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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희] 인간의 기억에 관한 아름답고 섬세한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대화하는 인공지능,  월터 프라임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마조리(로이스 스미스) 옆에는 항상 대화를 해주는 남자가 있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젊은 시절 남편의 모습으로 복원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월터(존 햄)다. 영화는 인공지능을 홀로그램으로 만들어 프라임으로 부른다. 미조리는 월터 프라임과의 대화를 통해 지나온 삶과 사랑 그리고 가족과의 소중한 순간을 회고한다. 마조리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월터 프라임은 더 많은 기억을 저장하고 풍부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인공지능으로 성장하여 더 사려 깊은 월터 프라임이 된다.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퓰리처상 후보로 지목된 조던 해리슨의 연극 <마조리 프라임Marjorie Prime>에서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동반자가 인간의 기억을 보완하고 대체한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영화는 더 나아가 기억에 관한 더 많은 상황과 반응을 영화로 재현해 인간의 기억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더 깊숙이 파고든다. 기억에 관한 흥미로운 영화 <이터널 선샤인>(미셸 공드리, 2004)이 기억을 제거하고 관계를 끊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을 했다면, 이 영화는 기억을 채워 넣어 관계를 맺으려는 프라임과 인간과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여든이 넘은 인간 마조리는 월터 프라임에게 많은 도움을 받는다. 월터 프라임은 죽은 월터에 대한 가족들의 기억으로 복원이 되었다. 복원 된지 얼마 되지 않은 프라임에게 저장되어 있는  기억들은 많지 않다. 무엇보다 프라임에게 유머나 농담을 이해하는 건 쉽지 않다. 기억을 잃어가는 마조리는 자신이 과거를 기억하고 싶은 방향으로 살짝 말을 바꿔가지만 과거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월터 프라임이 가진 기억의 저장고를 채워나간다. 

기억을 이식하기 위해 대화하는 과정은 혼자보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게 좋은 나이”인 여든 다섯의 노인에게 프라임은 더 없이 필요해 보인다. 여기에 월터 프라임은 상대의 감정을 헤아릴 줄 알고 애정이 듬뿍 담긴 말과 식사를 챙기는 등 돌봄 케어를 남편처럼 수행한다. 그리고 서른 두개 언어를 사용할 수 있고, 언제든 부르기만 하면 그 자리에 존재한다. 내가 필요할 때 항상 옆에 있어주는 존재, 월터 프라임은 홀로그램이지만 마조리에게 가족이상의 위안이 된다. 

그러나 함께 살고 있는 딸 테스(지나 데이비스)는 “저게 젊은 시절 아버지 인척 하는 게 소름끼치게 해”라며 인간과 지나치게 닮은 피조물에 친근감이 아니라 오히려 혐오감을 느끼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 심리 현상을 보인다. 이와 반대로 남편 존(팀 로빈스)은 장모가 TV보는 것보다 낫다며, 홀로그램 프라임이 장모의 상처를 치유하며 편안한 여생을 마칠 수 있게 할 거라고 생각한다.

아픔을 치유해주는 마조리 프라임

시간이 흘러, 마조리가 죽자 딸 테스는 엄마를 프라임으로 복원시킨다. 테스는 가끔 엄마를 닮은 말투와 태도를 가진 프라임에게 거부감을 느낀다. 새로 제조된 마조리 프라임은 더 진짜처럼 변해기 위해 자신에 대해 더 많이 들려달라고 말한다. 마조리 프라임은 상실의 우울단계를 겪고 있는 딸 테스가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테스는 왜 여든이 넘은 엄마 마조리 모습을 복원시켰을까. 엄마 마조리가 가족의 슬픈 기억이 있기 전인 40대 남편의 모습으로 월터 프라임을 복원한 선택과 달리, 테스는 엄마 마조리에게 살아생전 다 하지 못한 말들을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억은 잔인하게도 테스와 가족들에게 가장 큰 상처로 남겨진 상처를 들춰낸다. 테스에게 자살한 동생 데미안은 부모님의 사랑을 거둬가는 큰 아픔으로 남아있다. 마조리 프라임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지만 말로 드러내기 보다는 노래 한 곡을 들려준다. 음악은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엄마 마조리와 취향 차이가 있었다. 그런 엄마 마조리 프라임이 테스를 배려해서 들려주는 밥 딜런의 <I Shall be Released>는 그녀에게 어린 시절 사랑받지 못해 상처받았다고 느끼는 자신을 이제 놓아주라고 한다. 
 
 
  

말은 생각보다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말을 하다보면 사람을 옭아매던 방어기제도 서서히 해체된다. 프라임에게 위로받고 있는 자신을 못마땅해 하면서 “들은 걸 기억할 뿐인가요, 감정도 있나요?”라고 쏘아붙이지만, 테스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과학기술에 회의적이고 인공지능을 믿지 못했던 테스도 기억을 복원하는 과정을 통해 상처를 치유 받은 것이다.  

불현듯 테스가 세상을 버린다. 인공지능에 대해 평소 긍정적이던 존은 아내 테스를 복원한다. 인공지능의 동반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이던 존은 오히려 테스 프라임을 보며 “거울 같은 거야, 혼잣말 하는 거야”라며 테스 프라임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존은 영화 <트랜센던스>(2014)에서 에블린이 겪었던 혼돈과 유사한 혼돈을 겪는다. <트렌센던스>에서 아내 에블린이 삶과 죽음이라는 신의 영역을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계기는 사랑이었다. 사랑하는 남편 윌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에블린은 남편의 마음, 정신 혹은 영혼이라도 남겨놓고자 한다. 신체적으로 죽은 사람을 정신적으로 살려 놓는 것, 그것은 신에 대한 도전임과 동시에 인간의 정서와 감정, 마음이 모두 분석 가능한 전기 신호라는 증거다. 그러나 에블린은 과거의 기억을 가진 컴퓨터 음성을 접하면서 과연 그가 남편 윌인가 라는 질문에 시달린다. 기억을 말로 이식하는 프라임 생성 과정은 자신의 존재 이유였던 사랑하는 아내 테스와 현재도 미래도 기약하기 어려운 그저 인공지능일 뿐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미래는 금방 올 거야, 익숙해 져야 해.”
 
 
  

프라임에게 기억을 심어주던 가족이 모두 죽은 후 월터 프라임, 마조리 프라임, 테스 프라임 셋이 앉아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가고 있다. 서로의 대화를 들으며 기억의 저장고를 더 풍요롭게 만들고 인식의 깊이를 채워나간다. 새로운 추억을 받아들일 때 마다 감정 반응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영화는 기억을 함께 공유하고 나누는 것이 인간에게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시작으로, 그 기억의 정보들이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인가라는 인간 실존의 문제를 제시한다. 인공지능이 인간과 감정교류를 하면서 인간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가는 이미 <그녀>(2013)에서 제시된 적이 있다. <그녀>에서 테오도르는 AI 사만다와의 관계를 통해 지친 삶의 위안을 받고 더 나아가 사랑까지 가능함을 설득력 있게 재현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에서 AI 목소리인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습관, 기억, 상처 같은 것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후 테오도르에게 딱 맞는 위안을 제공한다. 그래서 AI 사만다는 비록 인간의 살과 뼈는 가지지 못했지만 그 어떤 인간보다 정서적 공감능력이 탁월하다. 그러나 <당신과 함께 한 순간들>에서는 과거의 경험을 기억해 둔 가족이 말을 통해 프라임에게 기억을 이식해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자연스럽게 프라임은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억을 축적시키고 그 기억들의 파편들을 맞추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프라임도 기억의 축적에만 관심이 있지 경험이 축적된 기억을 가지고 현재를 살아가는 주체로서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 

<당신과 함께 한 순간>은 AI에 대한 과학적인 설득보다 AI를 통해 우리 인간의 삶과 기억에 관한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인식과 미래의 가능성을 담아낸다. 그래서 가족이 모두 죽고 먼지가 되어 바람에 날려간 자리에 가족들의 기억을 가진 프라임이 남아 가족을 기억해내는 장면은 섬뜩함보다 우리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부실한 총체인지를 들려준다.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 프라임, 그들이 올 수 있으니 익숙해지라고 한다.  

영화는 결국 “기억은 퇴적층 같아서, 잊어버려도 거기에 있어” 우리가 잠시 잊고 사는 것이지, 꺼내볼 기억의 지층은 우리 생각보다 더 두텁다는 인간 기억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윌리엄 제임스의 이론을 빌어 부정한다. “기억이란 우물이나 서랍장 같은 게 아니야. 무언가를 기억할 때는 기억 그 자체가 아니라 기억한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는 것뿐이야.”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생생해지거나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복사본처럼 계속 희미해져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강렬한 기억도 완전히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조금씩 유실되기 때문에. 우리의 기억이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파도가 출렁이는 광활한 바다 앞에 선 인간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 인간의 기억이란 얼마나 부실하고 덧없는가를 영화는 끊임없이 섬세하게 말해주고 있다. 


사진 출처: 네이버-영화-당신과 함께 한 순간들


글: 서성희
영화평론가. 대구경북영화영상협동조합 이사장으로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대표이자 대구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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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곡숙

등록일2018-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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