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버넌트>, 신화화 된 실화의 매혹
민병선(영화평론가)
영화가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영화는 현실의 질료를 가지고 투사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투사된 이미지는 내면의 속삭임처럼 들리기도 하고,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영혼의 명료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영화가 삶을 탐구하는 가공의 예술이라면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레버넌트>는 그에 걸맞은 흥미로운 작품이다.
19세기 서부 미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레버넌트>(2016)는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의 전설적인 모험가이자 사냥꾼인 ‘휴 글래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물론 아들의 복수를 하기 위한 집념으로 살인자를 추적하는 것은 가공되어진 허구다. 멕시코 국적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내면의 다층적 심리를 스케치하는 데에 탁월한 재능을 드러낸다. 라디오 DJ로 시작해, 방송국 PD 등 다방면의 활동을 통해 사회시사적인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한다. 할리우드로 진출해서는 장편영화를 만들면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대중에게 알린다. 특히 폐부를 찌르는 듯한 인간 본성의 밑바닥을 파헤치는 세공기술에서 빛을 발한다. <21그램>(2003), <바벨>(2006) 같은 작품으로 국제적인 감독으로 도약한다.
광활한 대지,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관통하는 젖줄 같은 강물, 폐부 깊숙이 느껴지는 차가운 공기, 야생의 날 것 같은 원초적인 자연이 화면 가득 펼쳐진다. 짐승처럼 고기를 뜯어먹는 사냥꾼의 거친 몸짓, 화염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은 기다란 총열 끝에 불안감이 매달려있다. 방아쇠를 당길 듯 팽팽한 긴장감이 지배적인 정서로 흐른다. 야만과 인간다움의 경계에서 신화를 써내려가는 감독의 붓끝은 흥미롭다. 사건이 전개되면서 압도된 자연의 광활함은 조금씩 인간 내면의 모습으로 전이되며 본성이란 무엇인가를 투사해 나간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카메라가 느리게 혹은 유영하듯 세밀하게 현상을 포착해야한다. 네오리얼리즘과 유사한 이러한 시퀸스-쇼트가 사실성을 구현한다. 이는 앙드레 바쟁이 말한 존재론적 물음과 맥이 닿아있다고 하겠다.
영화의 사실성에 가장 근접한 기법은 롱테이크일 것이다. 롱테이크에 가장 잘 맞는 사이즈는 롱숏이다. 대개 작가주의 예술영화가 롱테이크와 롱숏을 즐겨 사용하여 조형화된 현실이 아닌, 존재하는 사실 자체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 알레한드로 감독은 한발 더 나아가 꽤나 영리한 선택을 한다. 유럽의 미장센과는 다른 접근방식으로 사실을 추구한다. 롱테이크 효과에 집중하면서도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을 구사한다. 롱테이크 촬영은 날 것 그대로의 가감 없는 사실에 가장 근접하는 유효한 도구일 것이다. 감독은 그 효과를 배가시키기 위해 롱숏에 의한 롱테이크 뿐만 아니라, 바스트 혹은 미디엄 숏에서 클로즈업으로 자유롭게 옷을 갈아입는 롱테이크-무빙을 사용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사실뿐만 아니라 내면의 진실까지 파고들기 위한 전략적인 선택이며 주의집중을 유도한다. 감독의 장점은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도구로서 카메라를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광활한 대륙에 발을 디딘 사냥꾼들은 인디언의 공격을 받는다. 배를 버리고 산으로 피신해 험난한 길을 돌아간다. 휴 글라스(레오나르드 디카프리오)는 인디언 사이에서 낳은 혼혈아들과 함께 사냥꾼들을 인도하는 안내자역할을 맡는다. 그러던 중 곰의 습격을 받는다. 곰에게 습격당했지만 6주 동안 300km가 넘는 거친 산맥을 넘어서 생존을 한다. (그림 1)
“인간이 삶의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과연 어떤 모습을 띠게 되는가, 또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고 싶었다.”고 포부를 밝힌 감독은 인간 내면의 두려움과 상실감에 집중한다. 인물을 빠져나올 수 없는 극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이 감독의 장기인데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실험한다. 관객은 휴 글래스의 상실감, 절망감, 분노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복잡하고 혼란스런 내면 심리에 공감하고 동일한 감정 선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약함은 육체의 한계라기보다는 배신과 절망 때문이리라. 감독은 실화 위에 아들의 복수라는 허구의 이야기구조를 새롭게 만들어 분노라는 감정을 덧씌운다. 부상당한 아버지에게, ‘바람은 뿌리 깊은 나무를 쓰러뜨릴 수 없다’고 속삭이는 듬직한 아들이다. 실화는 점점 신화가 된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휴 글래스는 분노라는 생명줄을 잡고 생존을 위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다. 분노는 주인공을 죽을 수 없게 만든다. 눈앞에서 사랑하는 아들이 살해당하는 모습을 목격한 그는 죽을 수가 없다. 대중이 흥미를 느끼는 지점은 분노가 만들어낸 인간의 의지일 것이다. 거대한 자연 속에서 나약했던 인간은 의지를 가질 때 위대해진다. 휴 글래스는 죽음의 문턱(레버넌트!)을 넘는 순간 신념이 생긴다. 실화는 신화를 만들고, 신화를 통해 인간의 존재를 규명하는 방식이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심리적 주의집중에 탁월한 감독이다. 인물의 외면이 아닌 내면을 담기 위해 공간을 분할하기보다는 사려 깊게 실재를 선별해 관객으로 하여금 실재 그 자체에 있는 것을 체험하게 만든다. 몽타주의 의존성을 덜어내면서, 장인의 손끝에서 세공된 보석처럼, 이미지를 세공하고 발화시켜 감흥을 만들어낸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인물의 감정과 동선을 일치시키기 위해 시간의 순서대로 촬영계획을 잡는다거나 장면을 하나로 연결하는 롱테이크를 사용하기도 하고, 인공적인 조명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광을 활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영화적 효과를 배가시킨다.
감독은 우리에게, 인간은 어떻게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가를 설명한다. 감독은 실화라는 사실의 문을 열고 우리를 초대한다. 그 안에는 삶의 경외감이 있다. 극한의 상황에서 역사는 인간 삶의 모든 것이 된다. 역사는 과거가 아닌 현실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영화가 만들어내는 허구는 이상과 바람일 수 있다. 실화가 신화가 되는 지점이다. 감독은 일관되게 주장한다. 그것은 바로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다. 작가는 생명의 본질과 숭고함을 노래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되놰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