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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가해와 피해의 미로에 갇힌 엄마들- <마더>와 <밀양>에 대한 윤리적 기억

 
 

0. 박탈당한 모성, 박탈하는 모성 


  <마더>가 도착했을 때, 잠시 망각했던 질문으로서 <밀양>이 떠올랐다. 두 영화 모두 살인이 발생하고 해결을 위해 기억을 소환해야 하며 종국에 가서는 망각을 도모하는 주인공이 전경화된다. 영화가 끝난 이후 영화 속 주인공이 점유한 위치도 미묘하게 연결된다. 어떤 면에서는 <마더>가 끝난 지점에서 <밀양>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효도관광에서 돌아온 혜자(김혜자 분)는 이제 <밀양> 오프닝 신의 신애(전도연 분)가 되어, 아들을 데리고 일상의 물리적 거점을 옮겨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 끝에 재구되는 것은, 유사적 연상관계로 합치되는 '엄마의 일생'이다. 

 그런데 엄마'들'의 차이를 기반으로 주목해야 할 논점이 있다. 신애와 혜자의 기억·망각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모성의 낯선 면면을 까발린다. 선별된 기억과 의지적 망각의 기묘한 접합면들로 실재의 틈입이 이뤄지는 것이다. 그들 장면엔 낯선 윤리적 논점을 배면에 숨긴 서로 다른 외상적 사건이 있다. 그렇다면 이 글은 신애와 혜자의 ‘기억/망각’을 짜맞추며 충격적 외상으로 내려앉은 사건들을 재호명하려는 기획이다.   

 <밀양>은 아들의 부재(준의 죽음)라는 실재의 순간을 앞에 놓고, 박탈당한 모성의 불가해한 행보로 긴장을 조성한다. 반면 <마더>는 엄마의 부재(종팔의 출현)라는 실재를 뒤에 놓고, 박탈당한 모성으로 출발해 박탈하는 모성이 되고 만 혜자의 고통을 전시한다. 이렇게 환언할 수도 있다. <밀양>은 정신적 외상의 내력을 영화 바깥(남편의 죽음)에서부터 안(아들의 죽음)으로 연결한 후, 망각에 기대지 않고서는 삶을 견딜 수 없는 신애를 지켜보게 한다. 신애가 경험한 끔찍한 사건 이후를 관음하는 우리의 욕망은 언제든지 선정적 호기심과 이웃하기 쉽다. 그러나 이창동은 신애의 외상이 서사적으로 봉합되는 길을 열어두지 않는다. 우리의 쾌락적 호기심과 신애의 실존적 고통 사이의 간격을 유지시키면서 매우 낯선 윤리적 아포리아의 세계로 데려간다. 그 곳은 밀양 주민들의 의뭉스러운 시선과 종교적 도그마가 규율하는 상징계적 질서 바깥이다. 신애는 대타자로부터 자신을 분리함으로써 실재의 윤리를 실천하려 했던 것이다. 

 <마더> 역시 기이한 치정극의 내막을 훑어가려는 우리의 욕망을 훼절시키며 충격적인 외상을 안기는 영화다. 봉준호는 우리의 관음적 욕망이 찾아다닌 궁극의 대상, 곧 진범이 밝혀지는 순간을 매우 영리하게 배치한다. 그러나 그보다 섬뜩한 외상으로 들이닥치는 장면은 진범 아닌 자의 특기할 만한 얼굴이 우리가 추측해 온 진범의 자리를 대체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마더>가 제기하는 일차적인 문제는, 혜자의 모성과 공모하여 무고한 자들에게 단죄의 칼날을 들이댄 우리의 음침한 욕망, 그 자체가 된다. 그런데 우린 <마더>에서 상대적으로 간과된 한 인물의 사연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봉준호의 전작 <괴물>로 비유하면, '강두(송강호 분)'에서 출발한 혜자가 '괴물'이 되는 표면적 플롯진행에만 집중해선 안 된다. 아정. 그녀는 종팔과 더불어 모성에 내재된 배타적 폭력성을 충격적으로 고발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이 글은 <마더>의 최종 피해자의 위치에 아정을 놓고 가해의 혐의가 분명한 용의자 모두를 취조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신애와 혜자의 ‘기억/망각’의 메커니즘이 절개해 보인 모성의 불가해한 양면성을 면밀히 해명해보려는 시도다. 그녀들은 가해와 피해 사이를 오가며 출구없는 고통의 포로가 된다. 중요한 것은, 신애와 혜자가 다다른 영화적 결말에 이르면, 우리가 그들에게 미묘한 부채의식을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그 부채의식을 해명하는 과정에 <밀양>과 <마더>가 기획한 서로 다른 윤리적 전언이 읽힐 것이다. <밀양>과 <마더>는 좀 더 우리의 기억이 될 필요가 있다. 

  
 
1. 피해자의 외양과 가해자의 내면

 <밀양>의 신애는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을 잃는다. 그녀는 곧 극단적인 무기력 상태에 빠지고 아들이 있던 자리를 메우기 위해 종교에 귀의한다. 종교가 상징적 대체물로 구실하면서 신애의 애도작업을 돕는 셈이다. 그런데 이 설명은 신애와 종교의 관계를 완벽하게 묘사하지 못한다. 자신이 내뱉은 거짓말에 의해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과 신애의 종교생활 사이에 모종의 연관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 연관관계를 구체화하면, 신애의 종교는 스스로의 가해 사실을 '망각'하기 위한 자기 주술로 판명난다. 즉 피해 흔적의 치유가 아니라 가해 사실의 초월을 위한 혐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신애가 피해자의 외양과 가해자의 내면을 동시에 지녔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영화 바깥의 이야기부터 먼저 하자. 상식적인 차원에서 보면, 신애는 남편의 외도․죽음과 관련하여 피해자 쪽에 속한다. 그렇다면, 신애는 남편을 향한 복잡한 애증의 기억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남동생 앞에서 남편의 외도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먼저 신애가 남편의 외도를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 왔음을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남편의 죽음 이후 고통이 배가되어 방어기제로서 부인(denial)이 고착화 되었리라는 점이다. 이 중 어느 하나만 맞을 수도 있고, 둘 다 맞을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온 과정 자체에 자기 기만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남편의 외도․죽음과 관련하여 자신이 절대적 피해자란 사실을 공표하기 위한 욕망이 밀양 이주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밀양>은 출발부터가 가해자의 내면을 초월하기 위한 비상식적 여정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아들의 죽음 이후, 신애가 보인 행동은 정확한 '반복'이다. 신애의 거짓말, 곧 경제적 여유에 대한 과장은 아들에 대한 잠재적 폭력으로 이어진다. 거짓말이 '유괴-살해'의 빌미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들의 '유괴-살인'에 가담한 자로서, 그 끔찍한 기억을 간직해야 하는 공포는 신애의 내면에 방어기제를 만든다. 이 역시 '부인'이다. 그래서 살인범 도섭을 찾아가 행하려고 한 신애의 용서는 그 배면에 복잡한 욕망을 은닉하고 있다. 용서란 특정 사건의 피해 당사자가 가해자에게 할 수 있는 윤리적 구원이기에, 신애는 용서를 행하는 것만으로도 가해 혐의를 상대방에게 전가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용서 행위 자체가 완벽한 자기기만이며 그에 대한 일체의 시도는 곧 '부인'의 실천이 된다. 그렇게 보면 신애의 밀양 이주와 면회실 방문은 가해자라는 상징적 신분을 숨기고, 아들에 대한 죄책감을 자기 안에서 탕감받기 위한 행동이라 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신애의 용서 기회는 좌절된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반드시 '망각'해야 할 외상을 신애는 더 큰 상처로 새기게 된다. 면회실 신의 특징적인 쇼트들은 이러한 정황을 시각적 은유로 전달한다. 도섭의 등장 쇼트에서, 도섭의 얼굴은 화면을 수직으로 삼등분하는 쇠창살 한 가운데에 고정된다. 이를 통해, 도섭이 완벽한 가해자의 모습으로 구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기표화된다. 그런데 이 신의 마지막 쇼트에 이르면, 신애의 얼굴은 도섭의 얼굴이 있던 자리로 가 결박되고 만다. 가해의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 찾아간 면회실 신에서, 신애는 '죄없음'의 선언에 실패하고 도섭과 등가의 위치를 확인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여러 평자들의 견해처럼 용서기회마저 신에게 빼앗긴 신애의 충격만으로 면회실 신에 고인 정념을 다 해석할 수 없다. '죄없음'을 선언하기 위해 찾아간 면회실 신에서, 신애가 가해의 기억 속으로 침잠하게 된 사실을 언급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면회실 신은 자기 내면의 불가해한 죄의식과 대면한 신애를 초점화 한다.  

 피해자로서 외양과 가해자로서 내면 사이의 낙차는 <마더>의 혜자에게서 더욱 극명하게 벌어진다. 역시 영화 바깥에서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저능아로 태어난 도준과 그를 아들로 둔 혜자는 모자관계의 출발 시점부터 서로 근원적 피해를 공유하게 된다. 그로 인해 도준을 향한 혜자의 극성스러운 보호의식은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숭고한 가치로 부상한다. 희생을 내면화했을 혜자의 세월만큼 감동이 배가되는 식이다. 영화 중반부 변호사를 만나러 노래방에 간 혜자는 살인혐의를 받고 있는 도준의 무죄를 증명할 마지막 희망을 잃는다. 혜자와 도준 위에 군림하는 세상은 도준을 4년간 정신병원에 보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종용한다. 그 순간, "저기요, 내 아들은......"이라고 말을 하려던 혜자를 지우며 의외의 쇼트가 도착한다. 그 쇼트는 혜자가 내민 박카스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어린 도준을 또렷하게 부각시킨다. 나중에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혜자는 도준에게 농약을 먼저 먹이고, 자신도 그 농약을 먹고 동반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 도준에게 도착한 이 끔찍한 기억, 곧 (혜자의 입장에서) 실패해야 할 기억은 오히려 혜자의 망각을 실패로 만들며 혜자의 양면성을 부각시킨다. 이 충격적인 기억 내용에 대해, 혜자가 "그때 내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너는 난데. 세상 천지에 너하고 나하고..."라고 절규하지만, 도준은 그 기억을 혜자가 자신을 죽이려 한 사건으로만 단정 짓는다. 혜자가 아들로부터 가해자의 위치에 내몰린 것이다.

 주목할 것은, 모성의 절대치를 보여주는 혜자가 그녀의 주변 인물들에게서도 점점 가해자로 특정되어 간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가족단위 바깥을 향해서는 언제든지 불합리한 폭력이 될 수 있는 모성의 음험한 실체가 누설된다. <밀양>에서 신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도섭으로 제한할 수 있는가. 우린 이 질문에 이미 간접적으로 답한 바 있다. 그런데 그 질문의 <마더> 버전은 더욱 중요한 논점을 내포한다. 아정을 죽인 범인을 도준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가 더 분명히 가시화되기 때문이다. 면회실에서 나눈 혜자와 도준의 대화는 이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무시하면"(혜자), "작살낸다"(도준), "한 대 치면"(혜자), "두 대 깐다"(도준) 이 대화는 절대적 가치로서 모성이 처세의 방편으로 도준에게 체화시킨 지침을 보여준다. 결국 아정은 "작살낸다"와 "두 대 깐다"의 규칙에 의해 죽었고, 도준에게 절대화된 모성에 의해 희생된 셈이다. 이렇게 혜자는 상징적 차원에서 가해자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마더>가 기획한 궁극의 충격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것의 도착은 종팔의 등장과 보조를 같이한다. 혜자가 벌여 온 도준에 관한 구명운동은 종팔에게 치명적 가해가 되어 돌아온다. 표면상 혜자가 종팔을 지목하여 살인범의 누명을 씌우지 않았음에도 잠재적 가해 혐의는 결코 벗을 수 없다. 그 무렵 감당하기 힘든 자괴감에도 불구하고 혜자는 극구 종팔이를 만나러 간다. 이때 혜자의 표정은 기시감을 준다. 만류를 무릅쓰고 도섭을 만나러 가던 신애의 표정이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내러티브적 측면에서 종팔과 도섭의 위치가 상이하지만, 혜자 역시 종팔의 면전에서 가해자라는 상징적 지위를 '부인'하기 위해 면회실을 찾는다. 그전까지의 영화 정보를 종합하면, 종팔은 살인범의 누명을 쓰지 않더라도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할 인물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억울한 종팔을 향한 우리의 부채의식을 탕감해줄 얄팍한 정보다. 그러나 종팔의 등장 쇼트.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흐려진 영상이 다시 또렷해지는 순간 우리는 다른 차원의 긴장에 휩싸이게 된다. 종팔은 정상성의 세계 바깥, 즉 계획적으로 악의적인 범죄를 저지르기 힘든 ‘도준의 세계’에서 왔다는 것이 밝혀진다. 심지어 종팔은 얼굴 윤곽에서부터 뚜렷한 타자성(다운 증후군)이 현시된다. 유념할 것은, 그는 자신을 지켜 줄 최소한의 보호막으로서 '엄마'조차 없다는 점이다. 이로써 혜자의 모성, 즉 <마더>를 이끌어 온 정서적 동력은 그 가치를 완전히 의심받게 된다. 

 모성에 대한 낭만적 신화가 완전히 훼파되는 이 순간, 출처가 다른 질문도 도착한다. 혜자 홀로 그 모든 가해의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 제기의 이유는 혜자의 모성을 용인하고 싶은 막연한 정서와의 타협 때문이 아니다. 영화 속 또 다른 가해자들이 평온한 일상을 허락받았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 질문의 신애 버전은 좀 다르다. 그것은 신애 스스로 가해의 고통을 감당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쯤 될 것이다. <밀양>과 <마더>에 관한 윤리적 기억은 그 질문들이 답안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2. 끝나지 않는 투쟁, 두 가지 윤리

 <밀양>은 신애의 내면에 약동하는 정념의 움직임을 빈번하게 감춘다. 신애가 아들을 앞세우고 웅변학원에 처음 들어설 때, 유괴범과 통화 후 도로 위를 홀로 내달릴 때, 아들의 죽음 이후 밀양 시내를 걸을 때, 혼자 남겨진 거실에서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으로 착각할 때, 카메라는 신애의 표정없는 뒷모습을 오래도록 잡는다. 주관적 동일시를 이끌어내야 할 타이밍에 삽입된 이러한 쇼트들은 우리를 절대적 외부의 관찰자로 고정시킨다. 다분히 침착한 성찰을 유도하기 위한 기획이다. 아들의 사체를 확인하는 신도 그 연장선상에 놓인다. 그 신의 첫 쇼트, 그러니까 경찰차에서 내려 아들의 사체가 있는 자리를 바라보는 신애의 정면 얼굴 쇼트는 피해자의 그것이다. 그러나 곧 이은 롱 테이크 쇼트에는 언덕 위에 선 신애의 뒷모습만 확인된다. 그 언덕 아래에는 아들의 사체가 있다. 그 후 이 쇼트가 끝날 때까지 신애의 치명적인 슬픔은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전해지지 않는다. 단지 그녀가 아들의 죽음을 확인했다는 정보만 전달된다. 이 건조한 묘사 앞에서 좌절된 것은 우리의 관음적 욕망만이 아니다. 신애의 욕망도 불분명해진다. 범인을 잡고자 하는 욕망, 아들을 되찾고자 하는 욕망, 더 근원적으로는 새출발을 다짐하며 밀양으로 내려올 때의 욕망이 모두 겨냥점을 잃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 신애의 욕망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 질문은 신애에게서 읽히는 ‘가해/피해’의 양면성을 더 구체적으로 해명할 것을 요구한다. 먼저 신애의 아들과 그것의 대체물로서 종교(기독교)가 신애의 내면과 맺는 관계를 살펴보자. 프로이트의 『토템과 터부』에서, 금기로서 '아버지'는 아들들에 의해 살해된다. 그 후 아들들은 상징적 아버지로서 토템을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살인의 죄책감을 면피한다. 이 내용은 라캉의 시선으로 다음과 같이 재해석된다. 금기로서 최초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거부와 욕망의 대상이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사라지고 나자 아들들은 자신이 만든 규제의 틀, 즉 '상징적 명령(법)'에 제한받는다. 

 이러한 설명은 신애의 내면에 그려진 욕망의 궤적을 설명하는데 요긴하다. 신애에게 아들의 의미는 라캉이 말한 최초의 '아버지'다. 죽은 남편의 고향에 내려와 사는 과부에게 쏟아지는 주변의 시선을 견디게 하는 법이자 희생적인 삶을 당연하게 하는 금기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초의 '아버지'로서 아들은 자신에 의해 살해되고 그 자리엔 상징적 아버지로서 기독교가 들어선다. 이때의 기독교는 프로이트의 용어로 '토템'이면서, 라캉의 용어로는 '법'이기도 하다. 라캉은 '법'이 곧 금지이고, 그 안에 위반의 욕망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금지와 욕망은 상호의존하며 공생하는 셈이다. 그처럼 신애가 붙든 기독교는 순종에의 강요를 통해 그것 너머를 욕망하게 하는 관념적 환상, 혹은 역설적 구조물이 된다. 이로부터 영화 후반 신애의 행보가 해석된다. 신애는 가해자의 낙인을 위반하기 위해 자신의 진짜 욕망에 충실하게 되고 결국 상징계의 지지물로서 기독교에 저항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때의 저항은 모성의 자기 투쟁 흔적이면서 정신분석학적 의미에서 윤리의 실천이 된다. 신애는 라캉의 선언, 곧 "너의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언명과 그에 내재된 전복적 문제제기에 충실한 것일 뿐이다. 상징계의 법은 욕망의 포기를 도덕적인 것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그 안에는 주체의 빈곤(욕망의 포기)에 기대어 자신의 결핍을 숨기려는 상징계의 비윤리성이 담겨있다. 따라서 신애가 의도한 '나는 가해자가 아니야' 혹은 '네가 가해자야'라는 선언은 상징계가 줄 수 없는 것을 요구하며 상징계 전체를 상대로 싸움을 거는 행위다. 이것은 자기 자신 이외에는 외부의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행하게 되는 윤리적인 도전이 된다. 그에 대한 결과로 밀양 주민과 기독교인들로 대변되는 상징계적 질서는 그녀를 ‘미친 여자’로 호명한다. 그러나 신애는 집요하게 ‘가해자’라는 낙인에 항거하며  실재의 윤리에 투신한다.

 이러한 해석은 <밀양>의 내러티브를 지지하는 뼈대에 대한 심미적 통찰일 수 있다. 그런데 그 같은 통찰에서 주어지는 정서적 긴장의 최대치는 종반부 미용실 신에서 주어진다. 신애는 도섭의 딸 정아를 미용실에서 마주한다. 정아가 주저하며 신애의 머리를 손질할 때, 신애는 면회실 신에서 거부한 도섭에 대한 용서를 정아에게 대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정아는 살인범(도섭)과 한 핏줄이라는 점에서 ‘가해-피해’ 구도에 미묘하게 인접한 기표다. 더군다나 법제도에 의해 아버지와 더불어 처벌받은 적이 있다는 점(소년원 수감)에서 이들 부녀관계는 또 다른 인접성을 이룬다. 더 중요한 것은, 도섭의 수감으로 피해를 입은 정아와 신애의 거짓말에 의해 죽은 그녀의 아들이 유사적 연관관계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미용실 신의 카메라는 신애의 감은 눈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지금 신애는 대타자가 내세운 윤리(혹은 내부에 병리적 본성을 감췄으나 겉으론 말끔한 사회화된 도덕)에 따라 유보되었던 용서를 행할 것인가, 아니면 용서기회의 자발적 거부를 통해 자기만의 주이상스로 나아갈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갈등하는 중이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 신애는 미용실을 과감히 박차고 나간다. 상징계의 법이 내세운 강력한 회유를 과감히 거부하는 셈이다. 

 이제 종찬을 이야기해야 할 때다. 그러고 보면, 미용실을 떠난 신애가 다다른 엔딩신에 이르기까지 종찬은 신애의 곁을 지켜왔다. 최소한 그는 신애를 '미친 여자'로 보지 않거나, '미친 여자'로서의 신애조차도 용납한다. 어쩌면 그는 고독한 싸움을 하는 신애에 대한 관객의 부채의식을 덜어주기 위해 존재한다. 거울을 들고 신애의 배경 속 정물이 되어버린 종찬은, 그 자체로 <밀양>이 묘사한 낯선 윤리에 대한 소리없는 옹호다. 따라서 <밀양>의 마지막 프리즈 프레임은 메워지지 않는 고통의 거리를 배회하는 인물(신애)과 메울 수도 있을 것 같은 위안의 간격(종찬)이 희미한 햇살 아래에서 교감하는 윤리적 정물화다.    

 이제 <마더>가 요구하는 윤리적 입장을 점검하기로 하자. ‘엄마’라는 이름으로 아들에 대한 편집증적 도착을 습관화하는 동시에, 아들 바깥으로는 배타적 폭력성을 분출하던 모성에 관해선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죽은 아정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상징적 위치와 그것이 드러내는 ‘(비)윤리’다. 이 문제에 대한 논증을 통해 혜자가 감당하게 된 고통을 나눠져야 할 현실윤리의 오염원이 드러날 것이다. 먼저 아정을 수식하는 '쌀떡소녀'라는 호칭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쌀떡'이란 단어는 간과해선 안 될 문제들을 함유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쌀'이 주는 뉘앙스와 관련된다. 우선 아정은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원조교제를 한 것이 아니다. '쌀'이란 단어는 그녀의 원조교제가 생존의 수단이었음을 강조한다. 그런데 세상은 그런 아정의 절박함을 비아냥거림으로 소비하고 그 무렵 도준은 "오빠랑 한번 할래? 술 한 잔? 남자가 싫은가?"라는 말을 건넨다. 그렇게 보면 "바보같은 새끼야"라는 아정의 응대에는 번지수가 옳았든, 틀렸든 인간적 수치심과 더불어 계급적 분노가 고여 있다. 

 아정의 핸드폰에는 문제적 가해자‘들’에 대한 두 가지 착안사항을 환기시킨다. 먼저 ‘쌀떡’이라는 단어에서 다시 ‘떡’이라는 은어를 분리하여 젠더의 문제에 주목해 보자. 세상에 편재하는 위선으로서 남성의 과잉 욕망은 명백한 비판의 대상이다. 더군다나 아정의 몸을 소비한 자들은 은밀한 섹스 경험을 안주삼아 퍼뜨리며 아정을 두 번 죽인다. 그 때문에 혜자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종팔과 고물상 노인을 구제하고픈 정서적 충동 때문에 아정의 죽음을 간소화해서는 안 된다. 고물상 노인만 보면, 그는 어느 비 오던 날, 우산과 거스름돈 천 원을 혜자에게 건넴으로써 혜자에게 약간의 위로를 건넨 것으로 비친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그 역시 참극이 벌어지던 날, 어린 아정의 몸을 쌀과 교환하려 했고, 그런 관계를 오래도록 지속해온 것으로 판단된다. 고물상 노인이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아정의 몸을 소유하려한 자의 전형은 아니지만, 그 역시 용납될 수 없는 과잉의 욕망을 폭력적으로 배설해온 자에 속하는 셈이다. 자칫 아정과 노인의 관계를 낯선 슬픔을 동반하는 계급적 연대로 본다면 중요한 윤리적 논점을 놓치게 된다. 아정은 같은 계급으로부터도 함부로 소비된 이중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두 번째 착안사항이 드러났다. 그것은 아정이 속한 계급적 층위에 대한 변별적 재인식이다. 사실 아정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대사, “바보같은 새끼야”는 다른 주소지로 발송된 것이다. 그 대사가 실제로는 돈으로 아정 자신의 몸을 쉽게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을 향한 것이었다면, 더욱 그러하다. 아정에 대한 직접적 가해자가 되고 만 도준과 그를 길들인 잠재적 가해자 혜자는 아정의 계급적 분노를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아정을 소비한 남자로 내러티브상에 명확히 폭로된 종팔, 고물상 노인, 또래 고등학생 역시 아정과 같은 계급이란 점에서, 아정의 마지막 분노의 우선적인 종착지는 아니다. 절박하게 쌀이 필요한 아정의 상황을 기만적으로 이용해 그녀의 몸을 소모품처럼 반복․소비한 자들이 있었다면, 그들이야말로 그 대사의 일차 주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퀀스에서도 철저히 숨겨진 그들은 내러티브상 최대의 수혜자가 되어 안전을 보장받는다. 

 그런 면에서 혜자가 아정 핸드폰의 실체를 파악한 시점부터는 죽은 아정의 반격이 행해졌어야 한다. 그러나 봉준호는 이 시점부터 장르영화의 쾌감을 휘발시킨다. 히스테릭한 한국의 어머니와 불구적인 한국의 아들을 전면화하기 위해 시선의 분산을 원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남은 것은, 변호사, 정신병원 원장, 검사, 경찰 등 공동체의 윤리를 훈육하고 계도해 나가야 할 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봉준호의 단편 <지리멸렬>에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곤 했던 그들은 <마더>가 끝난 이후에도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언어와 성기로 아정을 소비한 남성들, 즉 아직 죽지 않은 아정을 상징적 차원에서 미리 휘발시킨 자들의 배후에 위치한 심각한 가해자다. 종팔은 수감되었고, 고물상 노인은 죽었으며, 혜자는 물리적 구속을 피했을 뿐 정신적으로 영원히 종팔과의 면회실 신에 갇혀 살 것이다. 후경으로 밀려난 혜자를 딥포커스로 건져낸 면회실 신 마지막 쇼트의 의미도, 그녀가 그 순간을 외상으로 또렷하게 간직할 것이라는 암시다. 그렇다면 혜자의 고통 뒤에 숨은 그들은 영화가 관객에게 처단을 이양한 마지막 용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0. 미로 속에 갇힌 출구없는 모성
 
 기실 이 영화는 아직 말해지지 않은 모성에 관한 논점을 더 안고 있다. '아정-치매 할머니'와 '혜자-도준'의 유사관계는 그것을 암시한다. 아정 역시 아버지가 집을 나간 후 죽은 엄마의 자리를 대신해 왔으며 가난과 편견에 시달리면서도 보살펴야 할 대상(치매 할머니)을 안고 있었다. <마더>가 미처 다루지 않은 시간 속에서 아정은 혜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낭만적으로 신화화 된 ‘모성’의 이미지 안에 ‘돌봄’에의 헌신이라는 클리셰가 있다면, 아정 역시 너무 일찍 ‘모성’을 연습한 인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혜자와 아정의 최후는 세 가지 결론을 일깨운다. 첫째, 위악적인 현실 앞에서 모성은 힘이 없으며, 둘째, 모성을 숭고한 가치로 절대화는 것 자체가 허약한 봉합이고, 셋째, 모성이 서로 대극을 이루는 양방향, 곧 희생적인 사랑과 희생시키는 폭력으로 동시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마더>는 모성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내밀하게 교정한다. 

 영화가 끝나가는 순간에도 혜자는 고통에서 벗어날 출구를 도무지 발견하지 못한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고물상을 나선 혜자가 처음 맞닥뜨린 것은 빽빽한 소나무 밭이다. 그녀는 쇠창살처럼 그녀를 수직으로 분할하는 소나무 밭에서 잠시 머물다가 바람 한 점 없는 들녘으로 나아간다. 수직구도의 화면은 수평구도의 안정감으로 이어지고, 형언하기 힘든 표정으로 춤을 추는 혜자를 <마더>는 긴 시간 음미하게 한다. 구도 자체는 모성이 주는 환상처럼 평화롭지만, 혜자의 표정은 음산한 화면톤과 만나 관객을 불가해한 영화의 정서 안에 끝까지 가둔다. 영화 말미 혜자가 추는 춤사위는 죽은 자들을 위한 길닦음이면서 기억을 초월하고픈 열망의 주술화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위약효과일 뿐, 죽은 자들은 이미 고통의 기억이 되었고, 자신의 살아있음은 희망이 되지 못한다. 

 그렇게 혜자는 가해와 피해 사이의 미로에 완전히 갇힌다. 그것을 재확인이라도 시키듯, 도준은 불탄 고물상에서 혜자의 침술도구를 찾아온다. 망각해야 할 것의 귀환. 그 순간 미용실에서 정아를 만난 신애의 고통이 혜자에게 드리운다. 신애는 눈을 감았지만, 혜자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다. 그렇게 <마더>는 <밀양>과 마찬가지로 가해자여서 더욱 피해자로 남게 된 모성(혹은 그 반대)을 끝까지 구원하지 않는다. 이제 그녀들은 망각이 아니면 헤쳐갈 수 없는 미로를 감당해야 한다. 신애는 아들과 마주 앉던 식탁을 떠나 싱크대 앞에 계속 홀로 서야 할 것이다. 제 머리카락마저도 당분간 스스로 깎아야 할지 모른다. 신을 부정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하는 그 길은 상징계의 무능과 싸우는 인간의 길이다. 반면 혜자는 다시 식탁 앞으로 돌아와 도준과 앉는다. 그러나 도준이 들고 온 침술도구에 의해 “나쁜 일, 끔찍한 일, 속병나기 좋게 가슴에 맺힌 것”과 동행하는 삶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 여자로서 출구는 남았을지 모르지만, 모성으로서 출구는 닫힌 것처럼 보인다. 외상이 된 기억의 부피가 완벽한 망각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에.

 자신의 삶과 욕망을 포기하면서 '아가페'의 외양을 지켜내는 모성이 반드시 윤리적일 순 없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흔들림없는 유지는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맹목화된 모성을 숭고의 가치로 환원하는 우리의 습관은 기형적 관계망을 낳을 것이다. 반사적으로 날아간 도준의 돌멩이가 모성의 영역 내부에서 탄생한 폭력성이라면, 도섭의 존재는 모성의 영역 바깥 지근거리에 생긴 폭력성이 아닌가. <밀양>과 <마더>가 끝난 후 우리에게 전가 된 불편이 그녀들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 그것은 맹목적 모성이 스스로 만든 결과다. 모성을 둘러싼 이데올로기가 좀처럼 바뀌지 않을 한국 사회라면, 이들 영화의 칼끝을 더 숙고해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가해와 피해의 미로에 갇힌 엄마들: <마더>와 <밀양>에 대한 윤리적 기억」(『영화평론』 22호, 2009)에 실린 글을 부분 수정한 것이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네이버 영화

글: 안숭범

영화평론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시인.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문화콘텐츠 기획 및 인문학적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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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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