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공동체를 위한 공동체, 그리고 그 안의 공동체를 위하여
1995년에서 2008년에 나온 영화들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열편의 영화를 꼽아달라는 <씨네 21>의 요청을 받고 허문영 평론가가 작성한 목록의 맨 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영화에 대한 나의 식견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보잘 것 없기 마련이고 그 평론가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 또한 아니지만 21세기의 첫 십년 동안 나온 수많은 감독들의 무수한 명작들을 모두 제치고, 과연 이스트우드의 이 두 작품이 목록의 최상단을 차지할 만큼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지는 궁금했었다. 그리고 그런 의문을 품었던 그 때, 나는 아버지의 깃발은 보았지만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보지 못한 상태였다. 시간이 흘러 나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보게 되었고 여전히 의심한다. 저 두 작품이 지난 십년 중 최고였는지는 아직도 나의 단견으로서 미심쩍은 구석이 있지만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 목록에 대하여 맨 처음 회의를 느낀 그 순간, 두 영화를 모두 본 상태여야만 했다. 아버지의 깃발만을 보고서 저 선택에 의문을 품는 일이 굉장히 허무한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아야만 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기괴한 기분이 들기 마련인 장면. 전투가 시작되고 사이고가 소속되어 있던 부대는 본대와 고립되어 괴멸의 위기에 처한다. 쿠라바야시 장군은 살아남아 본대에 합류할 것을 명령하지만 연대장은 명령을 거부하고 부하들에게 자폭할 것을 종용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몹시도 괴이하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괴이한, 병사들이 차례대로 덴노 반자이를 외치며 수류탄을 껴안고 폭사해나가는 장면은 영화에서 시종일관 대사로 제시되는 죽다가 싸우자 정신이 처음으로 발현되는 부분이다. 이 장면은 굉장히 상징적이면서도 감정적인 여파가 심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들게 한다. 아마 무엇이 이들을 자폭하게 만들었을까 가 가장 중요한 질문일 것이다. 그 질문에 답하기 이전에 당연하게 도출되는 전제 하나. 저 장면의 일본인 병사들은 죽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방식 또한 자살이어야만 했다. 이 명제아래 작동하는 위의 시퀀스는 사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닿고자 하는 가장 기본적인 법칙에 정통하는 시퀀스이기 때문이다.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저 병사들은 수류탄을 껴안고 죽어야만 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병사들의 부대는 본대와 분리되었다. 부대는 본대에서 고립되었기 때문에 공동체와 분리되었다. 공동체를 벗어났기에 저 들은 죽어야만 한다. 살아남아 합류하라는 장군의 군령도 공동체와 떨어진 개인은, 큰 공동체와 분리된 작은 공동체는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는 이오지마의 법칙보다 아래에 있다. 영화 속에서 이오지마의 모든 것들은 개별적으로 존엄하기보다는 모두가 한 덩어리로 뭉쳐져서야 비로소 존재한다는 느낌을 준다. 이런 느낌 아래 영화는 시종일관 강력한 공동체의 그림자 아래 존재한다. 이오지마에서 대열의 분리가 의미하는 바는 엄중하다. 영화의 후반부 니시 남작은 미군 병사 한 명을 포로로 잡았지만 자신이 미국에 있었을 때의 이야기도 해주고 치료까지 해준다. 미군 병사는 니시 남작의 연민 아래 보호와 치료를 받지만 그가 있어야 할 공동체는 니시의 공동체가 아니었다. 그는 분리되었다. 그래서 결국 그 병사는 죽게 된다. 이렇게 자신이 있어야할 집단에 있지 않아 죽음을 맞이한 미군 병사의 시퀀스와 정 반대의 지점에서 정확하게 기능하는 또 다른 장면. 시미즈와 사이고는 전투에 지쳐 탈영을 시도한다. 사이고는 탈영에 실패하지만 그의 친구인 시미즈는 성공하여 무사히 미군에게 닿는다. 그는 탈영을 시도했고 성공했다. 미군들도 백기를 든 그를 받아주었다. 하지만 그는 미군의 손에 죽는다. 그가 죽는 장면은 무척이나 허무하다. 시미즈는 그냥 죽었다. 시미즈의 감시를 맡은 미군 병사가 몹시 신경질적이었으며 그를 감시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벗어난 병사는 참혹할 정도로 의미 없이 죽는다. (일본군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친 그의 죽음이 역설적으로 일본군에게 탈영의 위험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그는 죽음으로써 자신의 공동체에게 탈영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어떤 식으로든 집단을 위해 죽은 것이다.)
미군은 미국과 분리되어서 죽었고 일본군은 일본과 분리되어서 죽었다. 마찬가지로 사이고의 부대도 본대와 분리되었기 때문에 죽었다. 이오지마는 전체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 법칙은 결국 이오지마 전체를 지배하는 법칙이다. 이오지마 내부의 군인들에게만 적용되는 법칙이 아니라 섬 자체를 온전히 둘러싸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일본군의 진영에 있었기에 죽음을 맞이한 미군 병사와 미군의 총에 죽어나간 시미즈, 그리고 이오지마는 서로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이들은 철저히 집단을 위해 기능하는 소집단으로 존재하며 집단에서 분리되어지자마자 죽임을 당한다. 그토록 빼앗으려던 이오지마도, 그토록 지키려던 이오지마도 결국은 일본 제국이라는 더 큰 공동체에 속해 있는 작은 섬에 불과하며 제국을 지키기 위해 희생되어 거침없이 폭사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수류탄으로 자폭한 사이고 부대의 병사들에 더 가깝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군의 공격이 개시되기 이전에도 개시된 이후에도 쿠바라야시 장군은 본토에 증원 병력을 줄곧 요청하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에 본국에서 돌아온 응답은 병력을 보내줄 수 없으니 그 곳에서 영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라는 내용이다. 이오시마는 버려졌다. 그래서 죽음을 맞았다. 죽음을 맞을 각오 또한 되어있었다. 이 각오는 시종일관 반복되는 죽을 때까지 싸우자는 대사로 거듭 다져진다.
이오지마가 철저한 일본의 땅이며 그 안의 모든 병사들이 이 절대적 가치를 위해 기꺼이 바쳐져야 함은 일련의 시퀀스 배치에서도 알 수 있다. 패배가 결정적으로 엄습해오는 순간 쿠바라야시 장군은 자신이 미국에 있었을 때의 기억을 회상한다. 그 곳에서 장군은 미군에게 우정의 표시로 권총을 선물 받았고 미국의 장교들과 담소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장교 부인의 질문과 이어지는 대답. 그리고 이 회상 시퀀스 다음의 장면은 니시 남작이 생포한 포로가 죽은 채 발견되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포로에게 자신이 LA올림픽에 참가했을 때의 추억을 들려주던 니시 남작역시 공격으로 시력을 잃고 자살하게 된다. 쿠바라야시 장군의 미국 회상 씬에서 니시 남작이 자살하는 장면까지 이어지는 이 부분은 흡사 응징의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 듯 보인다. 쿠바라야시는 일본의 전장에서 미국의 기억을 떠올렸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그에 대한 응답의 액션을 취하듯 미군 포로는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그 직후 역시나 미국에 대한 소중한 기억을 가슴에 품고 있던 니시 남작마저 영화는 죽음으로 몰아간다. 일본의 땅에서 일본의 군인이 미국을 기억하는 행위는 가혹하게 금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엔딩 씬에서 쿠바라야시 장군이 죽음을 맞는 장면에 이르면 이 가혹함은 더욱 분명해진다. 모든 것이 전멸하고 쿠바라야시와 사이고 둘 만 남은 이오지마. 쿠바라야시는 사이고에게 묻는다. 아직도 이 곳이 일본의 영토가 맞는가? 이어지는 대답. 그렇습니다. 쿠바라야시는 이 대답을 듣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미국으로부터 선물 받은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쏴 자결한다. 이오지마의 산꼭대기에 아버지의 깃발이 휘날려도 적어도 이 영화 안에서 섬은 끝까지 일본의 일부로 남는다. 패배했으나 그 땅은 사이고가 대답했듯 일본의 땅이었고 쿠바라야시는 그 땅에서 미국을 추억한 죄를 장렬하게 치른다.
영화는 이오지마를 위해 죽어간 부대, 부대를 위해 죽어간 개인, 일본 제국을 위해 죽어간 이오지마를 바라본다. 이런 응시의 과정에서 종종 넘실거리는 것은 집단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광기이며 누가 보아도 괴이하게 느껴지는 자폭의 행위들이다. 이런 공동체의 비극성이 관객으로 하여금 비정상적으로 느껴지게 묘사되는 일은 당연하지만 그 안에서 이스트우드의 시각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너무 예민한 것일까. 이오지마의 일본군을 바라보는 이스트우드의 시선에는 날이 서있으며 그 아래에는 어느 정도 미국적인 생각이 흐르고 있다. 쿠바라야시 장군이 섬에 부임해온 이후로 인물들을 구분하는 영화의 온도차는 제법 극명하다. 쿠바라야시와 니시 남작, 사이고는 전란의 와중에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예민함을 보존한 채 끊임없이 자아와 이오지마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들로 그려지는 한편 이토를 위시하여 쿠바라야시에게 불만을 품는 중대장들에게서는 이런 내적 갈등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들에게 자아는 곧 일본이다. 영화는 초반부터 쿠바라야시, 니시, 사이고로 이루어지는 한 축과 이토와 준장들로 이루어지는 한 축을 구성하고 이 둘을 무의식중에 대비시키도록 하는데 단연 관객들의 마음이 향하는 곳은 제국의 깃발아래 개인의 목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아무 때나 죽음을 주워섬기는 후자보다는 전쟁의 복판에서 고향을 그리워하고 끊임없이 내면의 요동을 겪어내는 전자일 수밖에 없다. 쿠바라야시와 사이고는 본토의 그리운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서사의 축을 지탱해 나가는 주인공들이라 할 수 있는데 공교롭게도 두 주인공은 때때로 영화의 주제와는 별개로 느껴지는 미국에 대한 호감을 보여준다. 쿠바라야시는 나라의 명령에 의해 싸움에 임하기는 하지만 미국에 있었을 때의 추억을 좋은 기억으로 가지고 있으며 애초에 미국이 자신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음을 알고 부하에게 그들이 1년에 생산해내는 차의 수가 500만대라며 자신이 속해있지 않은 또 다른 제국의 생산성에 경도되어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사이고는 쿠바라야시처럼 처음부터 미국에 관한 좋은 감정이나 기억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일본식의 공동체주의에 강한 반감을 가진 인물로 자신을 둘러싼 집단의 광기에 회의적이다. 그리고 미군에 대한 동경을 품고 탈영을 시도하기도 한다. 니시 남작에게도 LA올림픽에서의 기억은 인생에서 소중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처럼 쿠바라야시, 사이고, 니시 남작 등 영화에서 주류의 정서를 담당하고 있는, 관객으로 하여금 합리적이고 연민이 가는 인물로 받아들여지는 주인공들은 어떤 식으로든 미국에 경도되어 있으며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1945년 이오지마의 일본군 진영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있을 수 있다 쳐도 그 일들의 반대급부에 서 있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어떤 식으로든 친미적이라는 사실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앞서 언급한 전자의 축에 대한 이야기들을 상세히 설명하는데 영화가 상당히 공을 들이는 반면에 후자의 축이 지니고 있었을, 전쟁 이전의 그들의 서사가 거의 언급되지 않고 그저 전쟁광으로만 표현되었다는 점에선 약간의 불 균질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불만은 아주 작은 불만이니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적어도 이스트우드가 완전히 일본적인 인물이 미국에 대한 경도 없이 스스로 공동체의 서늘함을 깨닫고 올라서는 영화를 만들어 주었다면 어땠을 까 하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 그렇게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 아버지의 깃발로 이어지는 이스트우드의 질문은 전쟁 영화가 닿을 수 있는 어떤 다른 지점을 보여주었다. 이오지마의 연작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이오지마는 결국 개인으로 수렴하는데 실패했다. 공동체(일본)를 위한 공동체(이오지마), 그리고 그 공동체를 위한 공동체(이오지마의 일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