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주의 비평의 극복을 위하여
김시무(영화평론가)
소재주의 비평이란 무엇인가? 사실 소재주의 비평이란 용어 자체는 엄밀한 비평적 용어라기보다는 수사학적인 용어에 불과하다. 학문적으로 등록되어 쓰이는 본격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뜻이다. 소재주의 비평이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용어를 전면에 내세우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한 비평방식과 관행이 나름대로 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비평계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작품의 전체적 맥락과는 무관하게 소재(subject matter) 또는 모티브의 측면에서 여러 작품들을 비교해보고 어떤 경향을 짚어내는 저널리즘적 글쓰기의 한 방식이라고 잠정적으로 규정을 내리도록 하겠다.
좀 더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불륜을 소재로 한 영화가 있다고 하자.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이 그렇고, 이재용 감독의 <정사>가 그랬고, 최근에는 비록 영화는 아니지만 드라마 <푸른 안개>가 또 불륜을 소재로 하여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이런 소재를 다룬 개별 작품들의 목록을 끄집어내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소재를 다룬 영화를 비평적으로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에 있다. 혹자는 특정한 시점에서 제작된 일군의 영화들만을 골라서 그런 소재가 만연하게 된 원인을 캐내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사회학적 연구대상으로서는 가치가 있을지 모르나 작품에 대한에 비평적 접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럴 경우 이들 영화들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불륜이라는 소재(素材)는 말 그대로 연구대상의 재료(材料 ; material)로써만 가치가 있거나 활용될 뿐이다. 그래도 이런 경우는 나은 편이다. 어쨌든 학문적인 접근이기 때문이다.
정말 문제로 되는 경우는 다른 모든 것을 다 제쳐두고 그 소재 자체에만 입각하여 한 작품의 호불호를 결정해 버리려는 매우 근시안적인 접근법이라 하겠다. 소재주의의 원단이라고나 할까. <거짓말>이 나왔을 때 그 소재의 파격성과 표현의 과격성 탓에 찬반양론이 거세게 일었다. 이제는 이것도 과거사의 한 부분으로 희미해진지 오래지만 말이다. 논란의 초점은 어떻게 30대 유부남과 10대 여학생의 불륜 내지는 원조교제를 파렴치하게도 다룰 수가 있냐는 것이었다. 불륜은 한 소재일 뿐 좀 더 큰 미학적 맥락에서 작품의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는 일부 평자들의 낮은 목소리는 윤리와 규범을 내세우는 도덕주의자들의 아우성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평론가라고 해서 모두 다 미학적 가치기준으로만 이 작품을 대한 것은 아니었다. 미학이전에 소재 자체가 부도덕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나는 드라마 <푸른 안개>를 둘러싼 사회적 담론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모든 논의의 방향이 불륜은 무조건 안 된다라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음을 보고 좀 서글퍼졌다. 그렇다고 이경영과 이요원의 썸싱을 온갖 사회적 제도와 관습과 편견으로부터 벗어난 절대사랑의 추구라고 대놓고 주장할 수도 없었다. 어느 편에서든 결국 주어진 소재에 대한 찬반양론으로 갈릴 뿐이지 않겠는가? 소재 자체에 대한 혐오와 찬양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므로 둘 다 또 다른 관점에서 작품을 마주하기란 애당초 글러먹은 것이라 하겠다.
<거짓말>이후 이런 논의는 <로망스>가 개봉되었을 때도 그대로 이어졌다. 워낙 작품 자체가 소수파 영화라서 그런지 파급효과는 적었지만 <로망스>를 놓고 두 명의 남녀 평론가가 펼친 설전(舌戰)은 소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비평적 담론이 얼마만큼이나 궁색해지는 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논의의 핵심은 여성의 성기에 관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재료(material)로서의 성기였다. “이만한 접근을 과감하게 시도한 적이 있었느냐”, “아니다 이미 그런 정도는 다른 영화들에서도 다 나왔기 때문에 진부하다.” 등등. 나는 실명비판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그냥 생략하고 넘어갈 수가 없다. 『씨네 21』 276호(2000년 11월14일자 참조)에 실린 해석남녀의 글 가운데 편집자가 보기 좋게 돌출 시킨 대목이 특히 나의 관심을 끌었다.
심영섭 : “예전에 성치료 배울 때, 그때 내 성기를 처음 봤어. 우리 선생님이 나한테 내준 처음 숙제가 성기 그려오는 거였거든. 그건 요즘 애들도 마찬가지야. 똑같은 숙제를 내줬더니, 자기 거를 처음 봤다며, 신기해하더라구. 우리나라 여자들은 자신의 성기를 은폐하도록 교육을 받아왔어.”
김봉석 : “문제는 뭐냐면, 여성의 성기를 보자, 나의 몸이 어떻게 생겼나 보자, 내 몸을 사랑하자, 그런 것은 이미 70년대에 시작한 것이라는 거지. 사진으로 찍거나, 그림으로 그려서 미술관에서 전시도 했어. 말하자면 그런 담론이 벌써 한참 전에 시작된 얘기라는 거야. <로망스>는 그런 면에서 보면 진부해.”
사실 필자는 <로망스>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보고 나름대로 큰 충격을 받았다. 내게는 소재 자체부터가 결코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의 문화적 체험의 빈곤 탓인가. 나도 김봉석 기자가 언급한 것 정도는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진부하지 않았다면 내가 본 것은 소프트한 것이기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달리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렇다. 소재 자체는 원래 진부한 것이었다. 하늘아래 이제껏 안 다루어 본 소재가 어디 있었어야 말이지. 그 때 내가 깨달은 한가지 소박한 진리는 소재에 국한 된 어떠한 논의도 건설적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소재에 대한 가치평가부터 시작된다면, 그 때부터의 논의는 이미 평가적 차원이 아니라 심의의 차원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소재(불륜)는 안되고 저 소재(모성애)는 ‘대종상 감독상’ 깜이야 하는 것은 비평가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검열관이 할 수 있는 사법적 담론이라는 얘기다.
딱 한 가지만 더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소재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한 동성애다. 아니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 노골적인 혹은 본격적인 의미에서 동성애를 소재로 다룬 영화가 별로 없으므로 대개 논의의 초점은 동성애 코드를 발견할 수 있느냐의 여부로 모아진다. 김성수 감독의 <태양은 없다>에서 “정우성과 이정재가 실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냐?”에서부터 최근에는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이병헌과 제자의 관계에서 직접적인 동성애 코드를 읽어내기도 한다. 도대체 누가 그랬을까? 대표적으로 대중문화평론가 오은하 아줌마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아줌마는 <번지점프를 하다>에 나온 인우와 현빈의 사랑은 과연 동성애일까 하는 아주 까다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제작진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아줌마는 끝내 의문을 풀지 못한 것 같았다.
아줌마 : “하지만 만약 태희가 그런 풋풋한 몸과 싱그러운 소년의 매력을 입고 있지 않았더라도 인우는 그토록 열정적으로 끌렸을까? 남자를 사랑한 거 맞잖아? 그럼 그게 동성애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은 왜 자살했지?” (『씨네 21』 292호 3월13일자 참조)
아줌마 말대로 이병헌이 남자를 사랑한 것은 맞다. 그 학생은 분명 여고생이 아니라 남학생이었으니까 말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 소재(질료)의 측면만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동성애가 틀림없다. 그런데 왜 자살했을까? 사회적 질시와 냉대가 두려워서? 아니다. 남자의 몰골로 사랑하는 게 싫어서 다시 처음 그 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꾀했던 것이 아닐까? 대한민국 미남미녀(美男美女)로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영화는 철저하게 이성애 중심의 텍스트가 된다. 이런 면에서 감독은 명민했다. 보는 이에 따라서 해석을 달리 하도록 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으니까 말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소재주의적 관점에 입각했을 때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남 얘기 할 것도 없다. 필자 역시 ‘영화의 이해’ 수업 시간에 학생들한테 은밀한 게이 텍스트 어쩌구하면서 <태양은 없다>를 예를 든 적이 있다. 마치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이 말이다. 로빈 우드 선생이 <내일을 향해 쏴라> <미드나이트 카우보이>같은 영화를 동성애 코드로 읽어낼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을 경청한 까닭이었다. 아무튼 <번지점프를 하다>에 대해서 여러 지면을 통해 이미 담론 화된 ‘동성애 코드’ 운운하는 소리를 듣고 나서 그런 선입견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리하여 리뷰를 쓸 때 의도적으로 동성애 관련 코드를 배제해 버렸다.
이제 어느 정도 소재주의의 함정에 대한 예비적인 설명을 했으므로 본론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겠다. 그것은 정성일 평론가에 의해 촉발된 “최근 들어 한국영화가 죽음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테제다. 물론 그의 말을 올해 들어 부쩍 죽음이라는 소재를 다룬 한국영화들이 많아졌다는 의미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문제를 너무 단순화시킨 것이다. 어쨌든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요즘 한국영화가 보이는 두 가지 공통적인 특징은, 사소한 것에 대한 질문, 그리고 주인공들의 죽음에 대한 나르시시즘이다. 죽는데 주변 사람들이 말리지 않는 모습이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이 병장이 불현듯 자살했다. 감독은 이들을 만나게 해주려 했다지만, 살아도 상관없는 사람을 기어이 죽였고, 그것에 대해 대중은 침묵을 지킨다. <비천무>에서 주인공은 하여튼 죽는다. 부모는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지 않고, 아들은 부모의 죽음을 보면서 저항하지 않는다. <리베라 메>에서 주인공은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간다. 또 한 명의 소방관도 그저 나르시시즘을 느끼듯이 죽음을 받아들인다. <박하사탕>은 더할 나위 없이 죽음으로 시작한다. (중략)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은 죽음을 바라고, 제작자들은 관객이 그걸 바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들이 한국영화에만 나타나는 특별한 징후다.” (『씨네21』289호 2월20일자 참조)
이러한 논의는 즉각 확대 재생산되어 최근의 한국영화의 한 경향을 확실하게 대변해주는 비평적 화두(話頭)가 되었다. 이 발제문도 그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음은 물론이다. 사실 이러한 화두를 염두에 두고 한국영화들을 하나하나 따져본다면 죽음에 집착하지 않는 한국영화는 거의 없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필자가 최근에 본 한국영화 중에 죽음에서 자유로운 영화는 정초신 감독의 데뷔작인 <자카르타> 딱 한편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이 영화도 초반부에서부터 “사람 엄청 죽이는 영화로구나” 하는 분위기를 풍긴 것은 사실이었지만, 결국은 반전에 반전을 위한 교묘한 장치임이 밝혀져 신선한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죽음을 비평적 화두로 삼아서 한국영화의 흐름을 재단하는 평자들의 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극중의 모든 인물의 죽음이 아니라 특히 비중 있는 캐릭터의 죽음에 대해 문제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주인공의 죽음이었다. 요컨대 굳이 주인공을 죽일 필요가 있었느냐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특히 비중 있는 주조연급 인물들이 죽을 때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좀 양보한다하더라도 내러티브의 맥락상 주인공이 죽을 만한 당위적인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어떤 영화에서 위에 언급한 이유로 주조연급 캐릭터가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도 그 점을 도외시한 채 그냥 죽음 자체만을 부각시켜 ‘죽음의 남발’ 내지는 ‘죽음에의 집착’이라는 화두를 끄집어낸다면 이런 태도야말로 소재주의 비평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겠는가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개별 작품에 대한 엄밀한 비평적 접근이 이루어지기보다는 그냥 하나로 싸잡아서 도매금으로 넘겨버리기가 십상인 것이다.
지난 3월16일자 『한겨레』신문에는 중견 평론가 이효인과 『씨네 21』 허문영 기자의 대담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주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었다. 필자가 흥미롭다고 한 이유는 이 글에서도 역시 죽음의 모티브가 다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을 지우고 죽음을 남용하고 시시콜콜 흰소리로 채우고”하는 중간 제목도 눈길을 끌었다. 여기에서 허문영 기자는 최근 (한국)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죽음의 모티브고 그것을 너무 남용한다고 진단한다.
“<공동경비구역 JSA> 역시 현실에서 출발했지만 죽음이란 결말을 통해 장르적 비장미로 빠져나간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번지점프를 하다> <친구> <선물> <하루> 다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홍콩 누아르의 비장미가 한국대중을 설레게 한 적이 있는데, 그 시대가 지나간 뒤에도 한국 대중문화 속에는 죽음에 대한 키치적 수용이 오랫동안 살아남고, 90년대 후반부터 재연되고 있다. 이게 궁극적으로 왜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에서 죽음이 남용되는 것은 내러티브의 빈곤화와 결부돼 있다.”
이어 이효인 평론가는 “깡패영화에서 주인공의 죽음은 관습이지만, 그렇지 않은 영화에서 죽음이 되풀이되는 이유가 무얼까”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필자 역시 그 문제가 궁금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생각을 가다듬고 있는데 나의 이러한 의문점을 어느 정도 풀어줌과 동시에 또 다른 문제점을 제기하도록 자극을 준 평문을 접하게 되었다. 「한국영화의 퇴행징후 5가지」라는 『씨네 21』특집기사 가운데 첫 번째 코드(죽음에의 집착)였다.
영화평론가 홍성남의 글은 정성일이 던진 화두를 뼈대로 삼아서 살을 보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홍성남은 최근 나오는 한국영화들을 눈여겨보면 “죽음에 거의 강박적으로 집착한다는 하나의 특징적인 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이처럼 죽음에 매달리는 한국영화들을 ‘돌발사(돌발적인 자살) 영화’ 또는 ‘가미카제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하다고 덧붙인다. 그의 글을 좀 더 읽어보자.
“최근 한국영화들을 보면 누군가는 관객의 도덕적 분별력을 굳이 만족케 하려고 어쩔 수 없이 자살하고(<공동경비구역 JSA>), 누군가는 영화 속 다른 주인공을 성장케 하려고 거의 억지로 자살하며(<청춘>), 또 누군가는 사랑의 실패로 인한 애련의 정서를 공유케 하려고 자살한다(<번지점프를 하다>).” (『씨네 21』 294호 3월27일자 참조)
이 문장에 대한 논평에 들어가기 전에 한가지 눈 여겨 볼 것은 본문 중간 중간에 나타나는 중간 제목이다. 죽음을 향해 돌진한다, 가미카제 영화들, 죽음을 강권하는 영화들. 이 대목에서 나는 문득 10여 년 전의 일이 생각났다. 1991년도였다. 이른바 극렬 운동권 학생들의 분신 투쟁이 잇따르면서 정국이 극도의 혼란 양상을 보이자 일부 지도층 인사들이 한마디씩 거들고 나섰다. 그중 선두에 선 사람이 박홍 당시 서강대 총장이었고, 거기에 힘을 실어준 장본인이 다름 아닌 시인 김지하씨 이였다. 그는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선동적인 제목의 글에서 생명을 담보로 하는 운동방식에 질타를 가하여 운동의 열기를 식히는데 역방향에서 일조를 했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홍성남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그냥 그게 생각났다고 하면, 너무 무책임한 문제제기가 될 것이다. 요점은 이렇다. 일단 이러한 논의자체는 미학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하물며 영화는 허구가 아닌가. 왜 주인공을 그렇게 쉽사리 죽이는 쪽으로 몰고 가느냐하는 질문은 왜 주인공을 불륜에 빠지게 그렸느냐하는 질문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문제는 죽이느냐 살리느냐가 아니다. 죽였으되 어떻게 죽였고 살렸으되 어떻게 살렸느냐 다. 그 죽음이 내러티브 상에서 필연적 내지는 당위적 이유를 담보하고 있느냐 하는 거다.
이런 점을 동의한다면, 극중의 인물을 죽이느냐 마느냐하는 것도 감독의 소관사항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 문제로 감독이 비난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드라마의 내적 논리와 상관없이 그냥 영화의 라스트 씬을 폼 나게 마무리하기 위해서 주인공을 무리하게 죽음으로 몰고 가는 안이한 연출방식 탓일 것이다. 이럴 경우 이는 윤리적 이유 때문이 아님은 분명하다. 홍성남도 이점은 인정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적고 있다. “이야기를 주조하는 데 애를 먹을 때, 그러면서도 어쨌든 감동을 주고 싶을 때, 일종의 편법처럼 이용하는 방법이 무엇이 될 것이라는 건 뻔한 이치다. 그건 주인공을 멋지게 죽이는 것이다.” 이를 뒤집으면 이야기를 삼빡하게 주조하면서 편법에 의존하지 않고 설득력 있게 주인공을 죽이는 것은 용납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이야기가 엉성한데도 주인공만 멋지게 죽일 수가 있을까?
어쨌든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실제 작품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정성일과 홍성남은 모두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이병헌을 죽인 것은 무리수였다고 지적한다. 살릴 수도 있었는데 관객의 도덕적 분별력을 만족시키려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내 생각은 다르다. ‘도덕적 분별력’이라는 말이 언뜻 감이 잡히지 않지만 아마 죄책감을 수반한 휴머니티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적보다 먼저 총을 쏜 것도 그렇고 또 다름 아닌 이병헌 자신이 북한 친구를 사망케 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과연 그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했을까? 잠시 괴로워 하다가 다 잊고 속죄하면서 또 다른 생을 영위해야 할까? 그렇게 결말을 처리하려면 처음부터 영화의 플롯을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박찬욱 감독은 연출의 변을 통해 이병헌이 제삼국으로 떠나는 결말처리를 구상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애초에 제기되었던 플롯상의 문제의 남김 없는 해결이 아니라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부적절한 것이었다. 도덕적 분별력은 영화의 플롯에서 무시해도 좋을만한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역설적으로 극중인물의 행위에 필연성과 당위성을 부여해주는 핵심적인 요소인 것이다. 현실에서 누군가가 실연하여 자살을 기도한다면 도시락을 싸 갖고 다니면서라도 말리는 것이 인간의 도리겠지만, 영화에서라면 내버려 두라. 시인 김지하가 한 일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비록 진의가 부도덕한 정권에 의해 왜곡되었을지라도 말이다.
이점을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김유진 감독의 <약속>을 예로 들어보기로 하겠다. 이 영화에서도 비록 플롯 상에서는 아니지만 주인공 박신양이 죽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그도 그럴 것이 조폭의 수괴(首魁)인 데다가 살인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극중에서 박신양은 전도연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수도 있었다. 충직한 부하가 대신 죄를 짊어지겠다고 자청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럴 진데 그냥 두 눈 딱 감고 나몰라라하면서 살아도 되는 것일까? 영화가 그렇게 결말이 났더라면, 주인공이 죽음에의 강박관념을 벗어버렸다고 환영할 사람이 있을까? 도덕적 분별력이 있었기에 박신양은 자수를 결심했고 전도연도 그걸 받아들였다. 그러니 관객들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바로 이런 것이 주인공을 멋지게 죽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죽을 사람은 죽어야 영화가 사는 것이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의 죽음은 어떤가? 굳이 이병헌과 제자를 죽여야만 했을까? 그것도 뉴질랜드까지 가서 말이다. 이 영화는 만약 죽은 자의 환생(還生)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어찌 보면 황당무계한 발상에서 출발한다. 두 연인의 죽음은 따라서 환생을 전제로 한 죽음이다. 환생을 전제로 한 일종의 판타지 영화에다 대고 현실에서의 죽음의 논리와 가치를 들이대고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들이 구명대 없는 번지점프를 감행한 이유는 딱한가지다. 예전처럼 미남 이병헌과 미녀 이은주로 거듭나 다시 사랑하고픈 판타지 때문이다.
중견 평론가 정성일이 화두로 내놓고 신예 평론가 홍성남이 주석을 단 ‘죽음의 영화판’은 다른 평자들에게도 직간접인 영향으로 나타났다. <파이란>이란 영화가 나왔을 때 주인공 최민식(이강재)이 죽는 장면을 목도했던 우리들로서는 “아! 또 죽음이로구나”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다들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므로 여기서는 구체적인 사례만 가지고 논의를 계속 진행시키도록 하겠다. 송해성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FILM 2.0』의 이지훈 기자는 “이강재를 꼭 죽여야만 했나요”하는 뉘앙스로 말문을 열어 나갔다.(21호 참조)
기자 : 가까스로 구원을 얻은 강재를 바로 죽이다니, 세계관이 원래 그렇게 비관적이고 염세적인가?
감독 : 그렇다. 사실 강재가 죽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너무 전형적인 장르영화로 만든 것 아니냐고 비판을 했다. 하지만 나는 강재의 죽음에 내 세계관이 핵심적으로 반영돼 있다고 생각한다. (이하 생략)
여기서 (감독이) 가까스로 구원을 얻은 강재를 죽인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 강재가 구원을 얻었다고 말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아니면 강재를 달리 죽이지 않을 다른 방안이라도 있었는가? 또 다른 중견 영화평론가 이효인은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영화 <파이란>이 ‘바르게 살자’라는 구태의연한 이데올로기를 발산하는 것 같아서 작품에 대한 지지에 유보적이다. 비판적 지지라고나 할까. 이 역시 그의 평문을 직접 읽어보기로 하자.
“나는 지금 이 영화의 비현실성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해피엔딩을 문제삼는 것도 아니다. 강재는 결국 죽는다. 관습적인 방식에 매달리다 보니 더 징그럽거나 멋있는 대중 영화가 되지 못한 것을 문제삼는 것이다. 과연 강재는 파이란 때문에 정신을 차렸어야 했나? 현실이 그렇게 녹록한가? 천만의 말씀, 강재는 파이란의 죽음 때문에 더 비열하고 야비해져야 한다. 바르게 살지 않았어야 영화도 오래 가고 존중도 받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겨레』 2001년 5월17일자)
비현실성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면서도 현실이 그렇게 녹록한가? 하는 질책은 논리적 모순이라기보다는 그만의 독특한 수사학적 표현이라고 해 두자. 나는 이 글을 읽고 또 읽었지만 “결국 강재를 죽여서는 안 되었다”는 의미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비록 삶의 윤리에 바탕한 정성일 평론가의 시각과는 반대되는 입장이긴 하지만 말이다. 파이란의 순정으로 인해 양아치중의 양아치였던 강재는 개과천선(改過遷善)했고, 그 대가로 조직의 쓴맛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영화의 중심 얼개라고 하자. 그렇다면 어떻게 처리했어야 개망나니의 본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될까? 파이란의 죽음에 더 약아져서 보스로부터 돈만 챙기고 경찰에 고발이라도 해버렸어야 했는가. 사실 필자도 속으로 은근히 그러기를 바랬다. 아무튼 그와 같이 했더라면 걸작이 탄생했을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텍스트는 이효인 평론가나 내가 본 게 다다. 역사에 가정이 성립하지 않듯이 이미 완결된 작품을 자신의 입맛대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설령 ‘디렉터스 컷’을 따로 만든다해도 이미 죽은 강재를 되살릴 도리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즉 평론가는 텍스트에서 다루어진 것만을 갖고 문제삼아야 한다. 비록 해석은 자유일지라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해석은 좀 남다른 데가 있다. <파이란>에서 “바르게 살자”라는 교훈을 간파하고 그에 대해 일격을 가하니 말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려던 감독의 의도도 말짱 도루묵이 되는 셈이다. 한마디로 강재는 “서서 죽기보다는 무릎 끊고 살아야 했다”는 논리다.
흔히 하는 농담으로 “굵고 짧게 살기보다는 가늘고 길게 살고싶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언뜻 윤리적 문제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유서 깊은 미학적 문제였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바르게 살자”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굵고 짧게 산다”라는 표현이 지극히 미학적인, 즉 좀 더 정확히는 시학적인 함축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멀리는 <오이디푸스 왕>이 그랬고, 또한 <햄릿>이 그랬다. 그리고 가까이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이병헌이 그랬고, 그리고 문제의 이강재가 그랬다. 내러티브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만약 강재의 죽음이 윤리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미학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바르게 살자”라는 교훈적 해석은 과잉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죽음을 행해 돌진하는 영화는 또 있다. 노효정 감독의 <인디안 썸머>가 바로 그 문제작이다. 나는 이 발제문을 준비하면서 다른 평자들이 쓴 리뷰를 읽을 때마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가 아닌가 여부를 유심히 들여다 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전체 문맥을 놓치고 죽음이라는 글자 자체에만 치중하여 적확한 메타비평을 하는데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가 되지 않을까 저어되기도 한다. 소재주의의 함정에 필자라고 해서 빠지지 말라는 법도 없기 때문이다. 아니 이미 여러 번 빠진 경력이 있음을 고백해야 하겠다. 필자는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를 보고 진짜 나쁜 아이들을 캐스팅 한 것은 윤리적으로 온당치 못하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또 송능한 감독의 <세기말>에서 망치로 사람을 때려죽이는 장면을 보고 도가 지나친 것이 아니냐고 질타를 하기도 했다. 나의 지적의 타당성의 여부와 상관없이 나는 윤리적 잣대로 작품을 재단하려 했던 것이다. 아무튼 영화평론가 이상용의 리뷰를 읽어보기로 하자.
“법정 드라마의 출발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사랑을 위해 열정을 바친 남자의 울부짖음만이 최후에 남는다. 그것을 바라보는 신영은 마치 안락사를 선택하듯 죽음을 향해 돌진한다. 왜 그랬을까.” (『FILM 2.0』2001년 5월1일자 참조)
여기서 필자의 눈길을 끈 대목은 “죽음을 향해 돌진한다”라는 문장이었다. 순간 “옳지 잘 걸렸다”는 생각을 했다. 죽음이라는 ‘미끼’에 그가 걸려 든 셈이다. 하지만 나도 이유는 궁금했다. 왜 그랬을까? 일단 영화의 맥락상 다른 것은 차지하고라도 신영을 죽음으로 몰고 갈만한 내러티브 상의 타당한 논리적 이유가 있는가하고 먼저 물어야 할 것 같다. 살인자니까 마땅히 극형에 처해져야 한다면 그건 윤리적 문제이지 미학적인 문제는 결코 될 수 없겠기 때문이다. 만약 <인디안 썸머>가 그런 정도의 수준에 머물렀다면 ‘죽음’ 운운할 것도 없이 그냥 이효인 평론가가 싫어하는 대로 ‘바르게 살자’는 상투적인 교훈을 주면 그뿐이었다. 권선징악인데 더 이상 무슨 말을 더 하랴.
내가 늘 문제로 삼는 것은 미학적인 차원이다. 이를 위해서는 영화의 플롯상 신영, 즉 이미연이 남편을 살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이상용은 “검사측이 전에 보이지 않는 집중력을 발휘해 재조사를 통해 살해 증거를 찾아냈다”고 적고 있다. 신영의 유죄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신영이가 굳이 죽음을 향해 돌진하지 않아도 법적으로 죽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럴 경우 비장한 결말처리를 위해 무책임하게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비난은 적어도 노효정 감독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다시 논의의 초점으로 돌아가 보자. 신영은 남편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무죄여야 마땅했다. 그럼에도 전반부 법정드라마의 부분에서 신영이가 침묵(묵비권)으로 일관했던 것은 필자 역시 지금으로선 체념(諦念)탓이었다고 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다.
문제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준 준하(박신양)와의 사랑이다. 그래서 후반부는 돌연 멜로드라마로 돌변했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공감할 수 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긴 하지만 신영은 준하와의 사랑에서 삶에 대한 애착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비록 잠시 동안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검사측의 새로운 증거물이 발견되었단다. 하지만 관객들은 알고 있다. 신영이 준하에게 해준 회상형식의 증언을 통해서 남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을. 문제는 그 느닷없는 해방감에 무작정 집밖으로 뛰쳐나온 신영은 미처 뒷마무리를 하지 못했다. 관객도 박신양도 모두 이미연의 말을 믿지만 법정에서 무죄를 입증할 길이 모두 봉쇄돼버린 것이다. 검사가 찾아낸 것은 살해증거가 아닌 단순 정황증거일 따름이었다. 똑똑한 박신양도 그것을 잘 알고 있지만 법정이란 게 어디 그렇게 녹록한 곳인가. 그래서 사랑에 눈먼 박신양은 어떻게든 신영을 살리려고 민간요법(해외도주)을 쓰다가 자신의 지위까지 위태롭게 되었다. 어차피 죽을 작정이었던 신영은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죽음을 향해 돌진해야할 진정한 이유를 찾게 되었다. 사랑하는 님을 위한 죽음의 행진곡이었다.
그렇다해도 어떻게 이런 것이 미학적이란 말인가 하고 의문을 던질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것 역시 윤리적 문제 아닌가. 천만의 말씀이다. 수잔 헤이워드가 열연한 <나는 살고 싶다>란 영화를 기억해 보자. 그녀는 명백히 무죄였다.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 사실이었다. 물론 관객도 당연히 알고. 법정에서 무죄입증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최근에 개봉된 라스 폰 트리에의 <어둠 속의 댄서>도 마찬가지다. 비욕은 정당방위였다. 그럼에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시학』에서 이렇게 말했다. 비극의 주인공이란 자신의 과오 때문이 아니라 어떤 운명적 힘에 의해 행복에서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때 관객에게 연민(憐憫)과 공포(恐怖)를 일으킬 수 있다고. 이것이 윤리적 문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요컨대 이상용이 굳이 “죽음을 향해 돌진한다”는 표현을 쓴 것은 최근 행해지고 있는 담론의 맥락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내가 정말로 문제로 삼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다. 만약 정성일과 홍성남의 주장이 미학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석연치 않게 담아낸 저질의 작품들만을 골라내어 샅샅이 해부하여 비판적인 결딴을 내면 될 터이고, 만약 윤리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내러티브가 부실한 작품은 물론이고 내러티브에 논리적 정합성이 있는 작품일지라도 주요 등장인물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모든 영화들에 대해서 비난의 화살을 돌리면 될 거라는 말이다. 소재 내지는 모티브를 문제삼는 비평적 태도는 미학적 차원과 윤리적 차원 사이에서 부유하기 십상이다. 이때 무게중심이 전자보다는 후자 쪽에 가 있기 때문에 소재주의 비평을 극복할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