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탄 소년(Le gamin au velo)
어린이는 그저 어른이 되는 게 아니다. 몸이 점점 자라 어른의 체형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를 진정한 어른이라 부르려면 필요조건들이 있기 마련이다. ‘자전거를 탄 소년’(다르덴 형제 감독, 극영화,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2011년, 87분)에서도 중요한 조건 한 가지를 제시한다.
시릴(토마 도레)은 절망적인 처지에 빠졌다. 엄마는 오래전에 어디론가 사라졌고 같이 살던 아빠마저 아들을 보육원에 맡긴 후 도통 나타나지 않는다. 아빠를 향한 그리움에 시릴은 보육원을 탈출하고 아빠가 이미 오래전에 종적을 감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다가 아빠는 시릴이 목숨처럼 아끼는 자전거까지 팔아치운 채 사라진 것이었다. 수소문하여 겨우겨우 찾아간 아빠에게서 돌아온 한마디는 ‘더 이상 연락을 취하지 말라’였다. 아빠를 만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시릴은 스스로 얼굴을 할퀴고 차창에 머리를 찧는다. 세상에 홀로 남은 11살 소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영화는 그처럼 절망에서 시작하고, 관객은 자연스럽게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감독은 희망을 제시하는 데 서두르지 않는다. 얼마나 잔잔하게 영화를 이끌어나갔는지 엔딩 크레딧이 올라온 후에도 ‘이게 뭐지?’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잠시 자리에 앉아 생각을 시작했고 그 후론 며칠 동안 영화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우선 영화에 배경음악이 몇 번 나왔는지, 그리고 어느 장면에서 나왔는지 기억해냈고, 수돗물을 틀어놓고 계속 버티던 시릴의 마음 상태를 짐작해보았고, 자신을 헌신적으로 도와준 사만다를 칼로 공격한 장면이 떠올랐고, 시릴이 나무에서 떨어진 후 툴툴 털고 자전거를 타고 사라진 마지막 장면에 이르렀다. 그 때쯤 되니까 영화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실로 오래간만에,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남겨주는 영화라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가 결론으로 치닫던 무렵 시릴이 자신의 어린이 용 자전거에서 아만다의 어른 용 자전거로 바꿔 타는 장면이 나온다. 시릴의 삶에 큰 변화가 찾아온 순간을 보여주는 중요한 은유였다. 그리고 시릴의 매정한 아버지와 나무에서 시릴을 떨어뜨리게 만든 소년의 아버지가 대비를 이루었고 마침내 사만다가 눈에 띄었다.
사만다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만다는 그저 착하는 말로는 설명이 불충분하다. 그녀는 아버지를 찾는 시릴의 여정에 늘 함께 하고 시릴의 막무가내 행동을 모두 받아준다. 종종 한국 양자를 받아들여 훌륭하게 키워낸 서양 부모들의 미담이 신문에 실리곤 하는데 아마 사만다는 그런 류의 사람일 것이다. 어떤 악조건에서도 도움이 필요한 이를 거절 못하는 사람 말이다. 심지어 칼로 자신을 찌른다 한들 그의 맘은 변하지 않는다. 외롭고 거칠었던 시릴은 엄마를 갖게 되었고 ‘용서’라는 말의 의미를 터득한다. 드디어 어른으로 가는 길에 들어선 것이었다.
‘자전거를 탄 소년’에는 감정이 잘 정리되어 있다. 관객을 과도한 웃음이나 억지 울음으로 유도하지도 않고 극적인 반전도 없으며 배경음악도 딱 네 번, 그것도 아주 간결하게 나온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에 나오는 짧은 주제다. 감독은 모든 절제된 감정을 다양한 상징과 은유에 섞어냈다. 돌이켜보면 한 장면 한 장면에 분명한 메시지가 담겨있었고 그 메시지를 담아내기 위해 감독이 세세하게 지시했을 법한 상황이 머리에 그려졌다. 한마디로 다르덴 형제는 대단한 연출력을 가진 감독이다.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64회)을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는 영화였다.
다르덴 형제는 ‘더 차일드(L'Enfan)’라는 성장영화로 이미 칸 영화제(61회)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바 있는 감독이다. 혹시 그 영화를 본 적 있는 독자라면 ‘자전거를 탄 소년’을 선택하는 데 절대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연출력의 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