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정>, 장르적 클리셰냐? 시의적 적실함이냐?
박 유 희 (영화평론가, 고려대학교 교수)
<밀정>은 두 가지 독법이 가능한 영화다. 하나는 스파이스릴러로서의 장르 영화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이 영화가 지닌 시의적 의미에 대한 것이다.
우선 스파이스릴러로서 볼 때 이 영화는 익숙하다. 이중간첩이라는 제재 면에서는 <무간도>(맥조휘·유위강, 2002)를 비롯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토마스 알프레드슨, 2012)나 <신세계>(박훈정, 2012)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화가 떠오른다. 그 배경이 일제강점기라는 것을 고려하면 작년에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암살>(최동훈, 2015)이 환기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설정과 분위기는 다르지만 이 영화의 장면들 속에서 문득 문득 <제3의 사나이>(캐럴 리드, 1954)를 마주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이 영화에서는 색다른 장점이나 미덕을 발견하기 어렵다. 경찰의 명령으로 범죄조직에 침투한 주인공이 결국 그 조직에 동화된다는 측면에서 <무간도>나 <신세계>의 박진감을 따라가지 못하고, 식민지시기의 재구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암살>을 능가하지 못한다. 또한 <제3의 사나이> 만큼 서스펜스가 조밀하고 엔딩이 우아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액션의 쾌감이 큰 것도 아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통쾌함과는 거리가 있다. 물론 첫 장면의 밀도 높은 지붕 액션 동선을 비롯해 대비적 명암의 미장센, 블루톤의 정교한 색감 연출 등은 김지운 영화의 감각을 확인시켜준다. 그러다 그렇다 하더라도 김지운 감독이라는 이름을 듣고,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에서와 같은 활달한 액션이나 장르 쾌감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독법으로 읽어보면 어떨까? 이 영화는 철저하게 송강호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영화다. 제목에 걸맞게 여러 밀정이 나오지만, 이 영화를 시종일관 끌고 가는 중심선은 송강호가 맡은 이정출 경부이다. 이정출의 행보는 의열단 핵심요원 김장옥(박희순)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생포하려고 노력하다가 그의 죽음을 목도하는 것에서 시작해 의열단 테러리스트로 경무국 부장 히가시(츠루미 신고)가 참석한 친일 파티를 테러하는 것으로 끝난다. 요컨대 조선총독부 산하 경무국 경부로 출발해 의열단 단원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서사의 인과성이나 개연적 계기는 이 영화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 영화가 1920년대에 식민지 조선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을 소재로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건에 대한 관심은 식민지시기 조선독립운동단체에 이중첩자를 심은 일제 식민지 정책의 간교함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사실 재판 과정에서도 황옥은 자신이 의열단이 아님을 강변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그가 폭탄이 경성으로 운반된다는 정보를 일본 경찰에 알리지 않았다는 정보 때문에 그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이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에서 심은 밀정이 의리를 지키기 위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의열단 투사가 된다는 결말은 ‘식민지조선’의 정황상 개연성이 희박하다.
그러면 현재 21세기 ‘헬조선’은 어떠한가? 경제적 총생산량은 증가하고 굶어죽는 사람도 줄어들었다고는 하는데 결코 먹고 사는 게 수월해진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신껏, 옳고 그름을 따져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은 그렇게 행동한다고 믿더라도 정작 진실로 그러한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대부분 보이지 않는 갑을관계에 묶여 내가 지금 가진 이것이나마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밀정> 속 이정출은 영화에서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우연한 계기로 히가시를 만났고 그의 은혜를 입어 경부에까지 올랐다. 그런데 히가시가 그를 고용한 이유는 과거 그가 독립군과 인연이 있기 때문에 정보원으로서 쓸모가 있어서였다. 따라서 히가시는 이정출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며, 한편으로는 그를 이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감시한다. 이정출 또한 그것을 모를 리 없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인 만큼 히가시를 위해 일하는 것 이외의 대안은 없다. 히가시는 이정출을 최대한 이용하는 방책으로 이정출을 의열단 체포 작전에 투입한다. 그 첫 번째 임무가 이정출의 과거 벗이었던 김장옥을 납아오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첫 국면에서부터 이정출의 태도는 무언가 애매해 보인다. 그는 지금까지 일제강점기 배경 영화에 나오는 밀정들처럼 악독해 보이지도 않고, 특별히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는 처음부터 뚜렷한 신념은 없어 보이는 인간이었고, 어디로 갈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뜨뜻미지근한 구석이 있는 인간이었다. 그러한 인물은 국면이 바뀔 때마다 흔들릴 수밖에 없고, 힘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를 쉽게 따르게 된다. 쉽게 말해 이정출은 줏대 없는 인간이자 현실적인 인간이고, 그래서 보통 사람인 것이다. 그가 옛 친구를 체포하는 일에 가담하는 것도, 의열단에 첩자로 들어가 정태산(이병헌)을 만나고는 그에게 감화되는 것도, 자기 손으로 고문한 앳된 여성 연계순(한지민)의 참담한 시신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도 그가 보통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가 출감하자마자 그동안 보이지 않던 가족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아한 세계>(한재림, 2007)의 생활형 조폭 가장(家長) 강인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실패해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실패가 쌓이고 우리는 그 실패를 딛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는 정태산의 계몽적인 언설을 전하러 온 의열단 학생에게 이정출은 담담하게 “꼭 다시 보세!”라고 말한다. 이 말을 통해 이정출은 정태산처럼 어떤 의미를 성취하기 위해서 싸우는 게 아니라, 매 국면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죽지 않고 다시 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는 의열단의 조직적 테러가 성공하는 게 없다. 조직의 선은 일본 경찰의 정보망에 너무나 쉽게 노출되고, 조직원들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의열단 조직이 보유한 기술도 없다. 그렇다면 지원받고 기댈 데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나마 그것이 경성거리에 나타나기만 해도 눈에 띌 헝가리 무정부주의자 정도이다. 그러니 실패가 거듭될 수밖에 없고, 이문 안 남는다고 문 닫는 가게 형국으로 희망 없는 사업에서 이탈하는 이들이 속출할 수밖에 없다. 조직 (달리 말하면 사업)에서 이탈한 이들이 결과적으로 하게 되는 일은 밀정이고 그들을 일러 배신자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지금까지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서사에서 가장 리얼한 것일 수 있다. 이는 치욕의 역사에 대한 보상심리와 관객의 쾌감을 위해 얼마 되지 않는 승리에만 주목해왔던 기존의 서사 관습을 뒤집은 것일 수 있다. (필자는 이 부분이 영화에서 가장 큰 성취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반복되는 실패에 주목한 이러한 역전이 더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은 그 리얼리티가 현재 우리의 현실과 겹치기 때문이다. 돌파구가 없어 도시락 폭탄에 목숨을 걸고, 하루의 생계를 위해 구걸과 유랑을 해야 했던 식민지조선처럼 지금의 헬조선도 출구와 연대를 못 찾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영어 제목 ‘The Age of Shadows’는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와 적, 선과 악과 같은 이분법은 무의미해진 지 오래다. 그래서 이 영화가 집요하게 보여주는, 밀정이라는 이름으로 경계에 선 인물의 심리적 도정은 우리 시대 보통 사람의 내면과 겹치며 공감을 자아낼 수 있다. 따라서 이 영화의 의의를 따져보자면, 그 동안 김지운 영화의 성취가 주로 거(居)했던 장르영화로서의 측면보다는 오히려 시의적 공감에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볼 때 이 영화의 일등공신은 역시 배우 송강호이다. 송강호가 아니었다면 현실적 개연성을 넘어서는 마음의 움직임에 따른 설득을 이만큼 성취하기는 분명 어려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