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은 출정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네 가지의 가르침을 주었다. 그것은 사구교(四句敎)이며, 마지막 구절이 “위선거악시격물(爲善去惡是格物)”이다. 그는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는 것이 사물의 이치에 이르는 길임을 제자들에게 남기고 전장터로 떠났다.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는 것은 제과점의 카스테라처럼 윤리와 종교의 영역에 핵심 가르침이다. 노자도 도덕경의 마지막 장에서 “하늘의 도는 이롭게만 할 뿐 해롭게 하지 않으며 성인의 길은 위하되 다투지 않는다”라고 마침표를 찍었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의 경계를 거부했던 노자였지만 마지막 장구에서는 결국 ‘위하되 서로 싸우지 말 것을 성인의 도’(聖人之道 爲而不爭)로 천명하고 만다. 이는 지구상의 모든 경서의 도달점이 ‘선을 따르고 악을 멀리하라’임을 입증해준다. 하지만 선과 악의 가치판단 기준과 저울을 무엇으로 삼아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답을 스스로 찾아가야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신연식의 <로마서 8: 37>은 악행과 속죄의 문제를 정면으로 내세운다. 중심 인물은 회개하지 않는 목회자와 스스로 회개하고 고백하는 선한 전도사로 배치된다. 첫 장면은 산의 능선에서 도착한 강요섭 목사를 맞이하는 성도들을 어두운 그림자로 잡았다. 그들은 서로 환대하고 선한 말을 주고 받지만 산의 능선을 밟고 서있는 피사체로 이미지화하여 선과 악의 공존가능성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은 전도사 기섭의 자복의 기도를 검은 화면에 보이스 오버로 배치한다. 기도 소리는 어둠 속의 별처럼 빛나는 회개의 소리로 관객의 영혼을 울린다.
이 영화는 한국 교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비판적 사실성과 목회자들의 담임 목사 승계권 싸움에서 성추행 사건으로 발전하는 대중성의 두 기둥 위에 견고하게 서 있다. 영화의 내용은 교회가 직면한 목회자 승계의 문제와 신앙인은 악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가져야할 용기와 스스로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어떻게 성찰하고 실천해야하는가에 대해 질문하고 답한다.
신연식의 <로마서 8: 37>은 두 가지 파격을 보여준다. 하나는 독창적인 서사적 실험을 감행한 신연식의 스타일에서 벗어나 기승전결의 구조로의 복귀이며 다른 하나는 기독교에서 죄의 문제를 대중영화의 장에서 전경화한 점이다. 한국영화에서 기독교는 배타적 기복신앙으로 변질되었고 인물들은 속물로 전형화되었다. 한국영화사에서 기독교는 상업영화의 배경으로 (<할렐루야>(1997)) 존재하거나 선전 선교영화로 이용된 적(<낮은 데로 임하소서>(1982))은 있지만 이렇게 전면에 구원과 죄의 문제를 다룬 것은 이례적이다. 종교 영화에 근접한 작품은 유현목의 <순교자>와 <사람의 아들>정도 손꼽을 수 있었으며 2017년에 정통 종교 영화의 귀환을 목도하게 된다.
부순 교회는 강요섭 목사와 박강길 목사가 후계 구도를 위해 경쟁한다. 기섭은 자신의 처남이면서 경외하는 강요섭 목사 진영에 가담한다. 하지만 기섭은 강요섭에게 도덕적 결함과 죄가 있음을 확인하고 협력을 철회한다. 정의로운 편에 선 기섭은 오히려 교인들의 공격을 받게되고 강요섭 목사는 박강길 목사와 연대하여 교회에서 입지를 보장받게 된다. 강요섭 목사는 지위를 유지할 만한 덕행을 쌓지 못하여 스스로 교회의 세속화 주범이 된다. 주역(周易)에 “솥이 발이 부러져서 윗 사람에게 바칠 음식을 엎었으니 형벌이 무거워 흉하다”라는 효가 있다. 이에 대해 공자는 ‘덕이 적으면서 지위가 높고 지혜가 적으면서 큰 계획을 세우고 힘이 작으면서 무거운 짐을 맡으면 화가 미치치 않을 수 없다’고 풀었다. 강요섭 목사가 덕없이 큰 자리를 탐하는 전형적 인물에 부합한다. 이와 같은 세속화된 인물이 교회의 담임 목사로 사역할 수도 있다는 설정으로 한국교회를 꼬집고 있다.
리쾨르는 악(惡)의 세 단계를 '흠'과 '죄(Sin,罪)'그리고 ‘허물’을 들었다. 흠은 얼룩과 부정이며 악의 첫 단계이다. 죄는 율법의 위반과 개인의 탐욕으로 야기된 보편적인 악의 상징이며 허물은 한 인격이 겪는 죄 경험이다. 죄가 신 앞에 선 인간처럼 보편의 지평이라면 허물은 개인의 영역에 놓여있다. 모든 인간은 죄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우며 철학과 종교는 이에 대한 해결방법을 제시한다. 인간은 자기 허물과 모든 사람이 감당해야할 법규의 위반과 자신의 탐욕으로 야기된 ‘죄’, 그리고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얼룩인 흠이라는 악의 형상에 물들고 종교를 통해 정화하면서 살아간다. 자연 속에 놓여있는 바위에도 시간의 이끼라는 흠과 비바람으로 마모된 얼룩과 같은 굴곡을 남긴다.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허물의 얼룩으로 스스로의 내면의 자화상을 그리는 일이다. 얼룩과 악의 흔적은 성찰과 용서를 통해 정화되거나 삶의 무늬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대부분 공익추구라는 명분으로 자기 기만의 죄에 을 남기는 일이다.
기독교는 모든 죄는 대속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믿는 자는 죄에서 사하게되고 영생을 얻는다는 복음으로 구원의 출구를 만들어준다. 성도는 구원의 가능성과 영생에의 기대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교회는 자본주의 시대에 헌금으로 대표되는 물질과 대형교회의 속출로 가시화되는 물신숭배라는 우상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고 있는 형국이다. 신자들은 구원을 위해 예배당을 찾지만 정작 대형교회는 물질 숭배와 담임목사 승계를 위한 권력싸움이라는 세속적 타락이라는 흠을 모든 신자들에게 복음 대신 제공하기도 한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기섭의 딸은 사랑해서 준 과자를 먹고 애완 동물을 죽게한다. 장자(莊子)에서도 노후가 잡아온 바다새에게 술을 대접하고 구소(九韶)의 음악을 들려주고 소와 돼지를 잡아 대접했지만 그만 죽고만다는 우화가 있다. 정작 바다새에게 필요한 것은 숲 속의 둥지와 입에 맞는 벌레 한 마리였다. 그릇된 사랑은 때로 누군가에게 독화살이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기섭은 딸이 사랑했던 동물을 장례지내면서 기도드린다. 선한 목자인 기섭은 자복하고 마음 속 깊은 용서를 빈다. <로마서 8:37>은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니라”라는 복음으로 구원 가능성을 갈구한다.
글: 문학산
영화평론가. 한국 독립영화와 동아시아 작가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며, 저서로 『한국 단편영화의 이해』와 『한국 독립영화 감독연구』 등이 있다.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