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희(영화평론가) 장률 영화의 비극성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사실적이라 하기에는 너무 황폐하고, 냉정하다 하기에는 너무 극단적이다. 어쩌면 그것은 겉으로는 변경 지역의 벌판처럼 차갑고 메마른 듯하지만, 그 내면은 숨죽인 갈망으로 들끓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두만강>은 이제 그 갈망이 현시되는 영화이다. <두만강>은 중국과 북한의 국경 지역인 두만강변에 사는 조선족의 이야기다. <망종>(2005)에서의 조선족이 거의 살지 않는 변방, <경계>(2007)에서의 몽골과 중국의 접경지역, 그리고 <중경>(2008)과 <이리>(2008)에 이어 이제 ‘두만강’인 것이다. 그런데 조선족에게 두만강은 다른 변경과는 다르다. 김동환의 <국경의 밤>(1925)에서 소금을 밀수하는 ‘순이’의 남편이 그랬듯이, 그곳은 오랜 도강(渡江)과 희생의 역사가 서린 곳이다. 또한 조선족에게 그곳은 과거의 고향과 현재의 터전, 혈연주의와 속지주의가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탈북자가 두만강을 건너왔을 때 그들은 국경을 넘어온 이국의 침입자이지만, 민족과 언어가 같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과거 그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현재 조선족과 탈북자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될 수 있을까? 아울러 경계와 위계 속에서도 민족으로 얽히는 남한과의 관계는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까? <두만강>은 도강이 쉬워지는 두만강의 한겨울을 배경으로 그것을 묻고 있다. 이 영화에는 세 가족이 나온다. 주인공 창호네 집, 철부네 집, 그리고 촌장의 집이다. 창호는 할아버지와 벙어리 누이 순희와 함께 산다. 창호의 아버지는 두만강에 빠진 순희를 구하려다 죽었다. 이후로 순희는 말을 잃었다. 창호의 어머니는 가난에서 벗어나보려고 남한에 가서 일을 하고 있다. 철부네 집은 가게를 한다. 철부의 아버지는 북한을 드나들며 무역을 하면서 탈북자를 돕는다. 철부네 집에는 사촌여동생이 살러 와있는데, 남한에 일하러 갔던 그 아이의 부모가 화재로 죽었기 때문이다. 촌장은 치매에 걸린 노모를 모신다. 노모는 두만강에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다리가 있었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틈만 나면 두만강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 한편 촌장은 두부장수 용란과 외도를 하고, 용란은 남한에 돈 벌러 가려는 꿈에 부풀어 있다. 어느 날 이 마을에 축구를 잘하는 소년 ‘정철’이 찾아온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다. 이웃마을과 축구시합을 앞두고 있는 조선족 마을의 소년들은 정철을 팀에 넣어 시합을 하고 싶어 한다. 정철은 시합에 오기로 약속을 한다. 그런데 탈북자에 의한 마을의 피해가 심해진다. 탈북자를 도와주던 순희가 강간을 당하고, 마을 곳곳에서 도난 사고도 잦아진다. 그리고 도강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면서 급기야 탈북을 도와주던 철부의 아버지가 체포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정철이 축구 시합 약속을 지키겠다고 창호를 찾아온다. 이 영화의 결말은 지금까지의 장률 영화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여성의 육체를 훼손하는 데 주저함이 없고, 소년의 죽음은 순식간에 이루어지며, 누군가가 믿고 의지하는 대상은 철저하게 부정되거나 부서진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마지막에 비명이 터져 나온다. 다름 아닌 벙어리로 살았던 순희의 목을 통해서이다. 그 비명은 <두만강>이라는 텍스트 내부에서나, ‘장률 영화’라는 콘텍스트에서나 모두 놀라움을 준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숨죽여 울고, 말없이 걷기만 하던 ‘순희’가 말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희’는 이 영화에서의 이름만은 아닌 것이다. 순희의 부르짖음에 이어 촌장의 노모가 천천히 두만강 다리를 건너는 장면이 제시되며 영화는 끝난다. 이 마지막 장면은 ‘순희 목소리’라는 날카로운 실재의 여운 속에서 제시되기에 환상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장률 영화의 ‘정처 없음’은 ‘다리’라는 구체성을 확보한다. 그것이 다른 곳이 아닌 ‘두만강’이어서일 수도 있겠으나, ‘순희’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은 의미 있는 변화로 읽힌다. 전작인 <이리>에서 마지막에 진서(윤진서)의 유령이 나타났던 것을 상기하면 ‘변화라는 해석’은 좀 더 설득력을 발휘한다. 어쩌면 이것은 장률 영화의 ‘참담함’에 대한 나의 갈망일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