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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향의 시네마 크리티크] 진실과 애도의 플래시백-영화 <살아남은 아이>

 
 
* 이 글은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죽어서 돌아온 아이

아들 은찬이 죽어서 돌아왔다. 6개월이 지났지만 동네에서 작은 지물포를 운영하는 성철(최무성)과 미숙(김여진) 부부의 일상은 여전히 은찬의 죽음에 침윤되어있다. 은찬은 물놀이를 갔다가 친구 기현(성유빈)을 살리고 대신 죽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은찬을 의사자로 지정하고 성철은 은찬의 포상금으로 학교에 장학재단을 만들기로 한다. 그런데 기현이 이 부부의 눈에 띤다. 이들 부부는 기현과 가까워지면서 아들의 죽음에 대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살아남은 아이>는 제목과 시놉시스에서 예상되는 내용에 전혀 어긋남이 없이 진행된다. 영화 내내 슬프고 비감어린 분위기가 이어지고 어떻게든 지녀보려던 희망의 끈은 돌발적으로 밝혀진 진실에 의해 끊어진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예측가능한 방식으로 이어지더라도 쇼트와 시퀀스를 촘촘히 쌓아가는 구성력, 중용을 살린 배우들의 연기, 개입하지 않으려는 카메라 그리고 끝내 어떠한 결말도 확신시키지 않으려는 태도를 통해 이 영화는 매우 세심한 세공품이 된다.

  
 

이 영화를 이루는 세 축은 성철과 미숙 그리고 기현이다. 이 영화는 각 인물들의 상황과 내면, 태도를 온전히 보여주는 방식으로만 이들 간의 균형추를 잡는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각 인물들의 감정의 정동은 서로 밀어지거나 당겨지는 식으로 순서를 바꾸어 가며 드러나는데 영화 전체의 톤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만 그 밀도들을 내보여서 관객들로 하여금 꽤 집중을 요하게 하기도 한다. 

각자의 애도로 견뎌내려는 부모

영화는 은찬의 죽음이 모두 정리된(!) 이후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소식을 접했을 때의 충격과 부모의 비탄, 장례식의 풍경, 주변 사람들의 눈물 젖은 위로를 모두 건너뛰고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사회적 애도의 시간을 지난, 즉 이 죽음과 관련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일상으로 복귀한 후의 상황에서 시작된다. 아버지인 성철은 큰 몸집을 안으로 수그리며 묵묵하게 생계를 살아내고 있고, 어머니인 미숙은 여전히 자리를 보전한 채 일어나지 못하지만 당장 절명하지는 않을 정도의 감정을 겨우 가누고 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부모인 성철과 미숙에게 애도의 기간은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애도의 태도에는 차이가 있다.

  
 
성철은 의사자로 지정되고 장학재단을 만들면 마치 은찬이 거기에서 영원히 살아남기라도 하는 듯 일을 진행하고 생계인 도배일이나 주변의 지인들과의 모임도 다시 재계하는 등 사회적 관계 속의 자신의 위치로 다시 돌아가려 한다. 이때 성철의 표정이 미묘하다. 무심한 듯 혹은 떠밀리는 듯한 표정은 언뜻 이 아버지에게 이미 아들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다 끝난 상태가 아닌가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의구심은 그가 기현을 받아들이는 장면에서도 느껴진다. 기현이 알바하는 가게에 가서 오래 기다려서 만나고, 도배일을 익히게 해주려고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그의 태도는 지나치게 적극적인 느낌이다. 아들 은찬이가 죽은 대신 살려낸 아이이므로 기현이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보이지만, 이 과묵해 보이는 아버지의 성정치고는 기현에게 쏟는 정성이 과도해 보인다. 요컨대 아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애써 눌러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에 반해 기현에 대해서는 좀 더 일상적 어법으로 비교적 자연스럽게 감정을 드러낸다. 만약 성철이 이는 그저 형편이 좋지 않은 아이를 위한 온정주의적 입장이라고 주장하더라도 어쨌거나 자신의 고통에 온전히 몰두해 있는 사람은 타인에게로 시선을 돌리지 못한다는 점에서 성철은 투사할 대상을 통해 이 애도에서 놓여나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미숙은 이 슬픔을 끝낼 수가 없다. 그에게 은찬은 마음을 쏟아낼 심적 대상이자 쓰다듬고 더 키워야할 물적 대상이기 때문에 아들이라는 존재 그리고 그 육체 자체가 사라져 버린 상황이 어떻게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아들이 의사자로 지정되거나 주변 사람들과 모임을 갖는 등의 방법으로는 그녀의 슬픔을 조금도 덜어주지 못한다. 은찬의 친구에게 은찬의 얘기를 전해 듣고 그의 물건을 나눠주는 것으로 눈 앞에 없는 아들의 부재를 친구들의 기억을 빌려서나마 현존 상태로 만들어보려 애를 쓰지만 이 역시 거절당한다. 그래서 그녀는 은찬을 대신할 아이-혈육을 새로 낳는 것으로 이 고통을 멈추게 해보고자 노력한다. 그녀에게 아들의 죽음은 강탈당한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치유될 수 없으므로 대체할 다른 대상이 다시 그녀에게 주어졌을 때에만 위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두 부모는 영화 초반부에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애도를 견뎌내려 한다. <살아남은 아이>는 그런 의미에서 자식이 죽은 이후에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보려는 부모의 간곡한 사연에 대한 이야기이다. 

살아남은 아이

다른 한 편, 이 영화는 피해와 가해의 역전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의 죄책감에 대해 묻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의 초반부와 중반부까지도 기현은 어떤 의로운 학생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인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어려운 집안 사정에 처해 방황하는 십대 남학생의 스텐스를 취한다. 기현은 가족의 돌봄을 받지 못한 고아같은 처지의 소년 내지는 학원 폭력의 피해자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순순히 성철의 도움을 받아들이고 처음 도배일에 투입되어서도 게으르게 구는 모습은 철없는 사춘기 남학생의 전형처럼 보인다. 그에게 가끔 드리워지는 그늘은 ‘친구들’-압박을 가하는 존재들이 나타났을 때 뿐이다. 그의 태도는 성철이 기현에게 느닷없이 보이는 적극적 호의만큼이나 기이한 것이다. 결말을 보고나면 이러한 기현의 태도가 단지 미성숙하게 자각된 의식 때문인지 아니면 성철만큼이나 그도 곤란한 상황의 타개를 위해 일종의 위악적인 무구함이 필요했던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게 한다. 

  
 
 그러나 기현 역시도 미숙 앞에서는 그러한 의장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미숙이 사무실에 있을 때는 불편해 한다든지, 공사장을 찾아온 미숙을 피해 벽 뒤에 숨는 모습은 기현이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태도는 세 사람의 나들이 이후로 절정으로 치닫는다. 세 사람이 여느 가족들처럼 도시락과 돗자리를 싸들고 주말에 교외로 나가 풀밭에 앉아 즐겁게 웃으며 음식을 나눠먹는 이 나들이는 이 영화에서 세 인물이 한 화면에 놓인 가장 밝은 톤의 장면이자 가족 로망스의 표상처럼 보이는 장면이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불편한 장면이기도 하다. 부모의 애도는 기현을 아들의 대리인으로 만들면서 끝나고 은찬은 완전히 대체되어 잊혀진 것인가. 기현은 어떤 부담스러움도 없이 순순히 자식 잃은 부모의 호의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아들로서 거리낌이 없는가. 

  
 
이러한 의구심은 기현의 느닷없는 ‘구토’를 통해 당위성을 얻는다. ‘구토’는 이 소년의 무구함이 내면의 엄청난 고통과 일상성 사이의 압박을 뚫고 나온 일종의 증환(sinthome)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기현은 은찬 부모의 대리 아들되기를 멈춘다. 

고통스러운 진실을 위한 플래시백

이 영화의 가장 빼어난 부분인, 세 인물에게 던져진 회오와 각성의 윤리적 질문은 이 지점부터 시작된다. 기현은 겨우 원하던 따뜻한 유사가족과 직업적 기반을 얻었는데 찢겨진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고 모든 것을 무화하는 고통스러운 자기 징벌의 자리로 갈 것인가. 성철은 의사자라는 명예로운 자리에 은찬을 올려놓음으로서 견뎌냈던 애도의 고통 속으로 다시 돌아갈 것인가. 이미 먹을 것을 주고(feeding) 껴안는(hugging) 행위로서 양육의 갈증을 대체했던 미숙이 또 다시 자식을 뺏기는 경험을 반복하려 할 것인가. 

  
 
  
 
  
 
혹자는 이 영화가 제목에서부터 세월호 참사를 연상시킨다고 하고, 감독과 배우들은 혹시나 작위적인 전시가 될까봐 우려하는 마음으로 직접적인 연결을 사양한다. 그러나 자식이 죽고 누군가가 대신 살아남았다는 설정 자체가 양자의 연결고리는 아니다. 오히려 앞서 던진 저 질문 이후에 이루어진 인물들의 선택과 서사적 전개과정이 역설적으로 우리 시대의 고통스러운 상처에 대한 태도를 유비한다. 

느닷없이 닥친 희생자들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고 사회적 애도 기간이 지났으니 이제는 그만하고(?) 일상을 살자는 주장들은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며 또 실제로 엄청나게 악의에 차 있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친근한 이웃들, 좋아보이셔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은찬 또래의 자녀를 지닌 부모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의사자의 부모로 사는 것이 더 낫지 않냐는 학교 관계자의 위로 혹은 다그침은 상처를 다시 후벼 파서 덧나게 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봉합을 해서 덮는 게 나을 거라고 이들을 설득한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잘못된 봉합을 뜯어내고 고통스러운 진실을 마주하는 길을 택한다. 국가도, 이웃도, 친구들도 외면하는 길을 한사코 가면서 울부짖고 광분에 차서 책임을 묻고 징벌을 요구한다. 이 영화의 초반부에서 삭제된 채 시작되었던 슬픔, 일상성의 외피를 벗고 바닥까지 내려가서 동물처럼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극도의 비탄과 절망이 겨우 이제야 터져나오는 목소리로 발화될 수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막을 수 없는 목소리들이, 깊은 슬픔이 다시금 제대로 된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플래시백이 이 영화의 전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살아남은 아이>
* 이수향: 영화평론가. 201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공저로 『영화광의 탄생』(2016), 『1990년대 문화 키워드 20』(2017).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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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0-09

조회수6,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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