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VIP인가 불청객인가
영화 <혈투>(2011)로 등장하여 <신세계>(2013)로 호평을 받더니 <대호>(2015)로 주춤했던 박훈정 감독이 2017년 <VIP>를 우리 앞에 내밀었다. 관람객 수는 기대 이하, 평점도 별로다. 호오가 엇갈리나, 예상에 못 미쳤다는 평가가 일반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작품의 완성도와 평단․관객의 반응이 언제나 행복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박훈정 감독의 스타일은 이번 <VIP>에서도 여전하다. 다종다양하지만 다질적이지는 못한 관객들에게 어필하지 못했다는 뜻일 수 있다. 영화는 산업적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외면당하면 그의 말 그대로 “천 길 낭떠러지로 다이빙”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관객이지 영화 제작자는 아니다. 손익 분기점에 관한 걱정과 근심은 그분들에게 일임하고 우리는 수용과 해석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쉽지 않다.
이 영화 <VIP>를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 모르겠다. 재미있고 스릴감 있게 볼 수는 있었지만, 어딘가 전작 <신세계>만큼 강렬하지 못하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여성들의 신체를 다루는 방식도 혐오스럽고 의심스럽다. 우리를 찾아온 손님으로서의 <VIP>는 아직은 비식별역에 위치한다. 달갑지 않은 초라한 행색의 불청객인지 아니면 우리가 알아보지 못한 귀빈인지 헛갈린다. 환대했지만 순식간에 강도로 돌변하는 손님인가 아니면 영화처럼 우리의 환영 속에서 은밀히 엽기적 살해 이미지만을 보여주고 마는 영화일 것인가. 여기 그 판단 보류의 지점에서 한 가지 해석을 시도해 봄으로써 영화 <VIP>를 식별해 보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 글은 쓰여지고 있다.
2. 노동하는 인간(Homo Laborans)
영화 <VIP>의 구도는 이렇다. 북한의 권력 실세인 장성택의 오른팔 김모술의 아들 김광일(이종석 분)이 있는데 김광일은 희대의 연쇄 살인마다. 그러나 북한에서도 그를 어쩌지 못한다. 권력자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북한의 정치판이 바뀌자 남한으로 귀순한다. 그가 알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의 해외 계좌 정보 때문에 미국의 첩보기관에서는 그를 남한 국정원에 넘겨준다. 국정원은 그를 보호하지만 한국에서도 연쇄 살인을 저지르는 통에 경찰에서는 그를 잡기 위해 혈안이다. 범인이 북에서 귀순한 김광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를 잡으려는 경찰 채이도(김명민 분)과 그를 미국 첩보기관에 넘겨주려는 박재혁(장동건 분), 북한에서 탈북하여 김광일을 잡아 북한으로 데려가려는 리대범(박희순 분) 이렇게 세 명이 김광일을 포획하기 위해 동분서주 대립하며 갈등하는 서사로 영화는 숨가쁘게 전개된다.
북한에서 김광일을 잡으러 온 전 보안성 간부 리대범과 그를 잡아서 미국 첩보기관에 넘겨줘야 하는 국정원 요원 박재혁, 연쇄살인범을 체포해야만 하는 경찰 간부 채이도가 김광일을 둘러싸고 벌이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실상에서 대립하지 않는다. 서사의 전개로 볼 때 김광일을 차지하기 위해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비틀어 보노라면 이들 삼항조(박재혁, 채이도, 리대범)에게는 의외로 공통점이 많다. 먼저 그들 셋은 모두 국가 기관의 조직원이다. 각 조직의 속성도 다르고 개인의 성격도 많이 다르지만 이들이 처해있는 상황은 비슷하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김광일을 체포-소유해야 한다는 입장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국은 거의 <혈투>의 상황과 유사하지 않은가.
더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연쇄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 김광일에 대해 보이는 반응이다.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과 달리, 이들 삼항조는 김광일의 엽기적인 살인 행각에 그 어떤 인륜적인 분노도 표출하지 않는다. 그들이 김광일을 잡으려는 이유는 우선은 그들 개인적인 이해득실 때문이고, 조금 더 크게 그들이 속한 조직이 원하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서는 그들이 놓여진 상황이 김광일을 포획하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인륜적 개인이 아니라 철저히 조직의 일원으로서 사고하고 행동할 뿐이다.
조심하자. 영화 초반부에서 리대범이 김광일을 내버려 두라는 북한 지도원의 만류에 분노하는 것은 천인공로할 만행을 저지른 자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범죄자를 체포하지 못하는 상황의 부조리에 대한 것이다. 또한 채이도 역시 자신의 취조에 당황하지 않고 태연자약 빙그레 웃으며 그윽이 자신을 응시하는 태도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다. 즉 채이도의 분노는 범죄자로 잡혀와 유유자적하는 자에 대한 분노인바, 어떤 점에서는 자신의 권력에 굴복하지 않는 자, 상황이 위중한 데도 보여주는 여유를 가진 자에 대한 분노이다. 경찰 고위급 간부와 국정원의 협조로 김광일을 넘겨줘야만 하는 상황이 생기자 채이도는 조금 더 격분하지만 김광일 같은 범죄자가 놓여난다는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자신의 체포를 무화시키는 것에 대한 분노, 자신의 의지대로 상황을 관철시킬 수 없는 자의 무력감에서 연유하는 폭주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박재혁은 극중에서 대체로 분노하지 않지만, 남한 국정원 여직원을 성폭행하려던 김광일에게 다소간 뜨뜻미지근한 분노를 내비친다. 그러나 박재혁의 분노 역시 자신이나 자신의 조직을 능멸하는 것 같은 김광일에 대해 분노하는 것으로 보는 것에 무리는 없다. 박재혁이 김광일에게 내뱉는 분노성 발언이란 “너, 우리가 우습냐? 우스워?” 일 뿐이다. 김광일이 박재혁의 구둣발 아래에서도 “이거 이거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오? 아, 당신들 일은 어디까지나 나 보호하는 거 아니갔어? 이래서야 미국 아새끼들이 좋아 하겠어?”라고 말하며 자신의 무력함을 놀려대는 김광일에 대한 울분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즉, 세 명 모두 김광일이 저지른 일에 대한 인륜적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 혹은 느끼지 못한다.
그들이 워낙에 험한 곳에서 일하며 끔찍한 일을 겪고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일까? 그들이 김광일 정도의 연쇄 살인, 스너프 필름에 버금갈 만한 사진이나 동영상에 놀라거나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는 면역력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관객의 감정선을 고려하자면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혹시 그들이 분노하면 거꾸로 관객들은 냉정해지기 때문에 자제한 영화적 표현과 연출일까? 아니다. 그들 셋 모두는 자기들 마음대로 김광일을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분노는 가지고 있을망정 여성들을 상대로 엽색적인 살인행각을 일삼는 김광일에 대한 분노는 갖고 있지 못하다.
왜 그러한가? 그들은 개인적인 감정을 철저히 억누르며 조직의 일원(사냥개)로서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들은 조직원으로서의 개인일 뿐, 보편적 감정의 소유자로서의 개인적인 면모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는 그렇다. 이들은 조직 속의 일원,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일하는 사람인바, 다른 말로 회사원 혹은 직장인이다. 노동하는 목적론자들. 그러니까 그들 셋은 철저히 ‘노동하는 인간들’이다. 그들 간의 성격적 차이나 입장의 차이는 말소될 수 있는 차이에 불과하며 실상에서 그들의 공통성은 쉽게 도출된다. 그들 셋은 기관-조직의 일원으로서 공통분모를 가진, 한 몸의 세 얼굴일 뿐이다. 아닌게 아니라 세 명 모두 그들 조직의 상급자로부터 행동을 제한받거나 명령을 받거나 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렇게 보면 상급자에게 시달리는 월급쟁이들의 애환이 꽤나 많이 등장하는 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물론 그들의 노동이란 조직의 일처리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에 있어서 능력을 발휘하며 “기량을 펼쳐” 일처리를 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거나 반대급부로 주어진 작은 권력을 행사하면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며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그들 각각은 자신의 일처리 방식에 상당한 전문성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혹독하게 부하들을 나무라지만 그래봤자 회사의 일과 관련해서 그럴 뿐이다. 그들이 영화 속에서 하는 일이란 고작 김광일의 행동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자신의 일(의지)을 가로막는 김광일, 자신의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보이지 않는 조직의 힘과 논리에 대한 분노. 그것은 직장인의 무력감이며 간헐적으로 폭발하는 회사원의 분노와 닮아 있다.
그러면 그들 혹은 우리들은 왜 노동하는가? 생존하기 위해서다. 자아실현? 개나 줘버리자. 노동이 생존을 위해 당연한 것이라면 그 다음으로 우리는 노동의 종류나 방식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노동한다. 이 영화의 재미는 세 사람의 일처리에서 나타나는 조직의 생리와 힘겨룸, 그리고 세 사람의 일처리 방식을 구경하는 ‘쾌’에서도 일어난다. 정리하자면 그들 셋은 모두 조직 속에서 노동하는 인간들이다. 개인적인 감정을 헌납한 감정 노동자로 보이며, 어떻게든 실적을 쌓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회사원들이다. 조직 생활을 오래해서 그런지 마땅히 느껴야 할 분노를 느끼지 못하고, 이상한 곳에 분노를 대리 표출한다. 일과 관련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분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회사원으로서만 행동할 뿐 그들 인간성의 자연적 본성은 극도로 억압되었거나 삭제된 인간들로 비친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그들의 분노는 김광일의 반인륜적 행위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도리어 한가로이 살인을 일삼는 자에 대해 질투를 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살인 자체에 대한 질투가 아니라 한가로이 살인을 취미로 삼을 수 있는 자에 대한 분노 말이다. 그것을 노동하는 인간이 놀이하는 인간에 대해 가지는 질투의 분노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렇게 열심히 죽을 둥 살 둥 일하는 사람 앞에서 태연하게 그윽한 눈빛으로 놀이하는 인간에 대해 노동인이 가지는 분노. 그러므로 이 영화는 김광일을 차지하기 위해서 세 명이 대립하거나 때로는 콜라보레이션을 펼치기도 하지만, 세 명 모두 김광일과 대립하는 구도로 이루어진, 노동하는 인간 대 놀이하는 인간의 대립 구도이기도 하다. 그렇게 보자면 이 세 명과 3 대 1로 붙어 있는 김광일이 있다.
3. 유희하는 인간(Homo Ludolos)
그렇다면 김광일은 누구인가? 그는 말할 것도 없이 연쇄 살인마이다. 하지만 독특한 연쇄 살인범이다. 그의 독특함은 그가 죽인 여성의 숫자나 방식에 있지 않다. 먼저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특색은 그가 보여주는 여유로운 태도와 한가로운 눈빛, 차분한 미소이다. 그는 헐벗은 북한 땅에서 벤츠 차량 뒷좌석에 앉아 이어폰으로 클래식을 들으며 영문판 펭귄 문고 소설들을 읽는다. 물론 여성들에 관한 소설이지만 그의 여유로움과 즐김의 방식은 여성을 잔인하게 죽여 버릴 때까지도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김광일은 채이도의 말처럼 “싸이코”가 아니며 박재혁의 말처럼 “개싸이코”도 아니다.
영화 내내 몇 번을 제외하고 김광일이 내뿜는 안면성의 기호들은 분노나 광기가 아니며, 정신병리적인 발작적 폭소나 음흉한 미소도 아니다. 빙그레 그리고 지그시 웃는 그의 얼굴은 소름끼치기는 하지만 그가 악마적 살인마라는 기호를 발산하지는 않는다. 그의 미소는 자신만의 고급한 취미 활동을 수행하는 자의 우아한 동작이다. 김광일, 그는 고급스럽게 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살해 동기 따위는 필요 없다. 그렇지만 김광일은 ‘무동기적 악한’이 아니며,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정신분열적 살인광도 아니다.
영화는 김광일의 살해 동기나 그의 정신병리에 대해서 관심이 없으며 언급도 하지 않는다. 영화 안에서만 찾아보자면 김광일은 철저히 자신이 탐닉하는 취미 행동을 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런 행동 방식이 취미이고 놀이인 사람의 인성은 파탄 난 것이며 정신병의 일종일 수 있겠지만 그를 사이코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우아하게 자신이 탐닉하는 취미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비쳐질 뿐이다. 따라서 김광일과 그의 패거리들은 범죄를 저지를 때 완전범죄를 꾸미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추적자들의 수사를 고려해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하거나 범행 현장을 청소하는 일, 완전 범죄를 계산하거나 실행하려는 일은 그들에게는 귀찮은 노동일 뿐이다.
그는 지금 취미 활동에 몰입하는 중일 뿐, 자신의 행동들이 불러올 파장에 대한 고려는 별로 없다. 원래 이것 저것 고려하고 따지면서 행동하는 것은 놀이의 정신에 어긋난다. 게임에는 규칙이 있다지만, 규제가 많아져 흥이 깨지면 더 이상 놀이가 아니게 된다. 그래서 김광일은 피해자 여성들에게도 아무렇게나 자신의 DNA를 남기며, 북한의 일가족 몰살에서도 쉽게 그 자신과 일동이 범인임을 알아채이는 일에 유념하지 않는다.
그의 놀이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 꼭 그렇게 놀아야만 했는지, 더 나아가 그의 도덕심이니 유아기 시절이 어땠느니, 전두엽이니 하는 분석은 그만두자. 같은 인간이자 여성들을 처참하게 유린하고 죽여 버리는 일을 놀이였다고 말하는 일은 무척이나 잘못된 판단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현실의 살인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 김광일의 행동을 영화적 맥락 속에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놀이 이론의 대가 요한 호이징하나 로제 카이와를 들먹이면서 영화 속에서 나타난 김광일의 행동과 놀이 이론을 억지로 연결시킬 필요도 없다. 그것이야말로 의도치 않게 살인광의 행동을 놀이 이론으로 설명하고 뒷받침하는 무모한 짓이 될 테니 말이다.
김광일의 행동 동기는 밝혀져 있지 않기에 영화 내에서 드러난 점으로만 추론하면, 김광일은 살인을 고급한 취미로 행하는 사람이다. 숨가쁘게 영화를 따라가느라 김광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수 없었을지 모르나 영화의 제목이 ‘매우 중요한 사람’(VIP)이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보인다. 그는 아무리 봐도 영화 속에서도 귀빈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가 VIP인 이유는 혹시 그가 ‘놀이하는 자유로운 인간’이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24시간 노동을 권하는 사회에서, 조직과 제도와 법률이 개인의 모든 자유를 합법과 계약으로 얽어맨 사회에서 극단적인 자신의 취미 활동을 수행하는 인간은 역설적이게도 우리 시대에서는 정말이지 드물고 귀한, 혹은 매우 중요한 사람은 아닐까?
이 무슨 미친 생각인가? 오늘날처럼 놀이와 게임이 난무하는 ‘유희 자본주의’ 시대에 놀이하는 인간이 VIP라는 게 과연 말이 되는 얘기일까? 그렇다. 자본주의는 우리의 놀이까지도 이상한 방식으로 산업화하면서 착취한다. 그럴 때 진정한 주이상스로서의 놀이는 되지 못한다. 자신의 체포를 빠져나가는 김광일의 멱살을 잡는 채이도에게 김광일은 이상한 말을 던진다. “너 혹시 그 소리 들어봤니? 내 제일로 좋아하는 소린데 말이야. 너, 사람이 죽을 때 무슨 소릴 내는지 아니? 특히 그 에미나이들이 죽을 때 내는 소리들. 하... 그 아파할 때 내는 신음 소리가 말이야. 아....그 소리 진짜.....” 이것은 김광일이 채이도에게 늘어놓는 경험적 앎의 우위적 표현이다. 많은 영화에서 살인범이 추적자에게 늘어놓게 되는 (특수한 취미와 경험적 인식에서 비롯한) 자랑질이다. 이 장면은 채이도를 무시하고 조롱하는 언표의 기능을 한다. 그러니까 채이도로서는 맛볼 수 없었고 들어보지 못한 소리에 대한 자신만의 경험과 그 맛을 자랑하는 목소리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살인마의 병적 탐닉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일하며 조직 속에서 살아남느라 바쁜 사람에게 고급하고 기이한 취미의 맛을 일러주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적어도 김광일에게는 도덕적 양심이나 가책 따위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고급한 취미가 있다는, 이상한 구별짓기를 김광일은 채이도에게 해 보이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미국 첩보기관의 폴 그레이(피터 스토메어)도 김광일에게 “취미 생활 좀 고상한 걸로 바꾸면 안돼?”라고 말한다. 폴은 김광일의 행동이 취미의 일종임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영화 밖 우리들은 김광일과 그의 취미 활동을 욕하고 혐오할 수 있지만 적어도 영화 안에서 박재혁, 채이도, 리대범 그들 셋이 김광일을 나무랄 수 있는 이유나 권리는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여성 살해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인륜적 분노도 느낄 수 없는 자들이 김광일 보다 나은 도덕적 우위를 확보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법과 제도와 조직이 허락하는 한에서 그를 포획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능(기량)을 이용해 그를 체포할 수 있을 뿐이며, 그 편에서는 김광일 역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정보로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들 셋은 김광일을 중심에 두고 빙 둘러싸지만 김광일은 유유히 빠져나간다. 인륜적 분노로 치달을 수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포기함으로써 인간 보편의 감정으로 나가지 않고, 철저히 업무적 충실성에 복무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이 마땅히 느꼈어야 할 인륜성은 그들 세 명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천사의 고리에 불과하다. 역설적으로 거기에 제일 가까운 인간은 김광일이다. 김광일은 비록 뒤집힌 방식으로이긴 하지만 그들 셋보다는 나은 미학적 인간이다. 취향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런 고상한(?) 취미를 가진 자의 우월함으로 그들을 조롱하며 비웃는다. 노동하느라 고상한 취미를 즐길 여유가 없고, 일이 곧 자신의 전부가 되어 버린 그런 조직인에 대한 경멸. “이 버러지 같은 새끼가 어디서 감히.”
엔딩 쇼트로 가보자. 3년 전의 모든 사정을 알게 된 우리는 이제 박재혁이 왜 홍콩의 빈민가에서 김광일을 지키는 자들을 무참히 쏴 죽이며 김광일에게로 직진하는지 알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박재혁이 가지는 인륜성의 분노일까? 그것은 차라리 놀이인에 대한 처절한 응징, 노동의 세계에서 항상 일해야 하는 자가 놀이-유희인에게 보내는 질투성 응징은 아닐까. 김광일을 해치우는 일을 하기 전 박재혁과 폴 그레이가 나누는 대화를 상기해보고, 일을 처리하고 나와서 박재혁이 폴에게 하는 대사를 가만히 들어보라. 박재혁의 불만은 더러운 일을 자신들에게 시키는 폴(미국,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일을 시켜먹는 자들)에 대해 분노하고 있으며, 김광일을 지키는 자들을 처리하고 자신에게 김광일을 데려다 주길 원하는 자에게 김광일의 죽은 머리를 가져다 주면서 “앞으로 너희들 일은 너희 스스로 하라”는 말을 남긴다. 그러니까 박재혁의 분노는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한 분노이다. 천인공로한 살인마를 계속 살려두어야 하는 상황에 대한 분노로 보기 쉽지만, 사실상 이런 일을 시키는 자와 상황에 대한 반발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재혁의 김광일 처단은 단호하고 주저함이 없지만 그 의도는 대단히 양가적이다. 물론 그동안 엽기적 살해를 일삼아온 김광일을 처벌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 경우 관객들을 대신해 김광일을 처단함으로써 심리적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박재혁이 김광일을 죽이는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면 그것은 인륜성에 대한 심정적인 참여일까? 정의가 비로소 실현됐다고 믿는 쾌감? 아니면 저토록 규칙을 위반하며 자기만의 놀이에 탐닉하는 인간에 대한 징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어서인가? 그 어떤 것이든 결국은 같다. 전자가 더 무지에 가까운 향락일 뿐이긴 하지만 말이다.
4. 언제든 죽임 당할 수 있는 인간(Homo Sacer)
영화를 본 사람들의 반응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참기 힘든 고어 장면들이 등장한다는 호소이다. 역겨운 것을 참아낼 수 있는 비장(脾腸)과 위장(胃腸)의 원만성 정도로 돌릴 일만은 아니다.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장면의 영화라면 이보다 더한 영화들이 얼마든지 있거니와, 아예 하드 고어 스릴러물도 얼마든 즐비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영화가 여성들을 다루는 방식에 있을 것이다. 이 영화 <VIP>에서 여성들은 비중 있는 역할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여성은 순전히 피해자로서만 등장하고 역할 할 뿐이며, 끔찍한 살해자들 앞에서 무기력하고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고깃덩어리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고 보면 박훈정 감독의 영화에 여성들의 자리는 별로 비중이 없었다. <혈투>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대호>에서도 그렇다. <신세계>에서 여성 경찰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녀 역시 드럼통 안의 고깃덩어리로 비참하게 살육되는 장면으로 각인되어 있을 뿐이다.
생각해 보자. <청년 경찰>에서도 여성은 피해자로 등장하고 조력자로서 메두사(박하선 분)가 나오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주인공들은 영화 내내 여성들의 응시 앞에서 전시되고 현시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여성들은 관객으로서 참여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출연 비중이 크지 않은 영화들에서도 여성은 어떤 결핍이나 부재하는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박훈정의 영화에서는 여성들의 참여 여지가 크지 않으며 <VIP>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 영화에서 여성은 살인마의 엽색-놀이 대상으로 등장할 뿐이며, 이는 감독의 여성관에 의문을 가지게 만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시 상기하자. 이것은 영화일 뿐이지 현실의 문제는 아니다. 실제적으로 감독이 어떠한 여성관을 가지고 있든지 그것은 아직 검증된 바 없고, 영화적으로 여성의 자리가 할당되어 있지 않다는 것뿐이다. 감독이 반드시 여성의 자리를 고혹적으로 만들어줘야 한다고 약속된 바 그 어떤 계약도 없으니 그것은 그저 감독의 소관이자 그의 자유다.
하지만 그래도 못내 아쉽고 또 찜찜한 것이 사실이다. 영화를 아무리 자기 원하는 대로 만들어 내놓는다고 쳐도(그가 아무리 관객의 반응을 무시할 수 있다고 해도) 여성이 무참한 희생자로서만 등장하며, 더구나 여성의 신체가 제시되는 방식이 폭력의 희생자로서 그려진다면 그것을 결코 편안하게 수용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의 자리를 만들어 달라거나 여성의 이미지를 그럴듯하게 그려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그것은 더욱 무참한 코미디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거나 혹은 혐오․비난할 수는 있겠다. 문제는 반대편에도 있을 수 있다. 영화상에서 강하고 능력 있고 개성 있는 인물들인 남성들이 고작 직장에 소속되어 조직의 노동이나 수행하거나 이유도 없이 희대의 엽기적 살인을 일삼고 있는 남성들뿐이라면 그 역시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며, 그렇게 된다면 이상한 균형 맞추기가 일어난다. 말하자면 감독은 여성만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 역시도 비하, 즉 모든 사람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 되어 무기력한 개인들을 지적하는 일이 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끝까지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여성들의 신체가 제시되는 방식의 문제이다. 그들이 다루어지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문제점, 여성들은 아무렇게나 죽여도 되는 존재라는 식의 제시. 죽임을 당해도 좋은 존재, 언제든 원하면 죽임을 당해도 괜찮은 존재라고 그려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합리적 의심이다. 그렇다 해도, 만일 여성이 그렇게 그려져 문제가 된다면, 영화 속에서 폭력이 등장함으로써 현실에서의 폭력을 부추긴다는 식의 조야한 수용 방식이 되고 만다. 만일 여성이 그렇게 취급되고 있다는 반영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꼬집는 것이라면? 죽일 수 있지만, 만져질 수는 없는 여성들의 지위를 반영함으로써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라면 어쩔 것인가? 어쨌거나 이 영화 속에서 여성들의 지위는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인간으로 그려진다.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인간이란 이미 죽은 인간과 다를 바 없다. 법과 제도가 그것을 금지했지만 법은 멀고 폭력은 가까운 곳에 상존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어 있다는 불안은 항상적인 것이다.
5. 세 개의 서클
이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원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먼저 박재혁과 채이도와 리대범이 하나의 서클을 형성한다. 그들은 조직의 구성원이고 노동한다. 그것은 현실의 서클이다. 현실 세계에서 노동하지 않는 자의 자리는 없다. 이 안에서 제한된 재원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고 또 때로는 협력한다. 그 현실적 원 위로 하나의 원이 나타난다. 그것은 매직 서클, 놀이의 원이다. 현실과 맞닿아 있지만 그보다는 고고하며 한가롭다. 얼핏 덜 중요해 보이지만, 현실의 원도 매직 서클에 들어가기 위해 하는 노력들로 구성되어 있을 정도다. 뿐만 아니라 그 매직 서클은 현실적 시공간과는 다른 질적 시공간에 위치한다. 거기서는 시간이 아주 빨리 흐르거나 천천히 흐른다. 그리고 끝으로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인륜성의 서클이 있다. 그것은 공허하고 담론적으로만 설정된 형이상학적 서클이다.
모든 사람이 동의하고, 현실의 그 누구도 그것을 거부할 수 없고, 어겨서도 안 된다. 그것은 앞의 두 원보다 더 강력해 보인다. 그럼에도 세 번째 인륜성의 원은 잊혀졌거나 언급되지는 말아야 한다. 그것을 이야기하면 이데올로기가 되거나 설교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 <VIP>는 음각적인 방식으로 그 인륜성의 서클을 드러낸다. 그들이 애써 도달하지 않거나 신경 쓰지 않는 방식으로 그 서클은 우리 머리 위에 떠 있다. 물론 우리는 감정적이며 애매하고 모호한 방식으로 희미하게 그것을 지각할 뿐이다.
이호
200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한국문인 인장박물관> 학예실장.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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