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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일단 의심하고 보는 사람들 <죄 많은 소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그 파괴는 내 주변에 영향을 끼친다.”

한 소녀가 자신을 파괴한 이유에 대해 아무런 말도 없이 갑자기 떠나버렸다.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소녀의 자살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타인을 희생양 삼아 자신들의 정신적 공황을 메우려 한다. 이 영화를 만든 김의석 감독은 실제로 과거에 소중한 친구를 잃고, 친구를 잃은 상실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친구가 실종된 상태에서 사실 암묵적으로 스스로 선택을 한 것이라고 모두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지 않은 상태였다"며 "하고 싶은 이야기도 그것을 캐릭터에 쪼개서 담았다. 본인의 죄책감을 누가 느끼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떠안는 또 그걸 견디지 못해서 떠넘기는 모습을 담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같은 반 친구 경민이 갑작스럽게 실종된다.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영희(전여빈)는 실종의 단서나 원인 제공자로 모든 사람에게 의심 어린 시선을 받는다. 관객도 예외는 아니다. 분명히 저 애가 뭔가 했을 거야, 직접 죽이지 않았더라도 뭔가 미심쩍은 어떤 일을 했을 것이라며 의심하기 시작한다. 묘하게 의심하는 마음이 한 번 들기 시작하면 그 마음을 좀체 거둘 수가 없다. 영희는 이때부터 사람들에게 낙인찍힌 인물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게 된다.
 
  
 
처음엔 영희도 친구의 실종에 슬픔과 죄책감으로 힘들어하는 사이, 일제히 모든 사람이 자신을 향해 의심의 시선을 보내자 당혹스러워한다. 이후 친구의 죽음이 현실이 되자, 자신은 경민의 죽음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며 결백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의심은 시작되었고, 영희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심지어 가장 친했던 친구조차 등을 돌린다. 몸도 마음도 아파진 영희는 학교 보건실을 찾지만, 보건 교사에게 꾀병을 의심받는다. 그러자 영희는 자신이 흘린 피를 직접 보여준다. 결국 모든 사람이 자신을 의심하자 영희는 피를 토하고 죽어야지만 억울함이 풀릴 것 같은 답답함을 호소하며 표백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한다. 그때야 영희네 반 아이들은 그녀에게 향하던 의심을 눈길을 거둬들인다.

‘합리적 의심’이라고 주장하는 의심

영희네 반 아이들은 죄 없는 영희를 의심한 자신들의 죄를 또 다른 아이에게 전가하기 위해 영희에게 다른 희생양을 들이민다. 이미 희생양의 고통을 경험한 영희는 희생의 대상만 바꿀 뿐 달라지지 않는 친구들의 태도를 보면서 의심과 불신의 순환을 확인한다. 같은 반 아이들은 그저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죄책감을 상쇄시키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할 뿐이다. 영희는 의심의 순환을 끊기 위해 또 다른 희생양을 따뜻하게 안아준다. 진짜 잔인한 현실은 영희의 자살 시도에도 의심을 풀지 않는 어른들의 태도이다.

가장 먼저 영희를 의심한 형사들의 태도이다. 형사들은 실종사건이 나면 의례적으로 시도하는 일들, 예를 들어 시체 찾기 등을 순차적으로 시도해보고, 그래도 사건에 진척이 없으면, 잠정 가해자를 심문한다. 잠정 가해자라는 의심은 CCTV 판독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피해자의 실종이나 죽음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CCTV 속 영상은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다음 절차는 형사들의 심증과 경험적 논리에 따라 일단 의심과 윽박지르기를 통해 잠정 가해자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해 어떤 사실을 실토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의심받게 된 아이가 받게 될 상처나 형사에게 의심받아 심문 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주위 사람들이 의심 어린 시선을 보낼 거라는 이후의 파장을 배려하지 하지 않는다. 영화 속 형사들은 업무적 절차에 따라 사건의 진실을 최대한 빨리 밝혀내고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야 한다. 형사들은 한 번 휘몰아치고 지나가면 끝이지만, 그 자리에 남아 계속 일상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친구를 혹은 제자를 의심했거나 의심받은 자의 상흔이 남는다.


  
 
담임 선생님(서현우)도 반 친구들의 의심 어린 시선을 견디며 살아가야 할 영희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는다. 결백을 주장하는 그녀에게 “야 인마 여태까지 어른들이 너 신경 써주고 그런 거지”라며 의심하는 어른들의 태도를 두둔하고, 오히려 의심받는 영희에게 윽박지른다. 그리고 그녀가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자살을 시도한 일에 대해 반 아이들에게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며 설명한다. “영희는 경민이의 죽음이 너무 속상하고 슬펐다고 해. 지금은 자기가 그런 ‘바보짓’ 한 거에 대해서 굉장히 후회하고 있어.” 치료를 마치고 돌아온 영희에게 담임은 우리는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라며 “누구나 살면서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어. 그래도 앞으로 잘 살아가기 위해 얼른 잊어버리자”라며 “요럴 땐 좀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고 한다. 담임은 끝까지 영희에 대한 의심의 태도를 거두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왜 필요한지조차 모르는 무감각한 젊은 꼰대이다. 영희는 아무리 결백을 주장해도 바뀌지 않는 선생님의 태도에 간접적으로 복수한다. 담임은 이제 자신이 하지 않은 성추행에 대해 해명하고 억울함을 호소해야 하는 입장이 된다. 그 후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감정지수가 높아지길 기대하면서.
 
  
 
고통을 전가하는 의심

 

한 아이의 죽음으로 가장 큰 죄책감을 느끼는 건 단연 엄마(서영화)일 것이다. 그녀는 그런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만의 방법으로 발버둥 친다. 딸의 죽음이 자신이 아닌 오직 타인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치에 있는 엄마가 자신의 무관심으로 딸을 잃었다는 죄책감을 느끼게 되죠. 그는 살면서 한 번도 누군가에게 진 적이 없는 사람인데, (딸의 죽음으로) 삶이 한 번에 전복되다 보니 격렬하게 부정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 경민이 엄마의 지독한 의심을 받는 영희는 자신의 속을 다 태우는 세제를 먹고 결백을 주장한다. 그래도 경민이 엄마는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더 이제는 의심을 그만 거둬달라는 부탁을 하러 간 영희 앞에서 경민이 엄마는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는다. 상대를 때리고 파괴하는 방식보다 더 잔인하고 무서운 방식으로 자신에게 연거푸 위해를 가한다.


  
 
딸의 죽음이 가져온 마음의 상처는 이미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의 수준을 넘어섰다. 그녀는 자신을 학대하는 수준을 넘어 타인을 의심하고 고통을 전가하고, 그 희생자의 파괴를 통해 끝장을 보겠다는 광기 어린 시선을 영희에게 보낸다. 의심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은 사회적인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회사도 그만두고, 아이가 죽은 후에야 새삼 학부모 모임에도 참석한다. 의심이 점점 더 커지면 피해망상과 편집성 성격장애라는 병이 된다. 그녀는 병적이다. 의심받는 사람(영희)이 마음의 병이 있는 누군가(경민 엄마)의 의심 어린 모든 시선을 거두게 할 방법은 없다. 그녀는 그저 병들었을 뿐이다. 영희에게 필요한 건 결백 증명을 위한 노력이 아니라, 자신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경민이 엄마와의 거리 두기이다.
 

의심을 의심해야 한다

카라바조의 그림 ‘의심하는 도마’를 오마주한 장면에서 영희는 친구의 손을 자신의 상처에 넣으며 더 자신을 의심하지 말라고 한다.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완전한 이해를 위해 타인의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어떤 사건을 완전하게 이해된 상태로 만들기 위해 ‘결코 알 수 없는 부분’을 메워줄 희생양이 필요하다. 인간이 결코 알 수 없는 어떤 영역을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죄 없는 소녀를 희생양으로 만들면서, 죄 없는 소녀는 죄 많은 소녀의 자리에 놓인다.

  
 
영화는 죄 없는 소녀 영희를 죄 많은 소녀를 불러와 “자 오늘은 여러분이 기다리던 ‘친구’가 돌아왔다.”라며 그 자리에 서게 한다. 억울한 그녀는 수화로 말을 하지만, 선생님이나 반 아이들은 그녀의 수화가 무슨 뜻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녀가 수화로 한말은 영화 마지막에 자막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 “여러분이 그토록 원하던 나의 죽음을 완성하러 왔습니다. 여러분 앞에서 가장 멋지게 죽고 싶습니다.” 이토록 처연한 고통을 내뱉는 그녀의 말에 수화를 알아듣지 못하는 반 친구들은 손뼉을 친다. 우리는 완벽하게 이해하려 하지만 때론 타인의 진심어린 말이 매번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가진 정보와 논리대로 해석할 뿐이다. 그래서 때로는 타인의 감정을 모른 채 상대의 고통 앞에 박수를 보내기도 한다.

우리는 의심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도 아니면 말고 식으로 조용히 묻어가도 되기 때문에 쉽게 의심한다. 하지만 의심은 상대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고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다. “믿고 싶은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데카르트의 말대로 자신의 행동을 의심하지 않은 결과가 광기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역사와 종교가 증명하고 있다.
 
  
 
글: 서성희

영화평론가. 대구경북영화영상협동조합 이사장으로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대표이자 대구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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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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