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이 책임져야 할 것은 ‘사회’인가 ‘영화’인가?『영화평론』 29호의 기획특집은 이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영화는 사회적 메시지의 효과적인 창구이다. 그것으로 우리가 속한 사회가 진일보한다면 분명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메시지에 부합하는 영화 스타일에 동반될 때 힘을 발휘한다. 최근 사회적 이슈를 전면에서 다루는 한국영화는 메시지와 스타일 사이의 심각한 불균형이 보인다. 정의로운 구호가 퇴행적인 영화문법으로 재현되거나, 시대의 시급함 때문에 영화적 만듦새를 방치하는 이러한 경향을 ‘메시지와 스타일의 간극’으로 명명하고 극영화와 영화산업의 맥락에서 깊이 있는 논의를 펼치고자 했다.
기획특집: 대의와 스타일의 간극, 영화산업
사회성의 기획, 한국영화산업 발전을 보장하는가?
양 경 미(영화평론가)
1. 들어가는 말
한국 영화산업은 199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다. 해마다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블록버스트 영화와 300만 이상 관객을 동원하는 저예산 영화들도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관객 수의 증가로 한국 영화점유율은 50%를 기록했다. 2015년 영화산업 매출은 2년 연속 2조원을 기록했으며 관객 수는 3년 연속 2억 명을 돌파했다. 또한 인구 1인당 연간 평균 관람횟수는 세계 최고 수준인 4.22회를 기록했다. 1년 동안 국내 극장을 통해 상영되는 작품 수도 약 1,500편에 달하며 그중에서 한국영화는 약 230편이 개봉되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한국 영화시장이 이미 성숙기에 접어들어 성장의 한계를 넘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영화의 제작편수가 증가하고 관객 수도 늘어나고 있지만 과거 한국영화 성장기의 작품에 비해 완성도와 예술성은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한국 영화산업의 경쟁력과 성장 한계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특히 기획영화는 작품성을 등한시 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관객동원에 성공한 영화들을 보면 대부분 투자배급사 주도에 의해 기획된 영화가 대부분이다. 기획영화는 감독의 개인적인 취향 혹은 스타일보다 영화 기획을 주도하는 투자배급사의 상업적인 의도가 우선인 경우가 많다. 혼란한 사회를 고발해서 관객의 호응을 얻으려는 사회고발 영화도 있으며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정부지원에 의해 기획된 영화도 있다.
사회현실을 담고,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영화들은 관객들의 열띤 지지와 큰 호응 불러일으키고 있다. 저예산 독립영화에서부터 블록버스터 상업영화까지 소재와 장르도 다양하다. 더욱이 이러한 영화들은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 있어 더 큰 공감대를 형성하며 자연스럽게 관객몰이로 연결됐다. <변호인>과 <베테랑>, <암살> 그리고 <국제시장>은 천만관객을 동원했고 저예산 독립영화 <귀향>은 350만 명을 모았으며 <다이빙벨>, <천안함 프로젝트>도 큰 화제를 모았다.
천만관객 시대에 과연, 한국 영화산업은 발전하고 있는 것일까? 한국 영화의 흥행성공과 영화산업의 발전의 관계를 점검하는 것은 향후 우리 영화산업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중요하다. 본 분석에서는 영화산업의 측면에서 볼 때, 이러한 흥행영화들이 앞으로 우리 산업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지를 고찰하였다. 특히 기획영화의 경우 흥행의 성공이 한국영화의 발전을 보장하는지를 분석하였다.
2. 기획영화의 흥행시대
기획영화는 감독의 고유한 스타일이나 주제 의식이 아니라 제작자, 기획자의 아이디어가 중심이 되는 영화를 말한다. 당대를 풍미하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인 트렌드나 기념할 만한 사건, 주제 의식에 따라 좌우되는 경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기획영화라는 용어에는 감독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스타일보다 기획자의 상업적 혹은 정치적 의도에서 출발한 상품이라는 뉘앙스가 강하다. 하지만 비록 기획자에 의도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기획영화의 본령은 시대와 관객을 읽어내는 기획자의 눈과 감독의 창작 능력이 만났을 때 성공을 거둘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시작된 기획 영화는 그동안 개념뿐이었던 ‘기획’ 즉 산발적인 시장조사와 막연한 추측과 운에 맡긴 주먹구구식 제작방식에서 탈피하여 현 시대를 읽어내고 관객과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다. 제작과 기획이 분리되면서 본격적인 프로듀서 시스템이 정착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전문 프로듀서는 아이디어를 발굴한 후, 그에 맞는 시나리오 작가를 고용해 프리 프로덕션 단계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1995년부터 한국 영화계에 벤처 캐피털의 한 형태인 창업투자회사의 자본이 들어오면서 한국 영화계는 산업적으로 좀 더 탄탄한 기반을 마련한다. 이로 인해 한국 기획 영화는 점점 더 영역을 확장하고 새로운 시도를 통해 꾸준히 관객들과 호흡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기획영화가 제작되는 배경은 1988년 UIP의 영화 <위험한 정사>가 처음으로 직접 배급(이하, 직배)을 시작한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부터 한국 영화계는 미국 직배사의 영화들로 채워졌다. 갑자기 할리우드 영화와 경쟁 관계에 놓인 한국 영화계는 젊은 영화제작자들을 중심으로 철저한 시장성과 사회문화적인 트렌드 분석에 맞춰 계획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국내 기획영화의 시초가 되었다. 1990년대 시작된 새로운 변화의 중심에는 신씨네, 명필름, 우노필름, 시네마서비스 등 참신한 아이디어와 기획개발 역량이 탁월한 신생 제작사들이 있었다.
신씨네는 1996년 영화 <은행나무 침대>로 성공을 거둔 뒤, <편지>, <약속>과 같은 다소 복고적이기만 뛰어난 기획력으로 흥행에 성공시킨다. 2001년에는 <엽기적인 그녀>를 발표해 다시 한 번, 기획력을 입증시켰다. 반면, 명필름은 안정적이고 짜임새 있는 기획을 통해 일정한 수준의 완성도를 갖춘 영화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한다. 특히 그 시대의 트렌드와 정서를 정확하게 꿰뚫어 제작한 새로운 멜로영화 <접속>(1997)과 남북문제를 미스터리와 휴먼 드라마로 엮어낸 <공동경비구역 JSA>를 2000년에 내놓았다. 또한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은 코믹잔혹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냈고 흥행 성공시키면서 뛰어난 기획력을 선보였다.
2010년대에 들면서 가장 많이 기획되고 있는 영화들은 사회비판적인 영화다. 과거에는 ‘사회성’을 지닌 영화는 흥행에 불리하다는 것이 충무로의 오랜 인식이었다. 그러나 편견을 깬 영화는 바로 <도가니>(2011)였다. 청각장애인학교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을 영화화한 <도가니>가 466만 명의 관객을 모은 데 흥행 성공했고 이어 석궁 테러 사건을 통해 사법부의 문제를 꼬집는 <부러진 화살>(2012)이 346만 명을 기록하면서 사회성을 지닌 영화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지기 시작했다.
2013년 개봉한 영화 <변호인>은 한국 영화계 큰 기록으로 남을 작품이다. 사회비판적인 영화가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폭발적인 관객 수를 기록한 영화는 이때부터 ‘사회성’이 흥행을 위한 필수 요소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변호인>이 성공한 이후, <베테랑>과 <내부자들>을 통해 사회성 짙은 소재들의 영화가 관객몰이를 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주목할 사실은 사회성 짙은 사회비판이라는 테마에 장르를 결합한 시도, 즉 기획화의 결과라는 점이다. 법정드라마, 액션영화, 범죄영화라는 장르와 관객들이 갈급하고 있었던 사회악의 척결은 흥행으로 이어졌다.
사회성과 장르적 요소가 결합한 경향은 2016년 한국형 재난영화 <부산행>과 <터널>로 이어졌다. 연상호 감독은 첫 극영화 <부산행>을 통해 천만관객 동원한 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두 영화 모두 ‘시스템의 부재’라는 주제로 기획된 영화다. 올겨울 영화 <판도라>가 그 뒤를 이을 예정이다. 지진으로 인해 원자력 폭발 사고를 그린 재난영화다.
사회성을 부각한 영화는 그동안 민감했던 문제로 취급했던 소재를 수면위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한일 관계가 고조되던 시기, 일제강점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일제강점기 영화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2015년 최동훈 감독은 <암살>로 천만 관객을 동원시키며 충무로에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면 망한다.’라는 징크스를 깼다. <덕혜옹주>를 비롯해 저예산 독립영화에서도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기획한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저예산 독립영화 <귀향>은 360만 관객을, 제작비 5억 원의 <동주>도 100만 명을 넘겼다.
정치물이 기획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기획영화는 기획단계부터 관객의 요구에 맞게 영화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것이다. 현 시대를 분석하고 지금 이 시기 관객들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정치, 사회, 경제적인 분석을 통해 영화를 만들어낸다. 정권이 교체되는 시기 또는 정권이 교체된 후, 그 정권에 부합하는 영화를 만들기도 한다.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2012년 <광해, 왕이 된 남자>와 2013년 <변호인>이 개봉되었다. 두 영화 모두 노무전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했다. 정권이 바뀔 때 즈음해 기획했던 영화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서 영화는 애국을 강조하는 영화가 기획되기 시작했다. <명량>과 <국제시장>은 대표적인 애국영화로 이름을 올렸다. 두 작품 모두 천만 관객을 동원한 작품이다. 또한 <연평해전>과 <인천상륙작전>도 작품성 논란을 빚으며 각 600만, 700만 관객을 동원했다.
3. 흥행영화가 한국영화산업에 미친 영향
1990년대 이후 젊은 세대의 영화전문인력이 기획영화를 만들면서 전반적으로 침체되어 있던 한국 영화산업은 흥행에 성공하면서 큰 활기를 띠게 되었다. 또한 영화제작 현장 전반에 걸쳐 전문화 및 분업화된 체계를 확립하는 데에 중요한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이를 토대로 영화제작 투자가 더욱 더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장르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영화들이 관객들에게 소개되면서 양적, 질적 발전을 모두 이루어냈다. 그러나 보완해야 할 점 또한 많다. 한국영화산업 발전을 위해 흥행영화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다.
1) 제작 및 배급구조의 왜곡
한국의 영화제작구조는 2000년대 들면서 큰 변화를 겪기 시작한다. 1990년대 중반에는 신씨네, 명필름, 우노필름, 시네마서비스 등 전문 프로듀서 중심의 기획영화 전성시대였다. 그러나 2000년대부터는 감독중심으로 기획과 개발의 주도권이 넘어가게 된다. 시나리오를 직접 쓰는 감독이 늘면서 한국 영화산업은 스타감독 중심 시스템으로 발달하게 된다. 예를 들면 박찬욱, 김지운, 곽경택, 봉준호, 강제규 등이 그렇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배용준, 전지현 등 한류 스타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배우와 매니지먼트사가 여기에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200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투자배급사와 프리랜서 프로듀서가 기획 개발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주도권이 투자사로 이동해 왔다.
한국 영화산업에서 투자회사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있다. 제작자가 선택한 감독보다 투자사가 선택한 감독의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투자사의 입지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투자배급사의 영화들은 유행을 따르며 상업적인 목적으로 영화제작을 기획한다. 대규모 자본을 투자하고 스크린을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CJ, 롯데, NEW, 쇼박스와 같은 대형 투자배급사는 예술영화와 중저예산의 스크린까지 독식하면서 스크린 독과점을 초래한다.
투자배급사가 주도하는 기획영화의 천만 관객 돌파 일수와 천만 관객을 동원할 때까지의 평균 좌석 점유율은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 천만 관객 수를 돌파하기까지 걸린 기간이 가장 짧은 영화는 <명량>으로 12일 동안의 평균 좌석 점유율은 67.2%에 달했다. <부산행>은 천만 관객을 모으는 데까지 19일이 걸렸고 그 기간 동안의 평균 좌석 점유율은 47.7%였다. 이렇게 천만 영화의 천만 관객 돌파 일수가 짧아지고 평균좌석 점유율이 높은 것이 스크린 독과점과 관련이 있다. 결국 스크린독과점으로 인해 높은 관객 수를 모을 수 있는 것이다. 기획 영화에서 투자배급사의 영향력이 높아진 결과다.
그런데 이러한 영화제작 구조는 문제가 있다. 영화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투자자와 제작자, 감독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해야 한다. 시나리오와 기획, 제작 그리고 감독과 연기는 모두 전문적인 분야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모든 것을 감독이나 배우가 담당할 경우 전문성이 떨어져 영화산업의 발전은 저해 받을 수 있다. 할리우드에서는 여전히 전문제작자 중심의 영화가 기획되고 있는 이유다. 또한 투자사 위주의 영화제작 구조는 중·저예산의 영화제작을 줄어들게 만든다. 스타 감독이 제작을 맡고, 투자사는 배급사를 선점하고 스크린을 독점하는 구조 하에서는 블록버스터 영화만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제작사의 역할이 줄어들면 이러한 악순환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영화산업의 전반적인 수익성 저하도 문제다. 한국영화시장은 대규모 영화위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매년 천만 관객을 동원한 한국영화가 나오지만 동시에 스타배우에 대한 비용 등 제작비용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그 결과 전체 한국영화 투자수익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비록 흥행에 성공한 몇몇 영화는 높은 수익률을 얻고 있지만 대부분의 영화는 수익률이 낮아지면서 과도한 제작비용은 한국영화산업의 발전의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2) 정치적 영화의 비용
영화가 지나치게 정치성을 띠는 것도 문제다. 영화산업에서 정치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영화는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가장 빠르고 그리고 작은 비용으로 여론과 국민들의 사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매체이라는 것을 인식한 정치인들은 영화를 정치적인 목적에 이용하려고 한다. 그러나 영화에 있어 지나치게 정치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면 그렇게 해서 시장논리를 우선한다면 이는 영화산업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
투자배급사 또한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있다. 영화의 정치적인 면을 이용해 흥행으로 연결시키려 하는 것이다. 기업은 정치적 이해집단으로 지배 권력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상호작용을 한다. 영화에 있어 정치적 영향력은 과거 반공영화 등에서도 있어왔지만 영화기업에서의 정치적 관계성은 최근에 들면서 크게 늘어나고 있다. CJ E&M은 2012년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배급한 뒤 2014년 <국제시장>을 제작하고 배급했다. 그리고 영화배급사인 NEW는 2013년 <변호인>을 배급한 뒤 2015년 <연평해전>의 배급을 맡았다. 이들 영화는 대부분 정치적인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영화기업에게 영화의 정치성이나 검열 등의 논란은 자본주의 체제의 시장논리에 의해 영화산업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동안 한국영화산업의 성공적인 발전 배경에는 영화 시장개방(1988년 직배 및 2006년 스크린쿼터제의 축소)에 따른 영화계 자생력과 정부의 검열폐지와 지원정책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도한 정치적 영향력 하에서 벗어나 한국영화산업의 생태계가 선순환적인 구조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주류 상업영화는 할리우드 영화에 대적하기 위해 자본력을 바탕으로 작품성과 흥행성을 겸비한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며 많은 관객을 동원시켰다. 소규모 독립예술영화에서는 주류 사회가 관심을 갖지 않는 다양한 사회적 측면을 부각시키며 작가주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여러 국내 국제영화제들은 한국에서 제작되는 다양한 영화들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는 데 힘을 쏟았다. 이러한 결과, 한국영화의 위상은 높아졌고 한국영화산업은 눈부신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제작을 주도하는 대기업이 정치적 영향력에 의해 영화를 제작, 기획할 경우 단기적으로는 흥행에 성공해서 영화산업 성장에 기여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작품성에서부터 흥행에 이르기 까지 한국영화 산업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러시아와 독일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에서는 모든 영화산업을 국유화하고 영화를 강력한 교육수단으로 삼았다. 레닌과 소비에트 정부를 거치는 동안 영화는 정치적 임무를 맡았다. 영화를 통해 당시 사회주의 정권의 가치와 이념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스탈린과 독일의 히틀러도 마찬가지였다. 영화의 중요성을 깨닫고 영화산업을 통제하고 검열을 강화했다. 정권에 부합하는 영화, 자신의 정치 성향을 드러내는 영화를 만들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정치적으로 사용했던 독일과 러시아에서 영화산업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영화를 선택한 결과, 대중들과의 소통은 멀어졌기 때문이다.
3) 작품의 완성도 저하
영화산업의 발전은 양적 확대나 산업적 합리화와 같이 경제적인 측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에 못지않게 영화의 미학적 감수성과 완성도가 과거에 비해 훨씬 세련되고 발전되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의 미학적 감수성은 대상을 영화화함으로써 형식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작가의 연출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2000년대 중반 한국 영화계 위기론이 대두됐던 때가 있었다. 무분별한 투자로 인해 영화산업의 질적인 저하를 낳았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는 투자배급사가 급격히 늘면서 양적으로 성장한 반면 질적으론 저하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영화는 그런 경향이 한층 두드러졌다. 영화가 상업성만 추구하는 기획영화의 비중이 커지고 있으며 동시에 정치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영화의 작품성과 완성도가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 영화가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이유는 대기업과 투자배급사 위주로 재편된 영화 시장구조 때문이다. 영화는 하나의 상품으로 대기업 수익 창출 통로로 작용했다. 시나리오 개발과 영화 편집권이 투자배급사의 말 한마디 휘둘린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감독의 작품세계에 천착하는 예술영화들이 설 자리가 없다. 제 2의 봉준호, 제2의 박찬욱, 제2의 이창동이 탄생할 수 있는 토대 자체가 사리지고 있는 셈이다.
한국영화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완성도와 작품성이 높은 영화가 필요하다. 한국 영화산업은 이미 성숙기에 접어들었다. 한국 영화는 이미 성장 한계를 넘었다는 분석도 나오지만 문제는 국내의 좁은 시장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점이다. 미국 영화산업계는 이미 다양한 콘텐츠를 확보해 넷 플릭스(Net Plex)와 같은 OTT(Over The Top)서비스를 통해 전 세계를 공략할 준비를 마쳤다. 여기에 중국의 영화시장은 막대한 인구를 배경으로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중국 내수시장 매출 규모는 평균 35.5% 정도 급성장하며 세계에서 가장 잠재력 있는 시장으로 부상하는 중이다.
한국영화산업이 지금의 성장 한계를 뛰어넘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좁은 내수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기보다 세계로 진출해 시장을 넓혀야 한다. 다양한 소재의 콘텐츠를 확보하고 전 세계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흥행성과 작품성 있는 영화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훌륭한 시나리오에 기반한 작품성과 완성도가 높은 영화가 필요하며 흥행만을 위한 장르영화 뿐만 아니라 다양성 예술영화도 지속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상업성만 강조하는 기획영화만으로는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 영화산업이 발전하도록 하는 데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4. 한국영화산업 발전을 위하여
한국영화산업은 흥행에 성공하는 영화가 증가하면서 양적으로 크게 발전해왔다. 검열을 폐지하면서 정부규제 역시 과거보다 크게 줄어들었으며 시장논리에 의해 관객들의 수요에 부응해서 영화가 제작 배급되었다. 그러나 한국영화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보완되어야 할 점 또한 많다.
먼저 영화산업제작 및 유통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투자사 위주의 기획영화 제작구조는 단기적으로는 흥행영화를 만들어 낼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제작 및 배급구조를 왜곡시켜 영화산업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 따라서 할리우드와 같이 시나리오, 감독, 배우 등 전업구조가 정착될 수 있도록 개선되어야 한다. 전문분야의 전문가가 각 부문을 담당하고 이러한 각 부문이 협력하여 시너지 효과를 얻는 영화제작 체재로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배급구조 또한 개선될 필요가 있다. 현재의 같이 지나치게 수직적인 배급 및 상영구조는 몇몇 블록버스트 흥행영화만 수익성을 높이고 다양성 영화를 비롯한 대부분 다른 영화의 설자리를 잃게 한다.
지나친 정치적 영향력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한국영화는 정부의 검열이나 정부의 개입에서는 많이 벗어났다. 그러나 최근 영화기업들이 흥행을 위해 정부의 영향력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으며 정치권 역시 영화를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이 때문에 정치적 영향력을 의식한 기획영화제작이 늘어나고 있다.
영화는 다른 예술장르보다 효과적으로 여론을 형성하고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때문에 전체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영화가 지닌 정치적 영향력을 간파해 영화를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으며 영화인을 중시해 왔다. 영화산업에 대한 지원을 통해 정치이념의 당위성을 공고히 했다. 그러나 이렇게 정치적 영향력을 과도하게 받을 경우 영화산업은 쇠퇴의 길을 걷는 경우가 많다. 정치력을 이용해 문화산업을 통제하거나 혹은 투자사가 정치적인 소재로 관객들의 관심을 모으려 한다면 단기적으로는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영화산업이 발전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과도한 정치성을 배제하는 영화계의 노력이 필요하다.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 질적 성장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상업영화는 양적 성장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세계시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작품성이 중요하며 영화의 완성도 또한 높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영화 창작자와 전문제작자들 위한 공정한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그리고 그 분야에 맞게 분업과 전문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시나리오 작가와 전문제작자 역시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계발해 생존경쟁에서 살아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정부와 산업계는 시나리오나 촬영기술 그리고 감독의 예술적 능력이 개발되도록 영화산업 인재양성에 투자를 늘리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을 기울일 때 한국영화산업은 양적인 성장과 더불어 질적인 발전을 통해 단기적으로는 물론 장기적으로 발전해 세계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