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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향의 시네마 크리티크] 배우의 퍼스낼러티로 구현된 인물의 성격화-영화 '안시성'


 

* 이 글은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

김광식 감독의 영화 <안시성>을 보고 전쟁씬의 스펙타클함을, 슬로우 화면과 빛의 사용을 통한 인물 클로즈업의 촬영 각도를, 격전의 움직임이 생경한 시각특수효과(VFX) 화면 대신 유연하게 표현된 점 등을 고평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한국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클리셰에 가까운 전형적인 인물 구성과 여성 캐릭터의 낭비적 설정 등에서 서사적 나이브함을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좋은 평가를 받은 전쟁씬과 부족한 드라마로만 안시성을 설명하기에는 미진한 부분이 있다.

 

역사에 존재하는 많은 전투 중에 <안시성>이 선택된 것은 영화화에 걸맞은 드라마틱한 갈등의 요소와 결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서사적 동력은 승리의 역사가 주는 민족주의적인 공명심만이 아니다. 도리어 오래 전부터 익숙하게 알려져 있는 성서 속 이야기인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 주는 드라마틱한 구도를 떠올리게 한다. 즉, 규모와 선악의 대결에서 작고 약해보이는 존재가 신의 도움을 받아 승리를 이끌어냈다는 도식이 이 영화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띄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어마어마한 적이 성문 밖에 모여 있고 그들은 흙으로 성을 쌓을 수 있을 정도의 규모와 힘을 자랑한다. 안시성의 성주와 백성들은 중앙 정부에서도 버려도 된다고 판단했을 정도로 한미하고 존재감이 적은 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끝내 물러서지 않았고, 양육강식을 전도시킨 결말이 주는 쾌감이 이 영화의 오락성을 담당하는 것이다.

 

한편 배경이 조선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신녀’(정은채)의 존재와 이세민의 눈에 박힌 주몽의 ‘신궁(화살)’으로 상징되는 샤머니즘적인 특징도 눈에 띈다. 이 부분은 <안시성>이 특이하게 점유하고 있는 지점이자 다소 혼란스럽게 처리된 부분이기도 하다. 영화의 앞부분에서 신녀는 당에 포로로 잡혀있게 되는데, 당과 고구려의 전쟁 장면 사이사이에 고구려의 멸망을 느끼게 된 그녀가 떨며 두려워하는 표정을 클로즈업한 화면들이 교차편집 된다. 그만큼 비중을 가지고 중요하게 처리된 부분으로 고구려가 망하고 말 것이라는 신탁을 받은 신녀는 전쟁을 막고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적에게 내부의 기밀을 누설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 부분에서 양만춘이 당긴 주몽의 화살이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에 의해 승부가 결정 나고 고구려가 구원된다는 점에서 신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안시성의 승리를 신탁을 거스른 자가 운명에 패배하지 않고 맞서서 싸워나간 현대적 서사로 봐야할 것인지, 인간적 노력의 한계로 돌파하지 못하는 시점에서 신에 의해 승리하게 된다는 고전 비극적인 서사로 봐야할 것인지가 모호하다. 양만춘이라는 존재와 백성들의 자발적 희생 외에도 ‘고구려의 신’으로 표현된 신적인 존재의 도움으로 안시성의 승리가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탁의 예언과 그것의 성취 사이, 인간의 주체적인 노력과 신적인 개입 사이에서 확언하기 어려운 이해의 지점이 있다.

인물 성격화의 측면

 

주로 전쟁신의 묘사에 집중하고 있고 우리 민족 대 이민족의 싸움이라는 다소 단순한 선악도식을 보여주고 있는 이 영화에서 창의적으로 묘파해낸 부분이 바로 인물 성격화의 측면이다. 전장의 승리와 영웅담을 다룬 기존의 영화들과 <안시성>이 가장 차별화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극적 구성과 배우가 가진 퍼스낼러티가 합쳐져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은 극중 양만춘의 배역이 목소리가 얇고 톤이 튄다고 말한다. 때로 무람없이 다른 인물들을 대하는 태도를 표현하는 연기가 장군 역할로서는 지나치게 가벼워 보인다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명량>의 이순신 장군이 지닌 진중함을 언급하기도 하고, 다른 배우가 주는 엄숙한 톤과 진지한 감정선과 비교하면서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오히려 우리가 경험적으로 익히 기대하는 장군이라는 형상적 이미지가 새롭게 산출해내는 인물 해석에 대해 평가절하 하고 있는지 않은가.

 

우리는 흔히 연기를 잘하는 배우에 대한 최고의 찬사로 ‘대체불가’라는 수식어를 쓴다. ‘대체불가의 연기’, ‘대체불가의 배우’. 그러한 수식어는 보통 한 연기자의 연기가 가장 뛰어나서 하나의 정전이 될 정도로 훌륭하다는 뜻이고 당사자인 배우에게는 아주 영광스런 칭찬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때로 이러한 표현은 ‘연기 예술’이라는 장르에 대해 지나치게 협소한 정답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즉, 다른 어떤 사람도 대신할 수 없을 정도의 완벽한 연기라는 것은 기실 수많은 베리에이션(variation)이 가능한 극 속 인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막게 된다는 뜻이다. ‘햄릿’에 대해 완전무결한 한 가지 판본의 연기만이 존재할 수 없듯이, 아무리 정확한 인물 분석에 의해 세심하게 표현된 연기라 하더라도 그것으로 한 역할을 완성형의 형태로 고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짐멜에 의하면, 배우는 역할의 꼭두각시가 아니며 배우의 고유한 뿌리에서 발전된 배우 예술은 현실이나 희곡 또는 ‘종합’적 결실로 축소되어 질 수 없다는 점에서 예술철학의 범위에서 드라마 예술의 자립은 가장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고 본다.(1)

이것을 문제 삼는 이유는 간단하다. 때로 우리는 어떤 역할과 배우에 대해 예상 가능한 기대치를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이미 경험적으로 혹은 개연성의 인과적 논리에 의해 우리가 특정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산업이라는 측면에서 대중적인 호흡에 어느 정도 복무할 필요가 있는 대형 규모의 영화에서는 영화적 장르나 익숙한 캐릭터의 설정이라는 면에서 이해의 편리성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흐름들이 때로 배우에 의해 현시되는 연기 예술을 편협하게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안시성>의 극중 인물들은 대부분 젊고 에너지에 차 있다. 이는 실제 역사에서 취재한 사극들 일반의 서사적 구조 즉, 흔히 왕권을 사수하려는 왕과 노회한 신하들의 암투를 다루거나 오랜 전쟁 경험으로 병법에 능한 장군을 주인공으로 하는 기존 영화들과 구분되는 점이다. 타이틀롤인 양만춘(조인성)은 실제의 사료가 적은 만큼 다양한 극적 설정이 가능한 인물이다. 이 영화는 극을 끌어가는 프로타고니스트로서 양만춘 장군을 완전무결한 영웅처럼 그려내지 않는다. 이러한 서사적 구성은 인물 성격화와 배우의 연기를 통해 이 영화에서 다소 이채로운 장면들을 만들어 낸다.

‘세 번의 망설임’

극 초반, 중앙의 정쟁과는 거리를 둔 채 외곽의 한미한 성의 성주로서 살아가는 양만춘은 소탈한 행장을 한 채 권위의식 없이 성민들을 대하는 서민 영웅적인 풍모의 인물로 등장한다. 그렇더라도 수하에 둔 부하들과의 관계나 당의 공격에 맞서는 전술의 운용에 있어서는 장군으로서의 위용과 결단력으로 지위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준다. 양만춘이 연개소문과 관련된 중앙 권력의 암투 문제나 당의 침공이라는 상황에 대해 인지하고 있고 사물(남주혁)’이 온 목적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으면서도 그를 포용하는 설정 등은 장군이라는 배역의 예상치를 그대로 답보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주 양만춘은 결정적인 순간, 즉 당과의 세 번의 결전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상하리만치 허둥대고 넋을 놓은 채 집중력을 잃고 망설인다. 전쟁 영화 속의 장군이 가진 흔들림 없는 확신과 영웅적 면모라는 평면성을 위반하는 것이다.

 

첫 번째 망설임은 당과의 공성전에서 등장한다. 안으로 들어앉아 성문을 굳게 닫아 건 안시성을 공략하기 위해 당이 공성탑을 쌓아올려 침공을 하는데 그 규모에 순간적으로 성주 양만춘은 눈빛이 흔들린다. 희미하게 멀리 있던 적이 눈앞에서 압도적으로 밀어닥치는 순간이 그에게도 공포로 다가온 것이다. 영화에서 이는 인물 클로즈업과 이명 소리처럼 처리된 음향, 순간적으로 느리게 재생되는 배경 등으로 표현된다. 이후, 양만춘은 혈육의 죽음 앞에 또 다시 망설인다. 당이 토산을 쌓아가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기마대로 선제 공격을 시도했던 파소(엄태구)가 전사하는데, 이에 연인이었던 백하(김설현)이 당의 진영으로 단독 공격을 감행했다가 실패하고 죽게 된다. 양만춘은 여동생의 죽음 앞에 흔들리고 실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토산에 대비한 작전이 비가 와서 실패할 위기에 처하자 양만춘은 다시금 혼란 속에 망설이게 된다. 적이 진군해오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오랜 시간 공들인 백성들의 토굴에 불이 붙지 못하게 되자 당황한 성주는 시공간이 멈춰있는 듯한 상황 묘사 속에 집중력을 잃어버린다.

 

이러한 성주의 흔들림이라는 특징(characterize)은 확신에 가득 찬 표정으로 의지력 있게 전투를 실행하는 노련한 장군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것이고 이를 표현해내는 배우의 비교적 젊은 외양과 얇고 때때로 불안정해 보이는 딕션, 불안을 표현해내는 눈빛이 드러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조셈 체이킨의 말처럼 배우의 연기는 통제와 허용 사이에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자 억제와 포기, 충동과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 또한 연기와 그것이 관객에 의해 이해되는 방법 사이에서 변증법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다.(2) 짐멜은 예술가의 주체성과 작가가 그려놓은 역할 이 사이에서 순전히 우연한, 일치의 결과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3) 김광식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양만춘 캐릭터는 실제 배우의 특성에서 끌어내어진 부분이 있다는 점에서 배우의 개성이 영화적 표현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 세 번의 망설임과 일깨워지는 과정을 통해 성주 양만춘은 영웅적인 장군으로 완성되어 간다. 이때 그를 일깨워주는 인물들이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안시성 전투의 승리를 양만춘만이 아니라 보조인물들의 공로로 분배한다.
공성전으로 순간 멍해져있는 양만춘을 깨우는 것이 사물이다. 사물 캐릭터는 성주에게 반동적인 인물처럼 보이지만 도리어 그의 입지를 보충 설명해주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자객이자 살수로서의 사물의 캐릭터는 안시성에 들어오자마자 그를 먼저 간파한 성주에 의해 금세 힘을 잃고 만다. 사물은 양만춘의 소년 버전으로서 양만춘 이후를 담당할 만한 새 세대의 대표격이자 극의 결말을 위해 고구려 원군을 부르기 위해 달려가는 결정과 실행력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양만춘은 사물의 말을 통해 자신만을 바라보는 성민들의 모습을 보고 다시 한 번 각성하며 전의를 다지게 된다. 백하의 죽음 앞에서 고뇌하는 양만춘을 일깨우며 죽은 사람 대신 산 사람을 보라고 그의 의지를 북돋는 사람은 추수지(배성우)이다. 당이 쌓아올린 토산을 격파해낼 방법도 백성 아이들의 놀이에서 찾아낸다. 토굴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당황한 그를 다시금 각성시킨 사람들은 우대(성동일)로 대표되는 백성들이다. 이는 성주 양만춘이 세가 불리한 싸움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개인의 의지만이 아니라 그가 흔들릴 때마다 일깨워주는 주변 인물들의 도움에도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두가 함께한 것이다”라는 양만춘의 대사는 안시성의 승리가 수하들과 백성들과 연대하여 얻어낸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성주인 양만춘 장군의 카리스마와 압도적인 위용이 두드러지는 영화가 아니다. 적의 파상공세 앞에 불안해하며 혈육의 죽음 앞에 실의에 빠지는 인간만이 무지렁이에 불과한 백성들 한 명 한 명의 목숨의 가치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서사적 구성력과 배우의 퍼스낼러티가 더해져 인물의 성격화가 효과적으로 구현되었다. 이는 대의를 위해 안시성 정도의 작은 성은 당나라에 의해 함락되어 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극중 연개소문(유오성)과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이 영화에는 그런 점에서 통쾌한 액션의 구현만이 아니라 배우와 역할의 색다른 해석의 측면이 주는 장점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담당하는 것은 사물의 시선이다. 그는 성 밖으로 말을 타고 달려나가 멀리서 안시성을 바라보는데 모든 것이 완료된 뒤임에도 안도의 표정이라고 보기 어려운 눈빛을 보여준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음악이 경쾌하게 이어지지만 이 평안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다. 이러한 결말 역시 전쟁의 격렬함 후에도 남은 영화적 잔여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각주
(1) 게오르그 짐멜, 신소영 옮김, 『배우의 철학』, 연극과인간, 2010, 51-52쪽.
(2) 조셉 체이킨지음, 윤영선 옮김, 『배우의 현존-오픈 시어터, 위장, 연기 그리고 억압에 대한 기록』 , 현대미학사, 1995, 23쪽.
(3) 게오르그 짐멜, 앞의 책, 30쪽.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안시성>


* 글: 이수향

영화평론가. 201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공저로 『영화광의 탄생』(2016), 『1990년대 문화 키워드 20』(2017).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9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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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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