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초여름, 한 편의 흥미로운 공포영화가 개봉했다. 가족과 악령에 대한 이야기로 촘촘히 구성된 <유전>(Hereditary, 2017)이 바로 그것이다. 귀신들린 집 혹은 악령에 빙의된 가족 구성원을 다루는 공포영화는 완전한 주류라고 할 수는 없어도 때마다 제작되고 관객들의 일정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중에서도 <유전>이 주는 특정한 종류의 흥미로움이 있는 듯하다. 평생을 알 수 없는 의식에 몰두했던 어머니의 사망 이후, 애니(토니 콜렛)는 자신의 가족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불행에 서서히 잠식당한다. 오랜 시간을 묻어 두었던 어머니와의 기이한 관계, 또한 삐거덕거리는 애니와 자식들과의 관계의 균열이 점차 벌어져 거대한 비극이 인물들을 덮치고, 드러나는 진실은 이들을 어느 곳으로도 도망가지 못하게 한다.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애니와 관객들이 함께 알게 되는 것은, 그녀의 어머니가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악마숭배와 관련된 의식에 오랫동안 관계해왔고, 남편이나 자식들의 몸에 파이몬 왕이라 부르는 악령을 빙의시키려 해왔다는 사실이다. 이는 줄곧 실패했고 애니의 두 자식에 이르러 마침내 그러한 의도의 완수가 코앞에 다가와 있는 상황이다.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가족관계는 최근 연이어 공개된 오컬트 영화들이 전제하는 관계와는 사뭇 다르다. 컨저링 시리즈나 인시디어스 시리즈를 떠올리면 보다 쉬운 비교가 가능할 것이다. 이를테면 여기에는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에게 불운하게도 잘못 걸린 저주, 그것을 함께 극복해나가는 힘없고 약하지만 단란한 가족의 모티브가 없다. <유전>이 일련의 사건을 겪게 되는 주인공 애니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압도적인 공포의 체험으로 다가오는 것은, 물론 짜임새 있게 설계된 공포영화로서의 형식적 미덕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기본적으로는 이 모든 불행에 도무지 출구가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마침내 진실을 알아낸 애니는 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불행을 처음부터는 아니더라도 어느 지점에서는 멈추고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는 듯 보이지만, 사실 여기에는 바로잡을 것이 없다. 그 무엇도 잘못 행해진 적이 없으며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유전(hereditary)을 통해 꼭 붙들어 매어진 관계 그 자체가 공포의 원인이자 실체인 것이다. 사랑하고 지켜야 한다고 느끼지만 어색함과 애증으로 뒤엉켜있는 애니와 두 자식과의 관계,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남긴 해소되지 않는 의문과 어두운 정념들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 <유전>(2017) |
가족을 소재로 하는 영화는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다양한 장르들 속에서 영화는 가족에 대한 저마다의 견해를 다양하고 풍부하게 펼쳐놓는다. 또한 가족이라는 관계가 영화에서 공포나 스릴러,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탁월한 소재가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감독 아리 애스터가 <유전>에 영향을 주었다고 밝힌 영화들은 재미있게도 고전 오컬트 영화들이 아닌 가족관계의 비밀과 균열에 대한 흥미진진하고도 쓰라린 드라마들이다. (<전부 아니면 무>(All or Nothing, 2002)와 <비밀과 거짓말>(Secrets & Lies, 1996), <45년 후>(45 Years, 2015), <아이스 스톰>(The Ice Storm, 1998), <침실에서>(In The Bedroom, 2001) 등)(『씨네21 1160호』) <유전> 정도의 장르적 선택이 아니더라도 가족이라는 관계에 대한 면밀한 탐구는 두려움과 아찔함, 절망과 처절함을 적게나마 포함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아리 애스터가 언급한 영화들 이외에도 여러 영화가 이러한 성찰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가족이라는 관계에 달라붙어 마지막까지 제거되거나 화해되지 않을 얼룩과 긴장을 끌어안고 계속 나아가보는 영화들이 있다. 완전한 파국에 이르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극복되지도 않은 채 지속되는 가족의 모습을 응시하는 영화들. 지난함과 지긋지긋함을 말하며 ‘그럼에도 가족’과 같은 수사에 기대기보다, 결코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가족의 모습을 담담하고도 용기 있게 말하는 영화들. <유전>을 보며 떠올린 두 편의 다른 영화가 있다.
노부부의 일상에 찾아온 균열, <45년 후>
앤드류 헤이의 <45년 후>가 좋은 시작이 될 것이다. 두 주연 배우에게 베를린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과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이 영화는 어느 노부부의 관계에 균열이 생겨나는 6일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암전된 화면에 알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곧 영국의 한적한 작은 마을의 모습이 보인다. 이곳에 사는 케이트(샬럿 램플링)와 제프(톰 커트니)는 곧 결혼한 지 45주년을 맞이한다. 이들은 자식 없이 오랜 세월을 단란하게 살아온 듯하고 각자의 직장에서 퇴직하여 지금은 개와 함께 산책하고 집을 관리하는 등의 소일거리를 하며 지내고 있다. 45주년 기념 파티는 그 주의 토요일, 영화의 시작으로부터 6일 후에 열릴 예정이다. 현재로서는 파티에서 틀게 될 음악을 고르는 정도의 일이 두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큰 일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들에게 독일에서 온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스위스산의 빙하에서 50여 년 동안 얼어붙어있던 한 여자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것이 편지의 내용이다. 발견된 시신의 주인은, 케이트와 만나기 전 제프의 옛 연인이었던 카티야다. 1962년 젊은 연인이던 그들은 스위스에서 이탈리아로 향하는 여정을 함께 했고 카티야는 불의의 사고를 당했으며 그녀의 시신조차도 찾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젊은 시절의 모습 그대로일 그녀를 떠올리며 동요하고 스위스에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며 중얼거리는 제프를 케이트는 염려하며 바라본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45년 후>에는 이렇다 할 커다란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일정을 뒤로 미루고 제프가 스위스로 떠나는 일도, 예고 없이 찾아온 과거가 두 사람을 크게 싸우게 하거나 완전히 갈라서게 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당장 토요일에 열리게 되어있는 기념식 준비도 차질 없이 이루어지고 두 사람은 친구들을 만나며 일상을 지속한다. 매일의 일과를 마치고 마주 앉거나 침대에 누워 둘은 카티야의 사고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굴곡진 사건 대신 영화를 조금씩 이끌어 가는 건 두 사람의 얼굴과 표정이다.
▲ <45년 후>(2015) |
▲ <45년 후>(2015) |
별다른 설명 없이도 영화는 케이트와 제프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세월과 둘의 관계를 탁월하게 보여준다. 교사였던 케이트는 이 관계에서 제프의 말을 듣고 다독이고 타이르는 쪽에 가까워 보인다. 처음 편지를 받고 제프가 독일어 사전을 찾는 장면에서부터 이러한 모습이 조금씩 드러난다. 어딘가에 사전이 있을 거라며 차고를 뒤지는 제프의 뒤에서 케이트는 조용히 사전을 꺼내주고 약을 챙겨주며, 끊었던 담배를 찾는 제프를 조심스레 타이른다. 화장실을 수리하다 손을 다쳤다는 제프의 상처를 살펴주는 케이트에게 제프는 마을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면서 투정을 부리는 듯이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한다. 이를테면 45년간 맺어온 이들의 관계에는 어떤 관성이 있고 그것이 현재의 일상을 지속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의 얼굴은 그러한 관성으로서의, 일상을 지속하는 것으로서의 얼굴이라 할 수 있다. 서로가 속속들이 알고 있는 다정하고 편안한 얼굴과 표정이 이들의 삶을 지탱하고 있다.
그런데 카티야의 소식을 담고 도착한 편지가 그 얼굴에 틈을 만든다. 45년을 함께 살면서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던 1962년의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제프는 편지가 도착한 그 날 밤 침대에 누워 조용히 케이트에게 들려준다. 공교롭게도 그 해에 케이트의 어머니가 죽었고, 둘은 같은 해에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그와 같은 대화를 이제야 처음으로 나눈다. 곁에 누워 이야기를 하는 제프를 바라보는 케이트의 얼굴을 카메라는 조용히 응시한다. 표정의 변화는 적지만, 조금은 불안해 보이기도 하고 조금은 놀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오랜 세월을 함께 하고도 말하지 않은 것을 처음으로 말하는 제프의 얼굴에서 케이트는 어떤 틈을 발견한 것일까. 불이 꺼지고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나는 케이트의 눈이 이들의 관계에 드러난 균열을 더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월요일에서 시작해 토요일로 이르는 동안의 요일을 자막으로 표시하며 시간의 흐름을 드러내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둘 사이에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는 균열과 흘러가는 일상의 힘이 겨루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편지가 불러온 파문을 감당하는 와중에도 이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미리 정해둔 약속을 위해 함께 외출하고 영화의 시간은 기념식이 예정된 토요일을 향해간다. 다음과 같은 장면이 있다. 다락방에서 슬라이드 영사기와 필름들을 찾은 케이트는 그것을 천에 비추어 사진을 확인한다. 놀랍게도 그것은 제프와 함께했던 시절의 카티야의 사진들이다. 계속해서 사진을 넘기는 케이트의 얼굴이 마주하는 것은, 제프의 얼굴 뒤에 줄곧 감추어져 있던 젊은 카티야의 얼굴인 것이다. (영사기를 넘기는 이 소리는 영화의 시작부분 암전된 화면에서 들었던 그 알 수 없는 소리다.) 더욱 놀랍게도 이 당시의 카티야는 임신 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사실을 마주한 케이트가 곧이어 받게 되는 전화는 토요일 기념식에 사용될 노래를 확정해달라는 것이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곡명을 하나씩 말한다. 이러한 대비와 긴장이 영화를 팽팽하게 잡아당긴다.
사진이 지시하는 사실도 물론 충격적이지만 그와 같은 사진, 다시 말해 카티야의 유령이 줄곧 케이트와 제프의 집에 함께 하고 있었다는 점이 케이트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 영화의 시간이 지속되는 내내 이들의 집 바깥에는 비바람이 불고 있지만 그래도 집은 비교적 편안하고 안전한 둘의 공간인 것처럼 보였었다. 그러나 카티야의 사진을 발견한 그 날 밤, 닫힌 다락방 문 아래 선 케이트는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다락방 문의 틈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금요일 저녁 케이트는 집 안 구석에 카티야가 늘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우리의 모든 일상을 그녀가 더럽혔다는 말을 제프에게 하면서도 자신이 알게 된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내일의 기념식을 문제없이 치러낼 것을 당부한다.
<45년 후>에서 사진에 대한 문제는 조금 더 등장한다. 이를테면 자식과 손주가 있는 그들 친구의 집에는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사진이 많이 걸려있지만 케이트와 제프의 집에는 사진이 없다. 자식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을 보는 등의 기념할만한 사건이 없었기에 그렇다면서 케이트는 집에 걸어놓을 만한 사진이 없음을 아쉬워한다. 작은 필름 조각이긴 하지만 물질적 형태를 갖춘 카티야의 사진이 등장하는 것은 그렇기에 더욱 정서적 파장을 남기는 듯하다. 이윽고 토요일의 기념식, 두 사람의 친구인 레나는 둘의 젊은 시절부터의 사진을 찾아내고 모아 붙인 커다란 액자를 선물한다. 이는 아름답고 감동적이지만 마치 두 사람 사이의 균열 위를 가까스로 덧붙여 놓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위태롭다.
영화의 마지막이기도 한 기념식에서 제프는 케이트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45년 전의 선택이 자신의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지금 옆에 있는 케이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 연설하며 끝내 눈물을 흘린다. 그런 제프를 바라보는 케이트의 표정은 미묘하다. 물론 그녀는 감동한 듯하고 조금은 뜻밖의 모습을 보이는 제프를 보며 놀란 것 같기도 하다. 곧 두 사람은 춤을 추기 시작한다. 45년 전 결혼식에서와 같은 음악에 맞추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러나 케이트가 보는 제프의 얼굴은 더는 예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분위기는 들떠있고 음악은 우아하며 사람들은 모두 쏟아져 나와 춤을 춘다. 이때 제프의 손을 뿌리치고 굳어가는 케이트의 얼굴, 그 자신도 결코 예전과 같을 수는 없는 케이트의 얼굴을 바라보며 영화는 끝난다. 이 관계는 단칼에 끝나지도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회복되지도 않을 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그리는 유령의 가족, 가족의 유령 <도쿄 소나타>
최근까지도 활발하게 영화를 만들고 있는 일본의 영화감독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업에서도 비슷한 테마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물론 유령과 감염, 접촉 등의 모티브를 중심으로 한 공포영화의 감독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여전히 싸이코 스릴러나 유령이 등장하는 드라마 등을 만들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공포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 정도의 수식어는 그의 영화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놓치게 만든다. 구로사와는 특히 최근작으로 향할수록 관계의 비대칭성과 결합의 불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을 껴안은 (재)결합에 대해 완고하게 탐구하고 있는 듯하다. 국내에서도 개봉한 바 있는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クリーピー, 2016)이나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공개된 <산책하는 침략자>(散歩する侵略者, 2017)와 같은 영화들은 소재도 장르도 다르지만, 파국적 상황을 맞이하는 커플의 마지막을 비추며 그러한 주제를 슬그머니 드러내 보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대개의 영화감독이 그러했겠지만 구로사와 기요시에게도 21세기로의 전환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스승이자 일본의 위대한 영화평론가인 하스미 시게히코는 구로사와가 21세기의 초입에 만든 두 영화 <회로>(回路, 2001)와 <밝은 미래>(アカルイミライ, 2003) 사이의 미묘한 전환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평을 덧붙였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친근한 존재가 모습을 감추고 일본의 수도로부터 완전히 사람의 모습이 사라져 버린 전작(<회로>)의 마지막을 지켜본 이에게 이 제목(<밝은 미래>)은 조금 기묘한 울림을 갖는다.”(『영화의 맨살 - 하스미 시게히코 영화비평선』) 이로부터 5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 구로사와 기요시는 <도쿄 소나타>(Tokyo Sonata, 2008)라는 영화를 내놓고는 다음과 같이 인터뷰했다. “요즘 나를 사로잡는 주제는 21세기가 대체 어떤 시대인가 하는 것이다. 왜 모든 것이 이토록 혼잡하고 혼란스러운 걸까. 왜 21세기는 이전 세기에 우리가 기대했던 미래의 비전과 이토록이나 다른 것일까. 이런 시대에 대한 책임은 대체 누가 져야 하는가. 대답을 찾기는 힘들다.”(『씨네21 694호』) 두 인용구를 억지로 연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완전히 달라져 버린 세상을 맞이하는 그의 영화적 태도에, ‘다시’ 만나고 ‘다시’ 시작한다는 것에 대한 거의 비관적일 정도의 숙고가 들어있다는 점 정도는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도쿄 소나타>는 그러한 고민이 가족이라는 소재와 만나 탄생한 영화다. 줄거리는 이렇다. 도쿄에 한 가족이 살고 있다. 아빠, 엄마 그리고 두 아들로 이루어진 이 가족은 평범하다는 수사가 딱 어울릴 법한 그런 가족이다. 아빠는 회사원이고 엄마는 가정주부이며 큰아들은 대학생, 막내아들은 초등학생이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아빠 사사키 류헤이(카가와 테루유키)는 실직자 신세가 된다. 회사에서는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비용이 적게 드는 유연한 인력교체를 원하고 류헤이는 그런 회사에 더는 도움이 되지 않는 직원이다. 회사 밖으로 쓸쓸히 나오는 류헤이의 주변에 양복을 입은 적지 않은 수의 실직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분명히 시대적인 배경과 영향 아래 있지만 그렇다고 외부의 원인과 오직 피해자로서의 가족 내부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빠져있지도 않는다.
그러한 전형화를 미묘하게 벗어나는 것은 영화의 오프닝 장면에서부터이다. 카메라는 집 내부에 있고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신문과 잡지가 천천히 휘날린다. 바깥에는 비바람이 불고 있는데, 창문이 열려있어 바닥에는 물이 조금씩 고여간다. 엄마 메구미(코이즈미 쿄코)가 서둘러 창문을 닫고 흥건히 고인 빗물을 닦아내는데 곧 다시 창문을 열어 비바람이 부는 바깥을 바라본다. 흥미롭게도 영화의 초반부 집 바깥에 부는 비바람은 <45년 후>의 집 바깥에 도사리고 있던 기후를 떠올리게 만든다. 지속적으로 비와 바람의 소리를 집안에 들려주며 관계의 균열을 일깨웠던 그러한 기후 말이다. <도쿄 소나타>에서 문제가 가시화되기 시작하는 것이 시대의 경제적인 위기와 변화로 인한 가장의 실직 때문이기는 하지만, 영화가 크게 관심을 두는 쪽은 그러한 변화를 겪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관계성 그 자체 혹은 이들이 모이는 집에 대한 탐구다.
▲ <도쿄 소나타>(2008) |
이들에게도 관성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있다. 여기서는 그것이 권위적인 가부장적 환경과 강하게 관련된다. 사사키 집안은 가장인 류헤이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듯 보인다. 모처럼 네 가족이 모두 모인 저녁 식사 장면이 있다. 엄마인 메구미와 두 아들 타카시(코야나기 유)와 켄지(이노와키 카이)가 이미 식탁에 앉아있지만 밥에 손은 대지 않고 있다. 이윽고 류헤이가 맥주를 한 잔 해야겠다며 캔맥주를 꺼내와 잔에 따르고 한 잔을 다 비울 때까지 이러한 분위기가 유지된다. 그리고 한 잔을 더 따라 마신 후, 류헤이가 밥을 먹자는 말을 하자 그때야 나머지 가족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평범한 식사장면이지만 이를 통해 이 가족의 관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영화 내내 제시되듯 이러한 권위와 관성은 그리 단단하지 않다. 무엇보다 영화의 시작이 류헤이의 실직으로부터가 아니던가. 그는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실직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양복을 입고 매일 아침 집을 나선다. 직업소개소를 전전하고 일자리를 구하는 일은 순탄하지 않으며 점심으로는 무료급식소를 이용하면서도 그는 이 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메구미의 일상은 단조롭지만, 집안일을 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것을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대신 그녀는 종종 바깥을 바라본다. 비바람이 부는 창밖을 굳이 다시 창을 열어 바라보고, 운전할 일은 없어도 운전면허증을 따두며 사지 않을 자동차를 보러 다닌다. 실직한 이후 조금씩 이상한 내색을 보이거나 두 아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폭력적으로 주장하는 류헤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도 메구미다. 알 수 없는 표정의 메구미는 마치 균열이 일기 시작한 일상의 틈 바깥을 더듬는 것 같다. 어느 밤, 남편을 기다리다 소파에서 잠들었던 메구미는 류헤이의 귀가와 함께 잠에서 깨어나지만 누운 채로 손을 뻗어 누군가 자신을 일으켜주기를 조용히 소망한다. 이때 그녀의 손짓은 어딘지 기이하다. 화면에는 오직 그녀의 두 팔만이 보이는데, 여기엔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쓸쓸함과 서늘함이 공존하고 있다.
두 아들에 대해서도 언급할 것들이 있다. 큰아들 타카시는 아르바이트와 학교를 오가며 무료한 일상을 보내다 돌연 미군에 입대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는 출구도 없이 답답하게 고착되어있는 현대 일본을 마주한 청년 세대에 대한 면밀한 고찰의 결과다. 물론 세부적인 부분들이 그를 좀 더 풍부한 인물로 만든다. 류헤이로부터 입대는 절대 안 된다는 선언을 들은 타카시는 나름의 방법으로 결국 미군에 지원해 집을 떠나게 된다. 그를 배웅하는 건 엄마인 메구미다. 버스터미널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둘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 흔치 않게 다정하고 그렇기에 다소 슬프다. 마치 오즈 야스지로 대화의 형식을 떠오르게 만드는 이 대화 장면에서 타카시는 메구미에게 이혼하고 다시 시작 할 수 있다는 말을 건네고는 버스에 오른다. 그는 다정한 사람이고 아버지의 권위를 견딜 수 없어 하는 새로운 시대의 청년이지만 홀로 집을 떠나 모두와 헤어진다.
또래들과 왁자지껄하게 어울리기보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솔직한 막내 켄지는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하나 이 역시 류헤이의 폭력적인 권위에 가로막힌다. 급식비로 피아노 교습비를 대신해 몰래 피아노를 배우게 되지만 이 같은 사실이 들켜 류헤이와 켄지 사이에 격렬한 다툼이 오간다. 이윽고 집의 1층과 계단을 비추고 있는 카메라에 계단 위에서부터 켄지의 몸이 굴러떨어져 내려오는 것이 보인다. 이 충격적인 장면에서 가까스로 유지되는 듯 보였던 집의 관성이 와장창 깨어지고 적나라한 폭력의 결과가 드러난다. 집은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공유되지 않는 고독을 지닌 채 모여 종종 밥을 먹곤 하던 공간, 가족들이 가족을 연기하던 공간, 어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함께하고 있다는 환상을 붙들어두던 공간이었다.
이 같은 공간의 관성이 깨어지자 이제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고 저마다의 위험에 처한다. 메구미의 꿈에는 돌연 타카시가 유령 같은 모습으로 돌아와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는 말을 하고, 꿈에서 깨면 집안에는 식칼을 든 강도가 들어있다. 대형마트의 청소부로 일을 시작한 류헤이의 앞에는 변기 옆에 떨어진 거액의 돈 봉투가 보이고, 켄지는 무임승차하다 걸려 구치소에 들어간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 사이에서 모호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야쿠쇼 코지가 연기한 강도는 위협적으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어설프고, 처음에는 인질로 잡혀 차에 탔던 메구미는 강도를 태운 채로 어느 바닷가까지 운전해 간다. 두 사람은 더 이상의 길이 존재하지 않는 해변의 끝에서 더 나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삶을 떠올리며 절규한다. 류헤이는 돈 봉투를 끌어안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달리다 차에 치인다. 켄지가 들어간 구치소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유령처럼 모여 있다.
불행한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자 가족들은 다시 집으로 모인다. 이상한 강도는 차를 몰고 바닷속으로 들어갔고 메구미는 홀로 눈을 떠 떠오르는 태양 앞에 선다. 류헤이는 차에 치어 쓰러진 그 자리에서 마치 잠에서 깬 듯이 일어나 돈 봉투를 유실물 보관함에 넣은 뒤 집으로 향한다. 켄지 역시 구치소에서 나와 집까지 걷는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린 집에 역시 엉망진창이 된 가족이 모여앉아 서로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침밥을 먹는다. 이들이 겪은 일이 현실인지 환상인지조차 모호하다. 심지어는 이들이 모두 살아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온갖 얼룩과 죽음의 기운이 들러붙은 가족은 그렇게 다시 결합한다. 그러고 보니 영화에선 도처에 실패한 가족의 형상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켄지의 피아노 선생님은 이혼절차에 스트레스를 받고, 류헤이의 실직한 친구 쿠로스는 끝내 그 부인과 동반 자살을 택한다. 사사키 가족은 마치 이러한 실패까지도 모두 끌어안은 채 끝과 시작의 경계에 다시 선 듯하다.
영화의 마지막은 그와 같은 사건 이후 4개월이 흐른 어느 날이다. 류헤이는 여전히 마트의 청소부로 일하고 있다. 타카시에게선 미국에 더 남아서 하고 싶은 일을 해보겠다는 편지가 도착한다. 켄지는 음대 부속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심사회장에서 피아노 연주를 앞두고 있다. 류헤이와 메구미는 함께 심사회장을 찾는다. 켄지가 연주를 시작하면 심사회장에는 드뷔시의 <달빛>(Clair De Lune)이 고요히 울려 퍼진다. 이 연주는 아름답고도 서늘하다. 연주를 끝낸 켄지는 부모와 함께 불현듯 심사회장을 떠나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이들이 겪은 문제들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가족은 여전히 유령과도 같다. 이러한 영화의 선택은 갑작스러운 희망으로의 전환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차 없는 절단도 아니다. 가족은 다시 시작하기 위한 길 위에서 있다.
▲ <도쿄 소나타>(2008) |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45년 후>와 <도쿄 소나타>에는 동일한 표현이 등장한다. ‘다시 시작한다’는 표현이다. <45년 후>에서 기념식을 하루 앞둔 금요일 저녁, 케이트는 제프에게 자신이 느끼는 절망과 분노를 전하고 앞으로 두 사람이 해야 할 일에 대해 말한다. 평소와 같이 약을 먹고 잠자리에 든 뒤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시작해보자는 것이다. <도쿄 소나타>의 파국의 밤, 각각 멀리 떨어진 메구미와 류헤이는 처절하게 중얼거린다. 여기서부터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이 영화들을 보고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섣부른 답변을 하기는 어렵다. 이를테면 이들이 함께 불행과 고난을 견뎌냈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다시 한번 가족이라는 이름과 관성에 무비판적으로 기대는 일이 될 것이다. 다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해를 시도해 볼 수 있다. 무언가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그것이 설령 가족과 같이 가깝고 익숙한 관계에서 일지라도, 관계들 사이에 놓인 모든 얼룩과 장애물을 뚫고서 혹은 제거하고 나서가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서 비로소 가능해지는 일이 되리라는 사실이다. 혹은 관계 맺음이란 개인들 사이의 거리와 격차를 좁힌 뒤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 거리와 격차 위에 간신히 놓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영화들은 지난한 관계를 단숨에 잘라내고 희망적으로 보이는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기를 제시하는 대신, 그 관계들 사이에서 사라지지 않는 찌꺼기와 얼룩, 멀고 먼 거리와 격차를 보여주기를 택한다. 그러한 영화들과 함께 우리의 관계 역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글 : 손시내
2016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에서 활동 중.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