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시르와 왈츠를 - ‘기억하는 것’과 ‘기억해야만 하는 것’ 사이에서
- 바시르와 왈츠를
- 감독
- http://static.se2.naver.com/static/img/dbattach/bg_line_bar2.gif") no-repeat right 0px; margin: 0px; padding: 0px 4px 0px 0px; display: inline;">아리 폴만
- 개봉
- 2008 이스라엘, 독일, 프랑스
좋은 영화는 주장하지 않는다. 어떤 옳은 주장이라도 영화가 먼저 소리 높여 외치며 여기를 따르라고 말하는 순간 궁극적으로 그 영화는 안 좋은 작품이 될 개연성이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대신, 좋은 영화는 보여준다. 그저 보여준다. 있는 그대로의 날 것이든 영화적으로 가공된 시각화의 결과물이든 그냥 스크린 위에 펼쳐놓은 채 한 번 보기만 하라고 넌지시 비출 때, 그리고 관객이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는 그 영화를 보고 무언가를 주장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나는 진정으로 신비한 순간이 온다고 믿는다. <바시르와 왈츠를>은 그런 영화였다. 전쟁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단 한 마디의 대사에서도 평화와 반전의 메시지는 들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시종일관 ‘기억’에 관한 문제를 잠입시키며 전쟁과 무관한 어떤 지점을 건드리는 것 같았다. 예를 들면 기억하는 것과 기억해야만 하는 것 사이에서 부유하는 우리들.
<바시르와 왈츠를>은 반복되는 악몽에 시달리는 친구의 고민을 들은 영화감독이 20년 전 자신과 레바논 전에 관해 이야기해줄 사람들을 찾아가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여러 명에 의해 복기되는 전쟁에 관한 기억들을 다룬다. 애초에 악몽에 시달리는 친구의 이야기는 극을 열기 위해 이용한 설정이 아닌가 생각될 만큼 영화는 애초의 고민에는 무심한 채 기억의 파편들을 차근차근 모아가며 20년 전의 레바논을 구성해 나간다. 여기서 주의할 점. 화면의 모든 이미지들은 지금 펼쳐지고 있는 오늘날의 전쟁이 아니다. 전쟁의 이미지들은 철저히 20년 이라는 간격을 두고 펼쳐진다. 예를 들어 <라이온 일병 구하기>의 오프닝, 노르망디 상륙 시퀀스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그 장면을 어느 때에 보든 장면의 시제는 바로 그때 1945년의 어느 날이다. 영화가 현재로서 가지고 있는 시간 또한 1945년의 어느 날 이다. 언제 어디서 <라이온 일병 구하기>를 다시 보아도 화면과 이미지 사이의 시제는 일치한다. 그러나 <바시르와 왈츠를>에서 설정된 이미지와 그 이미지를 회고하는 이미지 사이에 명시된 20년 이라는 간극은 영화를 완전히 다시 찍지 않는 한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이러한 회고적 설정은 얼핏 흔해 보이지만 궁금증을 부른다. <바시르와 왈츠를>이 전쟁을 통해 말하고 싶은 건 무엇일까. 다시 한 번 관심을 끄는 것은 스크린 위 우리가 보는 레바논 전은 현재 시제에서 펼쳐지고 있는 전쟁이 아니라 개개인의 기억에 따라 다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라는 점. 영화에서 중요하게 설정된 ‘20년 뒤의 복기’라는 틀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표출을 바탕으로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과 ‘기억해야만 하는 것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거시적인 (혹은 때때로 미시적인) 비극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핵심적인 설정은 아닐까.
기억은 어느 순간 자기 확신의 문제로 치환된다. 대사를 통해 제시되는, 때때로 강조되며 그래야만 응당한 명제. ‘너도 그때 거기 함께 있었어.’ 영화의 오프닝에서 개에 쫒기는 악몽을 꾸던 남자가 감독을 찾아간 이유를 생각해 보자. 감독은 남자가 꿈의 근원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레바논 전 당시 그와 함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어도 그 때 그 ‘기억’을 같이 했던 감독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란 믿음이 극을 출발시킨다. 그 이후로 펼쳐지는 내용 역시-러닝 타임 내내 극을 지배하는 주된 정서적 동인은 전쟁이지만-감독이 남자로 인해 불현 듯 살아 돌아온, 20년 동안 잊고 산 자신의 19세를 온전한 기억으로 되돌리기 위해 그 때 자신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을 찾아나서는 ‘함께 있음’의 기록이다. 이렇듯 <바시르와 왈츠를>은 기억하는 것과 기억해야만 하는 것 사이에서 부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레바논 전이라는 테마는 그 비극을 가장 극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발현이다. 그러나 극 중의 인물들 중 기억의 문제로 고민을 겪는 사람은 기껏해야 감독과 개의 악몽을 꾸는 그의 친구 정도로 보인다. 나머지 사람들, 인터뷰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은 거침없이 자신의 기억에 따라 그 때 그 곳에서 있었던 일을 회고한다. 조금의 의문도 없이 인터뷰이들이 풀어놓는 20년 전 레바논에 대한 증언이 극에 쌓여간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자기 확신이 필요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보이는 지점이 있다. 그리고 자기 확신의 문제는 앞서 언급한 ‘기억’의 문제와 멀리 동떨어져 있지 않다.
기억은 자기 확신을 먹고 자란다.
이상하게도 악몽을 꾼 남자는 오랜 세월 기억에서 지워 냈던 전쟁을 감독의 머릿속에 다시 불러내고는 그 이후로 영영 등장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않음으로서 안정된 과거를 살아가던 감독의 현재에 생긴 급작스러운 균열. 기억해야만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이지만 아무 것도 떠올릴 수 없던 그는 어떻게든 기억을 먹어야만 했고 <바시르와 왈츠를>은 분명 그가 원하던 기억을 다시 쌓아올리는 작업으로도 보인다. 감독이 찾아간 인터뷰이들이 한 결 같이 단호하고 분명한 어조로 끊임없이 ‘그 때 나는 거기에 있었어요.’, 혹은 ‘그 때 당신도 나와 있었으니까요.’를 되새기며 확고한 이미지들로 전쟁의 그 날을 풀어놓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남자가 원하던 기억은 불 균질하게 흔들리며 무너져 내리는 희미한 기억이 아니었다. 그는 추호의 여지도 없이 자신과 함께 있었고 그 중에서도 분명한 자기 확신의 증언을 해줄 사람들만을 찾아간 것은 아닐까. 그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잊고 지내다가 한순간 나타남으로서 역설적으로 부서져 내린 자신의 20년 전 19살 때를 분명하게 복구시켜 줄 수 있는 기억이었다. 그렇게 기억은 자기 확신을 먹고 자란다.
문득 드는 의문은 영화의 모든 이미지가 자기 확신의 그 것이었다면, 결국 후반부에서 언급되는 그 학살이 존재하기는 했던 것 일까. 아무도 직접 보지 못하고 그저 증언들로만, 유령 같은 목격담으로만 떠도는 학살. 영화의 마지막에서 모두가 있었다는 학살에 관해서 이야기하지만 단 한 명도 그 일을 직접 보았다는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망령처럼 떠다니며 입과 입으로, 모호한 기억으로 떠오르는 학살에 대한 언급에 영화가 집중할 때 나는 그 이야기가 마치 영화 전체에 관한 은유처럼 느껴졌다. <바시르와 왈츠를>은 얼결에 되살아온, 전쟁의 한 복판에 있었다는 자신의 불완전한 19세를 위해 자기 확신의 인터뷰를 떠난 한 감독의 이야기이고 이어지는 인터뷰의 증언들과 진짜 레바논의 실체 사이 존재하는 20년이라는 간극은 너무 깊고 아득하다. 본 사람은 없지만 있었다는 확신을 간직한 채 흘러 다니는 학살의 이야기는 아무도 정확하게 전쟁을 회고해 낼 수 는 없지만 각자의 기억(이라 불리는 믿음)에 따라 풀어놓는 레바논 전에 대한 은유처럼 보였다.
그렇게 알 수 없는 진실과 기억의 파편들만이 이리저리 떠돌며 방황하는 듯 보이던 영화는 마지막 몇 분을 남겨두고 완전히 새로운 경지로 날아오르는 감동을 보여준다. 여인들의 울음소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던 롱 테이크 직후 영화는 돌연 비상한다. 레바논 전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와 죽은 시체들의 실제 영상을 보여줌으로서 <바시르와 왈츠는>은 일순 스크린의 경계를 넘어 우리에게 온다. 시종 일관 전쟁의 복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던 영화는 사실 이 기억들이 영화 내부가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가 속한 세계의 문제라는 새삼스러운 진실을 깨우치게 한다. 그리고 ‘기억 해야만 하는 것’의 명제로 기울기는 이동한다. 우리는 애니메이션을 보았다. 아니, 우리는 실사를 보았다. 영화를 보며 어떤 이들은 망각하고 있었을 사실. 우리는 잘 만든 애니메이션 한 편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레 펼쳐지는 죽은 아이와 통곡하는 여인들의 실제 앞에서 <바시르와 왈츠를>은 단순한 관람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한다. 애니메이션 속 인물들의 전쟁이 (그 것도 기억 속에서 존재하던 전쟁) 갑자기 살아와 우리 앞에 나타나는 순간 영화는 묻고 우리는 답한다. 처참하게 죽어 쓰러진 어린 아이의 얼굴을 비추며 끝나는 마지막 장면 앞에서 <바시르와 왈츠를>은 아직도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을 거대한 기억놀음 의 복판에서 누가 아이의 죽음을 책임질 것이냐고 질문한다,
<바시르와 왈츠를>은 러닝 타임 내내 ‘우리는 전쟁을 기억한다.’의 이미지들 사이에서 천착하는 듯 보이다가 마지막 몇 분을 남기고 ‘우리는 전쟁을 기억해야만 한다.’의 테제로 옮겨간다. 수많은 전쟁영화가 있지만 <바시르와 왈츠를>은 유난히 특별하다. 레바논 전이, 세상의 모든 전쟁이, 일상의 모든 미시적인 비극이 하는 기억과 해야 하는 기억 사이에서 불현 듯 무너져 내리며 갈 곳을 잃었다. <바시르와 왈츠는>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무시해오던 그 간극이 어느 순간 인지 되었을 때의 당혹감과 그 것을 이겨내기 위한 확신을 찾아 떠나는 어느 감독의 이야기이다. 그렇게, 좋은 영화는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