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영화평론가)
가토 나오키 감독의 '스님과 락싱어'의 영어제목은 '아브락삭스'이다. 알다시피, 아브락삭스는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새의 이름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나기 위해 알을 깨고 나온 피조물을 의미한다. 그래서 곧잘 아브락삭스는 성장의 메타포로 이야기되곤 한다. 그렇다면 스님에게 있어 성장과 발견은 무엇일까? 한편 이미 출가한 스님에게 성장이나 발견이라는 화두가 적합하기나 한 것일까? 가토 나오키 감독의 대답은 좀 다르다. 승려에게 있어 “자아”란 평생의 화두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승려인 조넨은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듯 보이는 개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개가 죽을 것을 미리 염려하고 걱정하지만 큰 스님은 그 걱정도 사실 조넨 자기 마음의 반영일 뿐이라고 말해준다. 조넨은 스님과 아이를 둔 대처승이다. 대처승으로 별 탈 없이 살고 있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소음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 소음은 한 때 자신이 몸바쳤던 락음악과 닮아 있기도 하고 어찌 보자면 그저 굉음에 불과한 것도 같다.
조넨은 처음엔 그 소음을 없애고자 애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오히려 소음과 마주해야만 소음의 실체를 알 수 있으리라는 것을 직감한다. 그래서 그는 아주 오래 전, 떠나왔다고 믿었던 락음악으로 돌아가려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단순히 승려로서의 현재를 버리고 음악으로 망명하는 것이 아니라 승려로서 음악을 해보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가 도쿄나 대도시가 아닌 사찰이 있는 조용한 마을에서의 공연을 하고자 한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조넨이 원하고 찾는 것은 음악 자체가 아니라 음악을 통해 가 닿고 싶은 자기 생의 비밀인 셈이다.
무릇 삶이 그렇듯 진짜 질문은 이렇게 무겁고, 아무렇지 않는 듯 다가온다. 스승은 조넨의 이런 방황을 이해해주고 사찰에서의 공연도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물론 조력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조넨에게 승려다움을 요구하며 그런 일탈을 곱게 봐주지 않는다.
결국 조넨은 절에서 공연을 한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친구를 위해, 그리고 자기가 찾는 진짜 삶을 위해 그는 최선을 다해 공연한다. 사실 그 공연은 소음과 별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는 이 행위를 통해 결국 어떤 지점에 가닿는다. 우리는 그것을 구경의 경지 혹은 득도라고 부른다.
지독한 성장통을 겪고 난 듯 조넨은 이 공연 이후 조용히 대처승으로 자기 삶에 돌아온다. 어쩌면 득도라는 거창한 이름과 달리 진정한 삶의 의미는 매일 아침 일어나고 매일 밤 잠드는 이 일상다반사의 소소함 속에 있을 지도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조넨은 나무아미타불과 할렐루야를 동시에 외친다. 사실 이 부름은 모두 신을 찾는 간절한 목소리 아니었던가? 득도와 구경은 그다지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