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팬의 곁을 지키며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뽐내는 팅커벨을 우리는 남성적 시각에 부합하려고 만들어낸 이상적 여성상으로 이해하기 십상이지만, 그것의 유래를 살펴보든, 최초 창작자인 제임스 매튜 베리의 묘사를 살펴보든, 사실 그 이미지가 썩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실제로 작은 요정의 기원을 (명확하지는 않지만 일단,) 일리야드에 나오는 피그미 족의 게라나(Gerana)로 부터라고 할 수 있다면, 아름다운 여인임에는 분명했던 게라나는 미의 여신인 헤라에게 도발하는 무모함 때문에 두루미로 변하게 된다는 점. 그리고 ‘팅커벨 증후군’의 의미가 좋아하는 사람의 눈에 띄기 위해 못된 짓을 하는 증상을 일컫는다는 점 등을 놓고 보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작은 요정의 이미지를 좋게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남녀를 막론하고 그 이전의 작은 인간에 대한 묘사는 꽤 냉랭해서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을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요컨대 평범한 크기의 인간은 작은 혹은 소인인 인간을 하나의 별 ‘종’(種, 種族)으로 취급했던 탓인지 별 호의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미친 과학이라는 별칭 하에 무균돼지를 통해 인간의 질병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과학적 욕망이 ‘작은 인간’을 유전적으로 조작하여 길러낸 후 장기이식에 이용하고자 하는 영역까지 언급되면, 분명 ‘작은 인간’의 ‘작은’이 갖는 의미는 분명 우리와 다른 종에 대한 인식으로서 거의 동물의 차원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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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크고 작음의 문제를 기술적 이해를 통해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리 해석될 여지가 생긴다. 이를테면 작은 인간을 우리와는 다른 종족(피그미 족)혹은 동물이라고 ‘운명적으로 구분 짓기’보다 크고 작음의 ‘가변적으로 연결 짓기’로 뒤바꿔보면 어떨까. 작은 인간을 별 ‘종’으로 여겼던 대립적인 시각을 호의적인 시각으로 구제할 수 있는 한 방법은 ‘과학과 인간소통’이라는 명제로 옮겨놓고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바꾸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과학적 이해를 섭렵한 인간은 모든 대상의 대립관계를 바꿔 놓을 수 있는가?’ 브루노 라투르의 네트워크 이론을 연상케 하는 이 질문은 우리를 사물과 사물, 인간과 인간의 소통영역을 넘어 인간과 사물, 사물과 인간의 초월적 소통이라는 화두 앞에 던져놓는다. 어쩌면 소통의 초월적 이야기로 이동하게 될 이 번 영화 <앤트맨과 와스프>는 이 영화가 마블 영화 <어벤저스> 시리즈의 어떤 연결고리로 작용할 것이라는, 소위 이미 잘 알려진 떡밥에 빗대어 이야기하자면 더욱 그러하다. 그 까닭에 마블이 구축하는 세계관이 우리의 지지를 얻는 이유는 시간을 뛰어넘든 우주 저 편의 강력한 빌런에 힘을 합쳐 대항하든 ‘과학과 인간소통’이라는 주제를 이런 관점을 빌어 독창적으로 창조했기 때문이 아닐까.
<앤트맨과 와스프>에서 스캇(폴 러드)과 호프(에반젤린 릴리)는 서로에게 호감과 경쟁심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커플이다. 그들의 만남은 아버지 행크 핌(마이클 더글라스)의 ‘핌 입자’가 가진 능력 덕분에 성사되었다. 사실 그 능력에 적응한 사람은 호프이지만, 활약을 보인 순서를 따지면 스캇이 먼저다. 내용은 간단하다. ‘핌 입자’의 크기를 조절하는 능력을 사용하여(말하자면 원자와 전가간의 거리 축소이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여러 상황을 불가능에서 꺼내 가능의 세계로 이끈다는 것. 이는 꽤 놀랍고 사실적이어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마저 허를 찔리듯 장면 장면에 감탄하게 된다.
크기가 작아진다는 캐릭터의 창조와, 그 이름을 ‘개미인간’이라고 붙인 발상은 거의 유아기적에 가깝지만, 여기에 양자역학의 세계가 CGI기술과 접목되면서 상당히 그럴싸한 모습으로 우리 눈을 매혹시킨다. 여기에 과거 회상 장면에서 화자의 목소리를 영화속 등장인물과 입 모양을 그대로 일치시키는 영화적 장치는 기발하면서 자칫 단순할 수 있는 영화의 결을 여러 갈래로 세련되게 나누어 놓는다. 여러 작품에서 우리에게도 친숙한 마이클 페나가 연기한 ‘루이스’는 여기에 최적화 된 캐릭터이며 이를 통해 단순히 발랄한 캐릭터 이면에 또 다른 매력을 불어 넣는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크기 조절 입자의 능력은 완벽하나 슈트의 장치오류로 우리가 기대하는 크기에서 다소 벗어나는 장면들이다. 어린아이의 크기로 변한다거나 4~5m의 크기로 변하게 되어 트럭을 스케이드 보드 정도의 탈것으로 뒤바꾼다는 점 등등이 그러하다. 이와 같은 설정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오작동을 일으키는 것은 핌 입자가 아니라 바로 기계장치라는 점이다. 그 크기의 오류는 자주 엉키어 결함을 보이면서 ‘양자역학적인 것’과 ‘전자전기공학적 의미’를 구분 짓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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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양자역학의 역사적 맥락은 전자전기공학의 발전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이 말이 조금은 잘못되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잘못된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 (과학사적인 내용은 조금 미뤄두고) 영화는 재닛(미셸 파이퍼)을 등장시킨다. 영화의 서사만을 놓고 본다면, 양자역학의 세계 속에서 30년간 머물러 있던 호프의 어머니, 재닛의 발견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영화에서는 단순히 ‘진화했다’라는 표현으로 갈음되지만, 그 안에서의 세계는 현실과 나란히 진행되고 있었음을 재닛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잘못된 점을 위한 질문하나가 또렷해진다. ‘과연 양자역학적인 것’과 ‘전자전기공학적인 것’은 서로 다른 세계인가? 이 영화는 이 질문에 아니라고 말한다. 거창해 보이는 이 질문 속 두 세계는 결국 서로 겹쳐져 있다는 것. 그래. 과학은 ‘연결’이다.
이제 그 연결은 영화 전체의 세계관 즉, 마블 세계관의 중첩의 고리를 완성할 것이다. 그렇게 <앤트맨과 와스프>는 과학이 영화에 적용되어 중첩과 연결이라는 융합적 사유를 보여주는 가장 비싼 돈이 든 영상 샘플 자료가 된다. 특히 이 영화 속 중첩관계는 양자론의 ‘불확정성원리’, 다시 말해 어느 하나를 보려고 하면 반드시 어느 하나를 볼 수 없게 된다는 원리를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게 한다. ‘무엇이 되었든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나누어 생각하려하면 할수록 어느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하이젠베르크의 원리. 이것은 결국 모든 것은 하나로 중첩되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역설하는 명제일지 모른다. 하긴, 위치와 운동량, 시간과 에너지, 사랑과 증오, 기쁨과 아픔은 어느 하나만을 골라낼 수 없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샘플들이 아니던가. 눈치 챘겠지만, 앞의 두 관계(위치와 운동량/시간과 에너지)는 과학이지만, 뒤의 두 관계(사랑과 증오/ 기쁨과 아픔)는 우리의 인생이다. 인간적인 면모가 과학의 진리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보면 <앤트맨과 와스프>는 과학적이며 인간적인 묘한 풍경의 영화다. 마블의 영화에서 마음에 드는 점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세계관을 가진 <앤트맨과 와스프>가 마블 세계관의 문지방 영역을 차지한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덧붙이면, 영화 <다운사이징>의 명료한 냉랭함 보다 <앤트맨과 와스프>의 이 이상한 인간다움, 바로 이것이 흥행성적 차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글·지승학
현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문학박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