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라는 단어에 편안함이나 안온함이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을 굳이 떠올려야 하는 요즘이다. 주거환경, 그리고 최근 최소주거환경이라는 단어가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집을 대체했다. 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고민하기보다 내 몸을 제대로 뉠 수 있는 최소의 공간을 보장받는 것이 문제가 되어 버린 지금, 집은 어딘지 사치스러운 단어인 것처럼 보인다. 이 잔인한 시간의 흐름은 점점 사람을 쪼그라트리고 작아지게 만들면서 어쩌면 더 작은 공간에서 우리가 생존할 수 있을 것이라 믿게 만들지도 모른다. 살아가는 것이 아닌 생존을 위한 부피, 집은 그렇게 멀어져갔다.
주거환경의 변화를 설명할 때 좌식에서 입식으로의 전환, 동선의 축소 등은 곧 편리한 생활로의 이행을 의미했다. 처음 아파트는 바로 이러한 실천을 가능하게 한 주거공간으로 떠오르면서 선망의 대상이 되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아파트에는 그것이 놓인 지역, 층 수, 이름 등으로 주거와는 상관없는 의미가 들러붙으면서 점점 벽을 쌓아갔다. 때문에 입식이 가능한 책상이나 소파, 식탁 등을 들여놓기도 힘든 빡빡함과 동선이랄 것을 잴 필요가 없는 협소함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바라보는 아파트는 집이라기보다 모아봐야 티끌로는 오를 수 없는 곳으로 자리했다. ‘서울’이라는 수식어가 더해지는 순간 집 이외의 의미들은 더욱 강화되었고, 아마 앞으로도 서울의 아파트는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영화 <집의 시간들>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여기이다. 집을 덮어 놓았던 더미들을 걷어냈을 때 결국 남는 집의 의미. 우리가 바라마지 않던, 그래서 식상할지 모르지만 이제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조차 빼앗겨 버린 집의 의미. <집의 시간들>은 1980년 겨울부터 이 모든 변화의 시간들을 거쳐 왔을, 그리고 곧 사라질 둔촌주공아파트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짧게는 1년, 길어야 2-3년에 한 번씩 이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익숙해진 지금 20년 이상을 한 공간에서 살아온 이야기는 새삼스레 내 몸이 놓인 공간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영화 <집의 시간들>에서 주목할 것은 영화적 집을 쌓고 있는 다양한 목소리들이다. <집의 시간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누군가의 집 구석구석과 이와 겹쳐지는 목소리이다. <집의 시간들>은 한 집의 ‘주인’을 굳이 화면 안으로 끌어들여 특정한 가구(家口)의 이야기로 한정하지 않는데, 바로 여기에서 <집의 시간들>이 던지는 질문이 드러난다. 낡아진 창틀, 거울 사이에 끼워진 작은 증명사진들, 어디선가 보았던 익숙한 소품 등이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조화를 이루면서 천천히 관객 각자의 집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고막의 진동이라는 촉각을 바탕으로 하는 청각적 자극은 시각처럼 거리를 둔 감각과는 다르게 우리 몸 자체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에 수월하다는 점에서 <집의 시간들>이 쌓아가는 목소리는 결국 우리의 집의 기억에 대한 호명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집의 시간들>의 청각적 전략은 내레이션에 그치지 않는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산책로를 밟는 소리. 이 소리들은 우리가 느꼈을, 그리고 느끼고 싶었던 집에서의 상쾌함을 고스란히 경험하게 한다. 몇 십 층짜리 우뚝 솟은 아파트를 지으면서 굳이 따로 조경공간을 조성하는 것은 결국 어떤 환경에서라도 우리에게 풀냄새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테다. 둔촌주공아파트를 스쳐가는 수많은 바람과 풀과 새와 나무는 이러한 공간에 우리의 집이 있었어야 한다는, 그것이 별것 아니지만 별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문득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어느 샌가 천천히 걸을 수 있는 주변은 이사의 고려사항 조차 되지 못한 현실에 서글픔을 자아내기도 한다.
<집의 시간들>의 목소리들은 그들의 집에서 다양한 의미를 찾아냈다. 그들에게 집은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받기 위한 곳이기도 하고, 가족들이 따로 살게 되면서 나만의 공간을 꾸밀 수 있는 기쁨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어찌 살다보니 28년을 함께 해야 하는 공간이 되기도, 내가 뛰어놀던 길을 내 아이가 뛰어놀고 있는 신기한 경험을 선사하는 곳이기도 하다. 한참 나이를 먹은 집은 가끔 녹물을 뱉어내기도 하고, 적절한 난방을 하거나 외풍을 막는 것을 힘겨워 하지만 그 나이만큼 집이 채워놓은 것은 그들의 삶 자체이다. <집의 시간들>은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집과 무엇을 어떻게 함께 하고 있느냐고.
그러나 이 모든 공간은 곧 사라질 것이다. 둔촌주공아파트는 곧 없어진다. 이곳에 살던 이들은 공통적으로 같은 아쉬움을 갖는다. 더 이상 서울에서 이런 환경을 누릴 수는 없겠지 라고. 어디서든 살 수는 있겠지만, 지금 ‘누리던’ 것은 이제 더 이상 누릴 수 없다는 것, 잉여가 아닌 필수였던 그들을 둘러싼 환경이 이젠 잉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 이러한 아쉬움은 이제 둔촌주공아파트를 넘어서서 다시금 주거에 대한 의미로 되돌아간다. 이 집에서 나가 어느 동네로 가야하는지를 처음부터 정해야 하는 것처럼, 어디에 가도 없을 이 공간을 끊임없이 그리워해야하는 것처럼 혼란과 아쉬움으로 뒤덮인 서울에서의 주거는 다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가 닿는다. <집의 시간들>이 천천히 풀어낸 이야기가 남의 평화처럼 보이지 않게, 그 평화를 모두가 집을 통해 느낄 수 있게 사는 삶은 정녕 불가능한 것일까.
<집의 시간들>(2018)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