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작가론
작가 이후의 ‘작가’를 지키는 방법
송아름(영화평론가)
1.
박찬욱의 <아가씨>가 개봉했다. 오프닝크레디트에 자신의 이름보다 제공을 앞세우고 멀티플렉스에 촘촘히 깔린 상영시간표와 함께 여타의 커다란 영화들처럼 그렇게 <아가씨>는 관객 앞에 섰다. 박찬욱이 <박쥐>이후 7년 만에 선보이는 작품이라고는 해도 어딘가 과하다고 생각될 만큼 <아가씨>의 조각들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개봉 훨씬 전부터 박찬욱과 <아가씨>가 돌아왔다는 것을 모를 수 없을 만큼 기사와 광고가 쏟아졌고, 한 포털사이트에서는 <아가씨> 사진전 섹션을 따로 만들어 영화 속 스틸컷을 작품처럼 전시했으며, 《씨네21》은 아예 한 호 전체를 <아가씨>만을 위한 특집호로 발간했다. 가히 호들갑이라 할 만한 이 모든 것은 과한 자본이 겉으로 드러났던 다른 영화들처럼 <아가씨>를 소비재로 전락시키기에 충분했지만 <아가씨>는 이상하게도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는 이러한 물량공세나 소란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롯이 서 있는 듯 했다. 마치 빚을 진 것 같은 마음으로 굳이 저 먼 극장에 이른 아침부터 찾아가야만 볼 수 있는 영화처럼, 호불호를 쉽게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되는 영화들처럼 그렇게 영화 자본의 표식들과 동떨어져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아가씨>가 확장판이라는 이름을 달고 예술영화 전용관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에도 충분히 멀티플렉스에 걸릴 수 있는 영화가 몇 안 되는 자리까지 차지했다는 것에 약 오르긴 했지만, 그곳에 있는 것이 또 그리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아가씨>는 그 어떤 영화보다 ‘돈’에 둘러 싸여 있다는 것이 뻔히 보였음에도 감상을 존중받을 수 있는 영화, 멀티플렉스에서 편안한 시간에 언제든 볼 수 있지만 이것을 선택한 자신의 취향을 우쭐댈 수 있는 그런 희한한 영화였다. 물론, 그 이유는 누구나 예상하듯이 <아가씨>가 박찬욱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올드보이>의 박찬욱’에서 ‘박찬욱의 <올드보이>’로 전환되는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가 국내에 선보이기 위한 장편영화는 <아가씨>가 네 번째에 불과하며 그만큼 증명할 기회가 적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한국에서 작가감독이라 할 때 마치 필요충분조건처럼 요하는 각본의 창작에서도 박찬욱은 원작을 각색하는 편이 좀 더 좋은 평을 받았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박찬욱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어딘가 넘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진정성을 의심받(아야만 하)는 ‘돈’이 한국영화에 대한 혐오와 우월이나 선택과 배제라는 양극단의 가치를 매기는 데에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린 지금, 박찬욱이 그 경계를 무너뜨리는 유일한 이라면 그가 구축한 ‘우월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까지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게 구축되었는가. 그리고 어디까지 유효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는 한국영화계에서 현재까지 견고히, 아니 더 점점 더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그의 이름이 있다. 새삼스러워 던지지 않았을 그 질문을 이제 해보려 한다.
2.
잠시, 거칠긴 했어도 명쾌했던 그의 세계로 돌아가 보자. <달은...해가 꾸는 꿈>(1992)과 <삼인조>(1997)에 동시에 등장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주인공들, 그들의 살부(殺父)의식, 판이하게 성격이 다른 두 남자와 한 여자의 동행, 그 사이에 굳이 끼어들고 있는 극장과 카메라 에 대한 애호는 그가 어떤 세대를 거쳐 왔는지, 어떤 영화를 봐왔는지, 또 얼마나 영화를 사랑했는지를 깊이 새기고 있었다. 이 두 영화는 마치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보다 이 영화를 만든 이의 기반이 무엇이냐를 드러내는 것에 더 집중한 듯 보였다. 깡패와 그의 연인이 언젠가 만나자고 정한 장소를 굳이 극장으로 정한 것이나(<달은...해가 꾸는 꿈>), 두 남자가 털기로 한 장소가 하필 예술영화 전용관이어서 작전에 실패하는 플롯이 삽입된 것은(<삼인조>) 그가 꿈꾸던 영화에 대한 순진한 애정을 기필코 드러내겠다는 결심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이후 그는 <공동경비구역 JSA>(2000)으로 지금까지의 자신의 작품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불러 모았고, <복수는 나의 것>(2003)으로 그의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평을 들었으며, <올드보이>에 이르러 자신의 이력에 절정을 찍었다. 그 후 그가 사랑하던 영화는 조금씩 그 밖의 무엇인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박찬욱이 본인의 작품에 대해 한 말들을 훑다보면 한 가지 독특한 점을 발견한다. “<박쥐>가 어렵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아가씨>는 친절하게 만들다보니 늦어졌다.”, “<아가씨>는 해피엔딩에 모호한 구석이 없는 후련한 영화다.”와 같이 자신의 작품이 어렵다는 평에 대한 항변이나 설명, 혹은 어렵지 않다는 식으로 오해를 풀려는 내용들이 그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영화의 감상을 두고 ‘어렵다’, ‘어렵지 않다’를 해명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일진대, 이 과정이 늘 그의 영화와 동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의 감상은 작품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평가하는 지극히 취향의 문제이기에 ‘좋다’와 ‘싫다’ 그리고 그 경계에서 ‘그저 그렇다’ 정도로 순화시킬 수 있는 선호를 중심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부분의 영화는 이 안에서 움직이며 취향을 드러낼 때에도 그리 오랫동안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난이도는 전혀 다른 것을 요한다. 요컨대 난이도에는 ‘수준’의 문제가 개입된다. 영화가 난이도의 영역에 들어서는 순간 영화를 보는 이의 이해도, 지식이나 가치관, 멀게는 신념까지도 수준을 가늠해야 할 것이 된다. 그가 굳이 해명해야 할 만큼 그의 영화에 난이도의 문제가 늘 개입되어 있다면 이는 곧 그의 영화가 수준을 노출해야 하는 해석을 요구하거나 요구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는 의미이다.
박찬욱의 작품 속 적잖이 튀어나가는 덩어리들이 상당하다. 예컨대 주 플롯에 포섭되지 않는 부분들이나 도대체 왜? 라고 생각되는 유머 같은 것들이 그렇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영미(배두나)의 배후에 있던 혁명적 무정부주의자동맹의 일원들로 인해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동진(송강호)의 죽음이나, <친절한 금자씨>(2005)의 우스운 내레이션이나 백선생(최민식)에게 죽임을 당한 아이들의 유족들이 내밀던 계좌번호가 자아내는 실소, <박쥐>(2009)에서 태주(김옥빈)와 상현(송강호)의 탐닉 사이에 낀 황당한 설정이나, 태양을 피하기 위해 절벽위에서 벌이던 분투 등 모두 예로 들 수 없을 만큼 그의 영화는 순간 순간 생각의 흐름을 정지시킨다. 아마도 그의 영화를 ‘어렵다’라고 만들었을 이 비균질적인 요소들은 한데 어딘가 무시해버리기가 쉽지 않다.
이를테면 동진의 죽음은 자본주의사이에서의 노동이나 정치 운동의 한 부분을 상기시킨다. 금자를 향한 내레이션은 상황적 아이러니의 유희로 읽힐 수도 있으며, 유족들이 내밀던 계좌번호는 그들이 걸친 옷차림으로 예상할 수 있는 계급이나 돈의 문제를 짚어내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상현의 탐닉과 유머, 태주와 상현의 분투는 욕망과 신념의 정체를 까발리는 것처럼 보인다. 어딘가 어색하다고 생각되는 이 장면들은 거대담론을 부유하면서 그 가치에 대해 묻는 듯 보이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 가치들은 어떤 진보성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이 장면을 취하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노동이나 이념에 대해, 계층문제에 대해, 욕망과 탐닉에 대한 예술적 표현 수위에 대해 얼마나 앞서 있는지, 그렇기에 얼마나 올바른 것인지를 노출시키도록 만든다. 이것이 언제나 영화적 가치를 호명하는 한국의 영화감상법과 맞물린다면 중요한 문제에 의식 있게 가 닿았다고 믿게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박찬욱의 영화는 해석을 요구한다. 그의 영화에 다양하고 상반되기까지 하는 해석이 공존하는 것, 작은 소품이나 장면 하나 하나로도 거대한 그림을 그리며 해석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가 던진 게임을 수용한 결과이다. 감상보다 해석이 선행하기에 영화를 보는 이의 이해와 판단을 기어이 드러내도록 만드는 것, 그렇기에 영화 자체에 대한 자신의 호오(好惡)보다 영화에서 굳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그것의 올바름을 판단하는 것으로 우월함을 느끼게 하는 그의 영화들은 그래서 영리하다. 그의 영화에 대해 불편함을 토로하는 이들도 결국에는 그의 영화에서 어떤 가치를 확인하고 이것을 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느냐의 문제를 가지고서야 담론의 장에 뛰어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수용하지 않는다 해도 단순히 ‘싫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의 수준에서 그 이유를 해명하는 과정까지가 필요한 영화, 여기에 박찬욱이 빚어낸 ‘우월한 세계’의 정체가 있다.
물론 이 생경한 요소들에 선을 긋고 무시해버리면 그뿐이다. 영화의 개연성을 망치고,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흐리며, 굳이 왜 편히 볼 수 없는 영화를 만드는지에 대해 ‘싫다’고 선언하면 그만이다. 더 나아가 그가 실제로 위와 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지 역시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영화가 무엇인지는 잘 몰라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을 이 강력한 브랜드의 영화 앞에서 의심을 선언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영화의 스크린에는 늘 영화 바깥의 것들이 넘실댄다. 스크린에 감독의 이름이 떠오르는 순간 그의 전작,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 이와 더불어 평소 그의 이미지나 가치관 등이 스크린으로 흘러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크린에 감독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은 정보를 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스크린 속 이야기가 이름만 보고도 보고 떠올릴 수 있는 이 모든 것을 가진 이가 만든 것이며 따라서 그의 자장 안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스크린 속 ‘박찬욱’이라는 이름은 그 어떤 감독의 이름보다도 강력하게 현실을 환기시키면서 관객들의 해석에 영향을 끼치는 텍스트이다.
박찬욱이 해외영화제에서 수상을 했다거나 그곳에서 초청받는 감독이 되었다는 식의 작은 나라 콤플렉스를 치워둔다 해도,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는 늘 자신의 생각을 열심히 말하고 이를 실천하는 이 중 한 사람이었다. 예술 교육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문화정책이 불합리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에도, 부산영화제에 잡음이 발생했을 때에도 박찬욱은 늘 그곳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유머러스하고 여유있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데 거리낌 없던 박찬욱의 말들은 곧 그의 영화가 그가 옳다고 믿는 가치대로 만들어졌다고 믿게 하는 데에, 그의 영화에 어떤 가치가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다고 신뢰하는 데에 머무르게 한다. 앞서 말한 장면들이 의미가 없다거나 어색하다고 쉽게 규정되지 않는 것은 아마 현실 속 그의 모습에 빚지지 않았을까, 영화와 그것을 만든 이의 사상은 분명하게 괴리가 있을 수 있음에도. 더군다나 그는 이제 약 30년간 영화계에 몸담고 있는 중견감독이 되었다는 점에서, 후배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선배가 되었다는 점에서, 심지어 그의 언급만으로 다른 감독들의 영화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일종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가 그려내는 영화 미학에 대한 믿음까지도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
여기, 이 모든 것이 뒤섞여버린 박찬욱의 영화가 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미약하게 나타나고 <올드보이>에서 절정에 달했던 색채들, 이를테면 낮은 채도의 녹색과 보라색 등의 푸른 계열과 이 반대편에 서 있는 역시 낮은 채도의 붉음이 뒤섞인 아름다운 공간, 정확한 지역이나 국적을 추적할 수 없는 미스터리한 장소, 그곳을 꽉 채우는 음악이 주는 황홀함 속에 여기 저기 흩어진 부스러기들은 모두 ‘있어 보이는’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 박찬욱은 이 해석의 가능성으로 자신의 이름을 강화하면서, 그리고 그 강화된 이름으로 다시 해석의 가능성을 확보하면서 그렇게 유혹적인 영화들을 내놓고 있다. 그런데 현재에 이르렀을 때 그가 유혹하는 가치나 방식은 어딘가 낡아 보인다. 더 이상 가치의 위계는 없으며, 그 가치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하는 이들에게 그의 질문은 이제 그리 유효해보이지 않는다.
3.
그의 초기작에서 드러나던 살부(殺父)의식을 쉽게 보아 넘길 수 없는 것은 이것이 그가 지니고 있는 어떤 세대적 위치를 내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올드보이> 이후의 그의 영화들이 흩뿌려 놓은 파편들을 살펴보면 세대적 강박과 문제의식이 스타일이라는 미학 안에서 유연하고 아름답게 정제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들이 커다란 질문들을 던지고 있는 것 역시 세대적 발화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생각하는 어떤 가치들이 영화 속에 흥미롭게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가치 있다고 해석하는 범위에 국한되어 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준 것이 바로 <아가씨>이다. <아가씨>를 보았을 때의 새삼스러움은 비단 멀티플렉스에서 보던 다른 영화와 구분된다는 느낌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가씨>를 통해 박찬욱이 중요하게 생각해 온 가치들이 꽤나 견고했다는 것을, 그것에 새로운 가치가 끼어들었을 때 어딘가 어색해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 더 큰 이유였다.
올해 숱한 화제를 낳았던 영화 <아가씨>는 분명 레즈비언 영화이다. 숙희(김태리)와 히데코(김민희)가 여성이 아니었다면 서로에게 빠지지 않았을, 서로 사랑을 나누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가 이 영화의 중심에 있음에도 박찬욱은 이에 대해 단 한번도 발화하지 않았고 여성의 탈주, 그렇기에 해피엔딩이라는 그럴듯하지만 너무도 간단한 해석을 앞세웠다. <아가씨>에 드리워진 시선이 불편하다면 이는 이 작품이 남성적 시선에 놓여있다는 것보다 가치의 위계가 나뉘고 있다는 점을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박찬욱이 <아가씨>를 여성의 탈주라는 이름아래 두는 순간 두 여성의 사랑은 여성의 탈주 혹은 해방이라는 큰 의심 없이 수용될 수 있는 가치보다 작거나 덜 중요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아가씨>는 꽤 위험하다.
<아가씨>가 크게 화제가 되었던 것은 역시나 동성 베드신이었다. 박찬욱은 이 부분을 찍으며 배우들을 어떻게 배려했는지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지만, 정작 영화 속에 등장한 이 장면은 전혀 배려 받지 못한 듯하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작품을 여성의 탈주로 이야기했을 때, 두 여성의 동성 베드신은 19금 영화이기에 필요한 자극적인 유희정도로 전락하며 레즈비어니즘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히데코와의 정사 중 숙희가 혀를 내밀며 다가오는 클로즈업 등은 이성애자들이 가지고 있는 판타지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두 여성이 코우즈키(조진웅)의 집을 탈출하는 후반부 역시 어딘가 껄끄럽다. 그는 배를 타고 떠나는 히데코와 숙희를 두 여성으로 두지 않고 히데코를 굳이 고판돌이라는 남성으로 전환시켜 숙희와 함께 하도록 만든다. 여성의 해방으로 묶어버릴 때 남는 이 잉여들은 지극히 보수적인 관점에서 레즈비어니즘을 밀어내고 있어 쓰라리다. 원작 『핑거스미스』가 수와 모드가 서로에게 가 닿는 시선에 얼마나 많은 지면을 할애했는지, 그들이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서로에게 끌릴 수밖에 없는 것을 얼마나 운명적으로 묘사했는지를 생각했을 때 『핑거스미스』가 based on이 아닌 inspired by로 <아가씨> 앞에 놓인 것이 당연해 보일만큼 말이다.
더군다나 레즈비어니즘보다 상위에 둔 것처럼 보이는 여성주의 역시 그리 깊은 고민의 결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아가씨>라는 제목에 대해 “현대에 와서 아저씨들이 앞장서 오염시킨 그 명사에 본래의 아름다움을 돌려주”고 싶었다는 그럴 듯한 말로 설명한 바 있다. 이 단어가 명백히 오염되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단지 ‘젊은 여성’을 가리키는 이 말에 굳이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것에서 그의 여성관은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니까 그가 그리고 있는 여성은 폐쇄적인 의미망 속에 갇혀 상상 이상으로 매력적이게 등장하지만 이 모습을 제외한다면 여성이 영화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어쩐지 위태롭다. 가령, 자신의 삼촌에 집에서 탈출하기 전 삼촌에게 복수하기 위해 치밀하게 그의 서재를 침입하던 『핑거스미스』의 모드는 숙희 뒤에서 겁내고 있는 히데코의 파리하면서도 그림 같은 얼굴로 대체된다. <아가씨>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백작과 코우즈키의 고문에 가까운 유희와 그 옆에서 구불거리는 문어는 앞선 두 여성의 분투를 모두 후경화시켜 버릴 만큼 자극적이다. 식민지 조선을 떠올리기 힘들만큼 유려하면서도 기하학적인 배경 속에서 두 여성이 만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탈주는 그 자체로 상당한 에너지를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딘가 삐걱거리는 것이다. 위계는 지극히 상대적이기에 레즈비어니즘보다 상위에 이성애주의나 여성주의가 있다면, 혹은 그 위에 더 편리하면서도 내면화된 가치가 존재한다면 여성주의 역시 도구화 될 수밖에 없다. 그가 늘 자신의 영화에 여성을 중심에 두었음에도 그 시각을 의심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성을 ‘숭배’할 필요가 없음에도 숭배의 대상으로 두는 것, 그가 질문하던 가치들은 복잡하고 낯선 것 앞에서 이렇게 휘청대고 있다.
유려하게 이어지던 박찬욱의 세계는 조금씩 비틀거린다. 최근 그의 작품에 쏟아지는 관심은 늘어났지만, 정작 작품들은 어딘가 머무르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아마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지극히 직관적인 방식으로 바라보던 <아가씨>의 세계는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었다. 그는 어떤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그 안에서 위계를 설정하며 그 외의 것은 은근하게 뭉그러뜨리거나 눙치기에 정작 그의 해석에 대한 정당성이 게임판 앞에 서 버렸다. 이 섹시한 스크린에서 굳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라고 요구하던 게임은 더 이상 긴장을 일으키지 않으며, 이제 그에게 전혀 다른 게임판이 필요하다는 것은 스타일만 남았다는 말이 증명한다. 게임의 판은 돌아섰고, 이제 해석에 대한 판단과 고민은 그의 영화를 찾는 이들이 아닌 그에게 넘어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