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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의 시네마 크리티크] 타인의 삶과 나의 삶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타인의 삶'(2006제작, 2013 개봉)

성취할 수 없는 것들

살아가다 보면 아무리 성취하고자 해도 인간의 힘으로 도무지 성취할 수 없는 게 있어 보인다. 예컨대 인간이 맞닥뜨리는 삶과 죽음이 그러하고 타인 또는 타인의 삶 또한 그렇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오는 죽음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세상에서의 삶을 내 스스로가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개인에게 주어진 운명과 같은 어떤 것이라면, 동시에 사람은 다른 사람 그 자체, 그 사람의 삶이나 마음까지 성취한다는 것 또한 불가능해 보인다.

타인을 사로잡거나 정복하고자 하는 일들은 아주 옛날로부터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시도되어온, 그러나 늘상 실패하고 마는 것들 중 하나로 손꼽혀 왔다. 쉽게는 사랑하는 연인과의 관계가 그러할 수 있겠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혹은 친구와 친구 사이의 관계까지 말이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서로가 관계를 맺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임을 반증하는 사례가 될 수도 있겠고, 다른 한편에서는 주체 그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혹은 그 자신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로부터 시작된 감정일 수도 있겠다.

타인의 삶이라는 영화도 타인의 삶, 그 다룰 수 없고 복잡 미묘한 세계를 향한 어떤 사람의 생애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공산당 정권 시절의 동독인데, 동독의 국민들은 비밀경찰인 슈터지의 엄격한 재한을 받았다. 여기서 독재정권의 최종 목표는 바로 모든 것을 파악하기였다. 사람들의 모든 생활을 모조리 파헤쳐서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은 척결해 버리고, 불순분자들을 지워버림으로써 나라에 필요한 사람만을 남기는 것이 국가의 목표였던 셈이다. 그리하여 정권은 수 십 만 명의 감청요원과 스파이를 배치하기까지 되는데, 여기에 투입되는 요원 중 하나가 바로 영화의 주인공인 비즐러이다.

빈 틈을 찾아서

비즐러의 인생은 무진장 성공한 듯 보인다. 그는 수 십 만 명의 요원들을 제치고 최고의 자리를 누리고 있을 뿐 아니라, 예리하고도 민첩한 직관 덕분에 현장에서는 더더욱 빛을 발휘한다. 이론과 실제를 한 몸에 겸비한 사람. 그의 유능함은 경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나, 조속히 처리해야 할 임무들을 맡아함으로써 그 명성을 더한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삶엔 여유가 없다. 그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잠복근무나 감시, 취조나 고문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식사를 하고 씻고 잠을 잘 뿐이다. 어쩌다가 자신의 성욕도 여자를 사서 해결하고 치워버린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진회색의 요원 제복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고, 동시에 아무런 감정이나 욕구도 없어 보이는 사람이기까지 하다. 그는 어떤 면에서는 차갑고 낯설고 날카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동시에, 어떤 면에서는 고독하고 외롭고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 모습은 마치 예루살렘의 아히이만을 연상케 한다. 시키는 것만을 했다고 주장하는 아히이만. 수 십 만 명을 학살했던 희대의 비극이 아히이만의 문제는 아무런 생각 없음, 감정 없음에서 나왔다고 말하는 것처럼, 비즐리 또한 상관에 대한 절대 복종과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화는 그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태도가 너무나도 자기모순에 빠져 있으며, 동시에 그것을 합리화 시킨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는 대학교에서의 강의를 통해 진술이 너무나도 일관되게 동일하면 그것은 거짓이며, 반대로 진술이 이것저것 바뀌어도 문제가 있다고 밝힌다. 결국 그의 관점에서 당국에서 관찰자로 지목된 사람의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것, 거짓일 따름이며 자신과 같은 요원들은 그것을 판명하기 위해 끝까지 파헤칠 따름이다. 객관적인 판단과 진술에 의해 결정되어야 할 사항들이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판명되고 이해되는지를 다시금 알 게 된다.

비즐러에게 있어 상대방의 이야기는 들을 필요가 없을뿐더러, 하나의 핑계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피의자를 심문하는 고문관처럼 비즐러의 세계에서 타인이란 너무나도 성가신 존재, 거짓말을 하는 존재에 불과하며 그 사람의 거짓을 포착하여 내는 것만이 그의 주된 임무다. 따라서 그는 상대방을 늘 도청하고 감시하지만,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상대의 삶에서 비워져 나오는 빈 틈, 그 구멍의 진실을 포착하여 당국의 이념과 맞지 않을 때 철저히도 그것들을 잡아다가 감금할 뿐이다.

너무나도 비-주체적인 삶

비즐러가 무수히 만났던 사람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고 꿈꾸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왜 동독의 이념을 벗어나면서까지 그러한 무모한 일을 했느냐는 말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 바로 예술가이자 극작가였던 드라이만이었다. 드라이만은 저명한 극작가로서 동독뿐만 아니라 서독에서까지 활발히 활동을 하면서 많은 사상을 쉽게 유입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는 자유분방했고 어딘지 모르게 유쾌했을 뿐 아니라, 동독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누리고 있지 못하는 것을 누리고 있다는 것에 대한 선망과 동시에 질투(불쾌)를 안겨다 주는 사람이었다.

드라이만의 연극을 보는 동시에, 비즐리는 직감했다. 그는 당국에 위험한 사상을 유입할 인물이다, 그는 위험하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이에 맞춰 당국에서도 그를 감시하기를 원했고, 비즐리와 그의 친구는 그를 특별히 눈여겨 감시할 것이라는 명령을 내려 받게 된다. 비즐리는 자신이 직접 드라이만의 집에 도청장치를 설치하고, 카메라를 달아 놓음으로써, 아무런 인기척도 내지 않는, 그러나 늘 어디에선가 감시하고 있는 타자의 구역을 만들어 놓는다. 비즐리(라는 당국)의 눈이 그를 감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드라이만은 역시나 자유롭게 행동했다. 그는 유명한 여배우인 크리스타와 한 집에서 살면서 끊임없이 파티를 벌였고, 밤낮 할 것 없이 자신의 글에 몰두하기에 바쁘다. 드라이만의 친구들 또한 유명한 예술가들로 넘쳐났는데, 그 중에서도 예르스카는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었다. 예르스카는 드라이만의 연극을 연출해 주었던 연출가이자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의 자유로운 사상은 동독과 서독을 이어주었을 뿐 아니라, 예술을 통해서 나라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로 생각한다.

 

그러나 당국에서는 그의 발표문이 너무나도 동독적이지 않다는 것에 반기를 들어, 그것을 철회할 것을 요청했으며 그것이 거절되자 활동금지 처분을 내려 그의 모든 삶을 아예 단절시켜 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 비즐러가 예르스카가 결국 목을 매 자살했다는 비보를 듣게 되고, 드라이만과 그의 친구들이 얼마나 심한 고통에 시달렸는지에 대해 목격하게 되면서 그들이 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특히나 비즐러는 예르스카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예르스카가 드라이만에게 건낸 책들을 비즐러가 중간에서 빼돌려 읽으면서, 예르스카라는 사람 자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예르스카의 죽음은 드라이만에게 뿐만 아니라 비즐러에게도 강한 슬픔을 남긴다. 그는 울었고, 마음 아파했으며 처음으로 감정다운 감정을 느낀다. 무엇보다 브레히트의 시집과 아름다운 영혼의 소나타를 들으면서 비즐러는 그들이 추구하는 예술이란 무엇이고, 그들이 보고 읽고 듣고 있는 무수한 이야기들이 무엇인지, 그들은 무엇을 꿈꾸고 꿈꿔 왔으며 꿈꾸고자 하는지 조금씩 귀를 열고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순간 결심한다. 그들을 도와주겠노라고. 비즐러는 처음으로 자신 스스로결정을 내린다. 그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인지를 알면서도 말이다. 그들의 삶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기에 이른다.

무엇보다도 당국의 조취가 얼마나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것인지에 대해 파악하게 된다. 비즐러에게 드라이만을 감시하라 일렀던 장관조차도 자신의 욕정 때문에, 드라이만의 여자친구를 강제로 협박하고 괴롭힌다는 사실과 그것을 꾸준히 은폐하는 당국의 태도를 보면서, 비즐러는 당국은 옳은 것이 아니라 단지 힘이 센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힘이 센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고 있다는 일말의 진실을 포착하게 되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세계로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스스로 결정짓는다.

그러나 자신이 설치해 놓았던 만큼 더욱더 견고하고, 치밀한 그 덫을 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당국의 눈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철저히 속여야 했다. 그러나 그때 비로소 비즐러는 자신의 모습을 찾는 것 같이 보인다. 그는 비록 자신의 거짓말을 은폐하기 위해 전전긍긍할 따름이지만, 처음으로 이웃집 아이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아이의 이름을 물어보다 당황해서 공 이름이 무엇이냐고 엉뚱한 질문을 한다), 요원 동기의 철없는 장난에 불쾌를 느낄 줄 도 알게 되며, 드라이만과 그의 여자 친구가 잘 될 수 있도록 헌신을 다해 돕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만약 그가 하는 행위들이 단지 그들의 삶을 동정했기 때문에 한 행동이라면, 동정이 바닥날 때 까지만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즐러는 자신의 행동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다. 도대체 왜? 아무런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냐는 말이다. 그가 천성적으로 착했기 때문에? 갑자기 죄책감을 느껴서? 어쩌면 비즐러는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는지도 모른다. 당국의 철저한 감시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조작하고 은폐하려 들 때, 비로소 자신의 삶 또한 돌아보게 되었다. 나 또한 당국의 철저한 감시망에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그리하여 내가 왜 살아야하고 어떠한 이유를 가지고 살아야 할지를 묻고 있는 자들을 그렇게도 열심히 돕는다. 그들을 돕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을 돕는 것, 나 자신을 구출할 수 있는 유일한 일처럼 보였기 때문은 아닐까.

결국 비즐러는 자신의 모든 윤택한 삶을 잃고(버리고), 새로운 자신을 찾기에 힘쓴다. 그는 다른 사람의 삶에 동감할 수 있는 마음을 얻었고, 사랑을 배웠으며, 인생에서의 가치를 찾고자 노력한다. 그에 삶에서는 무시 되어 왔었던 것. 그러나 그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것들을 스스로 찾아 나서게 된 것이다. 그는 당국에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주체가 아니라,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자신의 삶을 찾고자 했다. 너무나도 비주체적이었던 삶에서 그는 자기를 구출해 가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주체적인 것들의 비극

그러나 때로는 주체적인 선택이 나에게 엄청난 비극을 가져다 줄 때가 있다. 비즐러의 상황이 그러한데, 그가 돕고자 했던 행위들, 예컨대 크리스타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드라이만에게 글을 쓸 수 있도록 동조해 주었을 뿐 아니라, 그의 타자기를 감추었던 모든 도움들이 물거품이 되고 마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크리스타의 죽음이었다. 그의 도움이 한 순간에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 내 손에 의해서 죽어간 사람, 나의 도움으로 죽어간 사람을 목도하게 된다.

차라리 자신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후회와 더불어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한 채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주체적인 선택은 그 상황이 희극이든 비극이든 그 어떤 상황을 가지고 온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것을 온 몸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닐까. 비즐러가 그들을 도왔다는 물증은 없지만, 심증으로 그 모든 것이 입증되는 바, 당국에서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의 삶은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평생을 감시와 조롱의 눈초리를 받으며 살게 되었다.

비즐러는 평생 자신의 선택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어디에 하소연을 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일까. 그의 삶은 도리어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의 모습은 요원의 일을 했을 때와 별반 달라진 것 없이 회색빛 유니폼을 걸치고, 우편들을 집에 날라다 주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고 있을 따름이지만 그는 어딘가 달라 보인다. 그것이 오로지 영화를 감상하는 우리의 눈에만 달라 보인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아름다운 결말

영화는 아름다운 결말을 맺는다. “감사한 마음을 담아 HGW XX/7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그렇다. 드라이만은 비즐러가 자신을 도왔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위한 책을 내면서 영화는 결말을 맺는다. 비즐러의 말처럼, “이 책은 저(비즐러)를 위한 겁니다.” 맞다. 비즐러는 비로소 자신을 '아름다운 영혼의 소나타'라고 불러주는 친구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당국이 아무리 끊어 놓으려 해도 만나는 이 아름다운 가치들을 우리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주체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타인을 도우려는 마음을 갖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으로 살 때만이 비로소 타인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되는 영화인 듯 싶다. 타인을 발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주체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 주체가 된다는 것, 주체로 산다는 것이 무언인지를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글: 이 호

200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한국문인 인장박물관> 학예실장.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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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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