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작가론
괴물들이 사는 나라
문성훈(영화평론가)
“이곳은 차가운 아스팔트와 그보다 더 차가운 육신이 뒤엉켜있는 세상이다.”
-<돼지의 왕> 중
여기, 처절하게 고통 받는 무리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불행을 둘러싼 곡절 가운데 황망히 고개를 들어 타인들의 기색을 애써 살피려 하지만, 절망적인 세상은 서로 다른 고통으로 신음하는 숱한 군상들의 엇비슷한 표정들로 그득하여 일말의 구원조차 기약할 수 없는 참혹한 지옥도를 이룰 뿐이다. 연상호의 영화들에서, 극의 중심을 이루는 등장인물들은 그들을 짓누르는 불행의 연쇄로부터 벗어나고자 끊임없이 도피한다. 그들의 도피는 비단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좀비 떼로부터의 물리적 피신(<부산행>, <서울역>)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들은 망가져버린 삶의 끄트머리에서 지난 생을 반추하거나(<돼지의 왕>), 거짓으로 이루어진 헛된 관념에 기꺼이 귀의함으로써 자신의 현생을 애써 부정하려(<사이비>) 한다, 하지만 구원을 향한 그들의 조악한 시도는 부정할 수 없는 엄혹한 현실을 한층 더 부각시킴으로써 그들의 파국을 앞당기는 잔인한 결말을 제시할 뿐이다.
앞서 언급한 도피가 연상호의 세계를 이루는 주요한 모티브라면, 인물들을 도피하도록 이끈 불행의 연쇄는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사이비>의 영선과 <서울역>의 혜선은 제각각 자신이 처한 비루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인물들이지만, 결국 그들이 궁극적으로 부정하고 싶어 하는 대상은 그들의 세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사이비>의 민철, 그리고 <서울역>의 석규는 자식세대가 처한 비참한 굴레를 상징하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는데, 그들은 영화 속 프로타고니스트로서 제각각 사이비 종교의 폐해와 좀비 바이러스의 습격이라는 외부세계의 위협으로부터 자녀를 보호하고자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종국엔 그들 스스로가 위협적 대상, 즉 자식의 파국을 불러일으키는 본질적 위협으로 간주된다.
<사이비>의 민철은 자신의 가족에게조차 폭력을 서슴지 않는 악한으로 묘사되며, 일말의 선한 구석마저 찾아볼 수 없는 흉포한 위인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수몰예정지역인 자신의 마을에서 성행하게 된 사이비 교단의 폐해를 목격하고 그 이면에 감춰진 의혹을 폭로하고자 동분서주하지만, 마을사람들은 민철을 두고 ‘사탄의 자식’이라 경멸하며 그의 말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민철의 딸 영선은 아버지의 폭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사이비 교단의 마수에 걸려들어 윤락업체에서 착취당하는 처지에 놓이지만, 자신을 구하기 위해 찾아온 아버지의 손길을 끝내 거부하려 한다.
<사이비>는 선량한 교인들로부터 이권을 획책하는 이단 종교의 민낯을 드러냄과 아울러, 비록 자신이 매달리게 된 신앙의 대상이 한낱 거짓임을 알게 되었음에도 비루한 현실 속에서 그러한 믿음을 차마 저버리지 못하는 맹신의 메커니즘을 다룬다. 연상호는 이러한 맹신에 가까운 믿음을 단순한 무지몽매의 결과로 다루지 않는다. 이단 종교에 현혹되어 돈독한 신앙을 표하는 마을사람들에게 있어 그들의 믿음은 비루한 현실로부터의 도피처, 즉 현생의 고통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게 될 내세의 약속을 향한 절박한 희망에 다름 아니다. 영선은 민철이라는 현세의 악으로부터 도피하고자, 내세의 희망을 약속하는 사이비 교단에 의탁하게 되지만, 그러한 믿음마저 무너져버렸을 때 그녀에게 들이닥친 절망은 차마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온다.
“영선이는 한 번도 나를 아빠라고 부른 적 없어.” <사이비>가 자식으로부터 아버지라 불리기를 거부당한 부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서울역>은 제 이권을 채우기 위해 아버지를 자처하는 어느 사내의 기만을 다룬다. <서울역>은 서사의 대부분을 서울역 인근에 출현한 좀비 떼로부터 딸을 구해내려는 석규의 부성애를 다루는데 할애한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서로를 애타게 찾는 석규와 혜선은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마치 애틋한 부녀지간인 양 묘사되지만 두 인물이 마침내 조우하고 석규의 정체가 밝혀지는 종반부에 이르러, 가족애를 다룬 재난영화 장르의 익숙한 클리셰는 무참히 전복되고 만다.
아버지라 여겼던 석규가 실상은 혜선을 붙잡기 위해 쫓아온 옛 포주였다는 진실이 평범한 가정집을 재연한 모델하우스 건물을 무대로 밝혀진다는 점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혜선은 좀비 떼로부터 도망하여 비교적 안전한 장소로 여겨진 모델하우스에 당도하게 되고, 그곳에서 남자친구인 기웅과 아버지를 기다리며 찰나의 환상에 젖는다. 마치 오래 전 떠나온 옛 집을 그리는 듯 한 혜선의 환상은 그녀의 눈앞에 당도한 아버지의 실체, 즉 가짜 아버지로 행세한 석규의 존재에 의해 무참히 깨져버리고 아늑하게 여겨지던 가정집의 환영은 순식간에 참혹한 살육의 현장으로 변한다. 좀비 바이러스의 습격이라는 외부세계의 초현실적 재앙, 그리고 평범한 가정집을 재연한 모델하우스 건물의 연출된 안온함은 이지러진 아버지의 실체와 더불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든다. 이렇듯 <사이비>와 <서울역>은 제각각 증오와 환멸의 대상, 혹은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회한의 대상으로서 서로 다른 아버지상을 그리고 있지만 두 영화의 여주인공들은 현실세계와 환영의 영역 가운데 어디에서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 채 파국을 맞이한다.
<돼지의 왕>에서 김철은 말한다. “힘을 가지려면 악해져야 돼. 계속 병신처럼 당하지 않으려면 괴물이 돼야 해.” 연상호의 세계에서는 악인과 악한이 대결을 벌이고, 괴물과 또 다른 괴물이 대치되어 싸운다. 하지만 연상호의 영화들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지점은 누가 승리하든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는 지난한 투쟁의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괴물과 싸우기 위해 괴물을 자처하게 된 인물이 스스로 자신을 돌이켜보았을 때 다가오는 거대한 충격에 있다. <사이비>에서 교회 장로를 자처하며 사기행각을 벌이는 최경석과 달리 목사로서의 소명의식을 지닌 성철우는 자신이 재직하는 교회의 악행을 자각한 후 그곳에서의 목회활동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급기야 장로를 제 손으로 죽인 성철우 목사는 살해현장을 목격한 민철을 회유하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자 그 또한 제거하려 한다. ‘주님의 뜻’을 좇으려 한 성철우는 민철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차창에 비친 스스로의 일그러진 얼굴과 마주하게 되는데, 이 때 그는 괴물과 싸우기 위해 몸소 괴물이 되어버린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발견한다.
현실을 외면하고자 붙들어 맨 환영이 무참히 깨지는 순간, 막연한 희망이 사라진 곳엔 좌절과 울분이 자리하게 된다. <서울역>에서 아버지인줄로만 알았던 석규의 정체를 알아차린 혜선은 그로부터 도피하고자 몸부림치지만, 결국 석규에게 사로잡힌 그녀는 무기력한 육신을 늘어뜨린 채, 자신을 강간하려는 석규의 몸뚱이 아래서 일고의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그 자신이 좀비가 되어 석규를 물어뜯는 혜선의 일격은 괴물과 맞서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음울한 세계관 속 군상들의 운명을 환기시킨다.
연상호의 첫 번째 실사영화인 <부산행>에서는 세 편의 장편 애니메이션에서 다소 일관적으로 관철돼왔던 아버지의 위상에 변화가 감지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연상호의 영화들에서는 아버지를 자처하는 인물들이 부재하거나(<돼지의 왕>), 폭압을 일삼는가 하면(<사이비>), 심지어 자식을 짓밟고 그의 파멸을 초래(<서울역>)하곤 한다. 이렇듯 연상호의 영화들에서 엿보이는 아버지에 대한 부정은 곧 아버지가 되어야만 하는 성인에 이르렀음에도, 이를 거부하고 퇴행적 단계에 머무르는 인물들(<돼지의 왕>의 경민, <사이비>의 성철우, <서울역>의 기웅)의 성격에서도 함의적으로 드러난다.
<부산행>에 등장하는 석우(공유 분)는 증권사에서 펀드매니저로 일하는 가장으로서, 그의 딸 수안은 자신을 양육하는 아버지보다는 그와 이혼해 부산에 거처하는 엄마에게 더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 속 두 부녀가 새벽 녘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은 연유 또한 엄마를 간절히 보고 싶어 하는 수안의 바람에서 비롯한다. 열차 내에서 벌어진 좀비 바이러스의 확산은 재난을 다룬 장르물의 도식에 따라 전개되며, 딸을 위험으로부터 구해내려는 아버지 석우의 부성애는 국가의 공적시스템이 차츰 마비되어가는 형세 가운데서 차츰 영웅적인 면모를 획득해나간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석우를 묘사한 일련의 대목들은 그를 단순한 재난의 피해자이자 영웅적 아버지로 규정하는데 있어 미심쩍은 단서를 제공한다.
석우는 자신이 근무하는 증권사에서 작전주를 통해 지원한 생명공학회사가 좀비 바이러스의 원흉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이 사실을 석우에게 전한 부하직원은 자신이 속해있던 조직의 비윤리적 영리활동이 대재앙의 빌미를 초래하였다는 사실에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이 시점에서 영화는 딸을 보호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석우가 열차 내에 도래한 침입자들의 살육을 도운 미필적 공범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석우는 자신의 인맥을 이용하여 스스로와 딸을 승객들로부터 동떨어진 안전한 피신처에 이르게 하려는 시도를 꾀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모습은 생존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타인들의 희생마저 개의치 않는 용석의 이기적인 면모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부산행>에서, 재난으로부터 생존하기 위한 ‘각자도생’의 몸부림이 생존자들의 열차칸을 둘러싸고 새롭게 구축해나가는 계급적 지형도는 다소 흥미롭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러한 현상은 공권력과 시민을 구획 짓는 정치적인 개념이나, <설국열차>의 열차칸을 횡행하는 경제적-인종적 계급의식과는 무관하다. <부산행>에서 등장인물들의 사회적 지위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는 증권사에서 펀드매니저로 근무하는 석우(공유 분)의 배경과 고속버스 회사의 상무라는 제 직함을 한차례 들먹이는 용석(김의성 분)의 대사가 전부다. 영화에 등장하는 승객들은 부산으로 향하는 KTX 열차 안에서 처음으로 마주했을 뿐 천차만별의 배경을 지닌 타인들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열차를 무참히 잠식해나가는 좀비 떼의 살육과 번식을 목도하며, 감염되지 않은 생존자들은 감염의 위험에 노출된 승객들을 배척하고 그들로부터 우위적 위치를 점하려 한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다소 의아한 대립구도를 띠기 시작하는데, 무기력한 모습으로 일관하는 공권력과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인 좀비 떼들이 불러일으킨 불안과 공포는 감염되지 않은 승객들 사이에 형성된 새로운 대립구도를 제공하는 무대로 기인하게 된다.
열차 내 각자도생에 경도된 인물들의 본능적 생존욕구는 바이러스에 감염됨으로써 인간성을 상실해버린 좀비들과의 경계를 차츰 흐릿하게 지워나간다. 가족을 구하기 위해 좀비들과 맞서 싸운 석우 일행은 그들이 좀비들과의 접촉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감염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비감염인들의 성화에 부딪혀 별도의 칸에 격리되고 만다. 용석을 비롯한 이들 비감염인들은 그들의 이기적인 면모로 인해 영화 속 공분의 대상으로서 결국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되지만, 그들의 파국을 목도한 석우 일행이 각자도생의 개념을 초월한 윤리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여기기엔 무리가 따른다. 석우와 상화(마동석 분)의 희생적이며 영웅적인 면모와 용석의 이기적인 행태는 보호자와 피보호자로 양분되는 그들의 위치에 있으며, 이는 그들이 지닌 윤리관이나 사회적 지위와는 무관하다. 용석은 좀비에게 감염된 직후, 석우 앞에서 어머니가 사는 부산의 주소지를 읊조리며 울부짖는다. 아버지이자 가장으로서의 뚜렷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석우, 상화와는 달리 용석은 보호자가 아닌 피보호의 대상으로서 스스로의 위치를 규정한다.
<돼지의 왕>의 종석과 경민, <사이비>의 영선, <서울역>의 혜선이 맞이하는 파국은 곧 피보호자로서 그들이 갈망하는 보호의 체계가 부재하거나 왜곡된 상황에서 기인한 비극적 결말을 이룬다. 주로 아버지로 표상되는 이러한 보호체계는 이내 종교가 설파하는 교의(<사이비>)나 국가의 공적시스템(<부산행>, <서울역>)으로 확장되기도 하지만, 연상호의 세계에서는 이렇듯 피보호자가 의존하는 ‘대안적 아버지’조차 환멸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연상호의 인물들을 추동하는 도피에의 욕구는 곧 부재하거나 폭압을 일삼는 아버지들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에서 비롯되지만, 그들이 도피하여 향하려는 그 어디에서도 보호자이자 구원자로서의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이비>와 <서울역>에서 첨예하게 다루어진 생물학적-대안적 아버지에 대한 연쇄적인 환멸은 <부산행>에 이르러 제시된 부성애의 회복으로 환원된다. 앞서 언급한 바, <부산행>의 석우는 그가 속한 증권사의 비윤리적 영리활동으로 인해 영화 속 대재앙의 빌미를 제공한 미필적 공범에 해당하며, 어린 딸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에겐 자식세대의 파멸을 초래하였다는 책임의 일부가 전가된다. 가장들의 무능과 악행으로 인해 파생된 대재앙은 피보호자로 하여금 대안적 아버지, 즉 국가시스템이 제공하는 안전한 피신처로의 도피를 추동하지만 국가는 대안적 보호체계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을 탄원하는 피보호자들을 향하여 서슬 퍼런 물대포를 쏘아 올릴 뿐(<서울역>)이다. 가장의 결핍으로 인해 부상한 대안적 보호체계가 피보호자들을 좌절시킨 그 지점에서, <부산행>은 다시금 보편적 가치에 해당하는 부성애로의 의존을 제시한다. <부산행>의 아버지(상화와 석우)들은 연상호의 이전 영화들에 등장하는 아버지들과 달리, 기꺼이 희생을 치름으로써 그 자신이 미필적 공범으로 가담했던 대재앙으로부터 자식세대의 안위를 지켜내고자 한다.
역설적이게도, 아버지의 희생은 곧 아버지로 표상되는 보호체계의 부재로 다시금 귀결되고 만다. <부산행>의 마지막 장면에서, 가장의 희생으로 인해 살아남은 석우의 딸 수안과 상화의 아내 성경(정유미 분)은 그들의 희미한 실루엣을 좀비로 오인한 군부대의 엄혹한 총부리 앞에서 위태롭게 걸음을 옮긴다. 일촉즉발의 상황 가운데서 그들의 목숨을 부지하게 한 것은 이미 존재하지 않은 가장의 보호나 공권력의 적확한 개입과는 무관한 의외의 요행(수안의 노랫소리를 알아들은 군인의 사격정지 명령)에 따른 결과다. 보호자가 존재하지 않은 세계에서, 피보호자들이 갈망하는 구원의 가능성은 요행, 즉 운의 향방으로 가름되는 것일까. 결국 연상호의 지독한 세상에서, 각자도생에 뛰어든 가엾은 군상들은 양자택일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희박한 가능성이나마 기적의 도래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면,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는 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