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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_시의 길 감정의 길_손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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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작 단평

시의 길, 감정의 길
손시내(영화평론가)

 

<동주>는 익히 알려졌듯이 시인 윤동주와 그의 각별한 동료이자 사촌인 송몽규의 삶과 죽음을 다룬 영화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명확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현실의 참담함이 나쁘게 반복되는 세상에서 이제는 일종의 공식이 되어버린 ‘사회비판 텍스트’들이 가지 못한 방향으로 우리를 데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 무능한 정부, 약한 곳을 향하는 공권력,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는 시스템 그리고 지키기 어려워진 개인의 존엄. 이런 사태와 이미지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텍스트에 스며들고 거의 매 장면이 현실과 일대일로 대응되며 전시된 이미지 자체가 현실을 논평하는 것처럼 소비된다. 영화도 예외는 아니어서 때마다 ‘사회고발’, ‘통쾌한 반격’과 같은 타이틀을 단 영화들이 현실을 주저 없이 재현하고 카타르시스로 끝맺는다. 그렇게 무언가를 고발하거나 악인을 폭력적으로 제압하며 통쾌함을 말하고 혹은 다 같이 죽자는 식의 공멸을 말하기도, 패배주의나 허무함에 빠지기도 하며 사실상 동전의 양면에 다름 아닌 이야기를 할 때, 그러니까 지금 비탄에 빠진 한국 사회에서 그것만이 영화의 할 일이라는 듯이 굴 때, <동주>는 슬며시 다른 문을 열어 보인다.

영화는 1943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시작해 취조가 진행되면서 윤동주와 송몽규의 과거를 나란히 엮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윤동주(강하늘)의 목소리로 읊어지는 ‘시’가 있다. 취조 과정에서 일본 경찰이 윤동주가 쓴 시의 의미를 다그치며 물을 때, 그것은 과거의 일들을 일깨워 선형적인 시간과 시어의 퍼즐을 맞추는 열쇠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윤동주의 목소리가 시를 눌러 쓰듯이 읊는 여러 개의 장면들은 현실이 시를 쓰도록 추동한 것이 아니라 마치 시가 현실을 불러일으키고 그려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맑은 긴장감은 시가 현실의 부속물이 아니듯이 현실 역시 시에 투명하게 겹쳐지는 것이 아니고, 시와 현실은 각자가 있는 힘을 다해 뻗어나가는 독자적인 세계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를 대하는 윤동주의 태도 역시 그렇다. 대학에서 만든 문예지에 실을 시와 산문을 검토할 때 윤동주는 송몽규(박정민)의 의견에 맞서며 시를 지키려고 한다. 시가 도구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에 담긴 인간의 감정과 살아있는 진실이 힘을 되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 장면의 앞, 뒤로 ‘별 헤는 밤’의 구절들이 까만 밤하늘에 박힌 별들과 함께 나올 때, 영화도 이 부끄러운 시인의 마음을 최선을 다해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일종의 다짐처럼도 보인다. 시와 현실의 거리는 끝내 좁혀지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고 비스듬히 기대있는데, 마치 현실을 대하는 영화의 마음역시 그래야 한다고 나지막히 속삭이는 것 같다.

시와 현실은 각각 윤동주와 송몽규가 생을 다해 껴안은 것으로, 둘의 자리는 마음과 상관없이 멀어져간다. 윤동주의 시가 영문으로 번역되었으며 송몽규의 계획이 발각되어 경찰의 급습을 받았던 운명의 날에, 2층의 창틀을 사이에 둔 그들의 거리는 더 이상 좁힐 수 없을 만큼 멀어 보인다. 영화의 후반부, 행적을 알 수 없다고 생각했던 송몽규가 사실은 윤동주와 같은 형무소에 있었음이 밝혀지고 두 사람은 다른 시간, 같은 의자에 앉아 일본 경찰이 내미는 서류에 서명할 것을 강요당한다. 서류는 자신이 유학생들을 모아 사상교육을 시켰고 조선어 문학을 유통시켰으며 조선인들을 모아 반군 조직을 결성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내용이다. 매번 앞으로 나아갔지만 끝내 무엇도 이루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는 송몽규와 매번 뒤에 서있었고 부끄러움 속을 맴돌았던 윤동주는 각각 서명을 하고 또 하지 않음으로서 사실상 같은 선택을 한다. 영화 내내 서로 다른 자리에서 다른 것을 껴안고 있다고 여겨졌던 두 사람은 이제 같은 자리에서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 행동을 촉발시킨 감정의 이동이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는다는 이 행동의 동력이 오롯이 그들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불의를 못 본 척 할 수 없다거나 불쌍한 사람을 보며 연민을 느끼는 것과는 다른 ‘감정’이 여기에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 ‘감정’이 <동주>를 특별한 영화로 만든다. 내내 송몽규의 그림자인 것처럼 느꼈던 열등감과 동시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윤동주의 부끄러움은 이제 어떤 것도 하지 않는 결단이 된다. 감정은 사라지거나 부정되지 않고 살아남아 다음 행동을 위한 씨앗이 된다. 이것은 슬픔이나 분노와 같은 강렬한 감정을 경험하고 난 뒤 그것을 강박적으로 잊거나 혹은 폭력적으로 분출하며 머물지 않는 새로운 길이다. 윤동주가 자신의 부끄러움과 시를 부정하지 않고 끝까지 끌어안아 어떤 행동을 할 때,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이 다시 그의 시를 마주보는 것으로 끝날 때 우리는 사라지지 않는 감정과 그것이 담긴 욕망을 찍는 영화의 아름다움을 본다.

새로운 문을 열어주었지만 <동주>는 여전히 자꾸만 현실에 겹쳐보고 기대어 보게 되는 영화다. 그럴수록 우리는 영화를 빨리 특정한 카테고리에 넣고 싶어 하고 세상을 가져다가 영화를 ‘읽고’ 싶어 하기도, 반대로 영화로 세상을 읽고 싶어 하기도 한다. 이런 방법은 영화의 활력을 눌러 납작하고 앙상하게 만드는 위험성을 언제나 동반하고 대개의 경우 그렇게 되어 영화가 죽은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것에 불과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때때로, 길 잃은 감정의 손을 잡아 이끌고 현실과 결코 겹쳐질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말함으로서 특정한 세상의 어떤 영화는 반드시 거기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 된다. 어떤 빈칸에 채워도 똑같은 밀도로 채워지는 퍼즐 조각이 아니라 반드시 2016년을 사는 우리에게 왔어야만 하는 영화. 그렇다면 부끄러움과 시로 가득 차있는 <동주>는 여기에서 결코 납작해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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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2017-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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