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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향의 시네마 크리티크] 만들어진 가족과 도둑맞은 가족-영화 <어느 가족>

 
 

* 이 글은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만들어진 ‘어느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지난 영화(<세 번째 살인>)를 만들면서 더 이상 가족 얘기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다시 자신의 장기로 돌아왔다. 원제인 <만비키 가족(万引き家族>의 의미처럼 이 가족은 물건을 훔쳐서 생활을 유지한다. 제목에 관한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일본어로 ‘만비키’(万引き)라는 ‘shoplifters’는 ‘도둑질하는 사람들’이라는 뜻과 동시에 ‘그들 자신이 여러 곳에서 도둑질을 당한 사람들’이라는 뜻도 있다.”(1)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가족은 도둑질을 할 뿐 아니라, 도둑질을 당하기도 한다는 것인데,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이는 명확하게 분기되는 분위기와 스타일로 드러난다.

  
 

영화가 시작되면 능숙한 방법으로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는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쇼타(조 카이리)가 등장한다. 언뜻 부자관계처럼 보이는 이 두 인물이 물건을 훔치는 장면을 카메라는 트래킹 숏으로 관조하듯 따라가는데, 음향효과나 인물들의 태도를 통해 이들의 절도 행각은 긴박험 대신 다소 유머러스하고 쿨하게 표현된다. 무사히 생필품을 훔쳐 내고 나온 두 인물의 대화로 보아도 그렇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야구 경기의 규칙을 알려주기나 하는 것처럼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태도를 유지한다. 일반적인 사회 도덕 관념이나 관습과 배치되는 이러한 태도는 영화의 전반부 내내 지속되는 이 가족만의 독특한 분위기이자 그들에게만 통용되는 규칙이다. 오사무는 어린 아들에게 절도를 더 잘하기를 권하며 때때로 ‘아직 주인이 없는 물건’이니 괜찮다고 하거나, 학교를 가고 싶다고 하자 학교는 혼자서 배울 줄 모르는 사람들이나 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때 우리는 가볍게 실소를 터트리게 되는데 물론 이는 그 논리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가족의 태도가 영화적 설정일 뿐임을 자각하고 있어서 관조하듯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방치하고 학대하는 부모로부터 어린 여자아이(유리, 사사키 미유)를 구해서 가족으로 삼고 그들 안에서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가족에 대해 우리가 심리적으로 동조하게 되기 때문에 때때로 그들이 벌이는 절도 행각들이 통념에 어긋나더라도 다소 허용적인 입장으로 이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아들에게 절도를 교육시키거나 부모가 엄연히 있는 어린 여자아이를 일정한 절차 없이 데려오고, 오사무가 막일을 하러나가서 의도적으로 다리를 다쳐서 보험금을 타내려 하거나, 노부요(안도 사쿠라)가 고객의 세탁물에서 나온 물건들을 챙기고, 이 가족 내에서 이모격의 위치에 있는 아키(마츠오카 마유)가 유흥업소에서 일하면서 돈을 쉽게 벌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한다든가, 할머니인 하츠에(키키 키린)가 사회복지사가 찾아올 때 가족이 없는 체 하며 복지 혜택을 부정수금하고 전남편의 아들 가족에게 찾아가 방문을 빙자해서 돈을 받아내는 모습 등은 밝은 색채로 처리되는 이 가족을 그저 유쾌하게만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특히 하츠에 할머니에게 나오는 연금이 주된 수입원이면서도 노부요나 오사무가 할머니를 물주 정도로 생각하는 듯한 발언들을 할 때는 이 만들어진 가족이 그려내는 따뜻한 공동체가 실은 그저 물질적인 필요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전반부 내내 그들만의 규칙들이 통용되는 오사무 가족의 세계가 비교적 코믹한 색채로 그려지고 전도된 그들의 당당한 태도가 때로 웃음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어딘지 불안정한 그들에 대해 완전히 동조할 수도 없는 애매모호한 감정들을 관객에게 주게 되는 것이다.

  
 

주워 온 가족 공동체의 위태로움

이 영화의 전반부에서는 무기력한 남편 오사무와 주도적인 아내 노부요를 통해 가족멜로드라마의 익숙한 공식과 감정적 과잉을 위반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역설적으로 ‘가족 공동체’이라는 이상향에 관해서는 향수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혈연으로 맺어진 실제 가족들에게서 버려지거나 그곳에 속하지 못한 자들이 그들만의 공동체에서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족을 이루는 모습은 낙오된 자들을 다시 따뜻한 가족 공동체라는 이상향에 포섭시킨다는 측면에서 문제적이다. 가족 전부가 해수욕장으로 소풍을 가거나 같이 불꽃놀이를 보면서 행복한 순간들을 공유하고, 노부요가 린(‘유리’를 ‘린’이라는 이름으로 바꿔줌)과 목욕을 하면서 두 사람에게 동일하게 남은 가정 폭력의 흉터를 보고 정서적으로 가까워지거나 아키가 자신의 발을 만져주며 감정을 읽는 할머니 하츠에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 쇼타에게 다정한 아버지처럼 대해주는 오사무의 모습 등에서 이들이 이전에 누리지 못했던 가족애가 드러나며 이를 통해 각각의 인물들의 상처가 치유되고 유대는 깊어진다. 이는 고레에다 감독의 전작들(<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와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에도 반복되는 설정인데, 대개 혈연이나 생물학적 결정성에 의한 가족 구성에 의문을 표한다는 점에서는 일차원적인 가족주의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그들이 다시 유사 가족으로 회귀되는 욕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문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후반부는 기존의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유사 가족주의적 이상향에 대한 낭만성을 걷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더 예각화된 인식을 보여준다. 사실 이 가족 공동체에는 두 가지의 근본적인 위태로움이 내재되어 있었는데, 하나는 물질적으로 풍족한 상태가 아니라는 점에서 끊임없이 돈 문제가 대두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 공동체의 바깥에 엄연히 법률로 행해지는 국가주도의 통제 시스템이 작동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 영화에는 감독의 전작 <아무도 모른다>(2004)와 유사한 설정들이 등장한다. 책임감 없는 부모에게 태어나 돌봄 받지 못한 어린 아이들이 있고 이들이 사회 복지시스템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그러한 방치 상태가 어린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14년 전에 비해 더욱 비루해진 일본의 현실에 대해 비관적인 진단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이 가족 구성원의 상당수는 사회적으로 그 존재가 지워진 상태이나 이들이 현실과 완전히 유리된 곳에서 안정적인 가족공동체를 도모할만한 지적 인식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결국 치밀하지 못한 행동들로 발목을 잡히고 마는 것이다.

린의 실종이 텔레비전 뉴스에 등장하면서 이들에게는 본격적으로 현실의 침투가 시작된다. 그리고 할머니 하츠에의 죽음을 분기점으로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확연히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오사무 가족에 대해 전반부 내내 유지하던 온정주의적인 영화의 톤은 후반부에 들어 완전히 달라져 현실의 냉혹한 시선으로 이 가족에 대한 의구심을 전면적으로 드러낸다.

도둑맞은 가족과 홀로 서게 된 아이들

영화의 후반부에서 오사무 가족을 어설프게나마 묶어왔던 논리는 전부 부인당하고 이들은 가족을 잃게(도둑 맞게) 된다. 이 가족에게만 통용되던 규칙들이 모두 허약한 기만에 불과함이 간파된 것은 쇼타가 자랐기 때문이다. 빠찡코에 빠진 부모에게 유기되어 주차장에서 발견되었던 쇼타를 오사무와 노부요가 ‘주워서’ 가족이 되었지만, 어린 린에게도 도둑질을 권하자 쇼타는 갈등한다. 그리고 가게 아저씨로부터 동생에게는 도둑질을 시키지 말라는 말, 즉 그에게 최초로 전달된 외부인의 호의를 통해 현실 세계의 보편적인 통념을 자각한다. 이에 쇼타는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도둑질뿐인 오사무가 아버지로 있는 가족 공동체가 가지지 못한 윤리적인 선택에 대해 고민하면서 린을 대신해서 잡혔던 것이다. 그리고 조사 과정에서 학교를 보내지 않던 오사무의 논리대신 “집에서 배울 수 없는 것도 있다”는 조사관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게 되면서 비로소 오사무 가족이 구축한 세계의 규칙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노부요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직접 낳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있다고 믿었던 그녀에게 조사관은 “낳지 않으면 엄마가 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리고 끝내 “그 아이들은 당신을 뭐라고 불렀나요?”라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없게 된다. 오사무 역시 아빠라 불리길 원했던 희망을 포기하고 “아빠는 아저씨로 돌아갈게”라고 쇼타에게 말한다. 노부요가 쇼타는 이미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도 마찬가지의 맥락일 것이다. 결국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이들의 유사 가족 만들기라는 이상은 비극적 실패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이상주의적인 도피처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감독은 비관주의적 현실인식을 보여주며 이들 가족을 다시 보편적인 통념 아래로 위치시킨다. 이들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다만 그들이 같이 지나온 시간 자체가 완전히 무화된 것은 아닐 것이다. 가족이 만들어준 생의 어떤 빛나는 추억들이 ‘밀개떡’의 맛이나 소리만 들리는 폭죽 소리, 낚시하는 기술 등으로 삶의 순간순간 떠오르게 될 것이다.

  
 

아이들은 자라지 못한 어른들을 대신해서 성장했고 결국 오사무 가족에게서 흩어져 홀로 서게 되었다. 쇼타가 일부러 잡혔다고 말하면서 오사무의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고, 다시 부모에게 돌아가 ‘유리’가 된 ‘린’이 여전히 혼자 놀면서도 더 이상 외로워 보이지 않으며 새 옷을 사주겠다는 엄마의 말을 거절하는 것 그리고 하츠에에게 속았다고 믿었던 유키가 다시 돌아와 가족들이 살던 집의 문을 열어 보는 것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살고 있던 고레에다의 외로운 아이들은 역설적으로 가족을 도둑맞고 외롭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늘 다시 가족이라는 유대로 회귀하던 고레에다 가족영화의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주석
(1) 이화정, 「[칸국제영화제 총결산②] 황금종려상 수상한 <만비키 가족>-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씨네21》, 2018.5.30.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어느 가족>
* 이수향: 영화평론가. 201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수상. 공저로 『영화광의 탄생』(2016), 『1990년대 문화 키워드 20』(2017).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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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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