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생산성에 관하여”
잘 된 영화냐 그렇지 않은 영화냐, 더 나아가 좋은 영화냐 나쁜 영화냐를 예리하게 벼려진 비평적 감식안으로 무장하여 따져보려는 시도란 분명 중요한 것일 테다. 그러나 만일 일련의 진지한 성찰작업을 감행하기 위해 준비한 저울의 중심부 가늠자에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놓여있지 않다면, 그리고 스스로가 쏟아낸 말들을 가로지르는 허리 즈음에 자신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나름의 해답이 적절하게 동반돼있지 않다면, 아무렴 비평의 실천이 공적인 신뢰감을 얻어내긴 어렵다고 하겠다. 환언하면 객관화된 설득력의 효과를 담보하긴 어려우리란 뜻이다. 그 질문이란 다음과도 같은 것이다. (이) 영화는 정말로 생산적인가? 여기에서 생산적이냐는 표현을 과연 영화가 ‘저를 둘러싼 많은 말들을 견인해내고 있느냐’는 문장으로 번역해보는 것 역시 가능하리라. 하지만 왜 이런 문답이 중요한 것일까. 결론은 간단하다. 영화 안팎에 스며드는 허다한 말들은 관객들과의 대화로부터 말미암고, 이 말들로 인해 영화의 의미는 풍성해진다. 반면 그들과의 대화의 여지를 닫아 건 영화에선 말들도 의미들도 피어오를 수가 없다. 애당초 관객에게 보이기 위한 영화가 ‘말들을 요청할 수 없다면’ 좋은 영화도 잘 된 영화도 아닌 셈이다. 그렇담 대체 어떤 말들을 견인해낼 때 비로소 영화는 생산적이란 말을 얻는가?
가령 하나의 작품 텍스트를 존재론-인식론적 시각에서 마주하는 입장에 동의한다고 한다면 이제 단순히 그 ‘작품을 찬성한다거나 반대한다는 말’은 좀체 성립할 수 없게 된다. 그건 마치 나를 그리고 너를 반대한다는 말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런 건 불가하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살아있음 곧 실존 그 자체를 문제 삼는다는 건 가능하지 않은 일이란 뜻이다. 허나 나의 생각에 반대한다거나 너의 입장을 지지한다거나 하는 등의 표현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쉽게 말해 존재의 ‘무엇’에 대한 말들이라면 얼마든지 허용된다는 뜻이다. 예술작품에 대해서도 동일한 접근을 취할 수 있다. 존재가 스스로를 표현하듯 작품 역시 우리에게 부단히 말을 걸어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품이 들려주는 ‘무엇’을 청취하고, 그에 대해 우리의 날선 언어를 동원해 각자의 방식으로 응답해보는 게 가능하다. 이야말로 작품에 의한 말들의 견인 곧 텍스트의 (담론) 생산성이다.
한층 더 깊숙이 접근해보는 것도 가능할 테다. 과연 그 누구라도 결코 말할 수 없는 혹은 절대로 말해선 안 되는 무엇이 실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울 테다. 원칙적으로 말할 수 없는 무엇이란 건 존재치 않는다. 심지어 홀로코스트와 같은 인류사의 기념비적인 비참일지라도 매한가지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말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되레 중요한 건 무엇을 과연 ‘어떻게 말할 것이냐의’ 문제가 된다는 뜻이다. 환언하자면 대상에 걸맞은 적절한 언어를 찾아주는 게 말하기의 핵심이 되리란 뜻이다. 실제로 낱낱의 예술 텍스트들은 각각의 말하기 방식들을 동원해 무엇에 대해 제 나름의 태도로 말들을 걸어오고 있다. 우린 이 말을 귀 기울여 듣고 각자의 비평적 사유정신에 힘입어 적절히 대화하려는 태도를 취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담 우리가 어떤 예술 텍스트에 대해 합당한 비평의 태도를 취하기 위해서라면, 먼저 그것이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가를 섬세히 포착해낼 수 있어야만 한다고 정리해보는 일도 가능하겠다. 또 여기서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말하느냐의 문제를 좀 더 압축적으로 ‘재현의 문제’라는 표현으로 번역해보는 것도 가능할 터이다. 더하여 이렇게 갈음하고 보면 감추어져 있던 중요한 지점 하나가 더 드러나게 되는데, 그건 재현이란 말 속에 내포된 ‘필연적인 결함’이라고 할 수 있다. 재현은 완전한 복제가 아니다. 더군다나 타자에 의해 수행되는 재현이란 본질적으로 다소의 부족함을 피해갈 수 없다. 그 어떤 경우라도 원상에 비해 존재함량이 모자란 상태가 된다. 만약 이 점을 밝히 시인하고 본다면, 실상 쟁점은 전혀 다른 것이 돼버릴 수도 있다. 쉽게 말해 동일성이라는 강박증으로부터 벗어나 시야의 전복적 전환을 꾀할 수 있게 되리란 것이다. 이제 단순히 무엇의 어떤 부분을 동일하게 그려내었고 또 어떤 부분을 동일하지 않게 그려내었느냐며 따져 묻는 건 더는 중요치 않다. 차라리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도대체 왜’ 그렇게 그려내었는지에 대한 적절한 탐문이 수반되는 편이 보다 마땅하리란 뜻이다. 이런 인식전환이야말로 작품의 생산성에 적극적으로 부합하는 길일 것이다. 지극히 가벼운 태도로 좋다 나쁘단 표현을 무책임하게 내던지기보다는 한층 더 깊은 지점에 가닿을 수 있도록 평자들을 이끌어 줄 터이다.
사실 <버닝>의 경우 텍스트를 둘러싸고 각양 논쟁적인 견해들이 활발하게 빚어지고 있는 만큼이나 이미 충분히 생산적인 영화다. 그렇담 구태여 이 글을 쓰는 목적이란 그 격론의 장으로 걸어 들어가서 담론(말들)의 지형에 입체성을 한층 더함으로써, 논의 자체의 풍부함을 기하는 데에 일조하고자 함이라고 할 테다. 다만, 생각의 파편들을 그저 의미 없이 늘어놓는 것에서 그치지 않도록 사고의 적실성을 충분히 제고하기 위하여 가능하다면 서로 긴밀히 연결된 2가지 원칙을 고수하고자 한다. 첫째는 성급하게 이데올로기적 판단을 먼저 앞세우기 않겠다는 것이며, 다음은 예술의 한 장르로서 영화가 말을 걸어오는 독특한 방식 곧 고유한 언어양식들과 그 조직화의 원리를 존중하겠다는 것이다. 상술한 양자를 종합하자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명제를 도출할 수 있는데, 가급적이면 영화 텍스트의 구성적 측면 곧 쇼트들과 장면들에 의거해서 의사를 개진하겠다는 것 정도면 꽤 그럴듯한 정리가 될 터이다. 기중에서도 특별히 인물들이 형상화되는 국면에 집중하고자 한다. 구태여 감독 자신의 언사를 인용해오지 않더라도, 그것이야말로 본 영화 자체를 이끄는 핵심적 동력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까닭이다.
“해미에 관해 몇 마디 덧붙이기”
해미에게 가해진 다수 평자들의 말들은 대체로 그녀를 이미 부정적인 성격의 인물상으로 진단하고 선언해버린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기인하는 듯하다. 아마 특정 주의(-ism)의 틀거지를 먼저 청사진으로 제시해두고, 남은 모든 부분을 가지런히 끼워 맞추려다보니 생기는 문제인 듯한데, 역시 동일한 주의에 대해서 적극적인 지지의 입장을 표하는 필자의 입장에서도 이런 식의 접근이란 다소간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자칫하면 영화언어의 구성소와 인식소가 뿜어내는 고유의 생기를 망실하고, 거칠고 범박한 철학적 이념의 이름하에 그 생명력을 화석화시켜버리는 지점에 가닿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겠다. 도대체 어떤 것들을 보고서 그렇게들 말하는가?
먼저는 해미가 경제관념 없는 헤픈 여성으로 재현되었다는 것이 그 주된 비판의 지점 중 하나일 터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가? 해미가 카드빚을 떠안고 있으며, 당장에 쓸 돈이 모자라 허덕이고 있단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확실히 영화의 후반부에서 그녀의 어머니와 벤의 입을 통해 각각 증언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녕 사치 때문인가? 어렵사리 삶을 지탱해내는 과정에서 얻게 된 부채, 그리고 또 힘겨운 삶을 어떻게 해서든 버텨내기 위해선 (여성의 외모에 대해 유달리 엄격한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는 한국사회를 살아내고자 결국 성형이란 길을 택하게 된 것처럼) 부득이하게 질 수밖에 없었던 삶의 무게라고 이해할 수는 없을까? 매우 높다란 언덕배기에 자리한 그녀의 허름한 보금자리에선 그릇된 경제관념이 새겨놓은 흔적 따윌 찾아보기란 어렵다. 일찍이 골목길에서 담배를 태우는 와중에 종수에게 시인했던 것처럼 사실 그녀는 일생에 걸쳐 변변찮은 손목시계 하나조차도 가져본 적이 없다.
난생 처음 손목시계를 가져본다는 해미 |
아프리카로 가려는 이유를 설명하는 해미 |
더불어 혹자는 지독한 가난 가운데서도 구태여 그녀가 아프리카 여행을 떠났다는 점을 들어 괜한 트집을 잡을는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분수에 안 맞는 삶을 사는 여성으로 재현되었다는 게 아마도 그 비판의 골자일 터이다. 허나 이 역시 영화에 나타난 있는 그대로를 매개로 하여 충분히 변호가능한 지점이다. 만일 해미가 도에 맞지 않은 허영을 꿈꾸었던 것이라면 굳이 아프리카를 행선지로 삼을 까닭은 없었을 터이다. 더군다나 결코 여러 번 여행을 다닐 수 있을 만치 넉넉하지 않은 형편인데다, 정말 어렵사리 번 돈을 모조리 탕진하면서까지 여행지를 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해미 또래의 한국인 젊은이가 아프리카를 택할 여지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거의 전무하리라. 같은 의도의 질문을 던진 종수에게 해미는 답한다. Great Hunger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다시 말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굳이 삶의 의미를 찾으러 먼 길을 떠나야만 하느냐는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는 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진지하게 생의 의미를 찾기보단 그저 일상의 쳇바퀴를 돌리기에도 급급한 현실 상황 속에서 마지못해 찾은 아프리카는, 단지 탐미적 도피의 땅이라기보다는 새로운 현실지각의 가능성을 열어젖힐 ㅡ바슐라르 식의 표현대로라면ㅡ ‘역동적인 상상력’이 발휘될 깨달음과 신생의 공간이 되어주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단 하나 특별한 게 있다면 묘하게도 결국 그 깨침이 ‘사라짐에 대한 갈구’로 귀착되고야 만다는 것 정도일 테다. 현실이 갑갑하기에.
더하여 해미가 섹스와 젠더의 맥락에서 수동적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지적 역시 한 번 즈음은 의심해볼만하다. 그녀는 한국사회의 고루한 금기를 깨고 10년 만에 만난 친구 종수를 곧장 침실에 들일만큼 자유로우며, 갑작스런 상황에 주저하는 종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갈 만큼 적극적이며 또 주체적이다. 혹 침대 밑에 콘돔박스가 있더라는 사실에 시비를 거는 이들에게 되묻고 싶은 건, 성적 자유를 누리는 여성들을 향해 ‘과연 어떤 구시대적이고 가부장적인 고정관념’을 고수하고 있기에 그리도 편협한 시선으로 해미를 백안시하려 드느냐는 혐의제기라고 하겠다. 소위 ‘직업여성’이 아니라면 그럴 리 없다는 망상인가? 혹 남성과는 달리 여성은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권리를 억압당한 채 살아가는 편이 온당하다는 식의 사유가 힐난의 근저에 매설돼있다면 그야말로 다분히 문제적인 부분이라고 할 테다. 많은 경우 한국영화들이 아무런 분별도 지각도 없이 범하곤 하는 우처럼 수동적으로 더 나아가 피동적인 양태로 여성이 재현되었더라면 분명히 따질법한 지점이겠으나, 적어도 ‘해미에게만은’ ㅡ다른 여성들의 재현은 여전히 문제적임을 미리 일러둠ㅡ 주체성의 박탈이란 올무를 놓기란 좀 어려워 보인다.
몸으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해미 |
자유를 향한 열망을 몸으로 표현하는 해미 |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육체성에 대한 과도한 부각 역시 따져보아야 할 만한 지점일 것이다. 영화의 초입에서 해미 스스로가 “몸 쓰는 일”이 좋다고 뇌까린 것을 좀 더 확장된 맥락에서, 제 안의 깊은 것을 ‘몸의 언어로 표현’한다고 번역해보는 편이 적절할 터이다. 그녀가 대마로 인한 일시적인 엑스터시 (일상적인 삶의 영역에서 잠깐 옆으로 빗겨난) 상태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꽤 유효할 테다. 그녀는 제일 먼저 스스로를 구속하는 옷가지를 벗어 던졌고, 자유로운 새의 이미지에 스스로를 동화했으며, Great Hunger의 춤을 췄다. 애당초 마임을 즐겨했다는, 심지어 없는 돈과 시간을 할애해 학원까지 다녔단 사실에서부터, 몸의 언어야말로 그녀가 주되게 택하는 대화와 소통의 수단임을 이해하는 데엔 큰 어려움이 없을 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그녀가 품은 의도의 순전함과는 달리 육체성의 과잉이 다소 민감한 위치에 자리매김하게 되는 건, 주체의 두드러지는 육체성이란 게 ‘적어도 보이는 것’으로서 타인에게 지각되고 또 향유될 수밖엔 없다는 점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그녀의 순수한 춤사위가 다분히 끈적이는 눈동자, 순수하지 않은 시선들에 의해 해석되고 소비될 여지가 충분하단 뜻이다. 화려한 음악에 반응하는 도심지 마트 앞에서의 몸놀림이든 한적한 시골공간에서 펼친 형이상학적인 상승의 움직임이든 도통 그 성격을 가리지 않고서 말이다. 혹 몸의 쓰임새에 대해 많은 말들이 덧붙여질 (한편으론 그로 인해 생산성을 얻게 되겠지만) 것을 우려했다면 다소 민감한 몇몇 부분들을 외화면 처리한다든지, 신체 모션의 속도를 빠르거나 느리게 임의로 조작한다든지, 일부를 아웃포커스로 잡는다든지 하는 방편들을 혹 동원할 수 있었을는지도 모르겠다. 부러 미학적 효과를 고수하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지탱해내었어야만 하는 지점들이 아니라면 말이다.
사실 타자에 의해 소비되고 있다는 지적은 과도한 육체성의 문제보다는 되레 해미와 벤 사이의 관계에서 더더욱 도드라지는 혐의점이 될 수 있다. 허나, 이 부분 역시 단순한 선언조의 언급만으로 지나쳐버릴 순 없다. 배배꼬인 실타래처럼 꽤나 복잡한 요소들이 아울러 얽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해미 스스로가 마치 격정적으로 불살라진 끝에 공중으로 흩어지고 말 재와 같은 상태가 되어, 세계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있었단 점이 문제가 된다. 그녀가 아프리카에서 본 노을의 태양이 붉음에서 보라색으로 변해가다 이내 암흑의 빛깔로 사그라지고 소멸해버린 것처럼 말이다. 아무렴 현실의 무게란 게 그만큼이나 견뎌내기 가혹했던 까닭일 테다. 문제극복의 욕구와 문제적 상황으로부터의 탈주를 향한 욕구는 실은 긴밀히 맞물려 있다. 그 옛날 프로이트는 생애후기의 논고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궁극적으론 죽음충동 역시 에로스와 마찬가지로 ‘보수적’이라 언급한 바 있는데, 여기서 보수적이란 말은 기본적으로 리비도 경제에 –즉 주어진 상황 속에서 가능한 쾌락을 극대화하려는 정신역동의 경향에- 부합한다는 뜻이다. 해미가 끝내 살라지기를 바란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자신이 흥밋거리인 것을 알고 있는 해미 |
광대로 소비되는 것마저 전혀 아랑곳 않다 |
벤의 집에서 종수와 함께 담배를 피던 중 술회한 것처럼 그녀는 벤이 자신에게 가진 감정이 고작해야 ‘흥미’ 정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와 어울리는 동안에 결국 자신에게 남은 다른 것들마저 모조리 잃고 또 태워져버리게 되리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을 테다. 그럼에도 그녀는 감당 못할 현실 속에서 이리저리 표류하기보다는 차라리 무너져 내리는 편을 택하고자 자신을 내몰아간 것이리라. 허나 깊은 수렁에 몸을 내던지는 편을 취하면서도, 동시에 한 편으로 해미는 이제 스스론 도저히 멈출 수 없는 폭주기관차처럼 돼버린 자신에게 누군가가 제동을 걸어주길 은연중에 갈구하기도 했다. 허나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당일 벤의 차를 타기에 앞서 종수를 바라보며 망설이는 장면에서부터, 마침내 파주의 종수 집에서 떠나기 직전 여전히 동일한 망설임의 모양새를 내비치는 지점에 이르기까지도, 그는 전혀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되레 현실의 억압과 굴레를 잠시나마 초탈하기 위해 옷을 벗어던졌던 자신의 간절한 몸부림을 ‘창녀의 작태로’ 비하하며 화를 내는 종수를 마주하고서, 그녀는 마지막 구원의 여지마저 완전히 상실케 된다. 이후 그가 벤에게 전해 들었던 것처럼, 해미는 ‘오직 종수라면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해줄 수 있으리라고’ 믿었었기에, 마지막 한 점 남은 미련마저 처절히 짓밟혀진 채 벤의 차에 탄 해미의 얼굴이 그 순간 대단히 차갑게 굳어버린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더불어 이는 자기 파괴적인 관계에 계속해서 자신을 몰아넣음으로써 끝내는 파국을 맞아들이기로 결심을 강하게 굳힌 순간이기도 했을 테다.
하지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설령 그녀 스스로가 원했다고 할지라도, 결코 불을 사른 이에게까지 면죄부를 수여할 순 없다는 점을 돌아보아야만 하겠다. 유비컨대 눈앞의 죽음을 (그것이 신체적이든 혹 정신적이든) 방조한 사람에게 과연 죄가 없을는지 생각해본다면 해답은 분명해진다. 더군다나 거기에 모종의 힘을 보태어주기까지 했다면 재론의 여지마저 없다고 할 테다. 더할 나위 없이 범죄의 구성요건타당성을 만족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 숨은 이면을 들여다본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첫째로 벤은 먼저 그녀가 품은 고통의 문제에 대해 전혀 공감할 의도가 없었으며, 기만된 자상함 이면에선 지겨움에 하품을 토할 만큼이나 무척 심드렁한 태도를 일관해왔다. 더 나아가선 오로지 철저하게 스스로의 흥미와 변태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데에만 그 관계의 목적을 두고 있기도 했다. 궁극적으로는 최소한 그녀를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생각하기마저도 거부하였으며, 실상은 다만 불필요하고 도무지 쓸모란 없기에 ‘태워지기만 기다리고 있는 버려진 비닐하우스’ 따위로 간주했다는 점이 심각한 문제라고 할 터이다. 적어도 이런 점들에 ‘국한지어’ 해설해본다면, 그녀는 간단히 소비된 존재로 그려진 것이 합당하다는 해설도 어느 정도는 성립하게 된다.
“종수에 대해서 간단히 덧대기”
해미가 현실이 자신에게 부여한 억압적인 의미들 앞에서 벗어나 초탈과 초월의 이미지에 가닿기 위하여, 결과적으론 모든 형성된 의미들을 망실해버리는 파괴적인 자리에 스스로를 내던지는 편을 택한 것과는 달리, 종수는 좀 더 교묘한 현실대응의 양식을 보여준다. 그는 쉽사리 메워질 수 없는 현실과 이상의 간극 앞에서 거듭 자위를 반복하는, 다시 말해 양자의 사이공간에서 태어나고 자라 이내 존재를 송두리째 잠식해오는 두려움과 울분의 부정감정(감정의 엔트로피)을 계속해서 허덕이며 쏟아놓기를 반복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가 까마득한 언덕에 소재한 해미네 집 층계참에서 유리를 통해 마주할 수 있었던 대도시 서울의 모습은 상당히 기괴한(grotesque) 것이었다. 그때의 경험이란 분명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음에도, 실상은 좀처럼 가닿을 수 없는 까마득한 위를 올려다보는 것만 같은 불쾌한 감각을 환기했음에 틀림없다.
순간 종수는 말없이 수 초 간 멈춰 서서 당면한 상황의 무게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게 된다. 나이가 지긋이 든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분노를 조절하는 데에 문제가 있어 결국 구속 수감이 된 부친, 그런 아버지 탓에 어린 시절 집을 나가버린 어머니, 천재가 아니면 좀체 전망을 찾기 어려운 문예창작학과 출신에, 암만해도 소설은 써지지 않고 하루하루 일용직 알바로 전전하고 있는 제 삶의 실제현실을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정말로 문제가 되는 건 그런 종수가 요동치는 제 감정의 엔트로피를 해소하는 배설의 구체적인 방식과 과정에 있다고 할 테다.
서울을 내려다/올려다보고 있는 종수 |
수음행위를 통해 부정감정을 해소하다 |
그는 해미의 방 창가에서 수음을 반복한다. 창밖에서 밝은 빛을 내뿜고 있는 남산타워와, 그것의 의도치 않은 시혜로 잠시잠간 스며든 미광에 의존하지 않고선 달리 어두움에 물들 도리밖에 없는 그녀의 방은 완전히 대비된다. 둘 사이는 도저히 허물 수 없을 천만 겹의 격벽과도 같은 창유리를 통해 철저히 가름돼 있다. 간극을 고스란히 느끼며 그는 수음행위에 임한다. 거칠게 몰아쉰 호흡의 끝자락에서 마치 문제가 어떻게든 해소될 수 있기라도 한 듯 말이다. 허나 현실은 전혀 변화되지 않고, 부정감정의 응어리만 잠시잠간 사그라질 따름이며, 실상은 그마저 머잖아 차오르게 될 테다. 다시 해미네 집 잠금장치를 해제하게 될 것이란 뜻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칫하면 장소의 독특성 문제로 격하되기 쉽지만, 분명 종수가 그녀의 집을 그가 안전하게 몸을 풀 인공자궁이라도 되는 듯 느끼고 있다는 점 말이다. 그리고 그 상징적 자궁이 겨냥하는 의미의 실체는 분명 해미로 읽힌다. 그가 수음을 하며 해미의 사진을 바라보는 장면이라든지, 혹은 좀 더 직접적으로, 종수의 상상 속에서 그의 남근을 거머쥐고 대신 위무해주는 존재로서 해미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부인할 수 없을 만치 선명해진다. 혹자는 모든 것이 개인의 은밀한 공상일 뿐임을 주장할 수도 있다. 분명 개인의 내밀성이라든지 자유로운 상상의 영역에 대해서까지 윤리의 잣대를 들이대긴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애당초 그 은밀한 제의를 바로 그 장소에서 아무렇지 않게 행할 수 있도록, 언제 해미에게 허락받은 적 있었던가? 그녀의 자궁 속에서 그녀를 배설의 매개체로 삼도록 말이다.
물론 종수가 해미를 애틋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곤 말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집요하게 그를 쫓아다닌 끝에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서 벤의 복부에 칼을 꽂아 넣을 생각 따윈, 나아가 태워도 좋을 비닐하우스 취급을 받은 해미에 대한 복수로써 아직까지 미미하게 호흡이 붙어있는 그를 무려 산 채로 차와 함께 태워버릴 생각을 실체화하여 옮겨 놓진 않았을 테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복수심의 근저엔 ‘해미를 향한 일방적 사랑’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해미에 대한 욕망’ 내지는 소욕이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을 뿐이라고 하겠다. 쉽게 말해 상호적인 사랑의 감정을 온전히 나눈 결과는 아닌 셈이다. 그러기는커녕, 희미하게 조소어린 벤의 목소리로 진실을 전해 듣기까지 종수는 해미의 마음을 전연 헤아리지도 못한 채, 다만 그 자신만의 감정에만 불타듯 오롯이 취해 있었을 따름이다. 혹 그가 해미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더라면 결코 그녀의 진지한 발악을 창녀의 작태로 비하할 순 없었을 테고, 나아가 그녀가 스스로를 부러 타는 불길 가운데 내던지고 있다는 사실 역시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 가운데서도 파르르 떨리는 한 손을 어렵사리 종수 자신을 향해 뻗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해낼 수도 있었을 터이다. 설령 그를 도의적으로 비난하긴 힘들다는 입장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할지라도, 잠자코 동정의 눈길만으로 종수를 바라보기란 아무래도 껄끄러운 게 사실이라고 하겠다.
“또 다른 여성들, 그리고 남은 문제들”
사실 해미 아닌 다른 여성들에 대한 텍스트의 접근은 꽤나 좋지 않은 쪽으로 일률적이다. 무엇보다 종수의 어머니를 굉장히 문제적인 인간으로 묘사함으로써 아버지의 성격장애를 초래하였음직한 근본원인을 뒤늦게 영화후반에 이르러 새롭게 정초하고, 또 종수가 겪은 각양 폭력들마저 의식적으로 정당화하며, 더 나아가선 그의 삶의 면면에 깃든 모든 불화의 원인들을 은연중 고스란히 모친에게 돌리려는 영화의 시도부터가 쉽사리 용납하기 힘들다고 할 테다. 도대체 어떤 어머니가 16년 만에 만난 자녀 앞에서 그런 식의 태도를 보여줄 수 있다는 말인가? 결국 이렇게 무책임한 인간으로 빚어낼 것이라면 애당초 수화기너머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는 설정을 구태여 집어넣을 이유란 건 또 무엇일까. 아무래도 해명이 어렵다고 할 테다.
대단히 무책임한 존재로 재현된 종수의 어머니 |
벤의 전리품 상자에 깃든 태워진 여성들의 흔적 |
물론 어머니뿐만 아니다. 주연격의 작중인물인 해미를 제외한다면 벤에게 희생당한 여성들이 거의 철저하게 물화되고 있다는 혐의 역시 피하기 어렵다. 해미 다음으로 지목된 태워지길 기다리는 무가치한 비닐하우스, 곧 벤의 변태적 정복욕에 희생될 먹잇감이 돼버린 면세점 직원여성은 그녀들 전부를 대리하는 대표 격의 존재라 보아도 무방하다. 여기서 소시민인 그녀는 상류사회에 대한 뜬구름처럼 막연한 동경을 가진 자로, 그리고 포르쉐 카이엔을 타고 다니는 벤이라는 남성의 부와 명예에 이끌려 몸과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힌 존재로 그려지고 있을 따름이다. 심지어 그녀는 벤과 그의 친구들 사이에 놓인 스스로가, 실상 그네들이 평소에 경험해보지 못했음직한 소소한 흥밋거리를 제공하는 광대의 위치로 전락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대단히 아둔한 인물로 재현되고 있다. 이런 관계설정이 낳을 결말 역시 분명하다. 벤과 어울리느라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게 돼버린 그녀는 끝내 벤의 ‘전리품 상자’ 속에 들어갈 장신구 하나만을 흘러간 실존의 증거물로 달랑 남긴 채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말 터이다. 마치 처음부터 이 세상에 머물지 않았던 것처럼 다른 흔적 따윈 일체 남겨두지 않은 채, 직장 동료도 가족들도 친구도 다른 그 누구도 알지 못한 곳을 향해서 말이다. 대단히 운이 좋다면 혹 어디에선가 별도의 신분증명을 요청하지 않는 허드렛일을 하게 될 것이고, 더러는 홍등가에 종사하게 된다거나, 경우에 따라선 아예 이승이 아닌 곳에서 그 자취를 찾아보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과격한 여성 재현은 단지 벤의 부덕함을 발고하는 목적에서만 그친다고 보기엔 확실히 지나치다. 희생자 일반, 한 발 더 나아가선 평범한 소시민 청년여성일반에 대한 그릇된 표상을 제기한다는 우려와 의혹을 충분히 받을 만하다는 것이다.
한 발 멀찍이 물러서서 좀 더 거리를 두고 살펴본다 해도 문제적이란 사실만은 여전하다. 견디기 힘겨운 갑갑한 현실 속에서라면, 혹 위법성 조각사유를 충족하는 것만 아닐진대,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든 부와 명예를 좇는다는 것이 (심지어 그것을 이미 거머쥔 타인에게 기대는 편을 택한다고 한들) 결코 도의적으로 비난할만한 건 아니라고 하겠다. 그러나 누구나 ‘그럴 수도 있다는’ 말과 누구든 ‘그러하리라’는 말 사이엔 좀처럼 건너기 어려운 현격한 간극이 도사리고 있다. 본 영화의 작가만 아니라 다른 어떤 이라고 해도, 허다한 젊은 여성들의 욕망이 그런 방식으로 (혹은 또 다른 방식으로) 단일한 작용의 양태를 보이리라고 단순화 할 순 없다. 암만해도 영화의 표현이 현실에서 상당히 유리된 욕망의 표준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는 혐의를 피하기 어렵단 것이다. 특히 오늘날 젠더 인식과 감수성의 문제가 반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상황 속에서, 자칫하면 젊은 여성들 일반의 바람이 마치 ㅡ마리아 미즈의 표현을 빌린다면ㅡ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 손쉽게 복속하는 것인 양 범박하게 눙치고 지나가려는 식의 영화적 표현은, 설령 고의가 아니라 해도 다분히 문제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긴 좀 어렵다. 영화작가 스스로도 상당히 묘한 감각에 직면한 탓인지 나름의 자구책을 내세운 것 같지만, 이는 되레 굉장히 ‘거북스런 장면’을 이입하는 결과만을 낳았을 따름이다. 아마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는 (급진적인 계열이든 그렇지 않은 쪽이든) ‘여성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대단히 복잡한 함의를 가진 슬로건을 그렇게 단순한 차원에 국한지어서 뇌까려주길 원하지 않았을 테다. 더러는 아주 큰 강도의 폭력으로 때로는 대단히 세미한 진동의 형태로 존재자들을 엄습해오는 어둠을, 환언하자면 거미줄처럼 대단히 촘촘하고 복잡하게 얽힌 억압의 복수적 맥락들을 단박에 거세해버릴 법한 이 한 마디는, 경우에 따라선 여성주의의 생생한 목소리를 지각없고 비이성적인 외침으로 전락시켜버리려는 부정적인 채색의 도구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만 할 테다.
정돈해보면 무언가 좀 부족한 색상을 사후 덧칠을 통해 채워 넣으려는 시도는 자칫하면 부조화의 역효과를 부를 수 있다. 차라리 처음부터 한결 조심스럽고 세심한 사유의 태도를 취했더라면 조금이나마 더 나은 결과를 산출해낼 수 있었으리라는 판단이다. 사유의 태도, 정확하게는 이 태도의 문제를 낳은 깊이의 부족현상은 그 밖의 다른 부분에서도 극명하게 도드라진다. 이를테면 벤의 개입을 트리거로 삼아 청년집단에 내재적인 갈등과 고뇌 그리고 울분의 정서를 가시화하겠다는 영화의 전략에도 실상은 큰 맹점이 숨겨져 있다고 할 터이다. 쉽게 말한다면 벤을 비윤리적인 자로 그리고 타자에 대한 공감능력을 상실한 괴물로 그려낸다고 해도 청년들이 겪는 어려움은 표면에 잘 응집되지 않는다. 문제의 쟁점은 단순히 상류사회에 속한 어떤 이들과의 갈등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상 부르주아지 혁명이었던 프랑스 혁명에서의 ‘귀족들’과도 같이, 청년들이 일거에 분기를 배설해낼 대상이 필요한 게 아니다. 현실 속에선 소위 수저라 불리는 가정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 외에도 학벌을 위시한 문화자본, 성차, 인맥, 지역, 그리고 이와 더불어 기업의 규모나 직군에 따라 (노동의 강도라든지 그 실질적인 사회적 기여도와는 무관히) 대단히 차등적으로 주어지는 임금격차 등을 위시한 갖은 요인들로 인해, 청년들 사이에서조차도 상호 간에 상당히 큰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요컨대 기성세대로부터 유래한 폐습 곧 갑이 을을, 을이 병을, 병이 정을 만드는 부정의 원리가 고스란히 옮아와 청년사회를 물들이고 있는 셈이다. 그렇담 문제해결의 열쇠는 기존 시스템 자체의 전면적인 교정에 있다고 할 테다.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구속을 벗어던지고, 정말로 가진바 (실제로 그/녀가 무엇을 얼마나 잘 해낼 수 있는지를 증명해내는) 능력에 따라 자유롭게 경합하는 가운데 타당하고 합리적인 욕망의 타협점들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구조차원의 질적 개선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세련되게 잘 갈무리된 이데올로기를 전파했어야 한다는 이른바 ‘선동에의 요청’ 따윌 언급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구태여 영화가 아니라도 그런 일을 감당해줄 르포르타주 매체들은 얼마든지 존재하는 까닭이다. 다만 중요한 건 이것이다. 벤과 같은 존재를 부각하는 일 따윈 잠시잠간 억류된 감정을 분출할 해방구를 마련해주는 수단이 될 뿐이지, 청년들의 지각과 의식의 지평에 어떤 진지한 파문을 일으키는 방편이 되어주기란 어렵다는 점 말이다. 아무래도 이는 앞서 지적한바와 같이 영화가 청년들을 위해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는지에 대한 보다 깊은 고민의 부재로부터 말미암은 문제일 것이다. 기존에 영화작가가 오랜 시간 동안 보여주었던 탁월한 재능과 감각을 고려한다면, 분명 완전히 새로운 접근을 통해 전혀 다른 영화적 형상화를 일구어낼 수가 있었으리란 점이 조금 ‘아쉽단’ 말을 첨언해보는 것 역시 가능하리라.
“마지막으로 한 점의 옹호를 덧붙이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들릴는지도 모르겠지만, 글을 닫는 말미에 이르러 다만 섣부른 옹호의 말을 약간 덧대보고자 하는 이유 역시 바로 이 아쉬움에 달려있다고 할 테다. 하여, 한 가지 가정적 추론을 제기해보고자 한다. 어쩌면 너무나도 영민한 작가는 어차피 스스로가 청년이 아님을, 그래서 그들의 심중에 깃든 묵직한 덩어리의 무게며 밀도며 질감을 온전히 투영해내는 영화를 만들어내진 못할 것이란 점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미 결말이 예정된 ‘도덕적인’ 영화를, 정말이지 유치하다 못해 뻔뻔한 영화를 만드는 건 도무지 그이의 눈에 차지 않았으리라.
바로 그렇기에 영화작가는 일부러 느슨한 국면들을 곳곳에 남겨둔 건 아닐까? 자신이 과업을 완수해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허다한 청년들이 생산해내는 여러 말들을 통해 영화가 벌충되고 비로소 완성되길 꾀한 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보는 게, 전혀 무리한 해석인 것만은 아니라고 할 테다. 어쩜 그야말로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는 자만이 비로소 해낼 수 있는 작업일는지도 모른다. 작품의 의미가 완성되는 장소란 결국 그것이 작가의 손을 떠나 관객과 만나 상호 교감하는 자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젠더 문제 하나만을 꼽아 보더라도 그러하다. 아무렴 이미 환갑을 훌쩍 넘어선 자신의 손과 입에서 좀처럼 나오기 힘든 섬세한 말들을 무리하게 떠올려보기보단, 미지로 채워질 공백의 영역을 예비하고 열어둠으로써, 그들 스스로의 허다한 말들로 틈새를 채워나가기를 바랐으리란 주장이다. 이를테면 영화의 ‘무엇’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와 다소의 거리두기와 부분적인 찬성의 목소리들이 마구 공명과 불화를 거듭하면서 얽어지는 바로 그 한 가운데에서, 의미의 직물이 탄생하리라고 믿은 셈이다. 그렇담 필자의 부족한 해석 역시도 그 촘촘한 직물을 구성하는 어느 한 귀퉁이의 날실 정도의 위치는 차지할 수 있게 될 터이다.
물론 이런 생각이 곧 정답은 아니다. 예술가의 완전한 구획과 통제를 벗어나, 때로는 그 자체에 고유한 양식과 언어들이 풀어놓는 길을 따라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기도 하는 예술적 표현의 여정에서, 노련한 작가들마저 완전하게 제 손아귀에 틀어쥔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을 일개 젊은 비평가가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주장은 지극히 허구적인 믿음이거나, 또는 지나치게 과장된 거짓말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확실한 한 가지는, 적어도 본 영화 텍스트가 분명 생산적이라는 점이다. 필자의 구미를 당길 만큼이나, 그리고 그 밖의 허다한 말들을 견인해내고 또 그 위로 새로운 말들을 계속해서 켜켜이 쌓아낼 만큼이나 말이다. 텍스트가 머금은 생산성을 따라 앞으로 좀 더 많은 말들이 논의의 장 속으로 호명되고, 또 그 말들이 이리저리 충돌하는 가운데 결의 풍성함이 선명하게 드러날 즈음이면, 혹 새로운 해석적 지평의 윤곽이 제 모습을 현상해내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글 : 남유랑
평론가.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 당선 및 2017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현재 남병수라는 이름으로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논문이나 에세이 등속의 영역들과 구별되는 지점에서 '과연 비평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무엇을 감당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에 답하려고 늘 고민하는 중에 있다. 이를테면 비평의 비평다움 내지는 비평의 고유한 위치에 대한 문제설정이 삶의 중요한 화두인 셈이다. 더불어서, 정치철학적 거대담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구원과 새로운 유형의 혁명을 호명해낼 가능조건으로서의 예술에 관하여 치열하게 사유하는 노정에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