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가씨’ 포스터 |
“많은 것을 말해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은 것만 같지만, 그럼에도”
그간 많이도 기다렸다. 얄쌍하고 차가운 금속성 막대의 감촉이 두 손가락 새에 제 존재감을 처음으로 드리우던 그 때를 즈음하여, 꽤나 지리하고 긴 시간이 유보되고 또 미루어졌다고 할 테다. 아니, 별달리 뾰족한 수가 없어 외면했었노라는 표현이 조금은 더 옳을는지도 모르겠다. 문자 그대로 딱히 영화로부터 ‘무엇’인가를 취해, 그에 관해 쓰기가 괜스레 까다로운, 어떻게 쓸래야 쓸 수 없을 것만 같은 형편 때문이었다. 지금에야 차분히 돌이켜보건대 아무렴 ‘과욕’ 때문이었을 게다. 불필요한 과욕. 암만보아도 쉽사리 움킬 수 없음직한 대상에 설익은 사유로 설피게 엮은 그물을 들고선 접근하지 않으리라는, 그리하여 충분히 준비가 될 때를 기약하겠노라는 치기어린 바람 따윈, 애당초 나달거리는 한 점 바람에 흩날려 망실돼버려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도달 불가능한 소망에 하염없이 목을 매고 있는 꼴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잘 따져보면 실제의 속사정은 그럭저럭 이해해 줄만했다. 복닥대다 못해 배각거리는 사고의 편린들을 어렵사리 싸매고 골머리를 앓을 만한 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단 뜻이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혹 다른 무엇이든 주저 없이 말하고 있기에, 마치 아무것도 토해내지 않은 것만 같은 혼잡성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게 이 영화 <아가씨>라 뇌까려본다 한들 큰 무린 없을 테다. 환언하자면 뚜렷이 의미를 식별할 수 없을 만치 혼탁해져버린 말일랑, 기실은 아무 말도 내뱉지 않은 침묵과도 같단 뜻이다. 혹 많은 음성들이 겹쳐져 뭐가 뭔지 모르는 잡탕의 소리가 돼버린 형국이라고 본다면 옳겠다. 이 묘한 감각의 대면은 관객들로 하여금 예민하게 벼린 감식안을 기동시킬 수 없게 하며, 그렇대서 순진무구한 심미안에 안온히 도취될 수도 없게 만든다. 헤아릴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는 모호함의 출현은 오직 복잡성의 관념덩어리를 능히 비집고 과잉하는 ‘순수감각과 욕망의 자리’로만 존재들을 성공리에 내몰 따름이다. 이것이 텍스트 속에서 마주케 되는 영화적 경험의 진상이다. 예컨대 갖은 빛깔의 색상을 뒤섞어 뭔가 이해되지 않은 혼돈을 대면하게 될 때면, 마비된 사고 작용 저편의 너머로부터 감지되는 건 오로지 순수감각으로서 불쾌와 이를 해소하기를 종용하면서 깊은 곳에서부터 마구 꿈틀대는 욕망뿐이다.
▲ 혼잡성-아이들의 노랫말, 빗소리, 구령소리 |
처음 클래퍼를 친 바로 그 순간부터 불가해의 감각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아직 어둠으로 충만한 스크린에 제멋대로 된 아이들의 노랫말이 들려오고, 그 위로 거친 빗소리가 더해지더니, 이윽고 일제히 맞춘 구령소리가 다시 포개어진다. 화면 위로 빛이 스며들어오기까진 그것이 비오는 날 제식으로 움직이는 일본군의 뒤를 좇는 아이들의 놀이 현장이라는 걸 감지하기 어렵다. 나름의 음색을 가진 세 사운드가 섞어지며 정체를 분간할 수 없을 괴음으로 채색돼버린 까닭이다. 영화텍스트의 면면을 뒤덮어 수놓고 있는 낱낱의 의미소 내지는 관념들 역시도 ‘그렇게나’ 뒤섞여 있다.
물론 상이한 주파수들을 애써 분절하고 떼어내 보려고 시도한다면 어렵사리나마 그 실체를 분간해낼 수 있기는 하다. 서로 녹아들어 습합되면서 모호의 덩어리가 돼버렸지만, 본디 각각의 것들이 가진 저마다의 부피감과 밀도는 상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경제적 심급에 의한 계급갈등, 신분제도에 의해 위계화 된 인간의 존재지위,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의 타자되기, 식민화의 폭력, 말끔히 채색된 엘리트 집단의 화려함 이면의 어그러진 본질, 젠더 퀴어의 문제 등이 켜켜이 쌓인 영화지형의 단면을 상호교차하고(intersectional) 있는 사유 양태들이다.
▲ 향락의 대상으로 소비되는 여성성 |
▲ 남성성의 심리적-육체적 우월표현 |
꼽아보자면 기중에서도 특별히 여성의 탈-주체화 문제는 굉장히 다면화된 양상을 통해 현출되고 있다. 현격한 권력격차를 가진 가부장적 남성주체의 실력행사를 통해 가해지는 억압적인 위력(威力;authority), 그와 더불어 능동적으로 발화할 목소리를 상실하고 주체성을 거세당한 채 단지 향락의 대상으로 소비되고만 있는 여성의 이미지, 나아가 이미 남성에게 포섭되었고 그에게 완전히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소위 좀비존재로부터 가해지는 (여성에 의한 동성) 폭력, 끝으로는 같은 하위계층의 남성성에게서 거칠게 발현되는 육체적-심리적 우월표현이라든지 가스라이팅이나 상투화된 미소지니 상징 등속의 것들이, 텍스트 속에 현상된 여성문제의 입체적인 바림을 자아내는 다채로운 작인들이다. 또한 동성애코드 역시 꽤나 선명하게 현상되고 있다. 오브제에 기대어 표현되는 다분히 암시적인 단계에서부터, 심리적인 연결접속, 시나브로 그 열기가 달아올라, 마침내는 격정적으로 몸을 섞으며 체온과 타액을 공유하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다양한 리듬들을 통해 현시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 테다.
▲ 쇠골무를 매만지는 행위로 표현된 정서 |
▲ 은근하게 오가는 연애감정의 심리적 차원 |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텍스트 전체를 조망하고자 한 발짝 거리를 두고 물러나서 생각해보건대 딱히 호모-섹슈얼한 연애감정 그 자체를 강하게 부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란 조금 어렵다. 심지어는 작중인물들 간의 뜨거운 정사장면이 카메라의 긴 호흡, 그리고 감정의 등고선이 등락함에 따라 예민하게 반응하는 변화무쌍한 앵글로 촬영된 감각적 쇼트들을 통해 몇 번이고 역동적으로 현상되는 바로 그 순간들조차도, 일련의 장면이 레즈비어니즘을 전면에 내세우기 위함이란 판단을 직관적으로 얻어내기란 아무래도 좀 힘겨워 보인다.
그 까닭은 이미 상술한 바와 같이 명제를 띤 여럿 관념의 덩어리들이 복잡하게 영화 속에 아울러 엮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의 홍수 앞에서 개별성이 갖는 빛깔은 사장되는 편이 자연스럽다. 만일 저울에 달았을 때 각양 명제들의 질량이 큰 폭의 차이를 보인다면, 상대적으로 무게감이 적게 달리는 것들을 다른 어느 것의 질서 속에 포섭해 들이고 내재적으로 계열화해보는 작업이 혹 가능한 일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혼선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본 영화 텍스트 속에서라면 그건 만만치 않은 일이 된다. 섬세하게 추출된 낱낱의 부분들의 경우 원체 컬러들이 선명하기에, 그 각각에 천착해서 별개의 논고들을 구성하는 게 가능할 만큼이나 상황이 까다롭고 복잡한 탓이다. 접근하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 결과적으론 어찌해야 할지 길을 찾지 못한 가운데 목소리들은 오롯이 포개진다. 이로써 고유한 색깔들은 망실된다. 그렇담 무엇이 남는가? 이윽고 마구 엉켜 모호해져버린 관념덩어리를 제 홀로 유유히 비집고 나오는 과잉의 정동, 곧 꿈틀거리는 존재자들의 몸을 통해 매개되는 사랑과 욕망의 언어만이 도드라지게 강조될 따름이다. 몸 대 몸으로 서로를 위무하고 돌아보며 더불어 가혹한 상황을 극복할 힘과 연대의 동력을 얻게 하는 바로 그것 말이다. 제멋대로 녹아 붙은 의미들의 사이공간을 찢고 튀어나오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이 들끓는 욕망의 힘’이다.
▲ 장해를 돌파하며 들끓는 욕망과 애정 |
물론, 사실 한 마디로 정돈될 수 있을 만큼이나 간단한 건 또 아니다. 이 사랑의 현상학은 목을 죄어오는 먹구름이 짙게 낀 현사실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부대끼며 투쟁하는 인간실존이 제 몸을 무기로 삼아 자아내는 ‘적극적인 존재표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사랑은 결코 투명한 무풍지대의 사랑이 아니다. 등줄기로 흘러 나리는 눅눅하고 비릿한 땀 냄새와 함께 묻어나는 그것은 혼탁한 현실의 세례를 경유한 자들의 격렬한 몸부림을 통해 아울러 매개되는 그들의 눅진한 존재감이다. 앞서 언술한 바 있듯 이 존재감은 모자이크 처리된 모호함의 단면 앞에서 한결 뚜렷하게 전경화 된다. 한색들의 무덤 앞에서 브리콜라주 된 난색의 운명처럼 말이다. 용기를 얻어 한 발 더 내딛어 본다면, 실제 영화적 상호작용에 있어 ‘그런 것들’은 차갑고 분석적인 관념들이 아니라 낱낱의 쇼트를 구성하고 매듭짓는 ‘카메라의 몸짓과 말 걸기’ 다시 말해 영화언어의 독특하고 고유한 리듬들을 통해 보다 더 효과적으로 현상될 수가 있다.
“불협화음, 서로 다른 것을 비추는 시선들이 기어이 엮어지며 한 자리에 조직될 때”
1995년 작고한 프랑스의 어느 저명한 현대 사상가는 영화철학에 대한 그의 두꺼운 저술 제2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서사가 언어로 조직되는 서술적 시간의 흐름이라면, 이야기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론이 전개되어가는 양상에 해당한다고 말이다. 그렇담 본 영화 텍스트 속에서 도드라지게 강조되고 있는 것은 서사보단 이야기라는 판단이 옳을 테다. 만일 조금 더 확장된 맥락 위에 서서 과감하게 발화해본다면 <아가씨> 속에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시간-전이(플래시백)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조차도 성립 가능할 터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 반복 따위의 허접스런 말을 이 영화의 독특한 시간‘적’ 비틀림을 지칭하고자 부여하는 것 역시 불가능해 보인다. 혹, 어떻게 하면 이를 좀 더 가든한 언어를 동원해 간동하게 갈무리해 들일 수가 있을는지? 말하자면 영화 속에서 윗점 찍고 있는 주된 전환의 국면들은 서술적-선형적 시간의 진행을 표상하는 게 아니라, 단지 ‘같은 시간을 살되’ 그 속에서 ‘자리바꿈’ 된 주체-대상이 만들어가는 변주된 운동(활동)의 양상을 포착해서 보여주는 데 주력하고 있다. 쉽게 말해 카메라가 누구의 눈과 의식에 한층 가까이 다가서느냐에 따라 ‘달리 비추이는 몇 개의 세계’가 마치 시력측정을 위해 여러 개의 렌즈를 하나의 안경프레임에 포개보듯 스크린의 무대 속에서 켜켜이 겹쳐지고 있다는 뜻이다.
▲ 같은 시간 속에서 체현되는 다른 시간들 |
▲ 같은 시간 속에서 체현되는 다른 시간들 |
아무렴 렌즈들이 층층이 포개어지면 현기증 때문에 순간 사물을 사물다운 모습으로 감지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이 흐릿한 맨눈으로 볼 때보담 한결 더 정확한 인상을 제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착란에 적응하기까진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리라. 반전에 반전이 그리고 그 반전을 다시 뒤집는 반전이 부산스레 더하여지고 있는 가운데 ‘무언가 기묘한 감각’을 대면하게 되는 것 역시도 얼추 비슷한 이유일 테다. 시선의 전면적인 이동을 따라서 ‘포착된 진실의 감춰진 다른 국면들’이 드러나 한데 뒤섞이고 있다. 이 사실을 지시해주는 실증적인 변화의 증좌는 동일한 오브제에 내장된 의미의 또 다른 층위가 뒤늦게 현상된다든지, 혹 전혀 결을 달리하는 의미가 그것들에 새로이 덧씌워지는 장면들로부터 확인될 수가 있다.
▲ 숨겨진 의미의 현상 후, 부서지는 코브라 |
▲ 무지와 지식의 경계선으로 선언된 코브라 |
가령 코우즈키에 의해 ‘지식과 무지 사이를 가름하는 경계선’으로 선언되었던 코브라 조형물속엔 서재-밀실 속에 은폐된 고고함 뒷면의 일그러진 얼굴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지키는 이른바 문지기란 뜻이 감추어져 있다. 시선의 운산 및 운신과 함께 마침내 그 숨은 의미는 수면위로 끌어올려지게 되고, 결국 문제적 현실을 극복하기 원하는 이들의 손에 의해 오브제는 부수어진다.
▲ 구슬 – 억압과 폭력의 집체 |
▲ 구슬 - 결정화된 사랑과 애욕의 상징 |
더불어 강요된 수치와 가공할 폭력의 집체인 구슬이 담지하고 있는 (사실상 본래적인 것으로서의) ‘결정화된 적극적 사랑과 애욕’이라는 의미 역시 몇 차례 시선의 자리바꿈을 거친 텍스트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수면 위로 오롯이 현상된다. 또한 본시 백작과 아가씨가 공모했음을 상징하는 액상아편은, 옥주(숙희)와 아가씨의 결탁을 강력하게 지시하는 표상으로 갈음된다. (저택의 유리창 그리고 차창으로부터) 아가씨의 이마에 남겨진 ‘선홍색 자국’ 역시 텍스트의 말미에 이르면 옥주를 속이기 위한 장치에서 긴장을 푼 백작을 속이기 위한 장치로 옮아가게 된다.
▲ 미소와 미소 사이에 놓인 의미의 심연1 |
▲ 미소와 미소 사이에 놓인 의미의 심연2 |
끝으로 정신병원 앞에서 슬며시 흘린 아가씨의 미소란 옥주에 대한 조소와 백작에 대한 비웃음이라는 (만일 시선의 자리 옮김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도무지 건너갈 수 없는 심연의 사이공간에서 침전하고 있다. 이는 누구의 눈과 의식에 가까이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같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의미운동의 색상마저 완전히 다른 것으로 지각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연하게 지시해준다. 이처럼 이질적인 색상들이 이리저리 겹쳐지는 순간이란 교향곡의 대위법적 선율이 만들어내는 풍성한 울림을 경험케 한다기보다는, 조화와 균형을 상실한 광시곡이라든지, 차라리 무조음악의 풍광이라고 할 법한 괴기하고 을씨년스러운 지각경험을 빚어낸다.
“억지로 많은 것을 들려주고 보여줄 때, 비로소 치밀어오는 부담과 메스꺼움”
지각경험에 혼선을 안겨다주는 영화언어의 또 다른 말 걸기 전략은 내레이션 내지는 방백(aside)으로 정돈해도 무방함 직한 심리상황의 직접적인 표현-전달이다. 환언하자면 소설이나 연극에서 통용될법한 ‘속마음의 숨김없는 현출’은 대개 그것들에게서 기대되곤 하는 효과와는 달리, 영화 속에선 되레 관람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부적작인으로 복무할 수 있다. 보기-작업을 통해 되기-작용을 스스로 일구어가는 관람객의 영화적 경험은 적어도 현대 영화적이지 않은 요소들의 난입에 의해 그 과정상의 자연스러움을 침노당하고, 더불어 예기치 않았던 불쾌감을 마주케 된다. 예상되는 경로를 이탈케 하고 흐름을 탈구시키는 현저한 이물감을 맞아들이게 되는 셈이다.
비단 과한 들려주기만이 문제가 되는 건 또 아니다. 불필요한 보여주기 역시 문제적이다. 감각자료들을 이리저리 연결-접속시킴으로써 느슨한 이미지 행간을 벌충할 여력이 주어져 있을 때, 관람객의 능동성은 극화된다. 그 여지를 차단당하는 경험이란 건 단지 자동적으로 짜여가는 직물의 경험 속에 존재들이 수동화 된 채 내던져지도록 만든다. 예기치 않게 일자리를 빼앗긴 채 실업자의 위치로 전락해버린 셈이다. 무엇을 해야 할는지 모르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가운데, 다만 눈앞에서 이리저리 카메라의 시점들이 옮겨 다닌다. 매번의 자리 옮김을 통해 새로이 획득되는 감각정보들은, 매한가지로 별다른 개입을 요청하지 않고서 마치 변신-로봇이라도 되는 양 제 스스로 아무런 스스럼도 없이 조립되어버린다. 이것은 관객이 마땅히 딛고 서야 할 발판을 뒤흔드는 동시에, 그들을 심각한 거북함과 현기증 가운데로 몰아붙인다.
▲ 감각정보의 자동적인 재조립 – 피 |
▲ 감각정보의 자동적인 재조립 – 칼 |
여성이미지의 그릇된 재현문제를 차치한다손 치더라도, 료칸의 이부자리에 남겨진 혈흔(처녀흔)의 정체를 구태여 보여줄 이유란 건 없었다. 옥주와 아가씨의 눈과 의식에 카메라가 한 걸음 가까이하게 되면서 그것의 정체는 충분히 벌충될 수 있는 것, 다시 말해 관객의 상상력에 의해 적절하게 매개되고 해명될 수 있는 것으로 전화되었기 때문이다. 굳이 혼자 이불안에서 연기하는 아가씨의 모습을 ‘억지로’ 보여주는 건 관람객을 일말의 사고 작용 없이 수동적으로 음식물을 받아먹기만 할 뿐인 ‘마비된’ 존재의 위치로 격하시켜버린다. 의도적이겠지만-.
“들끓는 욕망의 현상학, 그리고 실존하는 인간들의 투쟁문제”
분명 영화는 이야기적 속성을 도드라지게 머금어내고 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텍스트 속에서 전개되는 서사의 진행과 그 흐름을 당최 식별할 수 없다는 건 또 아니다. 선형적 시간의 노정을 잘 보여주는 사례 중에서도 대표적인 건, 작중인물들 사이를 오가며 펼쳐져나가는 정서의 궤적, 특별히 옥주와 아가씨 두 사람 사이에서 마치 왈츠를 추듯 그려지고 있는 감정선 그래프의 입체적인 개진이라고 할 테다. 소소한 관심에서부터 출발했던 정서적 교감은 시간의 세례를 거치면서 슬금슬금 짙어져만 간다. 그러나 심박 모니터에 표상된 환자의 활력징후(vital sign)가 간간히 등락의 파형을 그리듯, 마음이 침식된 상사병 환자라 해도 크게 다를 건 없다.
▲ 감정의 격동 – 일부러 초점을 흐리다 |
▲ 감정의 격동 – 연거푸 따귀를 때리다 |
그녀를 향해 품은 마음의 크기만큼이나 아가씨에게 화가 나버린 옥주가 미술도구를 팽개쳐 둔 채 멱찬 호흡으로 산을 뛰어내려오는 쇼트는 핸드헬드 카메라로 촬영한 듯 부러 초점을 불명확하게 흐린다. 주체의 밀실영역 속에서 그 움직임의 동세와 방향을 가늠할 수 없을 만치 이리저리 사납게 날뛰고 있는 파도를 가시적 문법으로 옮겨 외현해내고 있는 셈이다. 더불어 자신의 발을 주물러주던 옥주의 따귀를 때리고, 차마 끓어오르는 분을 삭이지 못해 이내 연거푸 그녀의 뺨을 후리고 마는 아가씨를 그려내는 지점 역시 정확히 매한가지라 할 터이다. 이처럼 서로에 대한 감정이 널뛰기하듯 격동하는 순간을 지나고 나면 두 사람은 한결 더 끈끈하고 튼실한 애정의 관계로 접어들게 된다. 마치 조를 지어 움직이는 숙련된 무사들처럼 단 한 치 동작의 흐트러짐 없이 집을 빠져나오는 두 사람의 행동을 통해, 이들을 마치 둘 아닌 하나로 묶어내는 듯한 감정의 뫼비우스 곡면이 시각적으로 현출되고 있다.
▲ 흰 담배를 몽땅 꺼내 피우다 |
▲ 서사적 필연에 의해 파란 담배로 |
각양 오브제들 역시 서사진행의 순조로운 방향성을 지탱해주는 보조적인 장치들로 복무하곤 한다. 대표적으로 코우즈키의 집으로 압송되는 지프차 속에서 단번에 연거푸 세 대의 흰색 담배를 몰아 피워버리는 백작의 모습은, 이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이 남겨진 푸른 담배(독극물)를 마침내 지하 고문실 안에서 피우게 될 (도래할) 상황과 자연스레 엮어지고 있다.
하지만 상술한 서사의 일상적 조건들은 그보다 한 발 더 앞서 언급한 여럿 이야기적 요소들의 비선형적 개입과 훼방에 의해 이리저리 뒤엉켜버린다. 그리하여 ‘영화적 사태’는 복잡해진다. 거추장스럽고 번거로운 정보들이 ‘같되 다른 시간들’ 속에서 이쪽에 들러붙고 저편에 덧대어지며 다분히 진실 되지만 그 이상으로 혼잡스런 감각이 연출된다. 겹겹의 강조를 통해 배증된 피부조직의 이미지나 속아지의 장기들을 훤히 들여다보는 그때, 과연 누가 있어 그것과 자신을 쉽게 동일시 할 수 있겠는가? 판단은 중지되고 되레 모호함이 들이쳐 올 테다. 허나 이런 방법을 취해야만 했던 이유가 도대체 뭘까? 단지 진실이라 의심 없이 믿고 있던 허구의 틈을 드러낸다든지, 이 불안정한 자리로부터 출발해 전혀 다른 의미로서의 진실에 가닿게 하겠단 식의 관념적 선언에 매몰되고자 함은 분명 아닐 터이다. 그 불안정함이야말로 진정으로 관객에게 주체의 자리를 허락해줄 수 있다는 유의 존재·인식론적 접근 역시 영화 텍스트의 ‘텍스트다움’을 위해선 잠시잠간 물리칠 필요가 있겠다.
이야기적 요소들의 범람은 관객에 의해 마침표를 찍게 될 시지각적 조형작업의 갈무리를 지연시킨다. 이처럼 의식을 어지럽히는 모호의 덩어리를 능히 비집고 솟구쳐 나와 제 홀로 요요하게 빛나고 있는 건, 오로지 살아 있는 몸들이 빚어내고 있는 실존의 감각, 곧 존재자들의 ‘사랑과 욕망의 꿈틀거림’이다. 어쩌면 혹자는 이런 식의 마무리에 대해 안전주의일색의 소극지향영화라는 비판을 더할는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말을 하기는 해야 하겠고,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문제시하고 있는 지점들을 일일이 다루기는 까다롭고 번거로우니, 편의주의를 따라서 그 모든 요소들을 대충 (애욕의 뒤편에) 배경으로 들러리 세운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허나 정말 그런 의도에 기대고 있었더라면 애당초 머리 아픈 문제들을 영화 속에다가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되는 일이 아닌가? 그리고 무언가 문제적인 것에 대해 말을 건다고 할 때, 구태여 영화의 내기방식이 그렇게 교과서적인 언어와 문법을 준용해 말을 걸어야만 할 당위란 것도 없다고 할 테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예술이 존재해야만 할 필요란 것도 없어지고 말 테니까.
옥주와 아가씨 사이를 맺고 있는 ‘들끓는 욕망의 현상학’은 힘들로 모자이크처진 부조리한 현실의 장막을 찢고 비어져 나왔기에 비로소 의미 있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간다면, 그것이 우리네의 실제현실의 주소(status quo)를 조명해주는 반영의 거울과 가늠자가 되어줄 것이라는 점 역시 물론이라고 하겠다. 설령 어느 시대를 그 배경으로 삼았건 간에 동시대의 영화는 공히 지금-여기(Jetzzeit)의 현실에 대해 말을 걸어온다. 그리고 영화의 말 걸기는 촘촘한 망상형질의 덫을 놓아 존재자들을 포박하려는 모호한 힘들의 역학관계 속에서 그 무게를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내며 격렬히 부대끼는 ‘존재자들의 실존’을 전해오는 데 기여한다. 고도로 육화된 관념들, 복잡한 사유가 감각적으로 결정화된 영화만의 언어체계를 통해 나누어지는 관객과의 끈적이는 대화들로부터 말이다.
글: 남유랑
비평가.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 및 제37회 영평상에서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비평가로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비교문학협동과정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총무간사로 사역 중이다.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에 정기필진으로 참여하고 있다.
1986년 출생. 본명은 남병수. 필명인 유랑은 유목늑대라는 뜻을 가진다. 문자 그대로 사회적 짐승인 늑대의 이미지로부터 착안해 낸 이름이다. 범이나 앉기를 고대할 법한 배타적 권좌를 멀리하는 늑대는 제 홀로 쏘다니며 고고한 단독자의 길을 열어가는 듯 보이지만, 사실 자유로운 그/녀의 발길이 내딛는 걸음걸음은 언제나 공동체의 생존이라는 목적에 닿아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비평가의 초상이다. 좀 더 비약하자면, 비평가는 평등-자유라는 도달 불가능한 이상을 항상 어떻게든 인간실존의 무대 가운데 이끌어 들이고자 분투하는 존재라는 확신이랄까? 만일 본인의 주된 관심사에 대해 묻는다면 늘 자신을 향해 던져보는 두어 가지 질문거리를 소개함으로써 그 대답을 갈음해 볼 수 있을 터이다. 먼저는 비평의 비평다움 곧 에세이도 논문도 아닌 비평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어떤 몫을 감당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고민일 테며, 다음은 여전히 관념적·형이상학적인 정치철학의 진리선언 대신 혹 예술이 제시할 수 있음직한 실존적·연대적인 구원의 가능성을 끝내 소명해내고야 말겠다는 갈증이라고 하겠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