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오브 파이
어느 나그네가 끝도 없이 긴 숲길을 가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앞에 잔뜩 성이 난 코끼리가 달려오지 않는가? 겁에 질려 부리나케 도망치던 나그네는 마침 우물을 발견하고 넝쿨에 의지해 우물 벽에 겨우 매달린다. 안도감도 잠시뿐 어디선가 흰 쥐와 검은 쥐가 나타나 넝쿨을 갉아먹기 시작했고, 뛰어내리려 밑을 보니 우물 바닥에 네 마리 독사가 꽈리를 틀고 있다. 사면초가, 진퇴양난의 위기! 그런데 마침 머리 위쪽에 있던 벌집에서 꿀이 다섯 방울 입에 떨어지고 나그네는 자신의 절박한 처지도 잠시 잊은 채 그 맛에 취하고 만다.
독자들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는『불설비유경佛說譬?經』에 나오고 그 이전의 힌두교 경전에서 발견되며 심지어 이슬람 전승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이를 그린 그림도 유명해 인터넷에 ‘안수정등岸樹井藤’이라는 검색어를 치면 즉시 화면에 떠오른다. 그리고 실로 오랜만에 영화에서 같은 이야기를 만나 보았다. 이 안 감독의 신작 <라이프 오브 파이>(극영화/모험, 미국, 2012년, 126분)에서 주어진 설정이다.
인도 소년 파이(수라즈 샤르마/이르판 칸)는 어릴 때부터 유별난 아이였다. 파이는 뜻하지 않은 계기로 수영을 매우 잘하게 되었고, 집 주변의 종교들을 섭렵해 그리스도교와 힌두교와 이슬람 신앙을 동시에 갖게 되었으며, 아버지가 동물원을 운영했던 까닭에 동물들의 생리에 통달했고, 그 중에서도 ‘리차드 파커’라는 이름이 붙여진 뱅갈 호랑이와 남다른 인연을 맺었다. 동물원의 재정사정이 악화되자 파이의 아버지는 캐나다로 이주해 동물원을 열기로 결정했고 가족과 모든 동물들은 배를 타고 태평양으로 나아간다. 예상 못한 악천후에 배는 침몰하고 파이 혼자 구명보트에 살아남는다. 그리고 보트에 얼룩말과 하이애나와 오랑우탄이 올라타고 마침내 리차드 파커가 동승한다. 이 모든 설정에 이른 후에야 본격적인 이야기가 문을 연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얀 마텔의 소설인 <파이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는데 소설에서는 파이의 신기한 여행을 통해 종교와 믿음,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안 감독은 그에 더하여 최고의 영상미까지 보여준다. 사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진정한 매력은 환상적인 영상에 있다. 음악, 문학, 미술처럼 영화 역시 독립적인 예술 분야로 정립시키려 했던 20세기 초 프랑스 인상주의, 초현실주의 감독들이 살아 돌아온다면 ‘우리가 원했던 바로 그것!’이라는 감탄사를 연발할 만한 장면들이다. 동?서양의 세계관과 다양한 제작 기술을 절묘하게 뒤섞어 이 안 감독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영화를 선보인 것이다.
망망대해에서 물에 비춰진 별은 하늘과 바다를 하나로 묶어내고, 무리지어 날아가는 참치들은 구명보트를 집어 삼킬 듯 하고, 수도 없이 떠 있는 해파리들은 온 바다에 내부 조명을 깔아 놓은 것 같은데 그 사이를 뚫고 거대한 흰수염고래가 약진해 오른다. ‘환상적이다!’라는 감탄사은 바로 이런 때 사용하는 말이다. 만일 <라이프 오브 파이>가 인간의 삶을 담아낸 우화가 아니었다면 그저 시각적인 즐거움만 누려도 충분한 가치를 발휘한다고 평해도 넉넉할 뻔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영화에는 세상과 인간을 알려주는 다양한 표상들이 때론 노골적으로, 때론 은밀하게 포함되어 있다.
본디 우화란 한 이야기에서 가능한 많은 뜻을 찾아내는 것을 목적(우의적 해석)으로 만들어진다. 그리 대입해보면 끝없는 숲길은 무명의 긴 밤無明長夜을 코끼리는 무상無常을, 우물은 생사, 넝쿨은 생명줄을, 검은 쥐와 흰 쥐 두 마리는 낮과 밤을, 네 마리 독사는 몸의 구성요소인 사대四大(흙, 물, 불, 바람)를, 꿀은 오욕五慾(재물, 애욕, 음식, 명예, 수면)을 뜻한다. 종합하면, 인간이란 위태롭기 짝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탐욕에 굴복하고 마는 가여운 존재이다. 그러니 무명無明의 ‘거짓 나’에서 벗어나 ‘참 나’를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파이 역시 자신의 모험을 믿지 못하는 작가에게 우의적으로 해석해준다. 얼룩말은 선원이고 오랑우탄은 파이의 어머니고 하이애나는 악독한 주방장이며 ‘리차드 파커’는 파이 자신을 암시하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파이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책을 쓰려는 서양 작가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 파이가 바다에서 호랑이와 맞섰던 일을 사실로 믿을 것인가, 아니면 전체 이야기를 우화로 받아들인 것인가? 사실 리차드 파커는 실존인물로, 바다에서 같이 조난당한 선원들에게 잡아먹힌 15세 소년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파이(리차드 파커)가 구명보트의 다른 생존자들을 먹었다는 말인가? 특히 파이가 표류 중에 잠시 머물렀던 식인 섬의 존재는 그와 관련해 강력한 암시를 제공한다. 영화에서 가장 절묘한 부분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훌륭한 종교영화다. 파이는 힌두교의 비누쉬 신의 인도에 따라 사랑을 주창하는 그리스도교를 믿었고,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파이의 아버지는 ‘하나에 집중해야 진정한 종교인’이라며 아들의 요란한 종교행각을 비웃지만 파이에게는 세 종교 사이에 아무런 충돌도 없다. 파이의 종교관은 바로 이 안 감독의 것이기도 하다. 학문적으로는 ‘종교다원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아주 멋진 철학영화다. 파이는 리차드 파커의 위협에서 벗어나려 작은 뗏목을 만들어 긴 밧줄로 구명보트에 매달아 놓는다. 파이에게 뗏목은 이성의 공간이다. 여기서 그는 글을 쓰고 사고하고 미래를 예견한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음에 도달한다. 리차드 파커는 파이의 생명을 호시탐탐 노리는 대단히 위험한 야수지만 리차드 파커의 위협이 없었다면 자신이 그렇게 오래 살아남아 구원받지 못했으리라. 인간은 인간에게 야수인 것이다. 육지에 도착하자 파커는 뒤도 안돌아보고 숲으로 들어간다. 뒤에 서 있던 파이는 못내 그 장면을 아쉬워한다.
과연 파이의 이야기는 사실일까, 우화일까, 아니면 그런 식의 구분 자체가 불필요할까? 이 안 감독은 <라이프 오브 파이>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일까? 그건 그렇다 치고, 영화를 보고 난 후 끊임없이 질문이 떠오르는 양질의 영화를 만나본 게 도대체 얼마만인가. 흥행에 무관하게 꼭 한 번 보시기 바란다. 독자 여러분의 마음을 틀림없이 건드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