 통해 겨우 들을 수 있다. “나 자신과 주변을 명확히 보기 위해 혼자 있어야 해. 어떤 식으로든 내가 그런 것처럼 속박 느낄 필요 없어. 둘 다 완전히 자유로워져야 해. 결혼반지 돌려줄게. 내 것도 돌려줘. 이제 끝났어.” 이제는 끝내고 싶다. 연극 속에서나마 결혼반지를 돌려받고 나니 좀 자유로워진 건가, 한나는 일하러 간 집의 세로로 쳐진 버티컬을 활짝 열어젖히고 바깥 풍경을 본다. 집으로 돌아와 케이크를 만들고, 손자 샤를리에게 생일 편지를 쓰고 지하철에 올라탄다. 

지하철에서 연인이 다투는 소리가 들린다. 여자는 말한다. “결국 내 잘못이란 말이지, 나만 미쳤지. 날 사랑하지 않지.”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남자가 대답한다. “사랑해,” 그 말에 더 격분한 여자. “날 사랑은 했니? 솔직히 모르겠어. 말을 했어야지 다 시간 낭비였어! 원하는 걸 말했어야지, 친구들과 섹스파티라니, 원하는 걸 말하지 그랬어, 처음부터 그랬어야지. 처음부터 말이야, 그럼 너랑 안 엮이는 건데, 진작 말했어야지. 원하는 걸 제대로 말했어야지! 뭐든 다 해줬는데, 이게 무슨 꼴이야. 문 열어, 당장” 여자는 지하철 문밖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간다. 그 대사는 한나의 억울한 심정을 대신한다. ‘소아 성애자라고 진작 말해줬어야지. 이게 무슨 꼴이야.’ 결과는 너무나 처참했다. 

  
 
케이크를 들고 찾아간 손자의 생일파티, 아들의 집으로 가는 길을 카메라가 천천히 그녀 뒤를 따라간다. ‘난 남편의 죄와 무관해, 오히려 나도 피해자야’라며 수없이 되뇌지 않았을까. 그러나 생일 파티가 한창인 한 집 앞, 아들이 나와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며 문을 닫아버린다. 공중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입을 틀어막고 오열하는 한나, 모든 죄를 씻으려는 듯 수영장의 물속에서 헤엄치고 물로 샤워하고 밖으로 나오다, 한나는 출입문에서 회원자격이 정지되었다는 통보를 받는다. 더 이상 대중과 함께 씻을 수도 없게 된 한나. 눈이 먼지처럼 날리는 거리로 나온다, 땅으로 꺼질 것 같은 걸음을 겨우겨우 떼며 걸어간다. 지하철에선 비애감이 흐르는 음악에 맞춰 한 남자가 춤을 춘다. 

고독, 모두 그녀를 버렸다

 결국 부정했던 모든 일이 현실이 된다. 씻기지 않는 아이들의 주황색 얼룩이 벤 천장을 고치기 위해 옷장을 들어내려다, 남편이 꼭꼭 숨겨두었던 진실의 실체가 드러난다. 옷장 뒤 사진이 든 봉투, 진실을 눈으로 확인한 한나. 면회를 간 한나는 아들 미셸을 만났다고 거짓말하며, 아들도 곧 면화를 올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남편은 오히려 뻔뻔하게도 아들을 절대 용서 못 하겠다고 말하고, 한나에게도 용서하지 말라고 말한다.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럴 수 있지?”라며 되묻기까지 한다. 면회시간이 끝나 남편이 들어가면서 언제 또 오냐고 묻자 한나는 “모르겠다”라고 말한다. 한나는 들어가는 남편에게 불쑥 “그거 찾았어.” 설마 하는 남편에게 “봉투 말이야, 사진이 들어 있는” 남편의 실체에 대해 진심을 쏟아 부어준다. 남편은 아무 말 없이 들어가 버린다.

버스를 타고 모래사장으로 올라온 고래의 사체를 보러 온 한나, 영화 내내 그녀에게 그어져 있던 세로 선들이 처음으로 사라진 바닷가, 수평의 모래사장 위에 고래가 죽어있다. 남편이 키우던 개를 다른 사람에게 입양시키고, 연극 연습을 하러 가지만 한 소리도 뱉어내지 못한 채 다시 지하철을 타러 간다. 다른 날과 달리 까마득히 가팔라 보이는 계단을 위태롭게 내려오고도 하염없이 내려간다. 땅속 깊은 곳으로 내려가고 또 내려간 한나는 지하철을 기다리며 위태롭게 휘청거리며 서 있다. 

  
 
부부는 성적 관계를 통해 깊게 맺어지는 사이다. 상대의 성적 취향을 전혀 몰랐다는 사실은 한나에게 오랜 시간 남편과 함께 살아온 시간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거기에 아버지의 잘못에 대해 부모를 모두 단죄하며 등을 돌린 아들, 사회가 부부라는 이유로 함께 새겨버린 주황색 낙인은 한나에게 깊은 고독과 자제력 상실이라는 치명적인 내상을 입힌다. 젊은이의 눈에 고인 슬픔은 눈물을 왈칵 쏟아내고 나면 다시 생기를 되찾을듯하지만, 노년인 한나를 연기한 샬롯 램플링의 눈에 고인 슬픔은 너무 오랜 세월 묻어둔 기억을 송두리째 거부해야 하는 절망과 가슴 깊이 침전된 고독이라 섣부른 위로조차 어렵게 하는 세월의 힘이 녹아있다.

글: 서성희
영화평론가. 대구경북영화영상협동조합 이사장으로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대표이자 대구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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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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