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로영화인상 | 신성일
보릿고개 면치 못한 한국영화의 새 희망
후시녹음시대 휩쓴 한국영화의 간판스타
김 종원 (본회 상임고문,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현실에 불만을 가진 젊은이들이 기성사회에 반발한 영국의 ‘앵그리 영맨’과, 기존의 문화 관습과 패러다임에서 탈피하려는 프랑스의 ‘누벨바그’가 이땅의 젊은 영화인들을 자극하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 청춘영화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신성일은 보릿고개를 면치 못한 한국영화의 희망이었다. 1960년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지 4년만의 일이다. <맨발의 청춘>(1964)이 그 계기가 되었다. 두 영화 사이에 튼튼한 가교 역할을 한 것이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1962)였다. 이 영화에서 그는 연상의 전쟁미망인을 사랑하는 유흥업소의 20대 관리인으로 거듭났다. 이후 <맨발의 청춘>의 주인공 두수 역을 맡으면서 뒷골목의 중간두목이자 밀수조직의 하수인이라는 이중적 인간형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신성일 시대’를 예고한 그가 1960년대 후시녹음 시대에서 산업화로 전환한 70년대까지 근 20여 년 동안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무비스타였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활동에서 잘 드러난다. 연평균 35편, 매달 최다 4편 꼴로 촬영한 겹치기 출연 편수와 청룡영화상 등 국내 영화제(상)의 인기상을 6년 동안이나 석권한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53년에 이르는 연기생활을 통해 5백42편에 이르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중 5백6편이 주연 작품이었다. 이러한 결과는 세계영화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신성일의 연기는 타고난 마스크에 의존하여, 소외된 청춘의 갈망과 좌절의 이미지에서 인생의 체험과 경륜이 배인 여유와 집념의 모습으로 진화하는 의미 있는 과정을 보여 주었다. <맨발의 청춘>, <흑맥>(1965), <초우>(1966) 등이 전자라면, <길소뜸>(1985), <장남>(1984) 등은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올해 80대를 바라보는 나이로, <태풍>(2005) 이후 8년만에 <야관문>에 출연, 혼신을 다하는 연기를 보여줌으로써 한국영화사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게 됐다. 이에 공로영화인으로서 보답하고 기리지 않으면 안 될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