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존 카니라는 사건: 소리와 사물
거리를 배회하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다. 그들을 동질화하는 건, 좀처럼 과거로 돌려보내지지 않는 한 줌의 기억. 아니, 시간의 퇴적층 안에 평온하게 잠들지 않고 흉터 위에 흉터를 덧대는 내면의 메커니즘이다. 우리는 그 불사의 리비도를 ‘미련’이라 부른다. 당신도 알 것이다. 쉽사리 아물지 않는 상처의 치유, 오래 메워지지 않은 결핍의 극복, 회복의 의지를 번번이 꺾어온 상실의 대체가 얼마나 지난한가를. 그처럼 한 대상을 향해 습관화 된 리비도가 철회되지 않을 때, 우리는 종종 음악으로 도피했고 음악을 통해 상상적인 봉합을 시도해 왔다. 음악에도 운명이란 게 있다면, 인간이 부여한 그 같은 역할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존 카니의 인물들은 음악의 운명을 어루만지며 이미 지나친 사랑과 지금 마주친 사랑 사이의 배음을 헤아리는 자들이다.
이처럼 존 카니의 서사무대를 애도의 관점에서 접근하려 한다면,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주어진 어떤 ‘결핍’의 상황부터 일별해야 한다. 먼저 존 카니의 남자들이 처한 현실을 들여다보자. <원스>의 ‘그(글렌 한사드 분)’와 <비긴 어게인>의 댄(마크 러팔로 분)은 각각 떠나간 애인, 멀어져가는 아내를 돌이키지 못하고 더블린과 뉴욕의 거리를 헤매는 중이다. <싱 스트리트> 속 코너(페리다 월시-필로 분)의 경우 입장이 조금 다른 것 같지만, 결국 애도에의 요청과 다투게 된다는 측면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한 여자가 그의 마음을 훔치는데, 그녀에겐 꿈을 실현해줄 애인이 따로 있다. 코너도 더블린의 거리에서 내면의 결핍을 곱씹는 존재가 되는 셈이다.
존 카니 영화 속 여자들의 현재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 그녀들이 안고 있는 결핍에 관한 정보는 매번 좀 더 늦게 도착하지만, 결과적으론 그들의 절망과 유사해 보인다. <원스>의 ‘그녀(마르게타 이글로바 분)’는 이른 나이에 아기를 출산해 어머니를 모시며 타지에서 살아가는 중이다. 아기 아빠는 그녀를 책임질 의지가 없다. <비긴 어게인>의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 분)는 함께 음악을 하던 애인을 따라 대서양을 건너왔으나 이미 스타가 된 그는 곧 다른 여자의 곁으로 건너가 버린다. <싱 스트리트>의 라피나(루시 보인턴 분)도 종국에 가서는 런던행을 함께 꿈꿨던 애인의 배신을 경험한다. 그렇게 보면 존 카니의 인물들은 남녀 구분없이 ‘대상의 상실-애증의 병존-자아로의 리비도 퇴행’을 경험한 후, 어떤 불가능한 임무를 음악과 공모해 가는 자들이다. 이는 존 카니가 잡아낸 이미지들 중 음악과 인물이 교유하는 순간의 표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그런데 <원스>의 가장 중요한 장면 속 그들 곁엔 이야기 말미로 갈수록 각별하게 재인식되는 사소한 사물들이 있다. ‘그’의 통기타와 ‘그녀’의 청소기와 피아노, 그리고 ‘그’와 ‘그녀’ 사이를 오가는 CD 플레이어, 한 시절의 꿈과 합일에의 염원을 영원으로 연장하는 데모 CD 등을 떠올려도 좋겠다. 이들은 지나간 삶에 대한 두 사람의 내밀한 태도를 말해주는 한편, 서로에 대한 감정선을 비의적으로 드러낸다. 이를테면, ‘그’는 매우 오랜 시간, 낡은 통기타로부터 현실을 넘어서는 힘을 빌려온 것처럼 보인다. 주목할 것은, 피크가드(pickguard)도 없는 그의 통기타 사운드 홀 아래로 상처 같은 큰 구멍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구멍은 버스킹으로 거칠게 감당해 온 ‘그’의 지난날을 적확하게 환기시킨다. 그 통기타 빈 구멍은 노랫말에 실린 모든 감정을 변통하는 강력한 푼크툼(punctum), 그 자체로 다가온다. 한편 두 주인공이 악기점에 진열된 피아노에 둘러앉아 음악의 힘으로 합일의 경지에 다다르던 순간도 기억해야 한다. 이때 ‘그녀’는 청소기를 옆에 두고 피아노를 연주한다. 청소기는 ‘그녀’가 짊어지고 있는 생계의 무게를 가늠케 한다. 반면 피아노는 피안으로의 열림을 의미하는 전혀 상반되는 기표다. 영화 중반에 등장한 CD 플레이어도, 심지어 새로 갈아 끼워야 할 건전지도 단순한 사물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그녀’는 아직 선율과 리듬으로만 존재하는 ‘그’의 음악을 CD 플레이와 함께 넘겨받는다. 그러나 CD 플레이어의 건전지는 이미 수명이 다해가는 상태였다. ‘그녀’가 건전지를 새로 구입해 CD 플레이어를 켠 후 ‘그’가 만든 ‘텅 빈’ 음악 안에 자기 노랫말을 입히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If You Want Me’가 탄생하는 그 순간, ‘그’와 ‘그녀’가 감당해 온 각기 다른 애도작업은 하나의 목소리를 얻게 된다. 요컨대 사소한 사물들이 베푸는 인상을, 그저 인상으로 남겨두지 않을 때 우린 낭만적 도취를 넘어서는 마지막 시퀀스의 여운을 제대로 해명할 수 있다.
두 사람이 음악의 힘을 업고 지난 기억의 상처를 보듬어가는 과정은, 서로를 향한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또 함께 만든 음악과 더불어 각자의 상실을 복구하는 작업에 임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각자의 ‘결핍’의 자리에 서로가 들어갈 수 있느냐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원스>의 결말은 질적으로 다른 두 번째 애도 앞에 선 그들의 모습을 전경화한다. 그들은 각자의 행복을 멀리서 응원하는 삶을 택한 후 마음의 일부는 서로의 곁에 둔 채, 몸은 멀어진다. 결국 그들은 서로의 내면에 또 다른 빈 구멍을 만들며 휘발되지만, 그것은 굳이 치유가 필요하지 않은 상처, 극복하지 않아도 되는 결핍, 대체를 궁구하지 않아도 되는 상실로 수렴된다.
<원스>의 주옥같은 노래들은 이미 지나간 헤어짐을 바라보는 입장이면서, 지금 다가온 사랑을 쓰다듬는 각오이기도 하다. 우리네 삶을 두고 미련이 고독을, 고독이 인연을, 인연이 불안을 부르는 과정으로 단순 환원한다면 과장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설명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이들, 바꿔 말해 지금 당장 쓸쓸한 이들에게 <원스>는 잔잔한 황홀이다. 지금부터는 노래를 타고 깊어지는 ‘그’와 ‘그녀’의 사랑과 그 순간을 경청하던 사물들을 다시 음미하고자 한다. 이는 애도에서 애도로 흐르는 서사 안에 비친 ‘에피파니(epiphany)’의 순간을 호명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기억의 생애 - 구멍 난 통기타
개인적인 이야기를 덧붙이면, 2007년 가을 하이퍼텍 나다에서 <원스>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원스>보다 정확히 100년 전에 세상에 나온 제임스 조이스의 첫 소설집 『더블린 사람들 Dubliners』을 떠올렸다. <원스>처럼 『더블린 사람들』의 처음(「자매들 The Sisters」)과 끝(「죽은 자 The Dead」)도 ‘상실-애도에의 요청’이 유의미한 플롯으로 자리한다. 또 『더블린 사람들』 안을 떠도는 정념이 자연광으로 촬영된 <원스>의 여러 장면에 묻어난다는 느낌은 살과 뼈를 가진다. 100년의 시간차를 두고 더블린의 거리를 쏘다니는 ‘사소한 쓸쓸함’. 두 작품 속을 살아낸 인물들은 그 정념의 발현태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조이스의 미학적 방법론으로 회자되는 에피파니의 순간들에 대해서도 더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는 존 카니가 음악의 권능에 기대 만든 <원스>의 결정적 장면을 꿰는 용어다. 어둑어둑해지는 더블린의 거리에서 만나고 사랑하고 멀어진 인물들의 내면에 솟은 심미적 섬광의 순간. 그것을 음악에 의한 포월(包越)의 에피파니라 명명할 수 있지 않을까.
"에피파니란 그에게 말이나 몸짓의 비속성, 또는 마음 속 기억할 만한 장면에서 갑작스럽게 솟은 정신적 계시를 의미했다. 그는 문학인들이 매우 주의 깊게 이러한 에피파니, 즉 정신적 계시를 기록하는 임무를 수행한다고 믿었다. 그것들이 찰나에 지나가는 가장 섬세한 순간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인용문은 제임스 조이스의 또 다른 소설 『영웅 스티븐(Stephen Hero)』엔 등장하는 구절이 다. 이 문장들을 경유해 존 카니의 영화를 더 풍요롭게 대면하고자 한다면, 우린 음악으로 오는 에피파니를 마중해야 한다. 예컨대 더블린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사람이 서로의 기억과 감정으로 들어갈 때, 또 그들이 서로의 마음을 건네다 보며 싹터가는 사랑을 예감할 때 그들이 만든 소리는 에피파니로 돌아온다. 그때 새롭게 열린 그들의 작은 우주를 몽타주하는 주체는 선율의 계단을 밟는 노랫말이다.
<원스>의 시작으로 돌아가 보자. <원스>의 첫 씬에서 ‘그’는 수많은 행인이 지나가는 도심 상가 거리에서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면 당신의 그 예쁜 여름 드레스를 입어줘”라는 노랫말을 읊는다. 그때의 더블린은 어둠이 깔리기 전, 사물과 사람의 윤곽이 선명하던 때였다. 오프닝 타이틀과 함께 등장한 이후의 씬은 ‘그’가 아직도 그 거리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린다. 다만 이제는 밤이 깊어서 ‘그’는 어둠을 온몸에 묻힌 채 더블린의 어둠과 한 몸이 되어 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는 결국 자기에게 돌아오는 노래(‘Say It To Me Now’)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잔잔하게 읊조리며 시작한 이 노래가 후렴에 이르러 절규가 되는 순간 미묘한 사태가 발생한다. 멈춰 있던 카메라가 흔들리며 ‘그’에게 다가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장면은 누군가의 시점 쇼트였다. 그제서야 우린 어둠을 잔뜩 묻힌 ‘그’의 노랫말, 곧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해주지 않겠어요? 이건 당신이 기다렸던 거잖아요. 당신이 만회할 기회 말이에요.”가 오로지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이때 ‘카메라의 다가감’은 쓸쓸해진 관객의 마음까지 끌어안은 ‘그녀(카메라의 시선 주체)’의 공감을 위한 제스처다. 이 씬의 무조명・핸드헬드 촬영은 단순히 저예산 영화의 날인이 아니다. 예컨대 다르덴 형제 영화가 취하곤 하는 태도처럼 상황 안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방편으로서 거의 적확한 형식처럼 느껴진다.
주지하다시피, <원스>의 ‘그’와 ‘그녀’는 영화 마지막까지 서로를 향한 사랑의 감정을 절절하게 뱉어내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리고는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만회할 기회’가 없을 것 같은 시간대로 점점 접어든다. 그럼에도 그들은 명확한 언어로 상대를 자기 곁에 붙들지 않는다. ‘그’는 자기 집에 가자고 말했을 뿐이고, ‘그녀’는 진심을 털어놓지만,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체코어(“Miluju tebe”)를 사용함으로써 연인으로 갈 수 있는 특별한 인연을 놓아버린다. 그 때문에 ‘Say It To Me Now’는 <원스>의 절제된 감성을 사후적으로 연장하는 힘을 갖는다.
이 관점을 그의 애도작업에 적용한다면, ‘Say It To Me Now’를 부르는 순간에 작동하는 두 종류의 열망을 감지하게 된다. 먼저는 과거에 ‘그’를 떠난 한 여자, 그러니까 과거의 그녀를 향한 뒤늦은 고백이 담겨 있다. ‘그’는 대상 상실의 충격이 강박적 자책으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우리 대부분은 상실로 남은 옛 연인에 대한 적절한 상징화의 요구가 내적 반발에 부딪히는 경험을 한 적 있다. 그 노래로부터 전혀 뜻밖의 상상을 해볼 수도 있다. 영화의 종결부에 이르러, ‘그’는 ‘그녀’를 떠나보낸다. 바로 그때 ‘그’가 못 다한 언어가 지금 이 순간 일종의 복선으로 먼저 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장면에서 ‘그’는 천천히 다가온 ‘그녀’에게 영화가 끝나기까지 하지 못할 말들을 불러 세우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작별’, 곧 이별을 짓는 행위란 대상 상실로 인해 주어진 감정이 자아 상실감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어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노래하는 ‘그’는 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음악의 힘에 의존하는 상태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에서 좌절된 사랑의 고통을 순정한 음악의 경지에서 해결하려 한다. 이처럼 감당하기 벅찬 현실의 고통을 ‘그’가 영감의 세계로 끌고 가 음악으로 발산하는 씬에서 존 카니는 에피파니를 이미지텔링한다. <비긴 어게인>에서 믿었던 연인으로부터 버림받은 그레타가 뉴욕 거리를 스튜디오 삼아 노래를 부를 때에도 그와 유사한 순간들이 종종 있었다. <씽 스트리트>에서도 코너의 마지막 파티 공연 씬에 삽입된 몇몇 쇼트엔 상실의 고통을 끌어안고 저 너머를 향해가려는 내면의 힘이 약동한다. 그때 그는 마음은 빗나간 연애에, 몸은 불합리한 규율을 강압하는 학교에 구속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가 ‘To Find You’와 ‘Brown Shoes’를 부르는 장면에는 ‘승화(sublimation)’의 에너지로 치환되는 독특한 에피파니가 있다.
다시 <원스>로 돌아와 ‘그’가 ‘Say It To Me Now’를 노래하는 씬을 디테일하게 읽으면, 옛 연인에 대한 ‘그’의 상징화 작업이 어디쯤에서 곤란해졌는지를 직감할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의 옛 연인은 언제든지 각색되기 쉬운 ‘그’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허상이다. 존 카니는 이후 여러 장면에서 그 내면의 각색 과정을 체감할 수 있도록 친절을 베푼다. 예를 들어 옛 연인에 대한 정보를 캐묻는 ‘그녀’를 위해 ‘그’가 들려준 노래 ‘Broken Hearted Hoover Fixer Sucker Guy’는 옛 연인을 잊기 위한 목적에서 ‘그’의 능동적 상징화가 기억에 대한 과잉의 부정과 자기 경멸로 작동하는 것을 보여준다. 대상이 머물던 존재의 자리를 비루한 언어로 메우고, 정신적 충격에서 이기적으로 탈피하려는 시도가 거기 있다. 물론 ‘Lies’라는 노래를 만드는 씬의 경우엔 기억과 노랫말 사이의 간극이 전시되기도 한다. ‘그’의 내면에 홈비디오와 같은 질감으로 등장하는 옛 연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완전해지는 아름다움의 순간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노랫말은 그 아름다움을 훼손하려고 애를 쓴다. 이러한 역설은 기억의 부정확성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각색의 의지에 따라 재의미화되는 기억의 본질, 곧 기억의 임의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처럼 ‘그’는 영화 중반부에 이르기까지 자기 생애를 스스로 살아가는 힘 센 기억, 곧 옛 연인이 주인공으로 오는 잔상과 싸운다. 그런 장면들에서 그의 낡은 통기타는 단순한 악기를 넘어 주술적 도구로 기능해온 사실이 밝혀진다. ‘그’의 통기타에 난 커다란 구멍은 그러한 판단을 강화하는 기묘한 이미지다. ‘그’의 절규하는 목소리가 기타줄을 스트로킹하는 오른손의 리듬에 올라탈 때마다, 피크가드도 없는 ‘그’의 통기타 상판은 점점 상처가 깊어졌을 것이다. 급기야 점점 큰 구멍을 안게 됐을 것이고, 예기치 않은 또 다른 사운드홀의 탄생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바꿔 말해, 그 통기타 구멍은 음악의 권능에 기대 불가능한 애도에 도전해 온 ‘그’의 시간들을 단번에 상상하게 한다. 그곳은 허물어진 지난날이 사는 자궁이면서 폐허의 감정이 드나드는 관문이다. 적멸로 가는 희열이 아스라하게 비치는 암전이 서린 곳이다. 사적인 인상이지만, 그 빈 구멍의 이미지로 인해, ‘그’의 노래는 언제든 부재를 머금고, 애도를 완수하려는 안간힘을 느끼게 한다. 그 빈 구멍의 면적이 넓어지는 중, ‘그’는 옛 연의 타자성(otherness)을 자의적으로 소거하려는 힘을 이겨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녀를 자아 안 납골당에 함부로 안치하려는 자기 욕망과 싸우며 기억 속 그녀와 지금의 나 사이의 거리를 인정하고 불완전한대로 애도작업의 출구를 찾아가지 않았을까.
그 빈 구멍의 이미지를 경유했을 때, 비로소 ‘그’와 ‘그녀’ 사이 최초의 대화는 세밀하게 이해된다. 혼자만의 버스킹을 마친 후 듣는 사람이 없다고 자조하던 ‘그’는 ‘그녀’의 질문을 따라 ‘Say It To Me Now’가 그 누구를 위한 노래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노래의 주인공에 해당하는 여자가 이미 자기를 떠났음을 인정하고, 심지어 그녀가 이 노래를 듣고 자기 곁으로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도 말한다. 언어적 선언일 뿐이지만, ‘그’는 지금 대상의 상실, 리비도의 철회, 상실에 대한 상징화를 다짐하는 중이다.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린 ‘그’를 옥죄었던 기억이 비로소 자기 생을 닫는 장면을 기다리게 된다.
그때 ‘그녀’는 ‘그’에게 대뜸 내일 다시 만날 것을 요청한다. 만남을 성사시킨 것은 사실상 또 다른 이상한 사물, 고장난 채 방치해 온 ‘그녀’의 청소기다. ‘그’는 거리의 가객이기 전에 진공청소기 수리공이었는데, 그녀의 청소기를 치유가 필요한 또 다른 인생(‘그녀’)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 있다면, 우린 ‘그’와 ‘그녀’의 그 다음 장면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음악의 청각- 진공청소기와 피아노
존 카니 영화에서 발화의 주체가 누구인가.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서사를 이끌어가는 남녀가 항상 존재해 왔지만, 음악이 자신을 완성할 사연을 듣기 위해 귀를 세우는 방식으로 서사가 진행된다고 하면 틀린 말일까. 실제로 <원스>의 음악들은, 주인공들의 과거와 현재를 예각적으로 보여주는 한편 가까운 미래를 끌어안는 시적인 노랫말로 흥건하다. 그렇다면, <원스>의 이야기는, 청각을 가진 음악이 남녀의 사연을 듣고 그것을 노랫말로 변환해가며 진행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즈음에서 ‘그녀’의 사연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그녀’가 ‘Say It To Me Now’를 부르는 ‘그’ 앞으로 다가가던 때, ‘그녀’는 상처입은 과거와 일말의 치유 가능성을 가진 미래 사이에 서 있었다. 이후 ‘그녀’는 ‘그’와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 생계의 고달픔과 꿈을 향한 설렘 사이, 지나간 사랑과 다가온 사랑 사이를 배회하며 음악에게 자기 생을 들킨다. 이를테면, ‘그녀’는 ‘그’와 마주친 그 다음날 진공청소기를 끌고서 더블린 거리에 나타나 ‘그’를 찾는다. 어젯밤 ‘그녀’의 품 안에 들려 있었던 건, 우리가 잘 아는 『빅 이슈 The Big Issue』 잡지였다. 홈리스들의 재기를 돕는 잡지인 『빅 이슈』와 고장난 진공청소기는 고달픈 ‘그녀’의 현실을 정확하게 표지한다. 그것들은 어린 나이에 홀로 딸을 키우며 노모까지 책임져야 하는 ‘그녀’의 외적 상황을 증언한다. ‘그녀’의 사물은 ‘그녀’ 안팎의 현실을 실감시키는 상징적 수사인 것이다. 이후 더블린 거리에서 ‘그녀’가 팔던 꽃도 그러한 심증을 굳힌다. 그 꽃은 믿었던 연인 혹은 남자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를 초월적으로 극복해 온 ‘그녀’의 사연을 역설적으로 논증하지 않는가. 그 때문에 진심을 달래는 음악으로 다가온 ‘그’는 ‘그녀’의 고장난 삶, 감춰온 사연에 숨통을 열어줄 희망으로 애초에 포지셔닝된다.
그들의 목소리와 연주는 한 악기점에서 최초로 협화음을 이룬다. ‘그녀’에게 그곳은 도피적 초월의 공간이다. ‘그녀’는 그곳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피아노를 잠시 빌려 써 왔다. 그렇게 불가능한 꿈을 겉만 쓰다듬다가 돌아가곤 했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수리를 부탁할 고장난 진공청소기를 옆에 두고 드디어 제대로 된 청중(‘그’)이 있는 피아노 연주를 하게 된다. 기시감으로 오는 정확한 ‘반복’이다. 그때 ‘그’가 만든 노래를 ‘그녀’가 뒤따라 연주하며 화음을 입히자 ‘Falling Slowly’는 두 사람의 것으로 완전해진다. 이 노래 도입부의 노랫말은 “난 당신을 모르지만 그래서 더 당신을 원해요”이다. 추측일 뿐이지만, 여기서의 “당신”은 그들의 옛 연인이 아니라 지금 화음을 맞추기 시작한 서로를 겨냥하는 것일 수 있다. “이 가라앉는 배를 붙잡아 고향으로 이끌어줘요”라는 가사에서 그러한 추측은 확신으로 도약한다. 문제는 ”고향“이라는 단어인데, 이때의 고향이 옛 연인인지, 아니면 서로가 가닿으면 좋을 완전한 사랑의 경지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두 사람을 나란히 잡고 맴돌던 카메라가 노래가 완창되기까지, 프레임 밖으로 어느 한 명도 벗어나지 않도록 애를 쓴다는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노랫말의 맥락과 그때의 이미지텔링을 합리적으로 결속시켜 보면, 두 사람이 각자 지녀온 ‘결핍’을 대체할 가능성을 서로에게서 찾아가는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녀’의 관점에서만 보면, ‘그’와 함께 현실을 끌어안고 넘어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그’가 만든 낯선 노래를 ‘그’의 리드에 의해 조심스럽게 뒤따라간다. 유념할 것은, 고장난 청소기와 청소기를 고쳐줄 ‘그’ 사이에서 ‘그녀’가 평소 혼자 치던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이 씬은 <원스>를 관통하는 포월의 에피파니가 ‘그녀’의 내면에 정신적 계시의 순간으로 임하는 최초의 풍경을 담아낸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악기점 씬이 끝난 시점에 두 사람의 노래는 마무리되지만 피아노와 기타의 합주, 곧 후주(outro)는 끝나지 않는다. 그들이 최초의 화음을 이룬 여운이 아직 연장되는 중에쇼트는, 그들이 악기점을 빠져나가 어디론가 함께 가는 뒷모습으로 점프컷한다. 이때 그녀’의 오른손엔 고장난 청소기가, ‘그’의 오른쪽 어깨엔 구멍난 통기타가 나란한 풍경이 도착한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서로의 상실을 대체하는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인가를 열렬히 상상해야(만)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부른 최초의 노래 ‘Falling Slowly’는 ‘그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와 ‘그녀’의 배경으로 틈입할 따뜻한 미래까지 조용히 쓸어 담는다. 그들이 부른 노래에 빠져있던 우리는 이제 ‘무엇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이미 발화된 노랫말로 재음미하며 그들의 행보를 뒤쫓게 된다. 다른 방향으로 전혀 다른 대상을 향했던 두 개의 애도작업이 하나의 목적 아래에서 동시에 해결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그들 사이의 ‘사랑’이 분명한 사건으로 오는 순간에 해결될 것이다.
엇갈림의 표정- 건전지와 CD 플레이어
애견마트와 사철탕집이 가까이에 있는 골목에서 사랑의 역설적인 두 방식을 생각한 적 있다. 한 사람이 두 가게를 동시에 드나들긴 어렵다. 그러나 어느 한 곳을 드나드는 이들이라면, 모두 개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처럼 대상에 대한 사랑은 전혀 상반되는 두 가지 경향으로, 소유에 대한 두 가지 태도로 완전히 갈라설 수 있다. 표피적으로만 보면, 멜로드라마의 관습은 대게 후자의 태도를 숭고한 미덕으로 포장하며 ‘끝’을 이야기한다. 그쯤에서 우리는 죽거나 죽음에 준하는 수준에 이른 주인공을 떠나보내기도 한다. 그리고는 살아남은 이의 편에 서서 식인성 ‘합체(incorporation)’의 열망에 포박당한다. 부재하게 된 대상을 자아 안에 삼킨 후 대상과의 거리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태도를 종용받는 것이다. 결핍을 봉합하려는 우리 의지의 실체는 대체로 그런 메커니즘으로 성격화 된다. 그렇게 우리는 영원한 단절(죽음)이 영원한 사랑(합체)의 신화로 비약하는 기적적 사태를 용납하거나 희구해 왔다.
존 머서와 마틴 싱글러의 표현을 참고해 말하면, 멜로드라마를 본다는 건, ‘너무 늦은’과 ‘때마침’ 사이에서 고조되는 긴장을 기다리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falling slowly’가 도착한 씬은 어쩌면 ‘때마침’의 순간일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은 고장나거나 구멍 난 내면을 상대에게 내보인 채 치유의 시간을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들이 충분히 가까워졌다고 판단되는 순간에 ‘너무 늦은’이거나 ‘너무 이른’을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그녀’도 런던이라는 큰 무대를 그리는 ‘그’의 미래에 합승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장 짊어진 삶의 무게를 덜어낼 방도가 아직 없다. 반대로 ‘그’는 불안한대로 행복한 꿈을 함께 나눠질 ‘그녀’가 필요하지만, ‘그녀’의 현실적 상황을 외면할 순 없는 입장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엇갈릴 것이라는 복선이 도착한 장면은, 그들의 서로를 향한 애틋한 감정이 우리에게 충분히 전달된 직후다. ‘그’의 실언 때문에 잠시 서먹해졌던 ‘그녀’는 ‘그’의 진심어린 사과에 대한 대답으로 자신의 집을 공개하고 노모와 어린 딸을 소개해준다. 상상하지 못한 수준으로 고달픈 ‘그녀’의 삶을 목격한 ‘그’는 수다한 위로를 전하는 대신, CD 플레이어를 건넨다. 아직 노랫말을 입히지 못한 미완성곡이 그 안에 있다. 집 앞에서 ‘그’를 떠나보낸 ‘그녀’는 곧바로 CD 플레이어 속 ‘그’의 미완성곡을 듣는다. ‘그녀’는 지금 언어로 의미화되기 직전의 진심을 음미하는 중이다. 동행을 기다리는 감정, 치유를 기다리는 상처, 완성을 기다리는 사연이 거기에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대다수가 기대하는 답장을 ‘그녀’가 새겨 넣을 수 있으리라 믿어졌다.
그런데 그 순간 CD 플레이어의 건전지가 수명을 다한다. ‘그’의 음악을 계속 들을 수 있는 힘, ‘그’의 음악에 자신의 삶과 생각을 얹혀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멈춘 것이다. 늦은 밤, 곧바로 ‘그녀’가 상점에 가서 건전지를 갈아 끼울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그녀’가 입힐 노랫말의 주소가 ‘그’와 함께 하는 내일일 것이라는 생각을 거두기 어렵다. 그러나 더블린의 밤거리를 거닐며 ‘그녀’가 흘린 노랫말의 주인은 ‘그’가 아니다. 그러니까 ‘If You Want Me’는 미리 주어와 서술어부터 쓴 후, 방금까지 고려되었던 목적어를 급작스럽게 변경해버린 듯한 뉘앙스로 우리에게 온다. ‘그녀’는 눈앞의 ‘그’에게 끌리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옛 연인을 향한 애증의 병존 상태에서 해방된 게 아니었다. 그러한 ‘그녀’의 감춰진 내막은 이 노래의 초반부터 발설된다(“당신을 마지막으로 본 게 도대체 언제였나요. 이젠 당신 얼굴조차 잘 기억나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 놓인 건 멀고 긴 침묵 뿐”).
‘If You Want Me’의 시간은 거대한 어둠을 밀어내느라 애를 쓰는 더블린의 가로등이 음악을 데리고 사람의 미련을 짓는 무렵으로 밝혀진다. ‘If You Want Me’ 속 ‘당신’은 정황상 ‘그녀’의 옛 연인으로 되돌아간다. ‘그녀’를 향한 ‘그’의 마음을 은유했던 CD 플레이어, 곧 숨만 겨우 붙은 건전지를 가진 그 기표는 목적지에 이르러 최초의 목적을 훼손당한다. CD 플레이어 안엔 ‘그녀’의 사연과 합일되길 원하는 ‘그’의 선율이 담겨 있었으나 ‘그녀’는 그곳에 긴 시간 동안 철회하지 못한 다른 방향의 리비도를 얹는다. ‘그녀’가 더블린의 밤거리를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카메라는 완만하게 흔들린다. 정갈한 보폭의 ‘그녀’도 그 흔들림만큼 혼란스러워 보인다. 그런 관점에서 ‘If You Want Me’는 더 이상 절제할 수 없어 헐거워진 ‘그녀’ 내면의 어느 지점으로 터져 나온 오랜 정념의 집이다. 갑자기 등장한 싱코페이션의 긴장처럼 ‘그’와 ‘그녀’ 사이의 셈여림에 관한 호흡은 그렇게 엇갈린다.
요컨대 ‘If You Want Me’의 고향은 길 위에서 포착된 세 가지 ‘흔들림’이다. 먼저는 불가능한 애도작업에 다시 흔들리는 ‘그녀’가 있다. 두 번째로는 ‘그녀’보다 몇 발짝 앞에서 ‘그녀’를 자연스럽게 흔드는 어떤 시선이 있다. 이 시선 주체를 영화 속 누군가로 특정하는 것은 억측이고 그럴 만한 근거도 없다. 그러나 영화 마지막 씬을 미뤄보건대, ‘그녀’에 대한 미안함을 놓지 않은 옛 연인의 시선으로 환원하고 보면, 이 씬은 ‘그녀’의 옛 연인이 ‘그녀’의 자신을 향한 노래에 마음을 녹이는 신비로운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 번째 ‘흔들림’은 이 영화를 로맨스 혹은 멜로드라마 장르의 관습에 의지해 따라온 우리 자신의 흔들림, 곧 사랑의 성사 여부를 놓고 생겨난 불안이다. 이 마지막 흔들림은 곧이어 슬픈 확신이 된다. 이후 이어지는 씬들에서 ‘그’ 역시 옛 연인에 대한 애증을 담아 ‘Lies’라는 노래를 작곡하기 때문이다. 결국 ‘If You Want Me’가 등장한 씬에는 <원스>의 스토리텔링 전반을 집약하는 엇갈림의 표정이 있다. 언어와 재현의 한계를 넘어 지금의 감정과 기억의 요구를 대질시키는 음악의 권능, 어쩌면 <원스>의 가장 특징적인 여운이 거기에 있다.
작별의 순열: 어떤 떠남은 희생을 남기지 않는다
음악은 청각적 자극이면서 귀를 가진 모든 이의 공통어다. 무정형의 기호일 수 있지만 해석의 한계에 갇히지 않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렇게 음악은 언제든지 음악 이외의 의미를, 음악 이상의 감정을, 음악 너머의 미래를 계시할 수 있다. 락밴드 ‘더 프레임스(The Frames)’에서 글렌 한사드(‘그’)와 함께 활동했던 존 카니는 그 힘을 일찍이 알았고 <원스>의 이미지텔링으로 번안하는 데 성공한다. 그 덕분에 <원스>를 보는 우리는 순간에 흩어지는 소리가 흐릿해진 기억을 한데 모아 무한으로 가는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그 ‘무한으로 가는 순간’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와 ‘그녀’가 함께 만든 데모 CD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한다. 거기엔 그들이 서로의 삶에 자신을 의탁할 수 있을까를 건네 보던 마지막 순간이 담겨 있다. 아직 희망적인 미래를 가진 서로의 꿈과 감정이 동거하는 소리. 이 데모 CD를 들고 런던으로 날아간 ‘그’가 현실적으로 목적했던 바를 이뤘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녹음된 음악처럼 이제 흩어지지 않을 행복을 껴안고 살았을 것이라는 추측은 진실에 가깝다. 이는 뒤이어 도착하는 바닷가 씬, 그러니까 주말동안 밤샘 녹음을 마친 ‘그’와 ‘그녀’가 녹음에 참여한 동료들과 어울리는 씬이 증명한다.
‘When Your Mind`s Made Up’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몽타주씬 안에는 평화와 환희의 순간을 담은 쇼트들이 배열되어 있다. 연대기적 흐름을 따라 해석하면, 이 씬은 등장인물들이 녹음실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날려 보내는 광경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의심해볼 여지가 별로 없는 자연스러운 판단이다. 그러나 이 씬을 영화 이후 미래의 ‘그’ 혹은 ‘그녀’가 오래도록 간직해 온 기억 이미지를 술회하는 장면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리라 본다. 이 씬에서 그들은 동이 터 오는 바닷가를 배경으로 다시없는 눈빛과 몸짓을 교환한다. 그들의 옛 연인에 대한 이미지는 한순간도 틈입하지 않는다. ‘When Your Mind`s Made Up’에서의 ‘당신’도 지금을 함께 누리고 있는 서로를 겨냥한다고 판단된다. 이 확신에 의지해 말하면, 영화제목 ‘Once’는 두 사람이 감정을 교류한 한 철을 의미하는 것이면서 한편으론 바로 이 찬란한 ‘한 점의 기억’을 지목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이제 마지막 엇갈림의 시간이 들이닥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엇갈림의 순간은, 이 영화가 그려낸 가장 완전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가 원했고 ‘그녀’가 각오했던 자리에 이제 아무도 남지 않는다. ‘그’가 기다렸으나 ‘그녀’는 오지 않았고 이제 ‘그’도 그곳을 떠난다. 이때 완전한 ‘한 점의 기억’을 대체할 소리와 사물이 ‘그녀’의 집과 우리의 눈과 귀로 배달된다. ‘그’와 ‘그녀’의 최초의 합일을 기억하는 피아노와 그때의 노래 ‘Falling Slowly’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Falling Slowly’가 배경음악으로 깔리고 런던으로 떠나는 ‘그’의 ‘그녀’에 대한 마지막 선물(피아노)이 등장할 때, 우린 작별을 계기로 완전해지는 사랑을 보게 된다. 그 피아노 앞에서 ‘그녀’가 홀로 연주를 시작한 순간 ‘그’의 자리를 대신한 건 돌아온 옛 연인과 활기를 되찾은 ‘그녀’의 가족이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부터 ‘그녀’를 괴롭혔던 결핍은 그렇게 해결된다.
그렇다면 거기서 영화가 끝남으로 인해 정서적으로 해명할 기회가 사라진 ‘그’와 ‘그녀’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런던과 더블린 사이, 지금 다가온 사랑과 과거에 머무는 사랑 사이, 꿈과 현실 사이에서 그들은 서로를 두고 이런 질문을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사랑이 아닌가’. 그들은 그 질문 앞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았고 서로를 배려했다고 믿는다. 그렇게 음악을 닮은 한 시절이 이별을 짓는다. 주목할 것은, 엔딩 씬 마지막 쇼트들의 순서다. 먼저 피아노를 배달받고 행복해하는 ‘그녀’의 모습이 등장한다. 다음 쇼트는 더블린 공항의 출국 게이트를 빠져나가는 ‘그’의 미소 띤 얼굴을 담아낸다. 흔들리는 카메라 때문에 확신할 순 없지만, ‘그’의 미소엔 절제된 슬픔이 미묘하게 묻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다음 쇼트들은 집안으로 틈입한 피아노를 배경으로 완성된 ‘그녀’의 가족이다. 예민한 관객이라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품을 법도 하다. ‘그’가 더블린을 등지면서 내보인 미소는 그 앞 쇼트의 장면을 상상한 결과인가, 아니면 그 다음에 나오는 쇼트들을 예상한 표정인가. 당연히 정답은 없다. 전자라면, ‘그’는 ‘그녀’와 보낸 과거에 대한 윤리적 애도에 성공한 것이고, 후자라면 ‘그녀’가 새로 쓰게 될 미래에 대한 존중을 각오한 것이다. 어쨌거나 ‘그’와 ‘그녀’는 서로를 떠났지만, 어느 한쪽도 희생되지 않는 매우 드문 작별에 도달한다.
2017년의 시점에서 존 카니를 떠올릴 때 품게 되는 아쉬움을 말할 차례다. 그가 <원스> 이후 만든 <비긴 어게인>과 <싱 스트리트>도 충분히 인상적인 영화이지만, 음악이 과시적이라는 판단을 지울 수 없다. <원스>의 뼈대가 되는 모티프들을 재활용하고, ‘텔링’을 반복한다는 느낌도 근거를 갖는다. 다분히 추측이지만, 관객의 기대지점과 타협하는 과정에서 존 카니가 <원스>의 절경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언급한 <원스>의 절경은 영화 마지막 쇼트로 설명이 가능하다. 이 쇼트는 상대적으로 롱테이크에 해당한다. 가족을 되찾은 ‘그녀’가 햇살을 받으며 피아노 연주를 하다가 옅은 미소와 함께 창밖을 응시한다. 그때 카메라가 ‘그녀’의 집 창문을 넘어 건물 창밖으로 천천히 빠져나간다. 저만치 멀어진 ‘그녀’는 피아노 연주를 끝내고나서도 창밖 한 점을 바라보며 미동도 않는다. 그제서야 카메라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프레임 밖으로 밀어낸다. 거기에는 한적하고 평화로운 더블린의 거리가 있다. 영화 내내 더블린을 떠나지 않은 카메라는 그런 풍경을 계속 지연해 왔다. 떼놓기 힘든 열망, 의지, 기대를 온전히 내려놓았을 때 담아낼 수 있는 무심한 평화의 풍경 말이다. 아른거리는 햇살이 어루만지는 이 ‘텅 빔’의 경지는 오로지 <원스>만의 것이다. 이 엔딩 쇼트는 ‘그’와 ‘그녀’ 사이의 감정선을 다 정리하지 못한 관객의 등을 두드린다. 이제 진짜 작별인 것이다.
<원스>를 넘어서는 음악영화는 얼마든지 가능하고, 관점에 따라 지금 당장 여러 영화를 열거할 수도 있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면, 타자의 호명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는 다른 얼굴의 밥 딜런‘들’을 다룬 <아임 낫 데어>는 ‘음악을 한다는 것’, ‘음악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 사실상 <원스>는 음악과 인간, 음악을 하는 인간의 다층적인 결을 보여주는 데 관심이 없다. 부랑자처럼 거리를 떠도는 가난한 뮤지션의 7일을 다룬 <인사이드 르윈>은 <원스>보다 더 세공된 ‘낭만적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뮤지컬 영화로서 <라라랜드>는 사랑과 음악 사이 ‘공집합’ 지점으로 틈입하는 판타지를 훨씬 더 영리하게 공략한다. 등장인물과 카메라의 유려한 움직임을 리드미컬하게 접붙이는 이미지텔링은 그 자체로 재지(jazzy)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원스>는 다른 음악영화에선 볼 수 없는 순간들을 갖고 있다. 포월의 에피파니. 지금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당신도 그 정신적・정서적 계시의 순간을 찾아 음악을 수소문하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원스>는 우리의 평범한 생각보다 더 오래 기억될지도 모른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 안숭범
영화평론가. 한신대학교 인문콘텐츠학부 교수, 시인.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문화콘텐츠 기획 및 인문학적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