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 흑백화면에 담길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스토리텔링
황혜진(영화평론가, 목원대학교 교수)
윤동주의 시는 늘 살아 있다. 살아남고 봐야 하는 팍팍한 현실언제부터인가 사어(死語)가 되어가고 있는 ‘부끄러움’이라는 단어가 윤동주 시의 본향이다. 모순과 타협하다가 종국에는 스스로 모순이 되어버린 어른들이 상실한 ‘부끄러움’은 청춘의 표상일 것이다. 한없이 투명한 자의식이 무수한 고민 끝에 타자와 부둥켜안고 화해하는 혹은 자신의 기원을 부정하고 스스로가 새로운 기원이 되고자 열망하는 청춘의 시간! 존재와 앎이 서로를 애증하는 가운데 결국 자기 정체성의 문제로 귀결되는 청춘의 욕망은 독백으로 가장 명료하게 표현된다는 점에서 비밀스러운 내면, 고적한 자의식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윤동주 시에 나타난 ‘부끄러움’의 자의식은 통과의례로서 청춘에 내려진 축복이지만, 내면의 순수성으로 인하여 영원히 나이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이기도 할 것이다. 윤동주의 시는 완전무결한 자아를 열망하는 과정에서 세계의 아름다움과 공명하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좌절하는 부끄러운 나, 청춘의 자의식으로 채워져 있다.
일제강점기, 해방을 목전에 두고 일본의 감옥에서 목숩을 잃은 윤동주를 이준익이 영화화했다. 대작에 속하는 <사도>(2015)를 마친 후 바로, 그것도 5억으로 신인배우들을 캐스팅해 흑백으로 촬영을 시작한다는 소식은 참신했다. 과거를 재현해야 하는 저예산 영화에 걸맞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윤동주의 삶을 어떻게 재현할지에 대해서는 그림이 떠오르지 않았다. 민족주의적 상상력을 자극할 수밖에 없는 시공간적 배경이 고정값으로 작용한다면, 개인의 내적 완결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모던한 성향을 보이는 윤동주와 그의 시가 재현된 과거와 충돌하지는 않을까? 영화나 드라마가 최근 십여 년간 재현해온 일제강점기와 윤동주의 시는 조화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소재를 아련한 코스튬 드라마로 풀어버린 <사의 찬미>(김호선, 1991)도 떠올랐다. 기존의 이준익 영화를 아우르는 소재가 예술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은 긍정적 요소였다. <왕의 남자>(2005)의 광대들, <라디오 스타>(2006)의 한물 간 록 가수, <즐거운 인생>(2007)의 아마추어 밴드에 이르기까지 다시 태어나도 광대가 되겠다는 장생과 공길의 고백은 허언이 아니었다. 순이가 써니인 동안만이지만 <님과 함께>(2008) 역시 여가수의 탄생에 관한 영화이며 <사도>의 왕세자는 아버지의 법에서 벗어나 그림에 심취하고 징을 울려대지 않던가? 주체의 입장에서 현실이 더 이상 조정과 타협의 대상이 아닐 때, 중심과 주변의 경계에 놓인 예술은 주체 나름대로 현실에 대응하는 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어쩌면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모든 예술가는 이 좁은 틈새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동주>는 시인으로 본격 등단하기 전의 소년 동주에서 시집을 내기 직전 체포되어 감옥에서 심문 당하는 청년 동주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보여준다. 나라를 잃은 백성이라는 점에서 타자인 동시에 동갑내기 고종사촌에 대한 열등감으로 또한 타자인 그는 스스로를 타자화하면서 시적 관념의 속살을 채워간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관객의 몰입을 유도하기 위해 허구적 서사를 생산하는 대신 배우로 하여금 윤동주의 시들을 호명하게 한다. 지식인조차 일본과 조선이 하나라고 목청을 높이던 시절, 혈기왕성한 행동주의자인 동갑내기 사촌을 부러움과 낯섦이 오가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동주, 서양의 문학에 심취하면서 근대에 목말라했을 동주, 황폐한 조선의 현실에 분노하면서도 길을 찾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던 동주의 수많은 얼굴, 가여운 욕망들이 낭송된 시구들 속에 겹쳐 보인다.
한편 재현의 욕심을 버린 영화적 시공간은 시인 혹은 시인의 내면과 충돌하지 않고 보조적 역할을 하는 데 만족한다. 흑백의 단출한 색조는 이준익의 영화들이 그래왔듯 주로 인물의 표정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관객과 캐릭터가 가까이에서 다정하게 대화하고 있는 느낌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부족한 사료에도 불구하고 그럼직하게 그려진 연희 전문 시절은 흑백의 미학을 뽐내면서 주인공들의 화양연화(花樣年華)를 재현한다. 벚꽃이 날리는 봄날의 밤, 관념의 동화(同化)가 사실적 재현을 넘어서는 것이다. 관념의 동화는 강조나 과장을 통한 감정을 증폭과 다르다. 동주의 일대기는 우리에게 알려진 데서 그리 멀리 나아가지 않고 실증적 자료의 공백을 정서의 교감이 이끄는 담백함으로 승화시킨다. 예를 들어 영화의 중심축을 두 청년이 같은 감옥에 갇힌 영화적 현재와 그들의 그리움의 대상인 과거 사이를 오가는 플롯으로 구조화하여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다룸으로써 얻게 될 극적 효과를 포기한다.
<동주>의 또 다른 매력은 시간의 교차 속에서 순간순간 자신의 존재를 부끄러워하거나 혹은 더욱 단단해지고자 했던 동주와 몽규가 내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관객은 두 청년의 삶을 위인전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연민과 동정의 시선을 바라보게 된다. 식민지 조선의 청년이 강압적인 외적 환경에 대응하며 정체성을 구성하는 과정을 그 내밀한 부분까지 목격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일본인 형사의 취조에 답하는 동안 시적 자의식과 항일의식이 둘일 수 없다는 깨달음으로 강건해지는 그들은 한편으로는 한없이 대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구 없는 현실에 갇힐 수밖에 없는 상황은 영화를 보는 현재의 청년들의 삶에 겹쳐지면서 이 영화에 이중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결국 <동주>의 가장 빛나는 스토리텔링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시각적 재현의 강박에서 벗어나 온전히 두 청년의 우정과 열망, 그리고 윤동주의 시에 집중한 것이다. 이것은 기획과 시나리오, 연출의 긴밀한 소통이라는 전제 없이는 불가능했을 터, <러시안 소설>(2013)로 저예산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지점을 보여준 신연식의 참여가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작품성과 대중성이 서로 배타적인 가치가 아니라는 사실, 저예산영화의 힘을 보여준 <동주>와 같은 영화의 선전을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