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권의 전통을 기반으로 한 시대극, 그 중에서도 여성 인물이 중심이 되는 멜로드라마들은 대개 화려한 복식과 밝은 자연광, 아름다운 실내 공간 등을 화면으로 전시하고, 서사적으로는 남녀 간의 애정 문제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오만과 편견>이든, <센스 앤 센서빌리티>이든, <어톤먼트>이든 간에 결국에는 신사와 숙녀가 갈등하다가 사랑으로 화합하는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주인공을 당대가 요구하던 조용하고 순종적인 여성상과는 달리 활달하고 자기주장이 있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그려내면서도 다시 결혼-남성이라는 도식으로 환원시킨다는 점이 이러한 영화들의 한계이며, 로맨스 외에는 서사적 상상력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여성에게 허락된 욕망에 한계가 있었으며, 활동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좁았다는 점이 어쩔 수없이 반영된 결과물로 보이기도 한다.
데이비스 감독의 <조용한 열정>은 남북전쟁이 일어나던 19세기의 미국에서 시인이자 여성으로 고통스럽게 살아낸 에밀리 디킨슨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이다. 그녀는 결혼에 뜻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안정된 가정이나 신앙심이 아닌 시창작에 대한 욕망을 가졌다는 점에서 당대가 바라는 여성상에서 벗어난 인물이다.
이러한 그녀의 성격적 특징을 보여주는 두 장면이 있다. 신학교에서부터 신앙에 대해 반골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결국 자퇴를 했던 그녀는 교구의 목사가 고압적인 태도로 종교적 순응을 요구하지만 거부한다. 심방을 온 목사가 가족들로 하여금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라고 종용하고 사회적 지위를 가진 부친마저도 약간 주저하다가 결국 그 명령에 따라 기도자세를 취하지만 끝내 에밀리는 거부한다. 목사와 부모, 두 형제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동안 정중앙에 꽂꽂히 앉아 끝내 눈을 감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은 세상의 규칙과 관습에 더 이상 따르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보인다. 관습들은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려는 그녀의 마음의 파동을 강력하게 막는, 세상이 그녀를 억압하는 장력이다. 그녀는 이러한 양자의 힘의 갈등에서 나약해지기도 하고 때때로 항변하거나 울부짖기도 한다. 그러나 끝내 자신의 마음이 가고자하는 방향을 포기하지 않는다. 여전히 전근대적인 규범들로 그녀를 억압하는 가치들에 쉽게 순응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드러나는 장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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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의 성격이 전경화된 또 다른 장면은 영화의 공식 포스터에도 사용되고 있다. 에밀리는 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보고 서 있다. 그녀는 빛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으나 건물 안에 있고, 등 뒤는 어두침침하고 자신을 속박하는 공간이다. 창문을 투과해 그녀를 비추던 빛은 그녀의 등 뒤편으로도 사선의 빛을 드리운다. 고요히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주는 압도감은 실로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미덕이다. 그녀는 여럿이 어울리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충실하기를 원했고 고독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 고독은 성별 차이에 기반하여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일 뿐이며, 그녀는 결국 창밖의 밝음으로 상징되는-바깥의 세상에 자유로운 개인으로 설 수 있게 되길 더 바랐다고 볼 수 있다. 밝음과 어두움, 바깥과 내부, 세상과 내면의 양자적인 갈등이 미장센으로 구현된 장면인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단순히 내면에 유폐되어 자족적인 세계 안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밝음을 향해 서 있다는 것, 그래서 어떻게든 자신의 목소리를 발화하려 한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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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는 시인에 관한 영화이다.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한사코 시를 쓰려는, 자신에 대한 억압을 문학이라는 가치로서 넘어보려는 주인공의 노력이 돋보이는 영화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이준익의 <동주>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동주>는 주인공이 남성이므로 성차에 의한 비판의식은 나타나지 않으며, 그를 억누르는 것이 ‘일제’라는 매우 구체적인 대타항으로 설정되므로 문제의식이 뚜렷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긴 하다. 하지만 두 영화 모두 주인공들이 현실의 억압과 한계를 시를 쓰면서 혹은 시적인 가치에 대한 숙고를 통해 넘어서려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리고 두 주인공이 모두 아직 시인이 되지 못한 습작생이라는 점이 그들의 멜랑콜리를 극대화한다. 요컨대 고통스러운 시대를 시를 쓰는 행위로 넘어서 보려는 그들의 삶의 태도가 이미 성취되기 요원한 일이라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들이 아직 시인으로 제대로 호명 받지 못했다는 점이 그들의 고통을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시와 삶을 평행적인 병렬(parallelism)로 배치하는 이 영화들은 삶의 변곡점들마다 그들의 시를 스크린에 자막으로 투사하고 그들의 목소리로 그 시를 읽어내는 방법을 택한다. 이는 이 영화에서 단순히 삶과 시의 조응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적으로 풀어내는 장치로서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시가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질 좋은 시화가 곁들여진 시화집처럼 그 인물에 대한 보다 나은 해석을 위해 시가 씌여진 그 자리와 시간에 인물을 위치시켜보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것이다.
이 영화가 아름다운 화면과 시적인 가치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사적으로 공감을 얻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 때때로 영화가 너무 늘어진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는 비교적 내러티브적 갈등이 적어서도, 종종 시를 화면에 띄워 흐름을 늦춰서도 아니다. 진지한 문제의식과 실존 인물을 극화하기 위한 성실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중요한 갈등의 지점에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를 테면, 그녀가 종교적인 억압에 항거하고 신앙에 회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반에 등장하는 워즈워스 목사에 대한 연모의 마음을 품게 된 과정과 정신적 갈등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으며 그녀의 이전의 태도에 비해서도 느닷없이 느껴진다.
또한 당대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억압적인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이 분명히 드러나면서도 그녀 역시 좀 더 나아가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유폐시킨다는 점, 그리고 그녀의 삶이 결국 가부장-아버지로 상징되는 신분적·경제적 울타리에 의해 결혼을 하지 않고도 안전하게 유지된다는 점 등이 그녀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얼마간 지연시킨다.
동시기에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에 선구에 섰던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일 년에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에밀리가 사람을 만나지 않았고 작품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궁핍의 고통에 시달리지 않은 것, 그리고 여전히 하인들에게 시혜적인 온정을 베푸는 장면들은 이 영화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의 차원에서 회의감이 들게 한다.
<동주>가 빛났던 부분은 당대의 강력한 현실적 압박이 짓눌렀을 때 그가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고 나름의 대결을 펼치다가 끝내 안타깝게 절명하였다는 점이다. 그에 비해 에밀리의 고통과 노력들이 개인의 심리적인 틀 안에서만 진행된 점이 이 작품의 갈등적 국면을 다소 감상적인 것들로 보이게 한다. ‘조용한 열정’이라는 제목이 주는 수세적인 늬앙스도 이러한 혐의를 좀 더 짙게 만든다. 이 영화에는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이 있으나 행동력의 차원에서 드러나지는 않으며, 올케와 에밀리의 대화 등을 통해 다소 직관적으로 포지셔닝 되는 면이 있다.
“당신도 혼자인가요?”라고 묻는 영화 포스터의 어구는 도착(倒錯)적이다. 왜냐하면 이런 말은 영화에 대사로 나오지도 않을뿐더러 이 영화는 ‘혼자’라는 상태가 강조되거나 ‘혼자’인 사람들끼리의 공감을 요구하는 영화도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에밀리가 죽기 전에도 여전히 여동생 비니와 오빠 오스틴이 곁을 지켜주기 때문에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에밀리 디킨슨을 고독한 내면을 가진 예술가로 표현한 것은 실제의 사실에 기반한 부분이나, 이 영화는 ‘혼자’됨이라는 사태를 통해 누군가에게 말을 걸거나 어떠한 연대를 꿈꾸는 종류의 영화가 아니라는 뜻이다.
에밀리를 맡은 신시아 닉슨의 연기가 놀랍다. <Sex and the city> 속에서 능력 있는 뉴욕의 싱글여성으로서의 ‘미란다’가 다소 뾰족하고 공격적인 말투였다면 에밀리가 된 그녀는 훨씬 부드럽고 유려하면서도 악센트가 살아 있는 톤으로 대사를 전달한다. 나지막하면서도 의지력 있는 발성이 인물에 대한 설득력을 높여준다.
19세기의 에밀리는 시창작을 통해 주체적인 예술가이자 독립적인 여성의 자리에 가고자 했으나 결국 인정받지 못했고 오히려 까탈스럽고 예민한 여성으로 받아들여졌다. 현대에 살고 있는 미란다는 하버드 로스쿨을 나온 변호사이지만 종종 원만한 데이트를 위해 자신의 직업이나 학력을 속인다. 그러니 에밀리가 미란다가 되어 집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된 현재에도 여전히 여성의 의식적 차원과 능력은 ‘조용한 열정’ 정도로 소란스럽지 않아야함을 요구받고 있는 시대이기도 한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그런 점에서 다소 역설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사진 출처: 네이버-영화-<조용한 열정>
* 이수향: 영화평론가. 201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수상, 웹진 문화다 편집 동인. 대학에 출강 중. 공저로 『영화광의 탄생』(2016), 『1990년대 문화 키워드 20』(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