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를 통해 이런저런 영상들을 보는 게 지난해와 올해 생긴 가장 명백한 취미일 것이다.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들이 많아 시간이 생길 때마다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특히 즐거웠다. 혹은 언젠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드라마 시리즈나 영화의 목록들을 나름대로 작성해나가고(찜하기) 휴일을 기다렸다가, 혹은 기다리지 못한 채 보게 되는 것도 넷플릭스가 있어 가능한 삶의 모양이 되었다. 하반기 들어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플랫폼인 넷플릭스와 관련해 들려오는 영화계의 뉴스가 뜨거운 것 같다. 오슨 웰즈의 미완성 유작이었던 <바람의 저편>을 비롯해 코엔 형제나 알폰소 쿠아론 등의 영화가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 영화제나 극장 개봉 등을 둘러싸고 말이 많지만 여기서 그 내용을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논쟁은 영화의 제작과 수용방식의 보다 긴 역사와 더불어 벌어져야 하는 것이라는 말만 해두려고 한다. 그보다는 이른바 ‘거장’들의 영화가 제작되기 이전에도 넷플릭스는 영화감독들의 새로운 길이 되어왔다는 점을 돌이켜보는 편이 좋겠다. 그리고 여기에서조차 제작되지 못했던 영화들이 있다는 것도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다. 내게는 코엔 형제나 알폰소 쿠아론의 신작보다는 그보다 조금 이르게 공개되었던 한 편의 영화가 더 흥미로웠다. 타마라 젠킨스의 <프라이빗 라이프>(Private Life, 2018)다.
<프라이빗 라이프>는 불임치료와 입양절차를 동시에 진행하고자 애쓰는 중년 부부의 삶을 다룬다. 감독 타마라 젠킨스의 전작 <세비지스>(The Savages, 2007)에서처럼 한 개인과 가족을 둘러싼 내밀하고도 사회적인 인생의 대소사가 이 영화의 관심사다. <세비지스>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학대받고 자라 20년이 넘게 별다른 연락 없이 지냈던 남매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아버지의 인생의 마지막을 책임지게 되며 벌어지는 일을 담고 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탐구보다는, 출산이나 늙음, 죽음과 같은 자연스럽고 사적인 과정들이 현대 미국사회에서 어떤 인공적인 일련의 절차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에 젠킨스의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의 삶과 감정은 결코 매끄럽지 않은 것이어서, 배설물과 울분, 죄책감과 신경질 같은 것들이 종종 포장지를 찢고 새어나온다. 포장되지 않는 삶의 신경질적인 고단함이 젠킨스의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레이첼(캐서린 한)과 리처드(폴 지아마티) 부부는 뉴욕에 살고 있고 젊은 시절에 연극을 했으며 지금도 예술가의 삶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는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것은 ‘아이를 갖기 위한’ 노력으로, 그들은 체외수정 실패 다음에 선택한 인공수정과 입양 프로그램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물론 이 절차들은 대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은밀하게 진행된다. 남들에게 알리기 싫어서이기도 하고 입양 절차는 불임치료와 함께 진척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의 초반부는 인공수정의 과정을 보여준다. 난자와 정자를 채취하고 그걸 다시 이식하며 테스트를 거친다. 사적이고 내밀한 것으로 여겨지는 임신과 관련된 이 절차들이 깨끗한 불임치료 센터에서 규격화되고 관리되는 모습이 드러난다. 대기실을 언제나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들이 그 풍경의 일부를 구성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그와 같은 ‘세태’를 비판하는 데에 손쉽게 편승하는 것은 아니다. 관리와 절차가 진행 되어도 결코 함께 정리되지 않는 혼란과 분란들을 포착하고 그럼에도 계속되고 있는 삶을 영화는 응시한다.
첫 인공수정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두 사람이 실의에 빠져있을 무렵, 리처드의 의붓 조카 세이디(케일리 카터)가 등장해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마침 병원에선 난자를 기증받아보는 것을 권유한 참이다. 세이디는 대학 졸업을 미뤄두고 무작정 뉴욕에 도착해 어린 시절부터 동경했던 두 사람과 함께 잠시 지내게 된다. 이들은 무척이나 친밀해보이지만 ‘난자 기증’과 같은 부탁을 하는 건 물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세이디는 세이디 나름대로 그것을 의미 있는 일이라 여기고, 다소 이상해보이긴 하지만 세 사람이 하나의 수정체를 만드는 일이 곧 시작된다. 세이디가 그녀의 엄마와 겪는 갈등이나 난자의 성장 속도와 관련된 문제와 같은 한바탕 우여곡절이 지나간 후, 여전히 임신은 성공하지 못했고 레이첼과 리처드는 종종 싸우며 세이디는 글쓰기의 꿈을 위해 다시 집을 떠난다. 물론 세 사람의 관계는 조금 더 돈독해진 것 같고 이들은 삶의 난관을 하나쯤 넘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이 이야기에서 어떤 결론의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이야기는 끝은 따뜻하지도 교훈적이지도 않다. 혹은 종종 인물들의 말과 행동이 냉소적이긴 하지만 영화의 태도마저 냉소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세비지스>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는 것으로 이미 말다툼을 하고 나서, 남매는 아버지를 보낸 곳보다 더 좋은 요양원을 방문한 뒤 싸운다. 웬디(로라 린니)는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좋은 시설에 모시려는 마음이 뭐가 문제냐고 따지고, 존(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더 좋은 시설의 깔끔한 요양원과 같은 일련의 기관들은 사람들이 죽는다는 단순하고 비참한 사실을 가리는 데 급급하다며 화를 낸다. 이는 언뜻 영화의 숨은 주제를 대변하는 비판적인 코멘트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드라마틱한 순간에도 휠체어를 타고 노인이 지나간다. 너무 느린 속도로. 조금 전까지 요양원과 죽음의 사회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따지던 존은 그 등장에 머쓱해 할 수밖에 없다. <프라이빗 라이프>에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난자가 젊은 나이에 걸맞는 속도로 자라지 않는다며 세이디에게 소리를 질렀다던 의사에게 따지기 위해 리처드가 병원에 들어간 장면이다. 내 조카는 닭이 아니라며 의사에게 화를 내고 돌아서려는 찰나, 그는 실수로 진열된 팜플렛들을 모두 엎어버린다. 역시 이 드라마틱한 순간에도 그는 그것을 주섬주섬 주워 담으며 사과를 해야 한다.
종종 젠킨스 영화의 인물들은 자신들이 처한 부조리한 상황을 알아채고 예술가 혹은 지식인답게 그것에 대해 논평한다.(<세비지스>의 남매도 역시 연극을 하거나 극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것이 직업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들이 차마 마주하기를 꺼려하는 본인들 내부의 모순, 이기심, 적나라한 욕망들도 보여준다. 그런 태도는 인물들이 겪고 있는 곤란과 현실적인 문제들을 소외시킬 만큼 냉소적이지도 않지만, 그 현실적이고 사적인 문제들이 놓인 맥락을 지워버릴 만큼 ‘인간적’이기만 한 결말로 이끌지도 않는다. <프라이빗 라이프>의 마지막, 어느새 9개월이 흘러있고 레이첼과 리처드는 다시 한 번 입양을 위해 생모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긴장되고도 지난한 기다림의 시간. 여기 사적인 시간과 사회적인 시간이 함께 흐르고 있다.
글: 손시내
2016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에서 활동 중.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