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이 책임져야 할 것은 ‘사회’인가 ‘영화’인가?
『영화평론』 29호의 기획특집은 이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영화는 사회적 메시지의 효과적인 창구이다. 그것으로 우리가 속한 사회가 진일보한다면 분명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메시지에 부합하는 영화 스타일에 동반될 때 힘을 발휘한다. 최근 사회적 이슈를 전면에서 다루는 한국영화는 메시지와 스타일 사이의 심각한 불균형이 보인다. 정의로운 구호가 퇴행적인 영화문법으로 재현되거나, 시대의 시급함 때문에 영화적 만듦새를 방치하는 이러한 경향을 ‘메시지와 스타일의 간극’으로 명명하고 극영화와 영화산업의 맥락에서 깊이 있는 논의를 펼치고자 했다.
기획특집: ‘메시지’와 ‘스타일’의 간극, 극영화
<귀향>의 현상과 담론
-소재주의, 민족주의, 마케팅에 연루된 비평
윤성은(영화평론가)
1. 비평의 죽음과 직무유기
비평의 정체성과 비평가의 책무라는 거창한 주제를 처음 떠올리게 만든 것은 올 2월 말에 개봉한 한 편의 영화, 아니 정확히는 그 영화를 위시한 일군의 현상이었다. 일본군 위안부의 실화를 다룬 조정래 감독의 <귀향>(2015)은 투박한 연출에도 불구하고 약 35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영화계를 넘어 사회적 이슈를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의 결핍을 단순 지적하는 데는 짧은 리뷰 한 편이면 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시피 주제와 분량이 비대해진 까닭은 필자를 자극한 문제의 핵심이 <귀향> 자체가 아닌 담론에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역사 내내 대중들은 미학적 가치 혹은 완성도와 그 어떤 함수 관계도 맺지 않고 행동해 왔다. 그러므로 작품성이 낮은 영화라고 해서 수백만 명의 관객을 모으지 말란 법은 없으며 그런 결과에 놀랄 이유도 없다. 이 글에서도 흥행의 음영(陰影)에 대해 다루게 되겠지만, 한국영화계의 ‘소재주의’ 바람을 언급하기 위한 것이며 대중들의 선택을 탓하거나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비평가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 라는 질문은 전문가들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하는 것일 뿐 비난을 목적으로 대중들에게 반사해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평의 기준 혹은 토대까지 흔들리는 것을 목도할 수만은 없다. 필자가 한 편의 영화와 그 현상으로부터 비평의 정체성까지 운운하게 된 것은 이 테제에 대한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비평가의 존재의미와 책무도 여기에 맞물려 있다. 안타깝게도 현재 우리에게 이런 단어들은 당혹스럽게 느껴진다. 그것은 2000년대 이후 영화 비평가들 스스로 ‘비평의 죽음’과 ‘평론가의 종말’이라는 말을 남용하며 ‘취향존중’의 시대를 배려하려 애쓰는 동안 이 문제에 대해 심도 있는 담론을 내놓지도, 진지하게 대응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2000년대에 들어와 파워 블로거들이 생겨나고 이후 파워 트위터리언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분명 디지털 시대로의 전환이 이전과 다른 메커니즘을 통해 권력을 창출한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그러한 흐름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거기에 부적응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정성일의 말대로 평론가의 종말이 기능적인 부고장이라면 그 책임은 궁극적으로 비평의 죽음을 초래한 비평의 주체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대중매체라는 영화의 속성이나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그 다음에 고려해 볼 문제다.
여기서 <귀향>의 현상을 끼워 넣어 보자. 필자에게 각인되었던 것은 이 영화를 (한국인이라면) ‘꼭 봐야 할 영화’로 규정하는 사회적 움직임이나 블로거들의 감상문이 아니라 여기에 침묵하거나 심지어 동조하는 영화 비평가들의 태도였다. 350만 명이 본 영화에 본격적인 비평을 찾기 어렵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씨네 21》, 《매거진 M》의 영화전문잡지들도 대부분 <귀향>의 험난했던 제작기나 감독 인터뷰, 흥행에 대한 기사만 내보냈을 뿐 영화평론가의 비평은 싣지 않았다. 문화평론가 손희정이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귀향>의 폭력성과 재현의 문제를 다룬 것이 그나마 개봉 당시에 가해졌던 일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귀향>의 완성도를 문제 삼은 글들은 영화가 극장에서 내려간 후에나 등장했는데 그것도 저널리즘을 통한 단편적이고 단발적인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의가 왜 제 때 나오지 못했는가를 물어야 할 차례다. 개봉 당시의 평가들, “이 영화(<귀향>)가 화제작이 된 이유는...(중략)...영화 미학의 요소와 예술적 가치가 충분히 투영 되어 있기 때문에 주목을 받고 있는 셈이다.” 과 같은 문장에 동의하지 못한다면 말이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을 설명하자면 ‘소재주의’와 ‘민족주의’, ‘역사주의 비평’ 등을 끌어들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개봉 당시 <귀향>에 대한 본격 비평이 부재했다는 사실, 그것이 우리 시대 ‘비평의 죽음’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는 사실만 기억하자. 그러므로 평론가가 종말을 맞이한 것은 지면이 부재하거나 영화의 대중매체적 성격이 파워 블로거들을 양성했기 때문이 아니라 적시에 적절한 비평을 내놓는 본연의 기능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의혹에 힘이 실린다.
<귀향>이 공공연히 하나의 사례가 될 가능성을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대상이 독립영화든 뭐든, 제작의도의 진정성이 비평의 기준이 될까 두렵고 침묵이 비판을 대신한 제스처가 될까 조바심이 난다. 어느 순간 대의(大義)를 지향하는 다큐멘터리들에 엄격한 미학적 잣대를 들이대기를 포기한 것처럼, 극영화도 점점 모래처럼 평론가들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버릴지 모른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귀향>을 위시한 허실을 다루고 있지만 필자는 이것이 곧 이 시대 비평가 및 평론의 문제와 맞물려 있다고 생각한다. 서두에 오히려 후자를 집중적으로 언급한 것은 영화 한 두 편을 비판적으로 리뷰하는 것 보다 이것이 더 근본적이고 시급한 문제라는 판단에서다.
2. 소재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마케팅
<귀향>의 흥행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사용하는 대표적인 용어는 소재주의와 민족주의(nationalism)다. ‘소재주의’ 혹은 ‘소재주의 비평’은 일찍이 김시무가 지적한 대로 수사학적인 용어에 불과하다. 그러나 편의상 이 용어를 계속 사용하기 위해 잠정적으로나마 개념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소재주의’는 다른 문화 예술계에서도 사용하는 용어이므로 참고하자면 ‘하나의 소재를 그대로 답습하여 형상화하는’, 좀 더 풀어 말하면 ‘소재가 주는 재미에 집착하는’ 경향을 일컫는다. 맥락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편이다.
<귀향>의 소재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으로부터 강제로, 혹은 속아서 끌려간 뒤 ‘위안부’라는 이름하에 인생을 유린당한 여성들의 실화다. 위안부 문제를 다룬 변영주의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는 1995년 개봉된 이후 여성영화로서나 역사의식을 보여준 영화로서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가 20년 넘게 빈번히 언급되어 오고 있다는 사실은 해결되지 못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유감, 그리고 영화의 희소성 등을 반영한다. 여기에는 아직 생존하고 있는 피해자들이 경험했던 성적 폭력을 영화로 표현하기에 까다롭다는 점 뿐 아니라 상업적 타진이나 정치적 민감성 등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귀향>의 개봉은 충분히 이슈화 될 만하며, 만든 사람들의 순수한 의도를 왜곡시키거나 부정적 어감의 ‘소재주의’ 영화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귀향>의 눈물 나는 제작기가 홍보 마케팅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과정은 오히려 그 진정성과 의미를 퇴색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영화 소개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14년간의 제작기’라는 문구는 조정래 감독이 피해자 ‘강일출’ 할머니의 그림, ‘태워지는 처녀’들을 보았던 2001년부터 제작기간에 포함시킨 것이다. 그는 물론 이 기간 동안 시나리오를 쓰고 고치기를 반복하며 투자자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구상 단계에서부터 포스트 프로덕션을 마칠 때까지를 제작기간으로 계산한다면 독립영화는 물론이요 상업영화들 중에서도 다수의 작품들이 십 수 년의 험난한 시간을 버텨야 했다고 홍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귀향>은 클라우드 펀딩을 받아 제작되고 배급사를 찾는데 난항을 겪었다는 점에서 독립 영화로 편입될 수는 있으나 24억 원의 예산이 투여된 바, 저예산 영화로 구분 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5,270명이 참여한 ‘클라우드 펀딩’ 방식은 ‘저예산 영화’라는 단어와 결합하여 영화의 만듦새에 면죄부를 주고 관객을 끌어들였다. <귀향>의 홍보 전략은 간단히 ‘관객들이 만들어낸 가난한 영화의 신화’로 요약된다. ‘소재주의’와 ‘민족주의’는 이 지점에서 끼어든다. ‘소재의 가치’가 충분한데 14년간을 묵혀야 했고 수 만 명의 지원이 필요했을 만큼 어렵게 제작, 개봉한 영화이므로 ‘한국인이라면 꼭 봐야한다’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정치 공동체 단위인 민족을 구성하고 통합하며 민족 단위의 국가 형성을 위한 이데올로기이자 운동’으로 정의할 수 있다. 계급사회였던 조선시대 말기, 아래로부터의 민족주의와 위로부터의 민족주의가 ‘독립’이라는 목표를 향해 통합된 시점을 3.1 운동으로 본다면 <귀향>의 관람 여부는 그 시비를 가릴 수 있는 것이 된다. 공교롭게도, 2015년 12월 28일 발표된 박근혜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관련 한국-일본 정부 합의가 영화 관람의 당위성을 더욱 높여주었는데, 이것은 소재주의 보다는 민족주의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나 소재주의든 민족주의든 그 자체만으로는 이 영화의 미학적 가치에 대한 침묵을 견인할 수 없었다. <연평해전>(김학순, 2015), <인천상륙작전>(이재한, 2016), <덕혜옹주>(허진호, 2016) 등도 유사한 의혹을 받았으나 <귀향>과 차이가 있다면 개봉 당시에도 스타일에 대한 비평가의 혹평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작금의 비평가들에게 위안부 문제가 남북 관계나 마지막 황녀의 인생보다 시의적으로 더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다른 작품들과의 가장 확실한 차이점을 기준으로 감히 말하자면 클라우드 펀딩으로 만들어진 독립영화라는 이 영화의 태생, 그리고 ‘저예산 영화’라는 심증 혹은 마케팅이 혹평의 방패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고서야 <암살>(최동훈, 2015)이나 <밀정>(김지운, 2016)도 맞아야 했던 화살을 피할 묘수가 있었을까. 본고가 <귀향>의 비평을 문제 삼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도 이 지점 때문이다.
논점은 한 바퀴 돌아 <귀향>의 홍보 전략이 진정성을 퇴색시킨데 이어 비평에도 걸림돌이 되었다는 데로 나아간다. 소재주의라는 비판은 섣부른 매도이고 민족주의는 강요당한 게 아니라 관객들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 하자. 그러나 <귀향>이 시장에 나와 상품으로 포장되는 과정에서 독립영화에 대한 비평가들의 애정이 악용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확신하건데 ‘독립영화’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대중들보다 비평가들이다. 편들어주고 싶은 사심이 작동한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이 마케팅에 이용되었다. 다음과 같은 정성일의 말은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우리들과 영화 사이에 홍보 마케팅의 전술이 끼어들었다. 나는 이 전술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그들의 계산 안에 포함되어 있고 종종 우리들은 동원되었다.”
3. 이데올로기 비평을 벗어난 <귀향>
순서가 틀렸는지 모른다. <귀향>이 어떤 면에서 좋은 평가를 내리기 어려운 작품인지 먼저 말하고 그것을 전제로 잘못을 따져야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 논지의 중요도를 고려한 결정이다. 또한 한 작품의 구체적인 결점들을 나열함으로써 글을 시작하는 것은 산뜻하지 못하다는 판단도 있었다. 필자는 그 작업의 산만함과 쩨쩨함을 모두 이 곳으로 미뤄뒀으나 이제는 해야만 한다.
개봉 당시 <귀향>의 비평을 주도했던 것은 이데올로기적 관점이다. 이데올로기 비평은 영화에 내재된 가치체계, 일관된 사상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며 앞서 살펴 본 바 <귀향>에는 민족주의와 페미니즘 등이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데올로기 비평은 콘텍스트 비평과 달리 형식적 측면을 포괄하는 방법론이지만 내러티브 분석이나 전반적인 미학을 평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귀향>의 경우처럼 제작 의도 및 역사적 의미에 무게가 많이 실리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텍스트에 집중하면 평가는 달라진다. 먼저, 내러티브와 캐릭터 부분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해원(解冤)’의 모티브를 갖고 있다. 현재의 인물들이 과거의 인물과 사건을 소환해 한을 풀어주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으로 무당과 굿을 이용하는 것은 지나치게 일차원적이고 전통적인 방식, 즉 클리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서사의 단순함은 허술함으로 연결된다. 과거 위안부로 끌려간 소녀 ‘정민’은 현재를 살아가는 ‘은경’에게 빙의되는데 여기에 서사적 고리가 빈약하다. 영화는 ‘성폭행’과 ‘죽음’(아버지/조국)이라는 공통된 경험이 두 사람을 이어주고 해원을 성취한다는 식으로 몰고 가지만, 이는 비논리적이다. 은경의 트라우마가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민이 그녀의 몸에 들어와 옛 동무(영옥)를 위로하고 (나비가 되어) 스스로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영옥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정민의 넋을 기림으로써 해원이 이루어지고 두 사람이 해후하게 되는 것이 바른 순서다. ‘나비’나 ‘괴불노리개’ 같은 오브제들 또한 진부하게 소비되고 말지만 서사 전반의 문제에 비하면 작은 결점이다.
지나친 감상성은 <귀향>만의 문제점은 아니다. 최근 한국 상업영화들은 종종 절제를 잃고 퇴행한다. 다들 그런다고 해서 용인할 수는 없다. 특히, 가해자인 일본군과 피해자인 소녀들을 묘사하는 방식에서의 과도한 설정, 혹은 극단적인 표현은 오히려 위안부 문제를 국가와 국가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수치심과 고통으로 평면화 시킬 수 있다. 관객들에게 제국주의의 폭력에 대한 자각과 분노 보다 피해자들에 대한 연민과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영화의 기획의도와도 맞지 않는 일일 것이다.
형식주의적으로 접근하면 영화는 더욱 실망스럽다. 우선, 영화미학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미장센에서 이 작품은 미덕을 찾기 어렵다. 인물 위주의 촬영이 계속되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의 숫자에 따라 샷의 사이즈가 결정된다. 그렇게 단조로운 영상들만이 127분의 러닝 타임을 채운다. 영화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촬영은 위안소의 내부를 직부감으로 잡아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겁간의 끔찍한 폭력성을 묘사한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스타일리쉬 하게 촬영된 이 장면이 개봉 당시부터 시선의 난폭함을 들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의도와 평가가 어긋난 경우다.
위안소의 실내 조명은 부러 표현주의적으로 연출했다고 보기엔 일관성이 없다. 극단적인 음영의 대비가 일본군을 악마로 형상화해내기도 하지만 몇몇 장면에서는 그저 조명을 잘못 사용함으로써 생기는 그림자를 그대로 방치해둔 느낌이 강하다. 영화적 리얼리티가 가장 살아있어야 하는 장면들이 연극적으로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두 번 등장하는 전투신은 이 영화를 저예산 영화로 오해하게 만드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특히, 첫 번째 전투신은 거의 풀 샷으로 촬영되고 편집의 기교도 없어서 긴박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항일군이 일본군에게 무기력하게 패배한다는 사실만 겨우 전달할 뿐이다.
‘웰 메이드’ 영화에 빠져서는 안될 요소는 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다. <귀향>에는 중견 배우들 외에 새로운 얼굴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 중, 은경역은 신인배우 ‘최리’가 분했는데 그녀의 어색한 연기는 극의 흐름을 자주 끊어 놓는다. 접신하는 무당역을 맡기에 미숙한 연기력을 편집과 촬영으로 극복하려 한 시도가 눈에 띄나 결과적으로 어설픈 장면들이 되고 말았다. 음악은 충실하게 신파의 관습을 따라간다. ‘아리랑’, ‘가시리잇고’ 등의 음악은 극의 요소요소에 사용되어 민족주의적 감성을 자극한다. 효과 자체는 나쁘지 않으나 기술적인 부분에서 세련미가 떨어진다. 특히, 평양 기생이었던 소녀가 ‘가시리잇고’를 부를 때는 녹음된 노래가 공간감 없이 부자연스럽게 입혀져 듣기 거북하다. 이 장면에서는 노래 부르는 소녀의 얼굴이 화면 안에 들어오는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는 등 촬영에서도 실수가 보이는데 컴퓨터 그래픽처럼 비용이 많이 드는 작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좀 더 세심하게 신경 쓰지 못한 부분들이 아쉽다.
기본적으로 영화의 형식적 완성도는 제작비와 무관하지 않다. 많은 제작비가 들어간 작품에 대한 기대치는 응당 높아야 한다. 그러나 24억 원이 투입된 작품은 물론이요, 초저예산 영화라도 ‘영화적 표현과 성취’에 대해 무심해서는 안 되며 이러한 요소가 평가에서 제외되어서도 안 된다. 소재주의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이 시점에 ‘작품성과는 별개로’ 라는 문구가 평론가들 사이에서까지 남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발터 벤야민이 말한 것처럼 ‘형식’은 내용을 포장하는 감각적 외투가 아니라 내용을 이루는 요소들의 특정한 배치이며 배열이기에 비평의 영역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이 부분이야 말로 영화의 객관적인 지표가 될 요소이며 영화 전문가들의 영역이다. 해석(interpretation), 감상(Appreciation), 평가(Evaluation)의 단계를 거친 성실한 비평이 필요하다.
4. 침묵과 동원에 저항하는 연대를 위하여
자각 다음은 실천이다. 2016년 봄, 문학 비평가들은 『문학동네』 및 『문화/과학』 등의 계간지에서 ‘비평’을 화두로 삼아 향후 비평가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논의했다. 특히, 『문화/과학』 85호에서는 ‘비평전쟁’이라는 특집을 앞세워 비평이 처해 있는 위기 상황을 진단하고 이를 타계해 나가기 위해 ‘비평에 대한 비평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동연은 「비평전쟁 시대의 메타비평 메뉴페스토」 라는 글을 통해 현재 비평의 위치를 재정립할 것을 촉구하면서 비평이 새로운 대안적 장을 형성하기 위해 상실된 비판을 복원해야 하며 새로운 비평의 위상과 역할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오혜진은 비평의 권위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계몽주의적 프레임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독자론을 구성하고 젊은 작가와 비평가들이 한국 문학 장에서 시도하는 새로운 실천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그간의 소위 주례사 비평에 대해 반성하면서 메타 비평 등을 통해 스스로 엄격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독자들의 관심과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 모색했다.
영화평론가들이 지향해야 나가야 할 방향성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개론서의 맨 앞 장으로 돌아가 비평이란 무엇이며 비평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 다시금 정리해야 할 것이고, 어쩌면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다음 챕터를 써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평론계로부터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담론의 장을 형성함으로써 함께 위기를 해쳐나가려 한다는 점이다. 영화 비평계도 더 이상 상상의 공동체로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며 연대를 통해 침묵과 동원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더 이상 한국영화계의 소재주의 및 민족주의, 이와 얼버무려진 마케팅에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