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센터

customer center

070.8868.6303

[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공간-인물’로 읽는 사랑의 유형학- <쓰리 타임즈>로 허우 샤오시엔 읽기


 

술회의 맥락과 회고의 형식

추억이 우리들의 몸속에서 피가 되고, 시선과 몸짓이 되고, 이름도 없이 우리들 자신과 구별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몹시 드문 시간에 시의 첫마디가 그 추억 가운데에서 머리를 들고 일어서 나오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 (1)

 

여기 사랑과 이별에 관한 세 가지 사연이 있다. 우연한 사랑이 필연으로 나아가는 1966년의 사연(‘연애몽’), 필연이었으면 하는 사랑이 서로에게 비껴서는 순간을 다룬 1911년의 사연(‘자유몽’), 예정된 결별이 필연으로 오지 않는 과정을 버텨내는 2001년의 사연(‘청춘몽’). 이처럼 다른 시대의 연애를 보여주는 <쓰리 타임즈>의 원제목은 ‘최호적시광(最好的時光)’이다. 그 표현에 값한다면, 각각의 사연들은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들로 가시화될 것이다. 그런데 감독이 허우 샤오시엔이다. 그런 평이한 이해에 부합하는 영화를 그에게서 기대할 수는 없다.

우리는 안다.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들의 날씨가 우리의 그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예컨대 그들은 어제까지 폭설이었다가 오늘은 구름 한 점이 없고 다시 내일은 태풍을 동반한 폭우를 견뎌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연애몽’은 감정적 기회주의에 영합하는 멜로드라마의 관습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자유몽’은 인물 간의 관계 설정 안에 놓인 정서적 자극점을 정공법으로 활용할 의지가 없다. ‘청춘몽’은 나쁜 이별에서 가장 나쁜 이별 사이로 허물어지는 인물의 사생활을 감정적으로 중계하지 않는다. <쓰리 타임즈>는 허우 샤오시엔 영화만의 관조적 태도와 차분한 호흡으로 ‘정서적 사유’를 유도하는 영화인 것이다.

‘정서적 사유’라는 역설적 언명은 허우 샤오시엔 영화의 본질을 관통한다. 다시 말하지만 <쓰리 타임즈>는 당장의 가능성 양극단에 사랑과 이별이라는 극적 사태를 둔 세 쌍의 청춘 남녀를 정서적으로 ‘읽게’ 한다. 이러한 작가적 태도의 연원을 따라가다 보면 성장기 4부작으로 불리는 <펑꾸이에서 온 소년>(이하 ‘<펑꾸이>’), <동동의 여름방학>, <동년왕사>, <연연풍진>에 이르게 된다. 그때 이미 그는 자신의 가장 먼 기억에 내려앉은 이미지의 세계를 정감적 시선으로 성찰하는 방식을 구축해냈다. 이후 대만 현대사 3부작(<비정성시>, <희몽인생>, <호남호녀>)을 보면 망원경과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때 보이는 이질적 세계를 한 개인의 일상에 접합해낼 줄 알았다. 상상적 공동체로서 중국·대만인의 공적 기억, 혹은 그로부터 주어진 정체감이 한 가족과 개인의 삶으로 분유되는 과정을 돌아보게 했다.

그의 영화세계를 돋보이게 하는 작가적 인장 중 하나는 ‘정서적 사유’에의 요청으로 이어지는 ‘기억하기’의 태도에 있다. 영화적으로 구축되는 술회의 맥락, 회고의 형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인물과 공간이 맺는 정서적 연결 관계를, 추억하는 시선으로 더듬는 그의 작법은 매우 유다르다. 그래서 허우 샤오시엔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은, 과거를 더듬는 시선이 직접적으로는 생략된 <남국재견>을 보면서도 숨겨진 ‘기억하기’의 태도를 찾았을 것이다.

많은 시네필들이 <해상화>와 <밀레니엄 맘보> 사이의 이격감으로 새천년을 감각했다. 이후 <카페 뤼미에르>를 거쳐 <쓰리 타임즈>가 도착했을 때, 그들 중 일부는 허우 샤오시엔이 자기 영화세계의 일단을 정리하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쓰리 타임즈>의 ‘연애몽’은 <펑꾸이>, <동년왕사>에 등장하는 ‘인물-공간’이 연장된 것 같은 착시감을 준다. ‘자유몽’도 <해상화> 속 유곽의 풍경을 무성영화 콘셉트로 더 확실히 마무리하려는 기획처럼 보인다. ‘청춘몽’은 <밀레니엄 맘보>에서 말한 것, 충분히 말하지 못한 것, 미처 말하지 못하지 못한 것을 요약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쓰리 타임즈>는 허우 샤오시엔이 우리에게 요청했던 사랑과 이별에 대한 ‘정서적 사유’의 방식들을 총체적으로 재주문·재체험 시키려는 기획처럼 느껴질 소지가 있었다.

사적인 고백을 하면, <쓰리 타임즈>를 영화관에서 처음 봤을 때 20대였다. 그땐 강렬한 통증을 동반하는 사랑의 여러 전철을 ‘최호적시광’으로 요약하는 허우 샤오시엔의 태도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 다시 본 <쓰리 타임즈>는 릴케의 빛나는 문장을 품고 ‘아름다운 시절’의 다른 의미에 동의를 구해 왔다. 이 글은 술회의 맥락과 회고의 형식으로 지어진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세계를, 특히 ‘인물-공간’의 신비한 연결점들을 릴케의 문장으로 동행해보려는 시도가 될 것이다.

 

연애몽, 거기서 예정된 결별이라는

모든 이별에 앞서 가라, 금방 지나가는 겨울처럼
마치 이별이 이미 네 등 뒤에 있는 듯이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2)


‘연애몽’은 카오슝의 어느 당구장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첸(장첸 분)은 벌써 오랜 시간 당구장을 중심으로 생활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의 짝사랑 상대는 당구장에서 일하는 하루코다. 그런데 마음을 고백하기엔 이미 늦은 시간이 되어버렸다. 입영통지서가 도착했고, 그는 이제 군입대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구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는 대학입시에서 떨어졌고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그 우울한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던 건 하루코와의 사랑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정든 카오슝을 등지기 전, 당구장을 정돈하는 하루코에게 찾아와 아무 말 없이 편지를 건네고 뒤돌아선다. 카메라는 편지를 읽는 하루코의 표정을 잡지만, 그녀는 첸의 열망에 부응할 만한 표정을 보여주지 않고 곧이어 편지를 프레임 밖으로 밀어내 버린다. 그때까지 영화는 우리에게 그 편지 내용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 다음 날 아침 신에는 카오슝 항구를 빠져나가는 배와 접안을 위해 들어오는 배가 프레이밍된다. 나가는 배에는 첸이 탔고 들어오는 배에는 슈메이(서기 분)가 탔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의 곁을 잠시 스친 후 엇갈린 사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군에서 휴가를 나온 첸이 카오슝의 당구장에 들러 한 사람을 찾는다. 아마도 하루코일 것이다. 그러나 하루코는 이미 그곳을 떠났고 그 자리를 대신한 다른 한 사람이 거기 있다. 바로 슈메이다. 당구장 일이 익숙해 보이는 슈메이는 카오슝의 당구장에 처음 왔을 때 하루코가 책상 서랍에 두고 간 첸의 편지를 읽은 적 있다. 다른 목적지에 도착한 고온의 감정. 그래서 첸과 슈메이가 당구장에 함께 있게 되자, 그들을 나고 드는 감정과 내면의 심상이 당구장 안 풍경으로 해석되기 시작한다. 허우 샤오시엔은 주인 없는 편지를 훔쳐 읽는 슈메이의 얼굴을 의미심장하게 잡은 적 있다. 그때 우리는 슈메이의 시선을 경유해 하루코가 읽고 던져놓은 편지의 내용을 이해한 바 있다. 편지에는 당구장을 안식처 삼아 보낸 세월에 대한 그의 소회가 담겨 있었다. 절망적 사건도 많았지만 그는 ‘여기에서 보냈던 시간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언급하고 있었다.

귀대를 위해 카오슝의 당구장을 떠나기 직전, 첸은 슈메이에게 앞으로 편지를 주고받자고 제안한다. 찰나에 고양된 감정에 충실한 청춘들은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기도 한다. 결국 ‘연애몽’에서 첸이 쓴 모든 편지는 오로지 슈메이가 읽는다. 이는 그녀만이 방황하는 첸의 최종 목적지가 될 것이라는 복선으로 기능한다. 그런데 첸이 두 번째 휴가를 나와 카오슝의 당구장을 찾았을 때 하루코처럼 슈메이도 그곳을 떠나고 없었다. 그때부터 첸은 자못 비현실적인 ‘슈메이 찾기’의 여정을 떠난다.

그녀가 근무하고 있을 당구장을 찾아가는 과정은 예상대로 지난하다. 강산, 타이난, 지아이, 수창, 신화, 달린, 두난 허베이 등 낯선 지명이 박힌 이정표들을 흘려보내고서야 그는 슈메이의 거처에 근접한다. 허우 샤오시엔은 그들 이정표가 첸이 탄 버스 차창을 스쳐 지나가는 장면에 특별한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다. 첸의 무심한 듯한 표정도 길 위에서 휴가일정을 다 쏟고 있는 자의 절박함을 환기시키지 않는다. 그런데 첸과 슈메이 사이의 느슨한 인연을 일말의 기대로 바꿔 온 우리에게 그들 이정표는 지명에 대한 정보를 초과한다. 방황하는 젊음을 고정해줄 장소, 떠도는 마음을 붙들어줄 정처에 대한 상상이 거기서 안타깝게 미끄러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접합점을 찾기 어려운 영화이지만, 코엔 형제의 <인사이드 르윈>을 보면서 ‘연애몽’의 미끄러지는 이정표들을 떠올린 적 있다. <인사이드 르윈>의 배경도 1960년대다. 당시 미국에서 포크음악 신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밥 딜런 같은 혜성도 등장하기 전이다. 무명의 포크가수인 주인공 르윈은 노래로 연명할 수 있는 방도를 찾지 못한 채 그저 하룻밤 묵을 곳을 수소문하며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부푼 꿈을 안고 음반기획사를 찾아 시카고를 방문한다. 그러나 늘 그랬듯 이번에도 현실은 잠시 달콤했던 꿈을 배신한다. 눈보라 치는 밤, 그는 다시 떠도는 삶을 각오하며 뉴욕으로 되돌아간다. 히치하이킹으로 빌려 탄 차를 차주 대신 운전하며 돌아가는 그 길에 그는 한 이정표를 맞닥뜨린다. 졸음과 싸우던 그가 꿈결에, 무의식중에 불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이정표에 적힌 지명은 르윈의 옛 여자 친구와 자기 아이가 살고 있을 마을을 표지한다. 그렇다면 지나쳐버린 그 이정표는 꿈과 사랑을 누일 장소가 간절한 르윈의 내면과 세계의 절망적 응답을 동시에 내포한다.

그러나 <쓰리 타임즈>는 숱하게 스쳐지나간 이정표들 끝에 환한 미소의 슈메이를 기어이 데려다놓는다. 실내에서 손님과 당구를 치고 있는 슈메이의 후경으로 첸이 걸어 들어온다. 잠시 후 첸을 알아본 슈메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함박웃음을 내보인다. 바지주머니에 넣은 손을 빼지 않은 채 일정한 거리에서 “보고 싶었어요”라고 말하는 첸은 차분하다. 여기까지 찾아온 사실이 마냥 신기한 슈메이는 웃음을 감추지 않는다. 얕은 심도의 카메라가 그들을 줌인하지만, 전경의 당구치는 사람들은 두 사람의 작은 우주를 자꾸 가린다. 이때 우리에게 생기는 모종의 조바심은 허우 샤오시엔이 베풀어 온 긴장미의 일단이다.

‘연애몽’의 마지막은 허우 샤오시엔 영화의 가장 달콤한 순간으로 나아간다. 슈메이가 당구장 일을 다 마치기까지 기다린 첸은 그녀와 간단히 요기를 한다. 부대로 복귀해야 하는데 버스는 이미 끊겼고 비는 내린다. 하나의 우산을 나눠 쓰고 걷던 두 사람이 잠시 멈춘다. 그때 카메라가 두 사람의 손이 포개어지는 순간을 클로즈업한다. 비좁은 우산 안이 그들만의 우주가 되는 순간이다. 그 밤이 지나면 다시 부대로 복귀해야 해야 할 테지만, 첸에게는 어떤 충만한 결별의 아침만이 존재할 것이다.

허우 샤오시엔 스스로 자전적 이야기라고 밝힌 ‘연애몽’은 수십 년을 거슬러 1966년의 어느 밤을 추억하는 첸의 추억담일 것이다. 허우 샤오시엔의 사적 진실이 담긴 회고담일 것이다. 이 단순한 스토리에도 허우 샤오시엔만의 형식미학이 선연하다. ‘연애몽’은 유사한 듯 다른 ‘인물-공간’들에 대한 상징을 중첩시킬 때 이미지텔링이 요청하는 ‘정서적 사유’에 이를 수 있다. 예컨대 첸의 내면은 카오슝의 당구장과 유사적 연상관계에 놓인다. 영화 초반 카오슝의 당구장은 정서적 방황 속에 성장이 지연되어 온 첸의 내면세계, 그 자체를 가시화한다. 이곳의 상상적 주인은 하루코였다가 슈메이로 바뀐다. 물리적 방황, 혹은 방랑을 거듭하는 슈메이의 내면세계는 허베이의 당구장으로 표상된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만 그녀의 세계는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않고 그 누구의 오랜 틈입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연애몽’은 두 인물의 성격과 합치되는 당구장들, 곧 ‘인물∈공간’의 상징을 교차시키며 서로가 각자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지를 지켜보게 하는 로맨스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연애몽’은 그보다 20여년 전에 만들어진 <펑꾸이>를 여러모로 상기시킨다. 굳이 의도하거나 의식하진 않았을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연애몽’이 <펑꾸이>의 스핀 오프 성격을 띠는지도 모른다. <펑꾸이>는 충분한 스토리 시간에 걸쳐 아칭(유승택 분)의 성장담을 전시한다. 아칭은 더욱 핍진하게 허우 샤오시엔의 페르소나로 기능하는 바, 세 번의 영화관 신은 ‘성장/반성장’에 대한 그의 더 직접적인 회고적 진술이 된다.

외딴 바닷가 마을 펑꾸이에서 살던 아칭과 아정, 쿠오추 등은 동네 건달로 사고를 치며 살아간다. 하루는 공짜로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 담장을 넘는다. 그런데 상영 중인 영화는 ‘젊은이의 세계’란 제목으로 국내 개봉된 바 있는 루치아노 비스콘티의 <로코와 그의 형제들>이다. 물론 그들이 기대한 야한 영화는 아니다. 찰나에 스쳐 지나가는 영화이지만, <로코와 그의 형제들>은 영화 밖 허우 샤오시엔과 <펑꾸이> 속 아칭의 인생사를 유비하는 스토리를 갖는다. 아버지가 죽자 이탈리아 가난한 남부 시골에서 오순도순 살던 한 가족(아내와 네 형제)이 밀라노로 이주하게 된다. 그들은 그곳에서 힘겨운 노동을 이어가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란 무척 어려워 보인다. 셋째 아들 로코(알랭 들롱)는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가장 성찰적인 인물로 마지막까지 내적 통증을 감수하는 인물이다.

틀림없이 로코는 허우 샤오시엔과 아칭의 성장 과정과 중첩되는 인물이다. <펑꾸이> 초중반, 아칭은 아정, 쿠오추와 함께 아정의 누나가 자리 잡고 있다는 항구도시 카오슝으로 떠난다. 매일 반복되는 지겨운 삶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고, 가난과 범죄의 굴레에서 탈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번화한 도시 카오슝에서 그들은 완벽한 이방인이 된다. 안주할 곳 없는 이방인에 대한 묘사는 허우 샤오시엔이 거듭해온 ‘정서적 사유’의 중요한 제재였다. <쓰리 타임즈> 직전의 영화였던 <카페 뤼미에르>에서는 2대째 고서점을 운영하면서 전철역 소음을 녹음하고 다니는 하지메와 프리랜서 작가 요코가 나온다. 그들은 고지도를 펼쳐들고 메가 시티 동경에서 사라진 옛 장소를 찾아다니며 기묘한 시간 여행자가 된다. <빨간 풍선>은 파리에서 중국 인형극을 하는 이혼녀 수잔(줄리엣 비노쉬 분)과 ‘빨간 풍선’을 친구 삼아 외로움을 달래는 수잔의 아들 시몽(시몽 분), 시몽의 베이비 시터가 된 중국 유학생 송 팡(송 팡 분)이 각각 다른 성격의 이방인으로 등장한다. 시몽을 데리고 영화를 찍는 송 팡의 카메라와 ‘빨간 풍선’의 전지적 시선이 만나는 어떤 순간에 파리를 오가는 우리 모두는 서로를 부유하는 공간 여행자가 된다.

<펑꾸이>에 대한 논의로 돌아가 그 안에 묘사된 이방인 표상을 허우 샤오시엔의 개인사와 연결해 보자. 허우 샤오시엔은 중국 광동성 매현에서 태어났지만 곧이어 가족과 함께 대만으로 이주한다. 천식, 폐병에 시달렸던 아버지 덕분에 그는 대만 남부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진다. 자기 고백에 따르면 그는 건달처럼 성장했고 어머니는 정신병원을 들락거리기도 했다. 그런데 가짜표와 함께 영화관 담장을 넘나들던 철없던 어린 시절은 군제대 후 대만 예술 아카데미에 진학하면서 마무리된다. 이쯤 되면 <펑꾸이>의 아칭 캐릭터를 허우 샤오시엔의 삶과 떼놓고 바라볼 수 없게 된다. <로코와 그의 형제들>이 삽입된 이유를 이방인의 정체감으로 방황했던 허우 샤오시엔과 연결시키지 않고 해명하기 어렵게 된다.

<펑꾸이>의 두 번째 영화관 장면은 더 중요하고 이채롭다. 먼저 카오슝으로 무작정 상경한 아칭 일행은 목적지(아정 누나의 집)로 안내할 버스를 계속 잘못 탄다. 여기는 아무 버스가 아니라 ‘바로 그 버스’를 타야 목적지에 도달하는 세계다. 그래서 그들은 정확무오한 계측 속에 질서화 되는 도시, 자본이 추동하는 속도와 경쟁이 가시화된 공간에 적응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된다. 영화 중반 아칭 일행은 아정 누나의 애인, 그러니까 형부를 자처하는 카오슝의 건달(허우 샤오시엔이 연기했다!)을 만나 용돈을 받는다. 그 돈을 어디에 쓸지 고민할 무렵, 오토바이를 탄 한 남자가 다가와 아칭 일행에게 올 컬러 유럽영화를 보여주겠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따라 900위안을 지불한 후 아칭 일행은 건물 11층으로 올라간다. 그 건물은 폐건물, 혹은 가건물일 뿐이었고 아칭 일행은 뒤늦게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그때 창유리도 끼워지지 않은 시멘트 벽 프레임을 통해 카오슝의 경치를 내려다보는 그들을 앞에 두고, 카메라는 의미심장한 ‘정서적 사유’를 요구한다. 이 유사 영화관람 장면은, 그들이 머물러 온 상징적 현실의 허구성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비가시적인 진실을 표지한다. 어쩌면 방랑을 거듭했던 허우 샤오시엔이 그 언젠가 경험했을 실재와의 대면이 거기 있다. 아칭 일행은 생애 최초로 지독한 리얼리즘 영화를 본 셈이다.

세 번째 영화관 신은, 아칭이 엊그제까지 다른 이의 애인이었던 첫사랑 샤오 싱과 깐쉬 극장을 방문하면서 등장한다. 그들이 본 영화는 <취권>. 샤오 싱은 아크로바틱한 액션 활극이 펼쳐지는 화면에 집중하지만, 아칭은 영화 대신 샤오 싱을 볼 뿐이다. 그렇게 사랑을 잃은 소녀는 2D 스크린을 활보하는 비약적인 캐릭터로부터 도피적 위안을 구하고, 사랑을 시작하고픈 소년은 일상을 공유하는 현실 캐릭터로부터 실존적 사랑을 구하는 중이다.

그런데 아칭이 꿈꾼 영화는 그 영화관 밖에서 곧이어 끝난다. 샤오 싱은 전에 사귀던 애인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기 위해 카오슝을 떠나 타이베이로 가겠다고 한다. 아칭이 그녀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장면은 허우 샤오시엔만의 관조적 태도, 절제의 미학을 보여준다. 무수한 자동차들이 오가는 도로 저편에서 아칭과 샤오 싱이 대화를 나눈다. 카메라가 그들을 줌인하지만 자꾸 끼어드는 자동차들은 우리의 편안한 관람을 방해하고 자동차 소음은 그들의 대화 내용을 지운다. 곧이어 샤오 싱은 고속버스에 올라타고 그녀를 지켜보는 아칭의 모습이 몇 번 리버스 쇼트에 담기지만, 도시의 소음은 두 사람의 벌어진 간격을 냉정하게 일깨운다.

그 순간 아칭을 둘러싼 현실세계의 소리는 사라지고 바흐의 ‘G 선상의 아리아’가 깔린다. 그 음악을 배경으로 아칭은 아정과 쿠오추에게 간다. 노점상에서 음악테이프를 팔고 있는 두 친구 중 쿠오추는 내일 군입대를 위해 펑꾸이로 돌아가야 한다. 정리하면, 아칭은 이미 예정되었던 여러 갈래의 결별을 오늘 한꺼번에 감수해야 한다. 그때 갑자기 아칭이 가판대 위의 음악테이프를 다 팔아버리자며, “3개 50위안. 하나에 둘 공짜.”라고 외치기 시작한다. 우스꽝스러운 이 행위는 통제할 수 없는 결별의 순간에 대한 적극적 대처다. 그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진취적 태세 전환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 엔딩신에서 허우 샤오시엔은 우리를 더욱 더 관조적인 관찰자로 포지셔닝한다. 발악하듯 목청을 높이는 아칭 일행을 두고, 그곳을 스쳐지나가는 인물들, 주변 시장의 상인들은 하나같이 무심하다. 마치 다큐멘터리 영상처럼, 단속적 몽타주로 흘러가는 카오슝 시민들의 평범한 일상과 그들의 무표정은 매우 강렬한 메시지다. ‘상상적 오인’으로 구축된 세계에서 이제 빠져나오려 하는 아칭에 대한 현실의 시선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엔딩신을 장식하는 침묵의 몽타주에는 아칭에게 미숙한 시절과의 결별을 권면하는 경험 세계의 냉정한 조언이 담겨 있다.

이 미학적 ‘입사’의 순간은 아칭을 주인공으로 하는 오이디푸스 궤적의 끝에 도착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아칭의 아버지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아칭은 첫 번째 영화관 신에서 영화에 마음을 섞지 못하고 아버지가 야구공에 맞아 백치가 되어버린 순간을 떠올린다. 아버지라는 거대한 존재의 상징적 결핍이 시작된 그 순간의 이미지는 펑꾸이에서의 방황을 설명해주는 하나의 계기일 수 있다. 영화 중반 카오슝에 와서 마음을 다잡고 일본어 공부를 하던 아칭은 공부 노트 사이에서 말라비틀어져버린 벌레를 발견한다. 그때 그는 벌레를 치우는 대신 죽은 벌레 주변으로 물결무늬 파장이 퍼져가는 듯한 그림을 그린다. 아버지라는 존재의 망실이 그에게 남긴 파장은 그렇게 표현된다. 허우 샤오시엔은 <동년왕사> 등의 영화에서도 아프거나 무기력한 아버지를 보여주고는 아버지 공백의 시공간을 살아내며 성장을 위해 분투하는 소년들을 그려왔다. 허우 샤오시엔의 술회의 맥락과 회고의 형식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작용/반작용’은 매우 중요한 도구인 셈이다.

영화 후반, 아칭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카오슝에서 전해 듣는다. 황급히 펑꾸이로 돌아간 아칭은 백치 아버지가 무료한 시간을 달래던 의자를 바라본다. 아버지는 하루 종일 하나의 정물처럼 그 의자에 앉아 계셨다. 이때 아버지가 멀쩡하던 더 오래 전의 풍경이 갑자기 틈입한다. 젊은 어머니는 아버지의 출근을 돕고 꼬마 아칭은 그 일상적인 아침을 무심히 쳐다본다. 곧이어 고향집 마당을 떠나 아버지가 프레임 밖으로 나가고, 젊은 어머니도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다. 부재하는 아버지를 받아들일 또 한 번의 기회는 그렇게 허허로운 고향집 마당 이미지에서 온다. 이제 아칭은 아버지의 빈 의자를 받아들여야 한다. 아버지가 야구공에 머리를 다치기 전의 세계로 돌아가려 하지 말고 카오슝에 어울리는 한 아버지가 되는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펑꾸이>는 카오슝으로 표상된 세계의 질서에 아직 제대로 진입하지 못한 아칭, 곧 ‘인물∉공간’의 이물감으로부터 ‘정서적 사유’를 이끌어내는 영화다. 오래 전부터 상징적으로 부재했던 아버지는 이제 물리적으로 사라져 버렸다. 첫사랑은 완전히 떠나갔고, 함께 방황의 나날을 보내온 친구들도 하나둘 군입대를 하는 상황이다. 영화 첫 신에서 걱정없이 당구를 치던 당구장의 소년들은 이제 ‘성장/반성장’의 갈림길에서 새로운 세계로 진입해야만 한다. 다시 상기해보면, <쓰리 타임즈>의 ‘연애몽’의 첫 신도 당구장이었다. 영화 초반의 편지에서 첸은 ‘여기에서 보냈던 시간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회고하지만, 이후 그는 그 세계를 과감히 떠나간다. 무수한 이정표를 건너 그 다음 세계와 화해의 길을 연다. 예정된 결별의 순간들을 극복한 젊은 허우 샤오시엔을 우린 그렇게 만날 수 있다.

 

자유몽, 집착 없는 소유의 길

“우리의 사랑은 두 개의 고독이 서로를 보호해주고 서로의 경계를 그어놓고 서로에게 인사를 하는 사랑입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3)

‘자유몽’의 배경은 1911년 일본 점령기(日治時期)의 대만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해에 중국 본토에서는 우창봉기를 계기로 신해혁명이 일어난다. 다다오솅에 살고 있는 대지주의 아들이자 애국적 언론인으로 정치활동을 하는 지식인 창(장첸 분)은 종종 유곽을 들른다. 그곳에는 창을 조용히 연모하는 기녀 아메이(서기 분)가 있다. 차분하고 온화한 얼굴을 유지하는 창은 기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열정으로 대문자 역사 안에 자기 삶을 결속시킨 남자다. 그래서 그는 당대의 정치적 사건들과 지근거리에서 조우하며 살아가고 있다. 유곽에 머무는 기녀 아메이는 창과의 사적인 미래를 가늠하며 하염없이 기다리는 삶에 익숙하다. 그렇게 ‘자유몽’은 멀리 있는 세계를 사랑하는 남자와 가까이 있는 사람을 욕망하는 여자 사이를 지켜보게 한다.

‘자유몽’은 1911년이라는 서사적 시공간을 체험시키기 위해 무성영화의 형식미를 내보인다. 먼저 기녀의 방 밀실 내에 고정된 카메라의 시선은 영화의 분위기를 완성한다. 심지어 카메라는 유곽 내 닫힌 공간 바깥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다. 아메이의 공간에서 포착되는 소소한 사태, 곧 ‘머묾’, ‘떠남’, ‘기다림’, ‘남겨짐’에 대한 술회가 영화의 전부인 것이다. 의미를 전달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은근하게 관조하는 듯한 영상의 문체에 의존할 뿐 부가적인 언어적 설명이 거의 없다. 그 때문에 아메이의 고독이 만져지는 유곽의 밤은 허우 샤오시엔만의 침묵의 언어를 웅변한다. 유일한 광원인 식탁 위 붉은 등불로부터 전해지는 후텁지근함, 어둠에 유폐된 듯한 느낌은 아메이의 내면을 적확하게 환기시킨다.

유곽 바깥을 흐르는 거대한 사회사와 동행하는 창은 아메이에게 ‘순간을 남기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창을 기다리 아메이는 ‘시간을 견디는 사람’, 혹은 ‘순간에 사는 사람’이다. 그녀가 창에게 건넨 가장 애절한 문장은 감정을 읽기 힘든 표정을 배경으로 자막으로만 전달된다. “내일 가시면 언제 돌아오세요?” 그에 대한 응답은 ‘언어적 이해’로 돌아오지 않고 오히려 다시 ‘정서적 사유’를 요청하는 침묵으로 온다. 그도 그럴 것이, 정치적 이상을 향한 창의 마음의 온도는 아메이를 소유하고픈 열망보다 항상 고온이다. 그렇다면 아메이가 내적 평화를 누리는 가장 간단한 길은 창에 대한 집착을 비우는 데 있다. 그녀는 한 사람을 향한 사랑에 어울리지 않는 기녀이기도 하다.

‘자유몽’은 ‘6일 후’, ‘1개월 후’, ‘3개월 후’ 등의 자막과 함께 예기치 않는 시간대로 계속 점프컷한다. 그러나 좀처럼 시간이 흐르지 않는 아메이의 공간은 외로움과 그리움이 단조로운 일상과 동거하는 풍경을 전경화한다. 허우 샤오시엔은 두리번거리듯 천천히 패닝하는 카메라와 조용히 눈을 깜박이듯 쇼트를 전환시키는 편집으로 유곽에 고인 정념을 포착한다. 물론 그녀의 정념이 직접적으로 분출되는 순간이 있다. 기녀로서 손님들 앞에서 노래를 할 때, 그녀의 표정은 더 이상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곡진한 사연이 읽히는 그녀의 노래는, 닫힌 실내를 빠져나갈 수 없다. ‘자유몽’은 창의 공적 소명과 아메이의 사적 욕망 사이의 먼 간극에 검붉은 침묵의 밤을 배치하는 영화인 것이다.

그런데 ‘자유몽’은 허우 샤오시엔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단연 <해상화>의 스핀오프처럼 느껴진다. <해상화>는 19세기 말에 세상에 나온 『해상화열전』을 원작으로 한다. 허우 샤오시엔의 카메라는 원작의 분위기를 재해석해 유곽의 기녀와 그녀들을 찾는 당대의 인물들 사이의 정분을 관찰한다. 영화 속 배경인 1884년 청나라 말의 상하이는 제국들의 탐욕이 쟁투하던 곳이었다. 외교관리 왕(양조위 분)과 기녀 소홍(방선 분)이 만나는 유곽도 영국식민주의자에 통제받던 영조계(英租界)에 위치한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영국으로부터 유입된 아편과 청말 특유의 퇴폐적 낭만을 배경으로 한다.

<해상화>도 기녀들의 방을 중심으로 밀폐된 실내극처럼 진행된다. ‘자유몽’으로 연장되는 촬영과 편집에 있어서의 형식미학은 <해상화>에서 이미 확립된 셈이다. 40여개의 롱테이크 신으로 마무리 된 이 영화는 인위적인 시점 쇼트가 전혀 없다. 인물 간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그 흔한 리버스 쇼트도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영상은 차분하게 미끄러지는 트래킹 쇼트와 천천히 패닝하는 카메라의 느낌으로 완성된다. 카메라는 사내와 기녀, 기녀와 기녀의 대화를 숨죽여 경청하지만, ‘줌인/줌아웃’도 자제되고 무리한 포커싱의 변화를 들키는 법도 없다. 우리를 그 퇴폐적 탐미의 세계 내에 현실적 실감으로 동석시키려는 의도다.

그럼에도 이 밀폐된 기녀의 방은 미세한 율동감으로 충만하다. 밥을 먹거나 차와 술을 마시는 사람들, 게임을 하며 목청을 높이는 사내들, 담배와 아편을 피우며 안에 고인 감정을 밖으로 비우는 기녀들, 붉은 등불 곁으로 뜨거운 수건을 나르거나 조용히 명을 기다리는 시녀들. 그들은 모두 청말 상하이의 밤을 지배하던 어떤 적멸감의 기표들이 된다.

<해상화>는 여느 허우 샤오시엔 영화처럼 극적 사건이 인과적 프로세스를 밟는 과정에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정서적 사유’를 요청하는 몇 가지 소란과 소란 이후의 정적이 있다. 소홍은 왕이 다른 유곽의 기녀 혜정에게 돈과 시간을 쏟았다는 정보를 전해듣는다. 오랜 시간 왕과 정분을 나눠온 소홍은 격하게 토라진다. 자신이 진 빚을 갚아주는 것 이상의 요구, 어쩌면 기녀가 기대해선 안 되는 사랑과 의리에 대한 요구가 그녀의 표정을 다녀간다. 그녀는 그렇게 자기감정에 대한 상대의 배신을 원치 않는다. 그런데 왕이 소홍의 빚을 다 갚아주자 그녀는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물린다. 부모 핑계를 대면서 결혼할 마음을 접어버린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예민한 ‘정서적 사유’의 태도를 견지하는 자에게 각별한 감흥을 준다.

그 무렵 왕은 소홍의 방에서 그녀가 평소 좋아하던 북경의 배우를 발견하고는 소홍의 방 집기들을 부숴버린다. 그것은 왕이 선물했던 것들이다. 왕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던 사내는 다시 이런 말을 한다. “자네가 처음 소홍을 찾기 시작했을 때 의미를 두지 말라고 자네에게 충고했었어” 그렇다면 ‘자유몽’은 소란 뒤에 오는 정적 속에서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랑이 가능한가, 집착 없는 소유가 가능한가를 되묻는 영화다. 결국 왕은 소홍을 버리고 혜정을 첩으로 맞아 광동으로 떠난다. 왕과 소홍의 관계가 남긴 것은 ‘머묾’과 ‘떠남’, ‘기다림’과 ‘남겨짐’이라는 행위가 전부는 아니다.

영화 말미에는 다른 소란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신참내기 기녀 쌍옥은 돈 많은 청년 주와 사랑에 빠진다. 일찌감치 쌍옥은 다른 손님을 들이지 않고 주에게 순수한 연정을 바친다. 같이 살 수 없다면 같이 죽자는 약속을 믿고 자신을 주의 여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유곽에서 그런 약속은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닫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 깨달음에 대한 쌍옥의 응대는, 주가 눈치 채지 못 하는 사이 동반자살을 감행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 소란은 주가 쌍옥에게 일만 냥을 건네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쌍옥은 자기를 향한 세간의 말들, 예를 들면 “그 애는 자기가 가질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원해요”와 같은 문장을 더 진지하게 대면했어야 했다.

소홍과의 추억이 깃든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는 왕의 질투, 주와 함께 자신의 인생까지 끝장내려 한 쌍옥의 분노는 사랑에 빠진 자의 리비도가 두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한 방향의 끝엔 연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상상적 대상이 있다. 다른 방향의 끝엔 연애 감정에 부풀려진 허구적 자기 자신이 있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자는 항상 그 두 사람을 사랑한다. 그런 어떤 순간에 우리는 현실 논리와 상상적 믿음의 차이가 지워지는 경험을 한다. 프로이트도 사랑에 빠진 자는 자아와 대상이 구별된 존재라는 감각 기관의 증거를 쉬이 초월한다고 말한다. ‘나’와 ‘당신’은 하나라는 선언 아래에서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이다. 왕과 쌍옥도 언제든지 그 불가능한 선언이 사실인 것처럼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4) 그러나 상상적 대상을 향한 리비도를 거둬들이는 것도 아픔이지만, 신화화 된 자기 모습을 부정하는 것은 더 큰 고통이다. 그렇게 <쓰리 타임즈>의 ‘자유몽’과 <해상화> 속 유곽의 방들은 집착없는 소유의 ‘가능성/불가능성’ 앞에서 같은 깨달음으로 어두워진다.

 

청춘몽, 갈라지는 감정에 관한 타자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로 몰려드는데,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 (5)

<쓰리 타임즈>의 마지막 에피소드 ‘청춘몽’은 방황하는 청춘들의 이야기이다. 더 정확히는 만남 이후를 대처하지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이며, 만남이 잉태한 다스릴 수 없는 감정을 끌어안고 고통스럽게 지속되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유몽’에서 ‘청춘몽’으로 100여년의 시간이 건너뛰면서 바뀐 것은, 냉정해 보이기까지 하는 타이베이의 푸르스름한 분위기이다. 클럽 가수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칭(서기 분)은 그 차가운 도시 어딘가에서 조숙아로 태어났다. 시작부터 ‘지연된 성장’을 감내한 그녀의 몸은 지금도 정상이 아니다. 그녀는 간질로 인한 발작 증세와 다투며 세계와 불화하는 상태로 지내온 것이다. 그에 더해 그녀의 오른쪽 눈은 약물 부작용으로 인해 거의 실명 상태에 이르러 있다.

‘청춘몽’은 칭과 사진사 첸(장첸 분)의 ‘끌림’을 다룬다. 그들은 각기 다른 애인이 있음에도 서로에게 이끌리는 중이다. 무수한 사람들, 자동차, 그리고 복잡한 소음을 거느린 타이베이는 비밀스러운 저녁과 푸른 빛 새벽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그들은 그 분위기를 직접적으로 표상하는 신비로운 기표들이기도 하다. 칭과 첸은 자꾸 다른 대상을 향해 갈라지는 마음 앞에서 무기력하고 번식하는 욕망에 대해 무방비 상태다. 허우 샤오시엔의 의도와 무관한 해석인지도 모르지만, 칭이 앓고 있는 신체의 문제들은 그 ‘갈라짐’과 ‘무기력함’을 증언한다. 약물 부작용으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어간다는 것은 파편화 된 이 세계에서 그녀가 균형감을 가질 수 없으리란 전망을 낳는다. 간질을 앓는다는 설정도 자기 정체감을 지킬 수 없는 조건 아래 살아왔다는 해석을 낳는다.

‘청춘몽’은 쳉이 자신의 오토바이에 칭을 태우고 다리를 건너는 장면에서 시작해 유사 장면으로 끝난다. 엔딩 신을 먼저 말하면, 핸드헬드로 도로가 갈라지고 합류하는 광경이 건조하게 펼쳐진다. 길을 따라 수많은 차들이 합류하고 또 갈라지는 중에 칭과 첸이 탄 오토바이도 선택한 길을 따라 프레임 밖으로 잠시 사라진다. 그러다가 다시 그 길과 함께 프레임 안으로 돌아온다. 쳉의 뒤에 탄 칭의 얼굴은 무표정이다. 굳이 비교하면, 오프닝 신에서 쳉의 오토바이에 처음 올라탄 칭은 간질이 오는 신호를 참기라도 하는 듯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린 그 표정의 변화 사이에서 허우 샤오시엔의 의중을 읽어야 한다. ‘갈라짐’과 ‘무기력함’에 익숙해진 동시대 대만의 청춘을 그는 그렇게 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린 ‘청춘몽’이 ‘인물⊆공간’의 상징성 위에 펼쳐진다는 것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칭과 첸의 내외부를 이루는 임의의 것들은 더욱 복잡해진 도시 타이베이의 유산이다.

‘청춘몽’은 2001년에 제작된 <밀레니엄 맘보> 속 두 인물의 사연을 재창작한 결과물이다. 그런데 <밀레니엄 맘보>는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 세계와 결부시켜 반드시 따로 논해야 할 장면을 가지는 작품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저만치서 비키(서기 분)가 슬로우 모션으로 손짓을 한다. 그녀는 푸르스름한 빛이 어른거리는 비좁고 긴 육교 통로를 지나가는 중이다. 스테디캠은 몽환적인 음악의 빠른 비트를 배경으로 어딘가로 건너가는 그녀를 유연하게 잡아낸다. 우리는 그녀를 따라 허우 샤오시엔 영화의 새로운 밀레니엄으로 들어가게 된다.

<밀레니엄 맘보>가 ‘청춘몽’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접하는 이유는, 비키와 하오하오(투안춘하오 분)가 복잡다단한 타이베이 안에서 파편화 된 조각처럼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 안주할 자기 세계를 갖지 못한 채 절망적인 방황을 거듭하는 중이다. <밀레니엄 맘보>에 구축된 서사무대를 ‘정서적 사유’의 방법으로 더듬기 위한 세 가지 경로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몽환적인 반복성을 갖는 테크노 음악의 활용방식에 주목하는 것이다. 인물들이 굳이 마약을 복용하는 장면을 빼고 보더라도 <밀레니엄 맘보>는 청춘의 방황을 자폐적 환각의 분위기로 그려내고 있다. 그들은 부정, 단절, 초월의 계기를 찾지만 결국 처음보다 더 끔찍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비키의 경우 하오하오와의 인연 자체가 벗어날 수 없는 끔찍한 현실이 되고 있다.

두 번째 경로는 카메라가 피사체를 잡아내는 방식에 있다. 그렇잖아도 얕은 심도의 프레임을 밀고 가는데, <밀레니엄 맘보>의 카메라는 피사체에 너무 닿아 있다. 특히 인물의 내면에 특별한 감정이 지날 때마다 우리는 미디엄 클로즈업과 클로즈업으로 파편화 된 그들의 얼굴과 신체를 보게 된다. 돌이켜 보면, 전작 <해상화>의 적멸감은 답답하리만치 폐쇄된 유곽의 실내 분위기에서 온 것이었다. 대신 카메라는 일정한 거리에서 인물에게 관조적 태도를 보인다. 그와 비교하면 <밀레니엄 맘보>의 카메라는 인물들의 내면에 약동하는 감정을 하나라도 놓치지 말라는 듯, 우리와 인물 사이의 간격을 최대한 밀착시킨다.

셋째,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만든 또 하나의 ‘거리’에 주목해야 한다. 앞서 설명한 오프닝 신에는 비키의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이 입혀져 있다.

그녀는 하오하오와 헤어졌지만 그는 항상 그녀를 쫓아다녔다. 전화를 걸어 돌아와 달라고 애원하길 수차례... 주술이나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녀는 도망칠 수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돌아왔고 자신에게 다짐했다. 예금해둔 NT50만불을 다 써버리는 날 그를 떠나리라. 그 일은 10년 전인 2001년의 일이었다.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세계가 축제로 떠들썩하던 그때.

그렇다면 <밀레니엄 맘보>는 영화 속 현재(2001년)보다 10살 늙은 비키가 자기 자신을 되짚는 술회의 맥락을 가진다. 만약 내레이션 주체를 지금의 ‘나’로 본다면, 한 시절의 ‘나’를 타자로 놓고 영상 배면에 3인칭 관찰자의 시선이라는 회고의 형식을 구축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때 발생하는 회고적 진술과 영상 사이의 ‘거리’는 밀레니엄 시대의 청춘을 면밀히 공감할 순 없으리라는 허우 샤오시엔의 태도를 반영한다고도 할 수 있다.

오프닝신이 끝나면 사실상 ‘현재’ 밖에 없는 영상의 시제 안으로 우리는 들어간다. 거기엔 한때 연인이었지만, 지금은 유사연인에 불과한 두 사람이 이상한 동거를 계속하고 있는 풍경이 있다. 비키는 하오하오를 진작에 떠났어야 했지만, 곧 떠나리라는 각오만을 다지며 아직도 그의 집착과 질투를 버텨내는 중이다. 이 불안하고 권태로운 상황은 “너는 네 세계에서 내 세계로 왔어. 그래서 내 세계를 이해 못하는 거야”라는 하오하오의 대사로 가늠해볼 수 있다. 그는 종종 마약에 취하는데, 이는 <해상화>의 유곽 풍경에 틈입하던 아편과 전혀 다른 뉘앙스로 다가온다. <해상화>의 아편이 도피적 은둔의 분위기를 강화한다면, 하오하오의 마약은 습관적 퇴행의 분위기를 띤다.

영화 중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에 따르면, 비키는 16살 때부터 놀기 시작했고 토요일마다 타이베이행 기차를 탔다. 화장실에서 몰래 대마초를 피우곤 했는데 하오하오는 그 무렵 디스코텍에서 만났다. 그로 인해 비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고 타이베이의 한 아파트에서 하오하오와 동거에 들어간다. 이후 호스티스 클럽에서 일하게 된 비키와 비키에 대한 집착 이외에는 딱히 하는 일이 없는 하오하오는 끊임없이 불화한다. 그때 비키는 폭력조직의 중간 보스 격인 잭(고첩 분)을 만난다. 직업의 성격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비키에게 잭은 착하고 매너 좋은 남자다. 하오하오와의 관계에서 도피를 궁리하던 비키였기에 잭은 더없는 안식처가 된다. 그러나 허우 샤오시엔은 그를 비키와 연인이 될 수 있는 남자로 그리는 것 같지 않다. 16살에 시작된 비키의 방황을 다스려줄 존재, 성장이 지연되고 있는 그녀의 현실에 출구를 열어줄 아버지처럼 성격화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조직 간 갈등 문제로 잭은 일본으로 피신을 하게 되고 비키는 잭의 메시지를 좇아 무작정 도쿄로 건너가게 된다. 그러나 비키는 비밀스러운 곳으로 피신을 거듭하는 잭과 엇갈리고 도쿄의 겨울을 견디며 잠시 방황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때 그녀는 타이베이에서 DJ를 하던 다케우찌가 들려준 말을 떠올린다. 그는 대만인 아버지와 일본계 어머니 사이에서의 혼혈아였고 매년 2월이면 할머니가 계시는 홋카이도 유바리에 간다고 했다.

<밀레니엄 맘보>의 절정은 2001년의 비키가 맞닥뜨린 유바리의 풍경 위로 2011년의 비키가 회고의 언어를 풀어내는 순간에 온다. 이 마지막 시퀀스를 통해 우리는 비키와 하오하오가 동거하던 타이베이의 아파트와 온통 새하얀 눈뿐인 유바리의 풍경을 의미심장하게 대차대조하게 된다. 2011년의 목소리를 경유하면 타이베이의 아파트는 과거로 돌려세워야 하는 공간이다. 돌이켜 보면, 허우 샤오시엔은 그 비좁은 아파트에서 부대끼는 하오하오와 비키를 숨 막히는 거리에서 잡아내곤 했다. 그때마다 화려한 색감의 소품들은 인물 중심의 촬영 때문에 몽환적으로 뭉개지곤 했다. 이는 정상적인 사회화의 과정에 실패한 그들 내면의 풍경, 더 정확히는 환각적 퇴행 상태의 외연화다.

반면에 유바리는 쏟아지는 눈의 마법에 의해 절망적 세계의 윤곽이 지워진 공간이다. 미래를 향해 새롭게 열린 장소가 된다. 그곳에서 비키는 하오하오와의 관계에서 파생한 비극도 눈사람처럼 녹아 사라질 것을 비로소 확신한다. 그녀는 부모가 있는 고향 길릉도, 하오하오와의 질긴 인연에 얽힌 타이베이도 벗어나고 싶어 한다. 유바리는 바로 그 제3의 세계에 대한 상징, 혹은 오래 전부터 그녀를 손짓해온 신비한 미래다.(영화 중반 서사적 맥락과 무관하게 유바리의 풍경이 ‘플래시 포워드’로 들이닥친 적 있다)

그렇다면 영화 마지막 프레임을 채우는 유바리의 ‘영화의 거리’ 이정표는 일종의 ‘누빔점(quilting point)’이다. 그 이미지와의 대면을 통해 방황과 혼돈으로 점철되었던 그녀의 삶은 의미의 매듭을 찾게 된다. 이제 그녀는 질투, 집착, 폭력의 메커니즘을 반복하는 하오하오를 등질 수 있을 것이다. 쫓고 쫓기는 삶에 언제든지 포박될 수 있는 잭에게 의지하지 않을 것이다. 호스티스로 연명하던 그녀 스스로의 삶도 거기서 멈출지 모른다. 허우 샤오시엔은 일탈과 방황, 혼돈의 세계가 갑자기 ‘애해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뀌는 기적(6)을 그렇게 구축한다.

그런데 유바리의 풍경에 틈입하는 자기반영적 목소리의 주체를 허우 샤오시엔으로 놓을 때, 이 시퀀스의 의미는 또 다른 차원의 해석을 열어젖힌다. 자신이 해온 영화작업에 대한 회고와 미래에 대한 다짐을 동시에 내보이는 허우 샤오시엔의 시선이 읽히기 때문이다. 참고로 김지석은 <밀레니엄 맘보>를 소개하면서 허우 샤오시엔의 새로운 밀레니엄이 우울한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다고 평가한 적 있다. 그러나 이는 유바리의 겨울 이미지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다케우찌의 말에 따르면, 유바리 탄광의 폐장이 자기 할머니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녀가 긴 시간 운영해 온 유바리의 여관에 손님이 끊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2월에 열리는 영화제 기간에는 도시에 다시 생기가 돌고 여관이 북적인다고 한다. 광부들이 떠난 후 폐허가 된 상점에는 옛날 영화포스터들이 화려한 추억을 불러온다고 한다. 그래서 이미 팔순인 할머니도 유바리가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고픈 소망 때문에 백 살까지는 살고 싶다고 한다.

이 같은 다케우찌의 말을 미리 들었기에 비키를 따라 진짜 유바리의 풍경을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쇠락해 가는 도시의 역사적 상황과 현실 조건을 확인하려 한다. 그런 우리에게 카메라는 상점 거리에 즐비하게 늘어선 고전 영화 포스터들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유바리를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던 탄광촌 노동자들을 향한 허우 샤오시엔의 안부 편지에 그치지 않는다. 이때의 카메라가 중국·대만의 지난한 역사를 성찰하며 그 시대를 살아낸 자들에게 영화로 편지를 써온 허우 샤오시엔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그는 인터뷰 때마다 자기가 살던 시공간을 이야기했고, 자기 인생과 영화가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가 창조한 인물 상당수는 그의 페르소나이기도 했다. 그렇게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는 변화하는 사회현실에 대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응대였다. 그래서 을씨년스러운 유바리의 겨울 풍경 위로 우뚝한 ‘영화의 거리’ 이정표는 반영론적 관점에서도 ‘누빔점’이 된다. 그가 구축해 온 영화세계에 대한 심미적 메타포가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허우 샤오시엔은 다케우찌의 팔순 할머니처럼 자기 영화가 현실을 끌어안고 변화해가는 과정을 오래도록 지켜볼 것이다.

 

아직 제 수식어를 찾지 못한 리얼리즘

그리고 나서 찾아온 명성은 아마도 그를 더 고독하게 했을 것이다. 명성이란 결국 하나의 새로운 이름 주위로 몰려드는 모든 오해들의 총합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릴케의 로댕』(7)

사랑하는 자의 궁극적 꿈은 상대와의 ‘완전한 합일’일 것이다. 그런데 앤서니 스토는 그 꿈을 향한 여정이 실패할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목적지를 향해 희망에 부풀어 길을 떠나지만 절대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는 여행”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고독은 일생의 임무”가 된다.(8) <쓰리 타임즈>의 원제가 ‘최호적시광’인 것은 현실에서는 성사될 수 없는 ‘사랑의 합일’을 아름답게 전시한 데 있지 않다. 사랑을 두고도 고독한 1966년, 1911년, 2001년의 청춘들이 그리 행복해보이지도 않는다. 다만 허우 샤오시엔은 감정이 무뎌져가는 삶, 그 ‘나이듦’의 자리에서 먼 곳의 섬광을 응시하는 중이다.

어쩌면 무드셀라 증후군은 오래도록 그의 지금을 있게 한 작가적 동력이었는지도 모른다.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천사 다미엘(브루노 간츠 분)이 유한한 인간의 삶을 흠모한 것도, 감정의 격랑에 휩싸일 수 있는 청춘의 시절에 대한 매혹 때문이었다. 그 시절을 지나치고 나면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곧 시간의 불가역성은 청춘의 한 시절을 신화처럼 빛나게 하는 우리 모두의 보편적 조건인지도 모르겠다.

허우 샤오시엔은 누가 묻지 않았음에도 왕가위 영화와의 비교를 통해 자기 영화를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한 습관을 받아서 굳이 구분하면, 왕가위의 영화는 정교하게 계산된 감각적인 이미지들의 힘으로 관객을 앞에서 끌고 간다. 홍콩 밤거리의 축축한 공기까지 전달하는 크리스토퍼 도일의 촬영도 개성의 일단을 이룬다. 궁극적으로 왕가위 영화는 ‘감각적 직관’을 벼려야 하는 영화다. 반면 허우 샤오시엔은 느린 호흡의 느슨한 이미지에 관객이 젖어들기를 기다리는 타입이다. ‘공간-인물’ 사이의 연결점을 탐색해 들어가는 마크 리 핑빙의 촬영은 허우 샤오시엔 영화의 기초가 된다.(9) 여러 번 말했지만 허우 샤오시엔 영화를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선 ‘정서적 사유’의 자세를 갖춰야 한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이미 언급한대로 허우 샤오시엔은 사건들의 인과적 연결보다 인물 간의 정서적 연결에 관심이 많은 시네아스트다. 그의 연출은 이야기와 이미지 사이에서 건축학적 균형을 추구하지 않는다. 영화 속 인물들이 자신이 속한 시공간을 자연스럽게 살아내는 순간까지 인내하는 일이 영화작업의 핵심 포인트다. 그래서 느슨하게 흘러가는 쇼트 내 시간이 때로는 군더더기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종종 특별할 것 없는 감정이 낭비되고 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인물들의 정체감이 신비하게 드러나는 순간까지 ‘정서적 사유’의 태도로 동행할 수 있다면, 그의 영화는 각별한 감흥을 선사하곤 한다.

영화는 본래 리얼리즘의 예술이다. 특히 허우 샤오시엔은 좀 더 리얼리즘의 방법을 따른다. <자객 섭은낭> 등 일부 영화는 다소 다른 결을 가지지만, 그는 대체로 직간접적 경험 속에서 영화 속 시공간을 구축하는 가치와 준거를 찾아왔다.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군상을 다룬 <쓰리 타임즈>의 세 에피소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허우 샤오시엔이 걸머져온 현실 세계의 실재성(reality)을 안고 있다. 그처럼 그는 역사적 조건을 도외시하지 않으면서도 서정적이고, 일상의 소소한 풍경을 놓치지 않지만 몽환적인 영화를 만들어 왔다.

우린 아직도 허우 샤오시엔을 오해하고 있고, 이 글도 숱한 오해로 쌓은 언어들의 가건물일 것이다. 그래서 허우 샤오시엔의 리얼리즘에 단순한 수식어를 붙이는 일을 피하고자 한다. 그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포괄하는 수식어를 그가 허락할 것 같지도 않다. 마지막엔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종종 그의 롱테이크 쇼트 속 한 지점을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될 때가 있다. 허우 샤오시엔이 더 오래 영화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1) 라이너 마리아 릴케, 문현미 역, 『말테의 수기』, 민음사, 2005, p.27.
(2) 라이너 마리아 릴케, 손재준 역, 『두이노의 비가』, 열린책들, 2014, pp.364-365.
(3) 라이너 마리아 릴케, 김재혁 역,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고려대학교출판부, 2006, p.75
(4) 지그문트 프로이트, 김석희 역, 『문명 속의 불만』, 열린책들, 2008, p.236.
(5) 라이너 마리아 릴케, 문현미 역, 『말테의 수기』, 민음사, 2005, p.9.
(6) 슬라보예 지젝, 주형일 역,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 인간사랑, 2013, p.68.
(7)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안상원 역, 『릴케의 로댕』, 미술문화, 1998, p.11.
(8) 앤서니 스토, 이순영 역, 『고독의 위로』, 책읽는수요일, 2018, pp.40-41.
(9) 참고로 왕가위는 마크 리 핑빙과 크리스토퍼 도일의 카메라를 모두 활용하여 <화양연화>를 찍었다. <화양연화>는 여러 의미에서 왕가위 영화의 새로운 밀레니엄을 열었다고 믿는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다음 영화

글: 안숭범

영화평론가이자 시인.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문화콘텐츠 기획 및 인문학적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9324

0

추천하기

0

반대하기

첨부파일 다운로드

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2-31

조회수7,147

  • 페이스북 공유
  • 트위터 공유
  • 밴드 공유
  • Google+ 공유
  • 인쇄하기
 
스팸방지코드 :
번호제목등록자등록일조회수
342[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가짜의 세상에서 가짜를 노래하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사랑을 카피하다'

서성희

2018.12.319,458
341[손시내의 시네마 크리티크] 포장되지 않는 삶, 타마라 젠킨스의 '프라이빗 라이프'

서성희

2018.12.318,203
340[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스릴러라는 불가능한 이름을 넘어서서, 예술 그 자체에 대한 물음을 촉구하는 자리로” - <108: 잠들 수 없는 시간>

서성희

2018.12.316,702
339[장석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리처드 론크레인 감독의 <해피 댄싱> - 황혼 무렵에 풀어보는 삶의 방정식

서성희

2018.12.315,852
338[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무사히 할머니가 되고 싶은 두 자매 이야기 <어른이 되면>

서성희

2018.12.315,648
337[정동섭의 시네마 크리티크] 콜롬비아 마약왕에 대한 또 다른 클리셰 - <에스코바르>

서성희

2018.12.315,980
336[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그 지긋지긋함에 몸서리치면서도 - <밍크코트>

서성희

2018.12.315,206
335[서곡숙의 시네마 크리티크] <안녕, 나의 소녀 시절이여>

서성희

2018.12.316,440
334[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공간-인물’로 읽는 사랑의 유형학- <쓰리 타임즈>로 허우 샤오시엔 읽기

서성희

2018.12.317,147
333[최재훈의 시네마 크리티크] 나그네라도 길 위에서 잠시 쉬어가야 한다, <에브리띵 윌 비 파인>

서성희

2018.12.315,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