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객 섭은낭>, 대의의 모순과 무/협
오 영숙(영화평론가,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
대만의 거장 허우 샤오시엔이 긴 휴지기를 가진 후에 8세기 당나라를 배경으로 한 여성 자객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감독 자신이 직접 제작과 각본 작업에 참여한 이 영화는 무협영화라고 홍보되었지만, 무협으로 범주화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물론, 무술을 가르친 스승이 있고, 그로부터 무공을 전수받아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기술을 구사하는 제자도 등장한다. 고수의 내공을 증명할 민첩한 칼놀림이 제공되고, 권력을 둘러싼 암투 역시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무림 고수들이 자랑할 법한 무술 테크닉의 구사에는 지극히 무심한 편이며, 무엇보다 액션 스펙터클의 분량이 최소화되어 있다. 승부를 겨루는 격렬한 액션이 들어설 자리를 고요한 풍광과 인물들의 고뇌에 찬 표정이 대신 채우고 있는, 무협영화라 하기엔 매우 기이한 영화이다.
무협에서 결코 빠뜨려선 안 될 핵심적인 것이 ‘무(武)’와 ‘협(俠)’이다. ‘무’가 기술이라면 ‘협’은 ‘무’를 통해 지켜내야 할 궁극의 가치이자 정신이다. 정신적 차원인 ‘협’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무협의 세계는 완성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자객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협’이라는 대의는 어떤 것인가. 명료하지는 않다. 감독은 그에 관한 정보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다만, 영화의 앞부분에서 제자에게 살인을 명하며 스승인 가신공주가 했던 “저 놈은 아비를 독살하고 형제를 죽였다”라는 말로 대의의 정당성이 무엇에 기대고 있는지 정도는 짐작해볼 수는 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혈육 살해만큼 도리에 어긋나는 죄악도 없을 것이다.
무와 협이 긴밀하게 결합하며 만들어내는 판타지가 무협장르의 매력이지만, 허우 샤오시엔이 관심을 두는 것은 오히려 무와 협이 균열하는 지점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대의가 갖는 모호함 내지 모순이라는 문제가 놓여 있다. 스승은 제자 섭은낭에게 “검술은 완벽하나 마음이 문제”라 진단하며, 한때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제자를 진정한 협객으로 완성시키려는 의도였겠지만, 스승의 이러한 처사는 사실상 자신이 내건 대의 자체를 모순에 빠뜨리는 것이기도 하다. 제자에게 살해하라고 지명한 전계안은 섭은낭의 옛 정혼자이자 사촌이며, 스승 자신에게도 친조카가 되기 때문이다. 친족 살해를 불사하고라도 지켜내야 할 대의란 무엇인가. 더군다나 혈육 살해를 죄악시하던 대의가 아니던가. 대의를 주저 없이 실천하기 위해서 나 스스로 대의의 내용을 어겨야 한다는 모순이 스승의 명령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섭은낭은 단단한 결의를 품은 영웅이라기보다는 무표정 속에 깊은 번민을 감추고 있는 인물로 재현된다. 그녀의 번민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점에서 유발되는 듯하다. 하나는 그간 수행해온 대의를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하게 되면서 생겨난 고뇌이고, 다른 하나는 타의에 의해 자신의 운명이 정해졌다는 데서 오는 슬픔이다. 영화 곳곳에는 섭은낭의 이러한 번민을 비롯하여 여러 인물들이 취하는 고민의 표정과 몸짓이 포진되어 있다. 이를테면, 정치적 목적에서 낯선 타지로 오게 된 고독한 가성공주를 비롯하여, 어지러운 번민에 휩싸여 있는 전계안, 후회와 자책으로 괴로워하는 섭은낭의 아버지가 다 그러하다. 대부분의 인물들은 어느 한 공간을 응시하거나 뒷모습을 보이면서, 혹은 무언가로 얼굴을 가린 채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행동을 자제하고 이런저런 고뇌에 빠져 있는 인물들의 표정을 단순한 포즈라고 폄하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들은 영화의 호흡을 매우 느리게 만들지만, 그것이 야기하는 감정적 울림이 결코 작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눈여겨 볼 지점은, 인물들의 고뇌와 아픔이 시작된 저변에는 조정 황실과 지방 번진간의 긴장관계가 자리하고 있으며, 어김없이 그에 따른 심적 고통과 불우를 겪고 있다다는 점이다. 서사가 기대고 있는 주된 갈등이 중앙과 주변의 위계와 알력에서 유발된다는 점과 더불어, 갈등하는 인물들이 알고 보면 이런저런 혈연으로 얽혀 있는 관계라는 점까지 덧붙여지면, 이 영화가 쉽지 않은 양안관계를 반영하고 있음을 가늠할 수 있다. 중앙으로 흡수되는 것을 원치 않지만 독립적인 존재로 남아 있기도 어려운 대만의 근심이 영화의 저변에 놓여 있는 셈이다.
영화는 섭은낭이 스승에게 불복의 뜻을 전한 뒤에 신라로 떠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검은 무정하여 성인군자의 근심과는 다른 법”인데 “인륜의 정을 끊지 못하였다”면 검술이 아무리 완벽해도 아직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스승의 가르침이지만, 결의를 다지게 하는 힘이 곧 마음에 있다는 것을 그 스승조차도 모르고 있다. 자신이 제시하는 대의 자체의 모순을 알지 못하는 스승의 존재는 그러므로, 섭은낭의 진짜 성장을 위해서 궁극적으로 넘어서야 할 벽이 된다. 허우 샤오시엔은 자신의 곁을 떠나려는 제자의 등에 칼을 내리치려는 스승의 비겁한 몸짓을 보탬으로써 자율적인 개인의 탄생에 지지와 격려를 보낸다.
자기를 키워준 스승과 결별하고 자기 주도적인 길찾기에 나서는 제자의 행보는 무협 장르의 성격에서 보자면 다소 이질적일 수 있다. 게다가, 대의를 좇으면서도 그 대의의 진짜 내용을 지닐 수 없었던 역설은 무와 협이 서로 어긋날 수밖에 없는 진짜 현실을 드러낸다. 중국 무협의 언어로부터 출발하지만 그 문법의 타협이나 애매한 절충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려는 의지는, 중국에 흡수되길 거부하는 대만인의 자기의식과 만난다. 지극히 영화적인 방식으로 공동체의 운명에 대해 성찰한다는 점이야말로 <자객 섭은낭>의 문제적인 성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