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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죽음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씨 인사이드'


라몬은 전신 마비로 침대에 거의 붙박이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그에게 인생은 사실 무의미하다. 그 어떤 일도 자유롭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말한다. 절망에 싸인 인간들이여. 그래도 인생은 살만한 것이다. 혹은 당신이 죽으면 나는 어떻게 살라고. 혹은 가정과 자식들은 그렇게 무책임하게 버려두고 혼자 가겠다니요. 혹은 회사는 당신 건데, 당신이 없으면 안 돌아가는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혼자 죽으려고 합니까?

사람은 죽음 조차 선택할 수 없다. 태어나는 것도 운명이지만 죽은 것도 운명이다. 운명을 거역하는 건 죽기 보다 더 힘들다. 사람은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지는 게 실상은 맞다. 그런데 라몬이라는 남자는 스스로 죽으려고 한다. 이 영화는 죽으려는 남자와 그를 죽지 못하게 막는 사람들 혹은 사회의 이야기다. 과연 라몬은 자기 생각대로 죽음에 이르를 수 있을까?

라몬은 훌리아 생각하면 사랑 생각이 나서 일단 고통스럽다. 훌리아란 여자는 그녀의 자살을 합법화시키기 위한 변호사이다. 그녀도 몸이 성치 못하다. 그녀는 희귀한 병에 걸려 나중에는 거동이 불편해지고 곧 죽어버리는 운명에 놓여있다. 그녀는 라몬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가 라몬을 변호하기 위해서는 먼저 라몬을 이해해야 한다. 그녀의 질문은 라몬에 관한 모든 것이다.


이기적인 사랑에서 헌신적인 사랑으로

우선 가장 궁금한 것은 라몬은 왜 스스로 죽으려 했는가이다. 그는 젊은 시절 한 여자로 인해 죽음을 선택했다. 사랑의 절망이 그를 죽게 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그의 죽음은 이뤄지지 못했다. 죽으려고 뛰어든 바다는 너무 얕았다. 그는 바닥에 부딫혀, 대신 전신 마비를 얻는다. 전신마비는 죽음 보다도 더 가혹한 형벌이었다. 그는 죽고 싶은 마음을 하루에도 수십번 품는 자신을 계속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훌리아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여자 때문에 죽기로 한 행동 뿐이 아니다. 지금도 라몬이 죽기로 결심한 배경이 궁금하다. 일단 살았으면 살아봐야지, 사는 사람이 죽으려고 하는 건 또 뭔가. 훌리아가 그런 생각을 하는건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다. 훌리아의 개인적인 이끌림 때문이다. 라몬은 남자로서 멋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멋진 남자가 죽는다는 것은 자연을 어기는 일 아닌가? 아름다운 존재들은 이 세상에 계속 남아서, 누리기도 하고 남에게 기쁨도 줘야 하지 않겠나.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훌리아는 라몬을 탐색해 간다. 라몬은 훌리아를, 훌리아는 라몬의 매력에 빠지고 만다. 라몬은 번민에 휩싸인다. 그가 젊어서 죽기로 했던 것도 사랑이지만, 다시 사랑에 빠지는 자신이 죽도록 미운 것이다. 사람은 사랑이 없으면 죽고 싶다. 그러나 사랑을 생각하면 살고 싶다. 라몬의 심리상태가 그렇다. 그는 사랑이 떠나 죽고 싶었으나, 지금 훌리아를 통해 다시 사랑하고 싶은 생각과 살고 싶은 생각이 고개를 든다. 라몬은 사회의 통념과 싸우는 게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에 놓여있다.

 

자유가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가난한 주부 노동자 로사가 라몬을 찿아온다. 그녀는 동병상련의 입장에서 라몬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속썩이는 남편과 아이 부양, 어려운 경제적 상황이 그녀를 속박하는 인생의 짐들이다. 그녀는 라몬을 통해 위안을 얻고 싶어한다. 그녀는 라몬에게 죽지 말라고 위로를 건넨다. 하지만 자신이 위로받고 싶어함을 아는 라몬은 오히려 로사의 위선을 꾸짖는다. 로사는 화를 내며 집을 뛰쳐 나가지만 라몬의 매력에 빠져든다. 라몬은 자신의 속마음을 정확히 읽어낸 것이다. 이후 로사는 라몬의 좋은 친구가 된다

라몬은 죽으려 하지만, 그가 보여준 모습은 주변의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희망을 던져준다. 자신은 죽으려 하지만 정작 다른 사람들에겐 살려는 의지를 심어준다. 그건 모순적 상황이다. 라몬을 분노하게 한 것은 카톨릭 사제의 행동이다. 그는 휠체어에 탄 같은 입장의 장애인이다. 겉으로 보기에 같은 입장에서의 충고는 받아들일만 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라몬은 종교에서 말하는 인간에 대한 해석을 반대한다. 하느님의 자녀들이란 하느님의 뜻대로 움직여야 하지 스스로 독단적인 행동을 할 수는 없다. 과연 그런가? 라몬은 근본적인 질문을 한다.

인간은 나약하다. 하느님의 뜻대로 하든가, 안 하든가도 하느님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나약한 인간이 할 일이다. 라몬이 보기에 종교인들은 자신도 허약하면서 위선적으로 강한 척 한다고 보는 것이다. 자신이 죽고자 한다면 그 말을 존중해야지, 그 마음도 모르면서 어떻게 남을 인도하나.

라몬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사람 중의 하나는 형이다. 가족을 잃어버리는 일에 해당하는 형의 심정은 인간적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형은 이기적으로 보인다.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살아달라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 산다는 것은 강요해서 되는 건 아니다. 자기 스스로 깨달아야 가능한 일이다. 깨달음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그저 기능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라몬은 형의 그런 말이 걸린다. 왜냐하면 그 목소리는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형은 제대로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며, 배운 것도 없는 농부다. 그런 소박함이,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신뢰를 준다. 가난한 서민의 시각에서 가족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배운 거 없고, 돈도 없으면, 사람이라도 서로 붙어서 살아야 인생이 재미있다. 라몬은 형의 말과 행동과 태도가 전반적으로 그를 저항하지 못하게 한다. 라몬은 심적으로 괴로운 상태에 빠지게 된다.

형은 통해서 라몬은 심각해 진다. 왜 인간은 스스로 죽을 수 없는가. 원인은 사회적 관행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의리 혹은 정으로 산다. 아이가 왜 엄마의 곁에서 떠나지 않으려 하는가. 정 때문이다. 그건 논리 이전에 원초적 본능에 가까운 정이기 때문이다. 라몬은 형에게서, 아버지에게서 특히 떠날 수 없다고 느낀다. 인간은 왜 사는가라고 거꾸로 질문할 수 있는 문제이다.

 

인간은 왜 사는가. 인간은 정 때문에 산다. 라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죽으려 하는가. 영화는 일상이기 보다는 상징적인 차원으로 확장되어 간다. 라몬이 그토록 죽고자 하는 이유는 영화안에서 찿아지지 않는다. 관객은 끝까지 죽으려 하는 라몬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반감을 품을 수 있다고 본다. 영화의 주제는 오히려 그것에 있다. 인생은 알 수 없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라몬의 죽음은 일상적인 선택이라기 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문제다.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면 살만한 가치가 없다는 강조법이거나 비유법일 가능성이 많다. 정말 죽어야 한다면 죽어야겠지. 그걸 막는 힘도 분명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 자유가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니까.


영화는 라몬을 탐구하지만, 결국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라몬은 그들과 같은 처지이고, 영화는 말한다. 그들과 같이 약한 자의 입장에 서 보지 않고서 감히 그들의 삶을 규정하지 말하는 멧세지 말이다. 제목 ‘씨인사이드’는 그런 점에서 깊은 바다속을 보고 싶어하는 라몬의 심정을 대변해 준다. 얕은 바다의 바닥에 튕겨져 나온 라몬은 이제 깊은 바다속까지 가보고 싶은 것이다. 세상의 이면과 인간의 내부에 있는 자유의 정신이 이 세상에는 억압되어 잘 보이지 않으므로.

글: 정재형
동국대교수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을 역임했다. [영화이해의 길잡이], [영화영상스토리텔링100] 등의 역저서가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9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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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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