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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작 장평

실화는 사연이 아니다
- <카포티> <머니볼> <폭스캐처>의 베넷 밀러 작가론
손시내(영화평론가)

 

 

연초에 꼬박꼬박 챙겨봤던 뉴스 중 하나는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이었다. 알파고는 구글에서 개발한 인공지능으로 비단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과 기계의 대결’과 같은 타이틀로 세계적으로 꽤나 주목받고 있는 화두의 중심에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바둑이 체스 등과 달리 기계가 인간을 이기기 어려운 게임이라고 여겨져 온 이유 중 하나는 수리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세력’이나 ‘두터움’과 같은 개념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을 지켜보며 해설자들은 알파고의 세력과 두터운 수에 대해 말했다. 이상한 일이다. 인공지능이 알 수 없다고 여겨지는 개념이 어떻게 등장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문용직 전 프로기사는 칼럼을 통해 다음과 같이 썼다. “언어는 본래 수단이라 형상만 판별할 수 있다면 두터움이라는 개념은 몰라도 된다.” (중앙선데이, 2016.03.04. “1000년치 공부한 알파고, 프로의 ‘감’도 형상으로 소화”) 바둑은 형상의 놀이이며 알파고가 검토했던 수많은 기보들은 모두 형상의 데이터베이스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굳이 두터운, 그래서 좋은 수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그 수는 그곳에 있는 최선의 수가 된다. 어떤 설명도 사연도 허락하지 않은 채 형상만으로 진행되는 놀이, 여기엔 이상한 감동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즉각적으로 어떤 이론을 떠오르게 만드는데, 바로 베넷 밀러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 <머니볼>이 소재로 삼은 머니볼 이론이다. 머니볼 이론은 영화에서도 소개되는 것처럼 오직 출루율을 기준으로 삼아 야구라는 게임을 짜나가는 이론이다. 선수 개개인이나 구단 전체가 직면하는 어떤 서사적 감동이나 사연도 없이 오직 수와 규칙으로 형상화된 야구가 주는 형식적인 감동이 바로 그런 접근 방식에 있고 그것을 느끼게 했다는 것이 <머니볼>의 중요한 성취이다. 그런데 알파고의 바둑과 머니볼 이론을 가로지르는 이 아이디어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영화’의 형식을 떠올리게 한다.

특정한 내용을 전달하는 정교한 서사 예술로서의 영화. 흔히 ‘낭비되는 숏 없음’으로 통칭되는 고전적인 이러한 방식은 ‘모던함’과 대비되는 준거틀로 쓰이거나 상당히 보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사실은 영화가 이미 물질적인 예술이라는 것을 지칭한다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내용을 더 사실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리얼리즘적인 형식과 전통들은 위의 말을 빌자면 축적된 형상의 데이터베이스라는 뜻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바둑판 위의 돌과 야구장 위의 사람이 다르듯이, 또한 야구에 단순히 규칙과 수로 환원되지 않는 홈런과 역전의 순간들이 있듯이 영화에 기계적으로 ‘형상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대입할 수는 없다. 모든 상황이 통제되고 모든 컷이 정교해도 영화에는 필연적인 여백과 잉여가 생기기 때문이다. 흔히 이것은 발견하는 쪽의 기세등등함이 되어 영화비평의 주된 근거가 되어주지만 사실상 모든 영화는 이러한 여백과 잉여를 어떻게든 감지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영화에 새긴다. 숏의 길이와 크기, 배열을 통해 내용을 ‘형상화’하지만 아무리 정교해도 어긋나고 말아버리는 형식상의 특징을 가진 ‘영화’, 그리고 그 영화가 실화를 다룰 때 벌어지는 일. 세 편의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든 베넷 밀러의 영화에는 바로 그런 질문들이 새겨져있다.

<카포티>, <머니볼> 그리고 <폭스캐처>에 이르면 베넷 밀러의 장기는 숏과 씬을 짜나가는 정교함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물간의 관계를 앵글과 숏 사이즈로 나타내기, 좁은 공간에서 인물들의 동선을 통해 숏 사이즈 변화시키기, 대립되는 인물을 공간과 색채를 통해 표현하기 등 마치 모범답안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또 공간을 채우고 있는 갈등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침묵의 순간들은 마치 숏이 터질 듯한 긴장감을 주기도 한다. 각기 배치된 자리에서 제 할 일을 해내며 전체적인 그림을 완성해가는 이러한 영화의 배열에는 각각의 자리를 감당하며 운동을 완성시키는 머니볼 이론을 보는 것 같은 더없이 무심한 성실함이 느껴진다. 그런데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이처럼 개별적인 장면들은 더할 나위 없이 정교하고 꽉 들어차있는데 전체적인 배열은 어딘가 비어있거나 또 부분적으로 넘친다. 이는 메워지거나 깎여지기를 거부함으로서 그럴듯해지거나 안정적이 되지 않고 균형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것은 정교한 영화의 단점이 아니라 중심이 되는 특징이 된다.

<폭스캐처> 이후의 영화가 나오지 않은 지금까지 그러한 특징들은 세 편의 영화가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는 것과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으리라 여겨진다. 실화를 대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망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건의 비밀’, ‘그날의 진실’과 같은 표현들로 대표되는 이른바 퍼즐 맞추기일 것이다. 트루먼 카포티가 마지막으로 남긴 베스트셀러 <인 콜드 블러드>에 얽힌 소문들과 진실, 가난한 구단인 오클랜드 에슬레틱스의 20연승 신화, 듀폰 가문의 부유한 남자가 벌인 의문의 살인사건. 이 사건들을 정교하게 재현할 수만 있다면 진실에 한걸음 더 다가서게 되는 것일까. ‘실화’가 주는 강렬한 이야기와 영화 매체가 만났을 때의 힘은 필연적으로 매혹적일 수밖에 없는가. 세 편의 영화는 마치 여기에 대한 대답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베넷 밀러는 사실상 이 질문들을 조금씩 변형시키고 있다. 영화에는 어차피 그 자체만으로도 간극이 있는데, 그것이 실화를 재현하려고 할 때 완벽한 재현을 목표로 삼는다면 그 야심은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끝나버리는 것이 된다. 어떤 영화들은 그 격차를 그럴듯하게 메꾸고 다림질한 매끈한 표면을 갖지만 베넷 밀러는 그런 데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는 차라리 영화가 재현할 수 있는 것이 다른 데에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사건의 중심 혹은 비밀에 다가가야 하는데 오히려 다음과 같은 생각에 휩싸이게 된다. 실화는 단일하지 않다. 실화는 사연이 아니다. 꼭 맞춰진 퍼즐 같은 사연이 아니라, 오히려 단 하나의 진실이나 그날의 비밀 같은 것이 없이도 성립되는 이야기와 인물의 궤적. 사건의 비밀이 아니라 이곳저곳에 흩어진 사건의 형상. 이미 드러난 것들의 재배치. 어쩌면 우리가 사건의 본질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러한 형상과 배열에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가 무언가를 재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면이 아니라 차라리 형상과 배열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에서 출발하면 (장편 극영화)데뷔작이기에 종종 지나치곤 하는 <카포티>의 흥미로운 지점이 보인다. <카포티>는 내용으로 삼은 그 ‘실화’ 자체가 어떤 사건의 감춰진 진실을 기록하거나 설명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영화를 볼 때 마치 이중창을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트루먼 카포티(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는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사교계의 중심인 인물로 일가족 살인사건을 접하고는 이를 기사로 쓰기 위해 사건을 취재하기 시작한다. 취재 중에 사건의 범인이 잡히고 카포티는 바로 이 범인을 취재해 책을 쓰려고 한다. ‘그날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범인을 취재하던 카포티는 그에게 감정적으로 동조되고, 자신의 야심을 위해 그를 이용하는 것과 그에게 느끼는 모종의 감정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 심리적인 갈등이 영화의 중심축이 되지만 카포티가 강박적으로 ‘그날의 진실’을 듣고 싶어 하며 그것을 들어 책을 쓸 수만 있다면 진실된 기록으로서의 소위 ‘역작’이 나오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또 다른 쟁점이 된다. 이 영화에는 단 한 번의 플래쉬백이 등장한다. 바로 범인인 페리가 카포티에게 마침내 ‘그날의 진실’ 즉 살인사건이 일어나던 날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순간이다. 카포티는 이 말을 듣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해주고 페리가 사형당하지 않기를 바라며 페리의 각별한 친구가 되고 책의 출간을 미루며 지금까지 기다렸다. 이제 이 이야기만 들어 책을 완성하면 실화는 완결된 사연이 된다. 화면에 가득 찬 창백하고 어딘지 아름다운 구석이 있는 페리의 얼굴이 회상하는 살인 장면은 앞서 언급했듯 이 영화의 유일한 플래쉬백이다. 영화는 서사의 빈 곳을 메워 사건을 납득가능하게 만들고자 이 장면을 쓴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까 이 플래쉬백은 잉여이며 서사적으로 어떤 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러니 이 플래쉬백은 오직 카포티를 위한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완결된 사연을 원했고 그날의 비밀을 들어 퍼즐을 맞추고자 했던 그에게 이 장면은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역설적으로 ‘진실’을 듣고 그것을 끼워 맞추고자 하는 노력의 어긋남을 떠올리게 한다. 어쩐 일인지 카포티는 이후 단 한권의 책도 쓸 수 없었으며 페리는 사형되어 그의 삶에서 떠나갔다. 영화는 그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과 주석이 되는 대신 영화 전체가 공평하게 나눠가진 감정과 궤적만을 그린다.

<머니볼>의 장점에 대해서는 아무리 말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대신 그 장점은 이러한 말로도 번역되는데, 도무지 단점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자칫 영화가 특출나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되기도 하며 어떤 관점에서는 그것 역시 사실이다. 제한된 자본으로 구단의 선수들을 뽑고 운영해야 하는 단장이 있고 그의 속내는 왠지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그는 ‘머니볼 이론’을 가져와 구단에 새로운 운영방식을 도입하고 우여곡절을 거쳐 20연승이라는 믿기지 않는 역사를 쓴다. 단장 빌리 빈(브래드 피트)의 무심하지만 외로운 얼굴, 인물들 사이의 동선과 구도, 분위기를 문득 환기하는 사운드를 비롯한 안정적이고 정교한 연출만으로도 <머니볼>은 그해의 주목할 영화들에 이름을 올릴 자격이 있지만 나는 역시 영화가 소재로 삼은 실화, 더 자세히 말하자면 ‘머니볼 이론’ 자체에도 관심이 간다. 여기에 주목할 때 이 영화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 영화는 현실의 ‘머니볼 이론’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었으며 지금은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를 따져 묻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며 이는 실화를 소재로 했거나 책을 각색한 영화에 모두 해당되는 말이다. 하지만 영화의 초반부에서 설명하는 ‘머니볼 이론’은 분명히 영화의 작동 방식과도 관계가 있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이 이론은 선수의 나이, 외모, 사생활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출루율로만 선수의 가치를 산출하는 것인데, 차트와 수식을 비추는 화면이 그 이해를 돕는다. 이 이론이 야구를 얼마나 제대로 설명해주는지 나로서는 확실히 판단할 길은 없다. 그러나 초반부의 이 장면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며 자세를 고쳐 앉게 한다면, 한 인물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 사람의 사연과 내면이 아니라 사람의 운동성과 좌표에 있다는 데에서 오는 이상한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카포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플래쉬백은 서사의 구멍을 메꾸는 용도로 사용되지 않는다. 진학을 포기하며 프로 선수로 스카웃 되었지만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지금의 자리에 이르게 된 빌리의 과거를 보여주는 플래쉬백은 언뜻 빌리 빈이 왜 그토록 머니볼 이론에 집착하며 구단의 모든 사람과 부딪히는지에 대한 대답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의 내면에서 머니볼 이론이 이해되어가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 훨씬 적합한 것 같다. 빌리의 일상에 문득 끼어들어 그를 생각에 잠기게 하는 플래쉬백들은 온통 빌리의 선수로서의 자질과 그 미래에 대해 관계자들이 늘어놓는 장광설과 어린 빌리의 운동으로 뒤섞여있다. 말하자면 이곳에서 말과 운동은 충돌한다. 말로 매개되는 설명과 경험 대신 수식으로 산출되는 운동과 좌표를 믿는 것. 빌리는 여기에서 시작해 그것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 보기로 하는 것이다.

영화는 빌리 빈이 그런 것만큼이나 머니볼 이론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다. 말하자면 실화란 결코 말로 설명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에는 중계방송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텔레비전의 화면, 라디오의 음성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구단과 머니볼 이론에 대해 논평하고 미래를 점쳐보는 내용들이다. 시즌 초반의 부진에 대해서는 역시 머니볼 이론이 통할 리 없다며 빌리 빈의 독단에 대한 질타가 주를 이루고 경기가 풀려나가자 야구란 통제할 수 없는 우연들의 종합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진다. 마침내 20연승을 이루었을 때는 도무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플레이오프에서 패했을 때는 머니볼 이론은 단지 이론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 일은 단지 일어난 것이고 이론은 매 경기가 개별 선수들의 출루율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지 설명해 줄 수 있을 뿐이다. 화면을 가득 메우던 구장의 함성소리가 녹화된 화면으로 바뀔 때, 빌리 빈은 이 모든 말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곁가지로 만들어버린다. 개별적인 장면은 너무나도 정교한데 그것이 향하고 있는 주인공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포커스를 벗어나버리는 것이다. 대신 그는 움직인다. 차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고,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채 끊임없이 먹고, 자신이 있을 좌표를 찍어 궤적을 그린다. 그의 모든 것은 바로 그런 움직임에 있다. 빌리의 가장 개인적인 순간들은 다름아닌 달리는 차 안에 있다. 영화 <머니볼>과 머니볼 이론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영광의 20연승의 가장 마지막 마침표가 홈런이라는 데에 있다. 그러니까 이 일은 머니볼 이론만 가지고는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혹은 이것이 머니볼 이론의 공백이다. 우리는 이 믿기지 않는 일에 얽힌 사연을 쫓아 왔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에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물을 수 없고 찾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결국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스카우터들과 단장의 대립이나 가난한 구단의 고군분투가 아니라, 어느 마이너리거의 홈런을 바라보며 이래서 야구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빌리 빈의 중얼거림이다. 여기에는 이야기가 주는 감동을 훨씬 초월해버리는 형식과 형상에 대한 믿음이 있다.  

 

 

베넷 밀러는 준비하고 찍는데 8년이 걸렸다고 말한 그의 세 번째 장편영화 <폭스캐처>로 그해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앞의 두 영화와 마찬가지로 안정적이면서도 묵직하고 정교한 연출을 통해 인물들의 심리와 관계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합당한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영화의 초반부 마크 슐츠(채닝 테이텀)과 데이브 슐츠(마크 러팔로)의 첫 레슬링 연습 장면만으로도 한마디의 대사 없이 두 사람의 관계와 심리를 보여주는 연출은 보는 이들을 감탄하게 한다. 혹은 존 듀폰(스티브 카렐)이 인정받기를 바랐으나 끝내 그렇게 되지 못한 그의 어머니와의 관계를 보여줄 때, 어머니의 붉은 색과 존의 파란색의 대비를 통해 갈등과 마찰을 시각화 하는 것도 탁월하다. 숏의 길이를 조절하는 것 역시 이 영화에 이르면 완전히 일정한 경지에 오른 것처럼 느껴지는데, 여기에서 그만 끝나야 할 것 같다고 느끼는 데에서 조금 더 침묵을 가져감으로서 긴장감을 극대화 하고 밀도를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사격 연습을 하는 존에게 환호성을 지르는 선수들을 바라보는 존의 반응 숏은 긴장이 축적될 만큼의 시간을 가진 뒤 바로 다음에 연습장으로 향한다. 손에 총을 들고 있는 존의 침묵은 이 장면에서 거의 터지기 직전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존의 행동과 긴장감은 ‘정적인 동작’이라는 모순된 단어를 통해서 어렴풋이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더불어 이 영화에 이르면 베넷 밀러의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를 대하는 방식이 훨씬 입체적이면서 동시에 더욱 단호해진다. 실제로 부유하고 명망 있는 가문의 존이 레슬링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데이브 슐츠를 총으로 살해한 사건은 미국 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불러 일으켰고 겉으로 드러난 모든 것은 실체인 동시에 강력한 은유로 작용했으며 영화도 그것을 숨기지 않는다. 이를테면 존 듀폰은 애국자, 도덕, 영웅, 롤모델, 국가를 위해 해야 하는 일 따위의 말로 세상 안에서 존재하려는 인간이었고 그 말은 고스란히 마크에게 전염된다. 이는 존이 마크에게 코카인을 권유하고 마크가 얼마간 그것을 흡입하는 장면으로도 반복된다. 혹은 존은 총이나 탱크와 같은 전쟁무기에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는 인간이기도 했다. 그는 끝까지 그의 어머니와 불화했으며 자신의 인생에서 비어 있었다고 여겨지는 아버지의 자리, 혹은 데이브가 표상하는 형이자 멘토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했다. 혹은 그는, 마크의 육체에 매혹되었다. 또는 결국에는 존이 데이브(로 상징되는 아버지)를 죽였고 그 역시 비참한 말로를 보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설명들을 다 합해봐야 존이 고개를 살짝 들고 침묵하는 한 순간을 이기지 못한다. 이곳의 진실은 오직 그의 몸에 있는 것이다.

데이비드 핀처의 <조디악>에는 마크 러팔로가 주연 배우로 등장하는데, 그 배역의 이름은 <폭스캐처>에서와 동일한 ‘데이브’이다. 이름도 같지만 두 배역은 미국의 전형적이고 조금은 이상적인 ‘가장’이라는 데에서도 모종의 동일함을 갖는다. 더 나아가서 두 영화의 비슷한 구석이 또 있다. 두 영화 모두 미국에서 일어난 실화를 다루고 있으며 그 ‘사연’의 비밀과 조각을 맞추기보다 드러난 사실들을 통과해가는 인물들의 시간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단순히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어느 한 조각을 빈칸에 끼워 넣으면 더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없어지게 되어 결국 퍼즐 맞추기를 포기하게 된다는 점도 비슷하다. 의문의 연쇄살인범이 등장하는 영화 <조디악>은 후반부로 향하며 강력한 용의자가 둘로 압축되는데, 각각은 매우 유력한 정황증거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등장인물 중 한명은 그 용의자의 코앞까지 가게 되고 이는 영화의 가장 긴장되는 장면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 두 용의자들은 결코 동시에 용의자일 수 없고 영화 내내 흩뿌려진 수많은 증거들은 그 둘 중 어디에 끼워 맞춰도 대충 말이 된다. 하지만 다른 한 쪽이 붕 떠버리므로 이는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없다. 그러니 애초에 이 영화에게 중요했던 것은 ‘범인 찾기’가 아닌 셈이다. 영화가 이해하는 ‘조디악 사건’이란 그에 연루되어 20여년이라는 긴 시간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들의 삶의 모습과 조디악이 언론과 경찰에 보냈다는 ‘퍼즐’로 대표되는 사건의 모호성이다. <폭스캐처>가 자신의 이야기를 대하는 방식도 이와 비슷하다. 심지어 이 영화는 존이 데이브를 총으로 쏘는 장면을 마치 에필로그인 것처럼 찍고 있다. 이때 시간은 아득하게 건너가 있고 존은 겨울이라는 계절을 닮은 것 같이 창백하다. 이 장면은 마치 본편에서 떨어져 나온 주석처럼 보일 정도여서 어디에서도 인과관계를 찾기가 어려워 보인다. 차라리 그에 이르는 존과 마크, 그리고 데이브를 이루는 삼각형의 배치와 역학관계에 영화는 훨씬 관심이 많다. ‘그날의 진실’같은 것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거나 말할 수 없다고 여기고, 굳이 원인을 찾으려면 어떤 것이든 대충 비슷하게 맞아 떨어지지만 그것이 결코 온전한 설명이 될 수는 없다는 것, 오히려 그런 진실이나 비밀 같은 것이 없어도 대등하게 성립되는 것이 바로 ‘실화’이라고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폭스캐처>에서도 단 한 번의 짧은 플래쉬백이 등장한다. 헬기 안에서 코카인을 나눠 흡입한 이후로 두 명의 친한 어린아이 혹은 연인 같은 관계가 되었던 존과 마크의 관계에 균열이 일어나는 장면에서다. 존은 어렸을 때 자신에게 있었던 단 한명의 친구가 사실은 존의 어머니가 돈을 주고 그와 친하게 지낼 것을 부탁했던 가정부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마크에게 밝힌다. 다음 장면은 존이 아마추어 레슬링 대회에 나가는 것인데 이때 마크는 상대 참가자에게 돈을 주고 존을 승리하게 한다. 존은 그 우승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냉소와 무시다. 존은 그대로 마크에게로 가서 당장 데이브를 데려오라고 말하며 욕설을 퍼붓는다. 이제 마크는 전혀 다른 좌표로 튕겨져 나간다. 그는 스스로 머리를 짧게 밀면서 존과 함께 대회를 준비하기로 했던 이후의 일들을 차례로 회상한다. 아니 거의 스쳐 지나간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단 한차례의 플래쉬백은 여기에 쓰인다. 과거로 돌아가 공백을 메우거나 시점을 다각도로 변화시키는 것은 여전히 사건을 이해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 연쇄된 장면은 말로 설명하면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존은 여전히 돈을 주고 친구를 만들어 줘야 하는 어린 시절 그대로인 인물이라는 듯이 아마추어 레슬링 대회에서 돈의 대가로 승리했다. 이때 상대편 선수를 바라보는 마크의 자리는 흡사 어머니의 자리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존과의 균열을 느낀 이후의 마크는 갑자기 어린 아이가 된 것처럼 분노한다. 이 자리에 놓인 세 컷의 플래쉬백은 이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직 마크 자신에게만 귀속되어 있다. 차라리 중요한 점이 있다면 마크가 이를 회상하는 방식이 매우 촉각적이라는 것이다. 마크는 몸을 통해 생각하는 사람이다. 또한 한번은 존이 또 한 번은 마크가 ‘아들’의 자리로 자리바꿈하는 두 장면의 연쇄만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모든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필연적인 어긋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베넷 밀러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납득 가능한 ‘사연’ 자체를 공백으로 만들어버린다. 우리가 영화를 보고서 논리적으로 무언가 귀결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틈새가 메꿔진 사연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숏과 숏의 연쇄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 연쇄가 매끈하면 매끈할수록, 규율과 규칙을 더 정교하게 지킬수록 영화는 사실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어떻게든 그 어긋남과 착시를 껴안아야 하고 사실상 모든 영화는 이 지점을 건너가며 자신의 태도를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실로 영화 같은 이야기’라고 말하며 놀라워하는데, 비록 상투적이며 스펙타클함을 지칭하는 용도로 쓰인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언급 속에 이미 영화의 특성이 얼마간 들어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베넷 밀러는 ‘영화 같은 이야기’를 영화화하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 작가이며 규칙과 규율에서 벗어나지 않고도 단일하게 서사화된 사연이 아니라 형상과 움직임에서 비밀과 감동을 찾고자 하는 고집스러운 ‘영화’감독이다.

개인적으로 흥미가 생긴 지점에서 시작해 베넷 밀러의 영화들에 대해 말해보았지만 아직 말하지 못한 것이 있다. 바둑판위의 돌이나 야구장 안의 선수로 표현되는 각각의 움직임이나 형상이 일반적으로 영화에 오면 숏의 물리적 길이 등으로 여겨져 ‘물성’이라는 표현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영화의 ‘표면’에 대해 말하면서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그것은 ‘배우의 몸’이다. <폭스캐처>에 이르면 거의 몸의 영화라고 불러도 될 정도인데, 각각의 몸은 캐릭터의 성격이나 처지를 말해줌과 동시에 그 공간에서 특정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인상을 준다. 또한 몸의 밀착과 부딪힘이 그 어떤 말보다 인물간의 관계를 자세히 말해준다. 베넷 밀러는 사건의 비밀보다 사건의 형상에 관심이 많은 감독이므로, 이때의 사건의 비밀은 인물의 내면으로 바꿔보아도 될 것 같다. 그렇다면 배우가 표현하는 것 역시 내면의 갈등과 분열이 아니라 표면과 형상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배우가 있다. 베넷 밀러의 친구이자 <카포티>의 주연 배우였고 아카데미 수상자인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이다. 베넷 밀러는 <카포티>의 배우들을 캐스팅하면서 이보다 더 적합한 배우는 없다고 인터뷰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영화를 찍기 이전의 이 인터뷰가 어떤 의도였는지 알 길은 없다. 마음에 들고 좋아하는 배우이며 오랜 친구이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베넷 밀러에게 그와 같은 경험은 실제 인물과 배우의 외형적 흡사함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겨지지 않게 한 것 같다. 혹은 원래부터 그랬을 수도 있다. 외형적 흡사함이 표면과 형상으로 곧바로 번역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호프만의 체형과 외모는 바로 카포티가 될 수 없었기에 그는 체중을 감량하고 목소리를 변형해 연기했다. 아마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은 이와 크게 연관된 것 같다. 그러나 베넷 밀러에게 ‘드러난 것’이란 좌표와 움직임, 인물들 간의 관계가 형상화된 것이라는 지점을 상기해보면, 우리가 ‘베넷 밀러의 영화들에서는 늘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눈빛과 내면연기 혹은 외형적인 흡사함이 아니라 움직임을 통한 재현에 근거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로 하여금 코 분장이 필요하고 코미디 배우로 훨씬 널리 알려진 스티브 카렐에게 존 듀폰의 역할을 맡기고 그것을 훌륭하게 연기할 수 있도록 한 것 같다. 특정한 배우만이 더 잘 재현하고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움직임, 개념, 형상이 있다면 이는 외형적인 격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된다. 카포티에게 그것은 관계를 장악하는 동시에 장악당하는 자의 불안정함이었던 것 같고 빌리 빈에게는 자신의 자리를 찾고 그것을 잇는 사람의 무심한 성실함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존 듀폰에게 그것은 ‘정적인 동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기묘한 형상이었을 것이다. 데이브의 사려깊음과 이상적인 아버지, 멘토의 역할, 마크의 어린아이 같은 몸짓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바로 그런 특성들, 단순히 외형적이라고는 볼 수 없고 움직여야만 작동되는 형상과 움직임의 개념들만이 수많은 설명들을 지나쳐 사건의 본질에 곧바로 도달한다.

그 스스로도 사건을 끊임없이 설명하고자 했으며 수많은 사람들 속에 둘러쌓여 ‘말’로써 관계를 장악하고자 했던 <카포티>의 트루먼 카포티. 그는 페리에게 사건의 진실을 들어 책을 완성했음에도 어딘가에 가닿지 못하고 스스로도 자신의 진실을 알지 못한다. 결국 사형된 페리와 그의 공범이었던 리차드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카포티에게 그의 절친한 친구 하퍼 리는 어쩌면 당신이 그것을 원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을 한다. 어쨌거나 그들은 죽었고 당신은 살아있다는 말을 하면서. 어쨌거나 그는 이제 다시 그가 있던 곳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 앉아 페리가 남긴 일기장과 자신을 그린 그림을 보고 있다. <머니볼>의 빌리 빈은 20연승을 이루었지만 마지막 경기에 패하고 얼마간 실의에 빠져 미래를 근심한다. 그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스카웃 제의를 받고 갈등하고 있다. 빌리 빈이 도입한 머니볼 이론이 숫자놀음에 불과하며 챔피언십 진출 실패가 바로 그 증거라고 말하는 야구 해설자들의 논평과 이제 그 이론을 도입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라며 빌리 빈을 영입하려는 보스턴 레드삭스 구단 측의 제안, 홈런을 치고도 그것을 몰랐던 어느 마이너리거의 영상을 보여주며 일종의 비유라고 말해주는 동료 피터의 목소리. 이 모든 것들을 통과하여 그는 다시 어디론가 달리는 차 안에 앉아있다. 언젠가 딸이 불러주었던 노래가 다시 오디오를 통해 흘러나온다. <폭스캐처>의 마크는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존과 데이브가 있는 곳에서 나와 어디론가 향한다. 시간이 흐른 뒤 자신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던 존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데이브를 총으로 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된다. 미국의 특정한 시대와 무관하지 않은 존의 말들이 영화 내내 거창하게 맴돌았다가 사라진다. 전쟁, 애국, 아버지, 멘토. 그것들을 어떻게든 조합하면 사건의 비밀이 풀릴 것도 같지만 존의 말이 허황되고 과장되어 있었던 것처럼 빈껍데기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대신 마크는 어느 격투기장에 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며 자신을 설명하는 사회자의 말과 짙은 연기를 뚫고 그의 몸은 살아간다. 이 세 장면들은 모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데, 나는 유독 이 장면들을 보며 ‘살아간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결국에는 이 느낌을 말하기 위해 긴 글을 경유한 것이다. 베넷 밀러의 영화들은 사연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영화 속의 말들은 부서지고 몸은 살아간다. 몸만이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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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관리자

등록일2017-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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