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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헤이트풀8-문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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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트풀8>,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문성훈(영화평론가)

 

쿠엔틴 타란티노가 여덟 번째로 연출한 <헤이트풀8>은 방대한 레퍼런스에 기반을 둔 그의 영화광적 감수성이 빚어낸 또 한편의 흥미로운 영화다. 숱한 평자들은 이 영화를 두고 <장고: 분노의 추적자>(이하 <장고>)에 이은 타란티노의 ‘변종 서부극’이라 칭하였는데, 동서고금을 망라하는 지독한 영화애호가로서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에서부터 엿보인 그의 무국적 취향을 고려하자면 ‘장르적 변종’은 타란티노의 작품세계를 아우르는 주요한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장엄한 스코어가 흐르는 가운데, 한 대의 역마차가 광활한 설원을 느릿하게 가로지른다. 70mm 필름으로 촬영된 <헤이트풀8>의 첫 장면은 타란티노가 이미 <장고>를 통해 표명한 바 있는 스파게티 웨스턴에 대한 경도, 혹은 모뉴먼트 밸리로 상징되는 존 포드의 세계를 연상시킨다. 마치 장르의 시원(始原)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이러한 환기작용은 역마차 속 인물들이 ‘미니의 잡화점’으로 들어선 지점에 이르러 관객들의 장르적 기대를 배반한다. 실상 <헤이트풀8>은 초반부 시퀀스와 일부 플래시백 장면을 제외하면 서사의 상당 부분이 실내공간에서 전개되는 영화다. 과거의 웨스턴 장르물을 연상시키는 영화적 장치(드넓은 평원의 눈 덮인 풍경, 엔니오 모리꼬네의 사운드트랙, 1960년대 할리우드 에픽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2.76:1의 화면비율)들로 관객들을 유인한 타란티노는 풍경이 거세된 낡은 오두막 산장으로 8인의 군상들을 집어넣은 후, 마치 <저수지의 개들>을 연상시키는 밀실 심리극으로 극의 향방을 비틀어 버린다.

‘미니의 잡화점’은 <저수지의 개들>의 주요 무대가 되는 허름한 창고, 혹은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에서 후반부 참혹한 유혈극이 펼쳐지는 쇼사나의 극장처럼 <헤이트풀8>의 인물들을 둘러싼 의심과 불화가 막연한 의혹을 넘어 파국의 임계점을 향해 치달아 오르는 연쇄적 상황의 근간이 된다. 그리고 이 무대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엄혹한 풍경으로부터 졸지에 고립되어버린 인물들을 웨스턴 장르의 세계로부터 (아가사 크리스티를 연상케 하는) 미스터리 장르의 미궁 한가운데로 끌어들여 재배치시킨다. 이러한 장르의 변이 과정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것은 영화 중반 맥락 없이 삽입된 감독 자신의 내레이션이다. 커피가 끓는 주전자에 독극물을 섞은 암살자의 정체, 그리고 이러한 독살기도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여죄수 데이지 도머그의 꿍꿍이는 타란티노의 내레이션을 통해 미스터리 장르 특유의 긴장을 조성하며, 베일에 가려진 나머지 산장 속 사내들의 정체에 관한 호기심을 배가시킨다.

<재키 브라운>을 제외한 자신의 모든 연출작들을 시네마스코프 비율(2.35:1)로 촬영한 바 있는 타란티노는 특이하게도 1960년대 이후 할리우드의 제작현장에서 자취를 감춰버린 울트라 파나비전 포맷으로 <헤이트풀8>을 촬영하였고, 그로 인해 이 영화는 현대의 관객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2.76:1의 화면비로 상영되었다. 타란티노의 영화들에서, 카메라에 담긴 세계는 수평이 강조된 ‘횡(橫)의 세계’이며, 이는 그의 전작들 가운데 가장 폐쇄된 공간을 배경으로 삼은 <헤이트풀8>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트래킹조차 무용한 이 협소한 무대에서, 애너모픽 렌즈는 마치 산장 내에 자리한 8인의 무리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기라도 하듯, 풍경이 사라진 스크린 속 프레임을 인물들의 표정과 몸짓으로 고스란히 채워나간다. 커피에 독을 탄 독살범이 누구인지를 추리하려는 현상금 사냥꾼의 기세는 산장 내의 여타 인물들, 즉 횡의 세계에 초점을 맞춘 시각에 다름 아니지만, 지하 공간 어딘가에서 그의 사타구니를 겨냥한 숨겨진 불청객, 즉 카메라의 틸트다운으로 드러난 산장의 비밀은 횡의 세계 이면에 감춰진 ‘종(縱)의 세계’를 자못 충격적으로 제시한다.

나치 득세시기의 유럽을 다룬 <바스터즈>는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의 수뇌부뿐 아니라 그를 제거하려는 연합군의 일원들마저 영화 속 희화화의 대상으로 삼았고, 여기서 더 나아가 영화가 소재로 삼은 실제 역사마저 뭉뚱그려 타란티노식 난장의 무대로 그려내려 하였다. 남북전쟁 시기를 다룬 <헤이트풀8>에서도 제각기 남군과 북군의 가치관을 체화한 인물들은 그들 나름의 정치적, 인종적 신념으로 인해 배격과 충돌을 거듭하지만, 실상 그들이 공통적으로 내세운 공동체에 대한 막연한 긍정은 한낱 무정부주의적 집단의 사사로운 범죄행위로 인해 무참히 산산조각 나버린다. 노예제를 혐오하는 흑인 현상금사냥꾼과 남군에서의 복무경력에 자부심을 지닌 백인 보안관은 서로를 증오하는 사이지만, 먼저 세상을 떠난 교수형집행인의 뜻을 좇아 그를 대신하여 여죄수 도머그를 목매달아 죽인다. 이미 총에 맞아 죽음을 앞둔 두 남자가 구태여 공권력을 자처하며 사형집행을 수행하는 모습은 언뜻 기괴해 보일 정도로 우스꽝스럽다.

<역마차>의 존 웨인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공동체의 일원들을 구해내지만, 범법자로 낙인찍힌 그의 신분으로 인해 행선지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금 떠돌이 신세에 처하게 된다. 존 포드는 자신의 서부극에서 그러한 패배자들을 역사의 이면 속에 스러진 영웅들로 규정하였다. <헤이트풀8>에서 서로 다른 배경으로 대립하던 두 인물은 신의 존재와 보편적 정의를 들먹이며, 공동체의 가치를 부정한 여죄수를 응징함으로써 자신들의 하찮은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하지만 참혹한 사형집행 현장을 담은 카메라의 시선은 그들에게 어떠한 영웅적 칭호마저 부여하지 않는다. 타란티노는 말한다. 서부의 세계에서 더 이상의 영웅은 없으며, 영웅이 떠나버린 자리엔 그저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체들만 그득할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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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2017-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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