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전
오랜만에 만나보는 흥미로운 전쟁영화였다. 그리고 오래전 집안 어른들에게 들었던 6.25 전쟁 당시의 상황과 일치되는 면면이 발견되면서 영화가 흥미를 더해갔다. 이른바, <고지전高地戰>(장 훈 감독, 전쟁물, 한국, 2011년, 133분)의 진상 말이다.
1950년에 일어난 6.25 전쟁은 3년간 지속되었다. 그런데 실제로 한반도 전체를 두고 벌였던 전면전은 1년을 넘지 못했고, 나머지 기간은 38선 주변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채 벌어진 국지전이었다. 당시는 요즘처럼 GPS 기술이 없던 시절이었으니만치 산 너머 적진의 동향을 살피려면 반드시 고지를 차지해 시야를 확보해야 했다. 따라서 밀고 밀리는 전투가 끊임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었는데, 영화의 배경인 애록 고지는 무려 30여 차례나 주인이 바뀌었었다. 국군이든 인민군이든 힘이 빠질 대로 빠진 상태였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고지전>은 기존의 전쟁영화와 뚜렷이 구별된다. 우선 다양한 인물들의 시각을 사용해 전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준 점이 눈에 띈다. 방첩대 중위 강은표(신하균)는 북한군과 내통하는 자를 색출하라는 임무를 맡았고, 악어 중대의 실질적인 지휘관인 김수혁 중위(고수)는 이미 전쟁의 창자까지 다 보아버린 인물이고, 갓 스물 나이에 중대장이 된 신일영 대위(이제훈)는 아군에게 총격을 가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며, 악어 중대와 맞선 북한군 지휘관 현정윤(류승룡)은 한 때 열렬한 공산주의자였으나 이제는 전쟁의 당위성마저 의심하고, 북한군의 빼어난 저격수인 차태경(김옥빈)은 의미도 모르는 채 총을 쏘아대는 고성능(?) 살인자이다.
이들에 더해 화려한 조연들(유승수, 고창석, 조진웅, 정인기, 이다윗)이 다多각도에서 전쟁의 냉철한 증인 역할을 해냈고, 그 중에서도 고창석과 유승수의 연기는 빼어났다.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감독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전쟁의 구체적 현장은 살육이 벌어지는 지옥이라는 것이다.
여기 글자그대로 선악이 사라진 무자비한 전쟁터에서 매 순간 목숨을 거는 군인들에겐 오직 휴전만이 기쁜 소식이다. 하지만 휴전을 기다리는 동안 애록 고지는 점점 수많은 시체들이 널브러진 민둥산으로 변해간다. 장 훈 감독은 한 곳에 시점視點을 맞추고 그 앞에 전투의 여러 장면을 교차시킴으로써 극적인 설명 효과를 불러왔다. 전쟁의 참상을 한순간에 간파하게 만든 훌륭한 연출력이었다.
전투의 세부적인 묘사도 뛰어났다. 전선에서 펼쳐지는 온갖 작전들과 임기응변을 적절한 상황과 엮어냄으로써 사실감과 함께 단단한 긴장감을 불러왔고 와중에 뜬금없이 내뱉는 대사들이 몰입에 도움을 주었다. 휴전까지 12시간을 앞둔 전투에서 남북 군인들의 유일한 소망은 고지에 자욱하게 낀 안개가 걷히지 않는 것이었다. 시야를 확보하지 못하면 비행단이 출격 못할 테고, 비행단이 뜨지 않으면 전투 개시를 알리는 공중 폭격이 시작되지 못하고, 결국 마지막 고지전은 취소된다. 만일 그렇게만 되었다면 그리운 고향에 갈 수 있었을 것을....... 하지만 무정한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폭격이 시작되자 최후의 승자를 가리는, 3년 전쟁 중에서도 가장 치열한 고지전이 벌어진다.
근대 이후 전쟁은 언제나 정의를 앞장세워 수행되어왔다. 그와 더불어 국가는 개인의 인격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불허하고 오직 ‘(국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허용된다.’는 일반원칙을 경제, 사회, 종교, 역사 등 모든 분야에 무차별적으로 적용시킨다. 이른바 법 보존적 폭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독일의 유명한 문학평론가이자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의 글 ‘폭력 비판’(Zur Kritik der Gewalt)에 담긴 내용이다.
영화에서 강은표 중위만 남기고 다 죽는다. 그렇게 6.25 전쟁도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년>도, <빨간 마후라1964년>도, <태극기 휘날리며2003년>도 <고지전>과 함께 끝났다. 그리고 전쟁이 지나간 자리엔 포화와 시체 가득한 헐벗은 애록 고지만 남았을 뿐이다. 만일 <고지전>을 보고나서도 전쟁을 찬양하는 자가 있다면 분명 차가운 피가 흐르는 주전론자主戰論者일 것이다. 멋진 반전영화로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