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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터널-신귀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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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재난의 연대기
신귀백(영화평론가)

 

 

풍경을 죽이는 터널

재난영화는 일단 컨셉이 정해지면 대체로 ‘고립무원’에 ‘설상가상’의 상황에서 정의로운 한 개인의 ‘고군분투’가 주를 이룬다. 물론 상황 이전에 전조가 있다. 그러나 <터널>은 일상생활 중 재난발생의 경고를 묵살하는 클리셰를 과감하게 생략한다. 정부의 음모 같이 골 아픈 이야기도 없다. 터널붕괴의 전조는 관객들이 채우라는 거다. 당신들이 이미 숱하게 경험했으니.

<터널>의 주인공은 죽어라 뛰어다니지 앉는다. 수많은 사람들의 처절한 희생도 없다. 피의 <곡성>, 좀비의 <부산행>, 국뽕의 <인천상륙작전>처럼 등장인물도 많지 않아 강력한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도 아니다. 엔딩도 그리 감격스럽지 않아 눈물을 자아내지도 않고. 어떤 사건을 떠올리니 만큼 은유적으로 혹은 ‘영리하게’ 가야만 한다.

트라우마를 지닌 주인공이 아니다. 비싸지 않은 자동차를 탄다. 주말에는 조기축구회에 나가 골키퍼로 뛰는 우리의 이웃은 카드로 주유하고 생수를 받아든다. 딸내미 생일 케이크 정도는 챙기는 평화로운 일상,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꾸었을 텐데. 생일 케이크 클리셰와 주유소 노인의 굼뜬 친절이 준 생수는 생존의 중요한 기반이 된다.

차 있으면 빨리 간다. 차가 있어도 산이 막으면 에둘러야 한다.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기 싫으니 산과 산 사이 터널을 뚫는다. 속도를 위한 터널은 풍경을 무너뜨린다. 그 터널이 무너졌다. 수사가 아니다.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대한 짐작 없이 그냥 무너져버린다. 기아자동차 하도대리점 과장 이정수(하정우)가 통과하자 곧바로 무너졌다. 거두절미. 상식이 무너졌고 한 남자가 갇혔다.

“대한민국의 안전이 또 다시 무너졌습니다.”라는 자극적 헤드카피를 언론은 쏟아낸다. 사회적 관심이 없으면 뉴스가 아니니, 당연하다. “지금 심경이 어떠십니까?”라는 뻔한 질문이 언론사의 알 권리라는 이유로 송출된다. 여기 의로운 소방관이 “방송이 중요합니까? 생명이 중요합니까?” 하고 살 권리를 주장하지만 특종을 위한 방송 미디어의 탐욕과 선정성은 계속 된다. 기시감이 있다.

소방구조대원의 “야무지게도 무너졌어.”에 이어지는 크락션 소리에 갇힌 남자는 반응한다. 재난영화치고 스펙터클이 부족한 실용적인 촬영스타일인데, 추가붕괴를 알리는 문 열린 산타페 자동차가 뒤로 질주하는 장면은 그래도 볼거리다. 자동차 배터리가 만드는 빛, 잘 터지지 않는 핸드폰에 절망하던 남자 곁에 민폐캐릭터 여성이 있지만 감독은 질질 끌지 않고 훅 보내버린다. 구조를 향해 땅 밑을 파내려간 기계는 결국 헛다리를 짚는다. 설계대로 공사시행을 하지 않았기에. 무너진 정황보다 무너질 수밖에 없는 정황적 상식에 관객들은 공감한다. 포인트다. 배터리는 떨어지고 그 자리에 FM라디오가 절대고독을 채운다. 이동진이 진행하는 클래식 음악에 캐릭터가 느끼는 고립감과 희망고문은 배가된다.

재난의 연대기

<타워링>과 <포세이돈>에 이은 재난영화의 연대기를 기억한다. 우리는 스크린이 아닌 실제 역사의 재난연대기를 기억한다. 꽃다운 청춘들의 수장 전후로 한국의 역사는 그 변곡점을 찍을 것이다. ‘다음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 역’이고 그 앞에 지나쳤던 정거장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역이었다. 위기에 대한 면역력을 잃어버린, <소수의견>은 무시되는, 윗선의 지시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경직된 관료제와 사악한 언론집단의 스테레오가 관객들을 절망시킨다.

연대기란 원래 없는 것이다. 짓밟히고 만 고유한 목숨의 꿈이 있었을 따름이다. 수직으로 잘린 산자락이 속살처럼 드러낸 지층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 묻힌 야산 위 키 큰 한 그루 미루나무 가지끝이 가을 햇살처럼 눈부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사라져라, 사라져라, 흔적도 없이 정갈하게 사라져라. 시간의 기슭을 걷고 있는 나그네여. 애절한 목소리는 차오르는 수위에 묻혀가고 있었다. - 허만하 시인의 「지층」

<터널>은 실재한 상황이 아니지만 이 시대의 이정표로서 재난의 연대기에 들어갈 것이다. 그 고유한 목숨의 꿈을 구하기 위한 매뉴얼과 그 시행을 두고 “공장이 어디요?” “미국 몬탈레이” “미국애들 원어로 되어 있습니다.” “번역 중이다.”같은 대사는 <살인의 추억>의 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연대기다.

재난의 연대기에 살을 붙이는 것은 구조대의 회군이다. 정수의 생존과 구조를 두고 여론이 분열되기 시작한 것. 터널안의 생존자보다 새로 지을 터널의 개통에 따른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더 걱정이다. 건설회사의 숙주가 되어버린 관료들은 수익률 때문에 인명구조를 포기하는 지점에 이른다. 부실공사로 인한 붕괴와 침몰, 감시감독은 고사하고 재난에 따른 매뉴얼도 없는 정부의 시스템 부재, 늑장대응 모두 우리시대의 자화상이다. 그렇다고 치자. “국민들도 그만하자, 65%가 넘었다.”라며 남편의 구조를 포기해야 하는 서류에 사인을 해야 하는 아내의 장면은 이 재난의 연대기를 더욱 의미 있게 만든다.

영화는 “저기 사람이 갇혀있습니다.”와 “죽은 사람 한 명 꺼내자고 이게 무슨 일인지?”로 대표되는 순장 아니면 묻어두기의 의견대립을 묻는다. "도롱뇽이 아니라 이 안에 갇힌 것은 사람이다."란 구조대장 대경의 대사가 주는 호소력은 피해자를 또 다른 원인제공자로 모는 시대의 폭식투쟁에 대한 감독의 메시지다.

설계도와 다른 시공으로 17일 동안 허탕질했고 배터리는 바닥난 상황에 개사료까지 먹게 되는 생존자를 두고 도롱뇽 논쟁이 벌어진다. 극적인 구조과정보다는 영화 바깥 시퀀스가 더 먹먹해진다. 오히려 밖에 있는 사람들이 더 고난을 당한다. “너 때문에 우리 아들이 죽었다.” 피해자를 가해자로 대하는 모습에 관객들은 공감하고 공분한다. 어떤 잠수사의 죽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남자는 용감한 소방대원에 의해 구조된다. 엔딩 전 동물병원에 있는 텔레비전에서 국민안전처장관의 담화가 나올 때, 개들이 짖는다. 즉각적으로 이해되는 내러티브 때문일까? 하정우의 경험이 내가 처할 수 있다는 기본적 공감대를 갖고 간다. 개인적 경험의 집단화는 당연히 세월호가 준 학습효과다. 감독이 제시한 우리 사회의 원근법은 오래되고 허름한 코트의 배두나의 민화장과 들뜨지 않는 연기가 조용히 말해준다. 소란스럽거나 뜨겁지 않음으로 고통을 나타내는 좋은 배우다.

집에 가자

절망과 후회의 재난이 낳는 사회적 분위기는 글을 쓰는 작가나 감독의 사유에 영향을 미친다. 사회의 윤리적 태도는 감독의 세계관과 맞물려 이것이 한 이년 쯤 뒤 스크린에 등장한다. 2015년 <베테랑>에서 돈과 ‘가오’를 이야기했다면 2016년에는 생명이나 안전이 테제다. 영화가 다루는 세계와 플롯에 대한 실천에 성공한 김성훈 감독의 윤리적 태도는 작은 희망을 보여주지만, 영화에서 학습된 관객들은 터널을 지날 때 천정의 환풍기 숫자를 센다.

<터널>은 순장당하지 않고 붕괴를 빠져나온 남자를 통해서 우리 사회가 재난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영화다. 관료나 언론의 비틀기는 웃픈 재미를 선사했다. 남편을 포기하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위로해야 하는 장면은 세금을 내는 정부에 대한 통찰과 인간에 대한 정서적 복잡성을 드러낸다. 메시지 전달로 인해 영화를 감동으로 보는 지점보다 영화를 사회학으로 보는 일은 사실 좋은 경험이 못된다. 관객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매혹의 지점이나 우리가 왜 이렇게 됐는가 하는 원인을 밝히려 하지 않는다. 다 학습되어 알고 있어서 그랬을까?

배가 잠기고 있어,/ 내가 잠기고 있어,/ 마침표 같은 건 찍지 마, 돌아오고 말 테니,/ 꺾어도 가만있는 꽃 같은 건 되지 않을 거야,/ 증언도 못하는 새도 아니고 물고기도 아니고,/ 반드시 사람으로, 난, 다, 시, 와, 야, 겠, 어, -김해자 시인의 「김동협-2014년 4월 10일 09:10」부분

정부의 무능과 인명경시를 풍자한 <터널> 그리고 김해자 시인의 시는 ‘그해 사월’ 이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을 기억하게 만든다. 최근 모 신문의 만평은 ‘우리를 구하러 올 국가는 아예 없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구조를 기다린 흔적은 또 가까이에 있었다. 며칠 전 막을 내린 제16회 전북독립영화제의 슬로건은 ‘너랑 걷고 싶다’였다. 이 영화제의 트레일러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봄날, 남학생의 볼에 입을 맞춘 여학생은 바퀴달린 가방을 끌고 출발한다. 그리고 발밑에 벚꽃만 휘날린다. 짧은 영상이었다. 아이들에게 ‘집에 가자’라고 말할 수 없을 때, 터널에 묻히고 갇힌 말들이 일어서 촛불로 타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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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2017-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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