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동시성을 허용하는 배우의 알리바이
알리바이의 타당성은 시간과의 싸움을 전제한다. 한 곳에서의 부재를 증명하는 동시에 다른 곳에서의 현존을 내보이는 것. 이는 한 사람이 서로 다른 곳에서의 시간을 공유할 수 없기에 가부를 판단할 수 있는 일이다. 배우에게 알리바이 역시 그런 것이다. 스크린에서 직업인으로서의 부재를 바탕으로 캐릭터의 현존을 가능케 하는 것, 이것이 늘 그들 앞에 놓인 숙명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배우의 알리바이에는 시간의 공존이 허락된다. 배우의 시간은 캐릭터에 영향을 미치고, 캐릭터의 시간은 배우의 시간으로 가능하다. 우리가 한 배우가 ‘어느 정도’의 나이에 ‘어떤 역할’을 하는 것에 호오(好惡)를 표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배우의 시간이 흐를수록 빚어낼 수 있는 캐릭터가 적어진다는 것을 짐작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켜켜이 쌓인 사회적 책임을 짊어지고 있을 누군가의 재현이 배우에게 흘러간 시간만큼이나 무겁고 견고하게 틀지어지기 때문이다. 나이가 그쯤 되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정해지고, 되어야 할 것과 되지 말아야 할 것이 분명해진다. 최근 들어 중년의 남성배우들이 스크린을 지배하면서, 상당수의 남성캐릭터가 아버지화(化)되는 것에서 드러나듯, 배우의 시간은 결코 자비롭지 않게 많은 것을 고립시킨다.
남성배우들이 아버지 역할(유사 아버지의 역할까지를 포함하여)에 상당부분 치우치고 있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적어도 상처받기보다는 극복해야 하고, 겁을 내기보다는 구해내야하며, 상대를 탓하기보다는 자책해야 한다. 아버지에 대한 암묵적 동의들은 상당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나이든 남성과 그 상대들을 고착화시킨다. 그런데 여기, 조금은 다른 위치에서, 버림받은 남성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에 거리낌 없던 역할을 도맡은 배우가 있다. 언뜻 강해보이지만, 찬찬히 생각하면 늘 상처받은 자의 모습을 한, 처연하게나마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에 적화된 배우 설경구가 그이다. 2017년 가장 세련되면서도 절절하게 상처받은 이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꽤 먼 길을 돌아 다시 여기에 섰다.
시대와 공명했던 상처받은 자의 얼굴
사실 돌아왔다고 표현하기에 설경구는 늘 스크린에 얼굴을 비추는 쪽에 속한 배우였다. 그의 얼굴을 가장 확실하게 각인시켰던 <박하사탕>(1999) 이후, 약 30여 편을 상회하는 작품에 등장했으니, 그는 자주, 그리고 많이 관객들 앞에 선 셈이다. 그러나 최근 선호도를 바탕에 둔 ‘믿고 보는 배우’의 명단에서 그는 꽤 멀어진 듯했고, 이 많은 작품에 출연했음에도 아직도 15년이 훌쩍 넘은 예전의 그 작품들, 그러니까 <박하사탕>이나 <공공의 적>(2002), <오아시스>(2002)를 등에 업고 호명되었으니 설경구가 가진 배우로서의 호소력은 거기에 멈춰있는 듯 했다. 그러나 이때 ‘호소력’이라는 단어에 주목한다면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풀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박하사탕 (2000) |
<박하사탕>을 찍을 당시 서른을 넘겼을 이 배우는 비슷한 시기 다른 남성들이 스러져갔던 방식과는 다르게 자신의 상처를 드러낸 배우였다. 자신의 모습을 고집스럽게 지키면서 상처를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던 이들과는 다르게(가령 <편지>(1997), <약속>(1998), <킬리만자로>(2000), <친구>(2001)와 같은 영화 속 남성들) 그는 김영호를 통해 사회가 자신에게 남긴 상처를 온몸으로 까발렸다. 설경구는 강철중(<공공의적>)으로 막무가내로 들이밀어야만 자신의 말을 들어줄 시스템 앞에서 발악했고, 홍종두(<오아이스>)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기에 절절했던 자신만의 이야기를 보여주었다. 이 모습들은 (방식은 다를지언정) 모두 상처받고 버림받은 자들의 눈짓과 몸짓을 요하는 것이었다. 1990년대를 힘겹게 넘어 가까스로 도착한 2000년대 초반, 우리의 상실을 대변해 줄 수 있는 버림받은 자들의 발악을 설경구는 체현해냈다. 그렇기에 그의 상처는 관객들에게 깊게 각인되었고, 동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오아시스 (2002) |
그리고 2000년대 중반을 넘어 상처는 티내지 말아야 할 것이자, 이를 역이용하여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수단으로 영화 속에서 재편되었다. 목숨을 잃을지언정 상처를 드러내는 남성들은 존재할 수 없었고, 매우 지능적인 방식으로 상처는 감추어졌다. 이 사이에서 영웅같은 아버지가 되지도 현란한 칼잡이도 되지 못한 채, 아이의 아픔이 치유되길 기다리며 그 주변을 맴돌거나, 자신이 죽여야 할 이의 어머니 곁에서 밥 한 그릇을 먹고 싶어 하던 설경구의 인물들은 부각될 수 없었다. 물론 여기에는 다소 굳어져 버린 표현방식들, 즉 과하게 힘이 들어간 목소리나 실눈을 뜬 채 입을 벌리고 소리 지르며 울부짖던 그 예상된 감정의 표출이 일조했을지도 모른다. 종종 그는 이해하기 힘든 곳에 자리하고 있기도 했고, 영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은 때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양복과 사투리와 칼이 난무하는 스크린에서 버림받은 남성의 모습은 그렇게 멀어져갔고, 이와 함께 설경구 역시 조금씩 흐릿해졌다.
상처를 깨달은 자의 처절한 사랑
2017년 설경구가 다시 그 모습을 보인 곳은 한시도 음악이 끊이지 않고, 컬러풀한 필터로 장식된 영화 <불한당>에서였다. 발로 뛰는 이들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에 익숙했던 설경구가 잘 차려진 수트에, 적절하게 맞춰진 몸과 깔끔히 정리된 헤어스타일의 한재호로, 그것도 빨간 스포츠카에 선글라스를 끼고 누운 채 처음 등장했을 때, 그 생경함은 처음 보는 배우의 그것과 비슷했다. 속을 알 수 없는 낮은 웃음소리와 날카로움과 애절함이 무수히 교차되던 눈빛 역시 섬세함과는 거리가 먼 듯 보였던, 그러니까 몸을 사용하여 인물과 유사해지는 것에 더욱 익숙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그에 대한 선입견에 물음표를 달았다. <불한당>의 한재호는 눈으로 말했고, 시선으로 장르를 비틀기를 시도하고 있었으며, 그곳에 상처를 담았다.
불한당 (2017) |
보통의 언더커버 느와르와 다르게 <불한당>은 영화 진행의 반이 채 되지 않은 순간 조현수(임시완) 스스로 경찰이라고 고백하는 부분을 배치한다. 바로 이 장면은 한재호로 분(扮)한 설경구에게 ‘형’이라기엔 ‘아저씨’에 더 가까운 이 중년의 남성이 자신이 ‘경찰’이라 고백한 젊은 남성과 동행하는 이유, ‘걱정되’는 ‘꼬마새끼’를 옆에 둔 이유를 설득해야 하는 과제를 던진다. 사실 쉬운 문제이지만 남성 대 남성이라는 대립항으로 가려진 답에 설경구는 늘 현수를 좇는 그의 눈빛을 조절해가며 멜로에 가 닿는 것으로 해답을 내민다. 조폭과 배신과 마약거래와 언더커버 경찰이 등장함에도 <불한당>을 다른 영화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것, 그 중심에 설경구가 재구성해 놓은 한재호의 얼굴이 놓였고, 현수의 말과 행동에 반응하는 예민함이 자리했다. 그리고 조금씩 재호의 얼굴에는 예전에는 미처 상처라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상처로 떠올랐고, 현실에 대한 곤혹스러움까지가 묻어나기 시작한다.
불한당 (2017) |
재호가 멋드러진 수트를 차려입을 수 있게 되는 동안, 자신의 뒤통수를 치고 대들고 마음에 안 드는 이까지 모두 처리하던 삶을 살아야 했고, 자신을 죽이려는 부모의 틈에서 빠져나와야 했고, 20년 넘게 모시던 이가 자신을 제거하려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아야 했다. 이렇게 사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던 재호는 ‘이렇게 사는 거 지겹냐 않냐’고 물었던 현수의 질문에 뒤늦게 ‘지겹다’고 호소할 만큼 현재의 자신에 대해 고통을 느낀다. 또 자신이 여태까지 사람을 처리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던 그 일 때문에 더 이상 현수가 자신의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것 역시 깨달으며 좌절한다. 자신이 살아왔던 모든 것이 상처가 되는 그 순간, 재호는 ‘처음부터’ 죽였어야 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결코 죽이지 못했던 현수의 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죽임을 당하는 그 순간까지 현수의 얼굴에 시선이 가 닿았던 재호의 눈은 결국 상처받은 자의 그것이었다.
불한당 (2017) |
<불한당>의 한재호를 취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은 아무데나 넘쳐나는 브로맨스라는 수식을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규정할 수 있는 배우의 이해였을 것이다. 경찰을 자신의 곁에 두는 것으로 어떤 결말을 불러올지 뻔히 알고 있는 이 조폭의 행동, 그것을 연기해낸 설경구의 행보는 그래서 의미를 지닌다. 중년의 남성 배우가 접근하는 데에 쉽지 않았을 이 감정을 설경구는 때로는 절절함으로, 때로는 거친 몸짓으로 풀어내면서 한재호를 완성시켰다. 허황된 남성성이라는 이름으로 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모토에 따라 움직였던 여타의 영화 속 남성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재호의 궤적은 그렇게 설경구를 통해 흥미로운 캐릭터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사랑에 실패한자의 아픔으로까지 읽힐 수 있게 했다. 설경구의 상처는 이렇게 또 다른 축을 만들며 다시금 갱신을 시도한다.
설경구의 몸에 새겨질 시간과 장소화(化)
2017년 한해에만 벌써 세 번째 영화의 개봉을 앞둔 설경구는 그만큼 부지런히 자신의 몸과 싸움을 했을 테다. 설경구라는 배우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그의 몸의 변화였다. 그는 많은 영화에서 체격에 변화를 주었고, 스크린에서 부피로 존재감을 조절하면서 그 인물이 되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제 설경구는 몸의 횡적변화를 넘어서 시간과의 싸움을 통해 노인의 모습으로 스크린에 도착해 있었다. <살인자의 기억법>에서의 병수는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앓으며 자신이 살인자라 믿는 이에게서 딸을 지키려 사투를 벌인다. 과거 살인자였던 노인의 광기는 경련이 일어난 듯 꿈틀거리는 눈과 쉰 듯한 목소리, 땅을 향해 수그러진 몸으로 벌이는 것이기에 더욱 섬뜩하다.
살인자의 기억법 (2017) |
<살인자의 기억법>은 ‘기억법’에 방점을 찍었던 소설과 거리를 두고 ‘살인자’에 더 초점을 맞춘 채 달려 나간다. 때문에 병수가 자신이 살인자라 믿는 이의 혐의를 따지는 데에 병수의 점층적인 기억의 상실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로서 이 영화에서 부각되는 것은 병수의 분투이며, 아버지의 서사로 환원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 각색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병수의 누나 마리아(길해연)의 존재이다. 병수는 가족들에게 잔인한 폭행을 자행한 아버지이긴 하나 자신이 그를 죽였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늘 병수를 감싸는 마리아의 존재는 병수의 죄책감 그 자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살인자의 기억법 (2017) |
살인자에 대한 다소 감상적인 이 해명(이러한 태도는 태주(김남길)가 살인자가 되는 이유에서도 드러난다)과 누나가 수녀라는 설정은 진부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지만,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한 상처와 그것을 처벌이라 여기며 저질렀던 자신의 행위에 대한 죄책감을 적절히 드러내는 것은 설경구의 몫이었다. 병수는 누나 앞에서 천천히 낮은 음성으로 말하며 스스로의 기억을 더듬었고, 누나에 대한 진실을 안 순간에도 그 기억을 지운 채 누나에 대한 기억을, 즉 죄책감을 남겨둔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누나 나 언제 데려갈 거야’라는 말로 자신의 죄책감을 짊어지고 있던 이 노인의 생은 살인자의 것이면서 버림받은 이의 행로였을 것이다. 이렇게 설경구는 털어낼 수 있는 상처조차 꾹꾹 짊어진 이들을 통해 배우의 모습을 다시 세워나가고 있다. 단순히 존재하는 공간이 아닌, 의미를 채워 넣음으로써 장소가 될 그의 몸은 훨씬 더 다양한 장르에서 녹아날 것이다.
<불한당> 2017. 5.17. 개봉
<살인자의 기억법> 2017.9.6. 개봉예정
사진출처-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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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