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불운한 삶에 투사(鬪士)의 이미지를 더하다
연 동 원 (영화평론가, 명지대학교 객원교수)
이제껏 일제 강점기의 실존인물을 소재로 제작한 영화중에서 대중에게 가장 큰 관심을 일으킨 작품은 여류비행사 박경원을 소재로 한 <청연>(2005)일 것이다. 이 영화는 비평가 대(對) 네티즌의 극심한 대립 양상을 보인 첫 사례이자, 소위 네티즌의 단합된 힘이 영화 흥행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속칭 친일영화냐 아니냐를 둘러싸고 벌어진 격한 논쟁이 흥행 참패를 가져와 이 영화 제작을 위해 거액을 쏟아 부은 영화사를 도산위기에 빠뜨리게까지 했다.
또한 이 영화는 해방이 된지 6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일제강점기를 겪었다는 역사적 상처가 얼마나 깊이 남아 있는지를 확인케 했다. 즉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영화는 결코 과거완료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일본이 역사교과서, 위안부, 독도 영유권 등 과거사 문제를 놓고서 한국과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다는 현재진행형의 역사 문제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이 영화는 압제자(일본인) 대(對) 피해자(조선인)이라는 기존의 서사구도를 답습하지 않았으나, 그러한 시도가 관객의 공감대를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입증했다. 실상 아직까지도 한국의 관객들에게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영화에는 감성적인 요소가 많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요소가 상당히 반영된 작품이 바로 2016년에 개봉한 <덕혜옹주>이다.
일제강점기의 또 다른 실존인물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를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여러 면에서 <청연>과 묘한 대비(對比)를 이루고 있다. 우선 두 영화의 주인공은 신분적 차이가 너무나 크다. 한 여성은 황녀인 반면, 다른 한 여성은 평범한 집안의 막내딸이다. 다음으로 한 여성은 평생을 자신의 의지는 무시된 채 일본 정부의 강제력에 의해 삶이 철저하게 유린되었다면, 다른 한 여성은 억압받는 식민지인이자 유교적 남성중심사회라는 열악한 여건에서 한국 최초의 민간여류비행사라는 명예를 성취했다.
끝으로 두 영화 각기 상반된 의미의 ‘역사왜곡’이라는 시선을 받고 있다. 즉 <청연>이 박경원의 친일행적을 미화했다면, <덕혜옹주>의 마지막 황녀는 실제로 하지도 않은 독립운동을 벌인 애국지사로 묘사되었다. 분명한 것은 이 영화를 만든 감독 허진호도 인터뷰에서 덕혜옹주는 독립운동을 벌인 적이 없는, 비극적인 역사의 격랑 속에 휘말린 여인이라는 점을 밝혔다. 즉 영화에 나오는 영친왕 및 왕족 상하이 망명작전, 강제징용 노동자들 앞에서의 연설 장면, 심지어 해안가의 총격 장면 모두 픽션이다.
그럼 어째서 감독은 덕혜옹주(손예진)에게 실제로는 없는 투사(鬪士)의 이미지를 입혔을까? 이에 대해 감독은 의친왕 망명사건을 비롯해 영친왕을 설득해 조선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한 사람들의 기록 등을 통해 “허구적인 사건이지만,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라는 논리를 피력했다. 그러나 감독의 인터뷰와는 별도로 추가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덕혜옹주의 삶이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울 정도로 참담했다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라. 8살 때 아버지 고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14세 때 일본으로 강제 유학하고 바로 그 다음해에 오빠 순종 역시 석연치 않은 죽음을 당했다. 18세 때 친어머니 양귀인이 사망하고 2년 후에는 일본 왕족과 강제 정략결혼하고 그녀의 외동딸 정혜도 유서를 남긴 채 실종이 됐다. 심지어 해방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마저도 거부된 상황에서, 그녀가 이러한 암울한 현실에서 버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그렇다. 그녀는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세상과의 단절’을 선택했다. 덕혜옹주에 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관객이라면, 그녀가 십대부터 조현병 증세가 있었으며 평생 시달렸다는 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즉 덕혜옹주의 삶을 허진호 표현 방식이 아닌 실제 역사 그대로 옮겼다면, 과연 관객이 극장 문을 마음 편히(?) 나설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역사학을 전공한 영화평론가로서 종종 느끼는 모순된 생각이 있다.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는 가급적 각색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비극적인 한국 역사를 ‘날 것 그대로’ 보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다. 즉 실제로는 없지만 영화적 장치라는 가상의 공간에서나마 역사를 긍정적으로 윤색(潤色)했으면 하는 기대감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 속 덕혜옹주가 친일파 한택수(윤제문)에게 당당히 맞서는 장면도 그렇고 그녀가 강제징용 노동자들에게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구를 사용하는 연설 장면도 여기에 해당한다. 한편으로 이러한 각색은 다른 영화에도 등장하는데, 한 예로 김유진 감독의 <신기전>(2008)을 들 수 있다. 이 영화의 압권은 라스트신에서 대신기전의 가공할만한 위력에 10만 대군이 몰살당하고 이에 기겁을 한 중국 황제가 조선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장면을 들 수 있다.
따라서 감독 허진호가 덕혜옹주를 일제에 의해 조정된 정치적 도구가 아닌 독립운동에도 가담할 정도로 당당한 여인으로 탈바꿈시킨 것은 바로 필자의 모순된 감정과 기대 심리에 부응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덕혜옹주의 말년의 삶을 실제로 조현병에 시달리는 노인이 아닌, 차분히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것으로 묘사해서 관객의 마음을 편히 해주고 있다. 즉 이러한 각색으로 덕혜옹주의 비극적인 삶이 적어도 영화에서만큼은 좀 더 당당한 여인이 될 수 있다고 위안이 되지 않을까.
다음으로 라스트신에서 덕혜옹주와 김장한(박해일)이 나누는 대화는 마지막 황녀에 대한 실제 위상과 함께 어째서 감독이 투사의 이미지를 입혔는지를 밝히고 있다. 즉 그녀가 스스로 조선의 옹주로서 부족함이 많다면서 사람들의 희망이 되지 못했다는 대사는 단순한 회고담이 아닌, 대중의 시선이자 인물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다. 한편으로 김장한의 대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든 사람들이 힘이 되는 옹주가 아니라고 생각해도, 저에게만큼은 옹주님이 늘 희망이었습니다.” 그렇다. 이 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바로 ‘희망’이라는 단어이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 속에 처하더라도 꿋꿋이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은 미래에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종 승하 후, 당시 백성들이 일본으로 강제 유학가기 전(前)의 어린 덕혜옹주를 통해서 조선의 밝은 미래를 기대한 것도 그렇고 영화 장치를 통해서 그녀의 삶을 당당한 모습으로 재현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