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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정동의 현상학, ‘관계맺음’의 형이상학-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론

* 이 글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나 없는 내 인생

“우리는 타자와 함께 존재한다. 모든 관계는 타동사적이다. 나는 대상을 만진다. 나는 타자를 본다. 하지만 나는 타자가 아니다. 나는 완전히 혼자다.” - 임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중

어떤 영화는 철학을 도구 삼지 않는 자에게 그 깊이를 내어주지 않는다.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이하 ‘<우리는>’)는 정확히 그 경우에 해당한다. <우리는>의 카메라는 감각과 직관의 주체가 되어 주인공들의 내면에 흐르는 어떤 정동, 혹은 의식의 지향을 담담히 좇는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삶을 비약시키는 각별한 경험에 귀속되어 간다. 그러나 영화는 그 맥락을 명료하게 언어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초월적이라고 느껴지는 이미지를 삽입시켜가며 명확히 표상되지 않는 ‘감정-반응’의 나고 듦을 추론하게 한다. 문제는 그들 스스로도 자기감정을 제대고 직시하고 있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부 관찰자인 우리는 카메라가 보여준 제한된 시공간 안에서 그들의 정동과 의식의 흐름을 분별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에 대한 영화체험은 필연적으로 ‘관계맺음’의 형이상학으로 수렴된다. 이 표현은 두 주인공이 서로를 향해 포개어지는 과정 이면에 대한 탐색이 중요하단 사실을 일컫는다. 덧붙여 우리가 이미지를 수단으로 하는 철학적 여정에 올라타야 함을 말한다.  

영화는 권태로운 고독의 상태에 침윤된 남녀로부터 시작된다. 살아있음에 대한 자각과 오래 결별한 이들의 표정을 안다면, 그들의 현재를 금방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레비나스의 표현에 따르면 어떤 ‘지향성도 없이’ 그저 존재하는 이들. <우리는>의 두 주인공 엔드레(게자 모르산이 분)와 라츠 마리어(알렉산드라 보르벨리 분)는 정확히 그런 상태에서 자기 삶을 버텨내고 있다. 그들은 책임관계 내에서의 사무적인 만남이 아니면 주변 누구와도 내밀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아니, 그런 소통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안주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감정이 휘발된 이후의 얼굴을 한 그들에겐 혼자인 삶에 오래 익숙한 자들에게서 감지되는 어떤 습관이 있다. 

남자는 여간해선 혼자 사는 자기 집의 불을 켜지 않는다. 그는 무감하게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전원을 끄지 않은 채 소파에서 잠들기 일쑤다. 영화 후반, 그가 내뱉은 대사에 의지하면 그의 이 권태로운 고독은 어떤 의지의 결과다. 한쪽 팔을 쓰지 못하는 육체적 장애때문이라고 단정해선 안 된다. 그도 한때는 주변에 여자가 많았던 남자였다. 그런데 그러한 생활에 회의감을 느끼게 되면서 그는 지난 수년간 “다 끊었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 어떤 상태에 머문다. 그런데 끊어버린 대상은 여자만이 아니어서, 그는 세계와의 관계 설정에 너무 소극적이거나 조심스럽다. 접촉해 오는 타인들과 일정한 거리를 설계하고 그 ‘간격’을 전제로 안정을 취하는 생활에 점착해 온 것이다. 결국 그가 닫아버린 것은, 더불어 의미있는 미래로 나아가려 하는 삶의 방식이다. 그렇게 감정의 행로마저 막힌 무감한 중년, 그가 엔드레다.  

한편 라츠 마리어의 권태로운 고독은 병리적 징후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그녀의 현재 상태는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절망일 수 있다. 영화 속 정보를 모아보면, 그녀는 다 자란 육체 안에 덜 자란 자아를 유폐시킨 존재처럼 보인다. 세계로부터의 고립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이를테면, 그녀는 상대와 나눈 과거의 대화를 비정상적으로 곱씹는다. 엔드레가 그녀에게 처음 다가와 내뱉은 열일곱 번째 문장을 기억하는 식이다. 심지어 그녀는 전염성 수두가 찾아온 첫 날과 떠나간 날을 정확무오하게 기억한다. 그래서 그녀가 집 안 아무 사물이나 붙잡고 낮에 누군가와 나눴던 대화를 역할극처럼 반복할 때, 우린 그녀가 세계와의 관계 형성에 필요한 사회적 언어를 잃어버린 존재란 걸 알게 된다. 영화는 그녀의 청결에 대한 결벽증적 태도도 반복해서 보여준다. 이를테면 그녀는 탁자 위에 떨어진 이물질을 잠시도 놔둘 수 없으며, 누군가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댄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사실상 그런 강박행동들은 그 순간의 불안을 잠시 경감시킬 뿐, 뿌리 깊은 불안으로부터 그녀를 구원할 수 없다. 어쩌면 마리아는 그 예외적으로 권태로운 고독 상태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나보지 못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함께 일하는 곳은 도축장이다. 생명에서 죽음으로 옮겨지는 소들이 있고, 그 비의적인 전환의 찰나를 무감하게 지켜보는 인생들이 있는 곳. 마리어는 거기에서 단지 살덩이로 남겨진 존재에 등급을 매기기 위해 존재한다. 엔드레는 일상화 된 죽음에 무뎌진 직원들을 관리하면서 재무를 담당하고 있다. 그들 생활의 근거지를 도축장으로 설정한 것은, 일디코 엔예디 감독의 철학적 선택이라고 믿는다. 어쩌면 그녀는 엔드레와 마리어를 살과 피로 구성되는 육체만 남은 상태에 가깝게 묘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두 주인공은 감정신호가 잡히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다. ‘영혼’이라고 칭할 만한 어떤 것이 결핍된 얼굴이라고 말해도 크게 엇나간 게 아닐 것이다. 그래서 도축장 안으로 들어가는 소의 얼굴은 그들 자신의 얼굴을 거울처럼 비추는 이미지가 된다. 예견된 미래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곳의 소들은 죽음을 앞두고서도 표정이 없다. 영혼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어떤 ‘텅 빔’이 거기 있는 것이다. 그렇게 죽기 직전의 소는 엔드레와 마리어의 실존과 중첩된다.  

그처럼 <우리는>은 자기 삶을 전유하지 못한 두 인물의 자가 고립적 상황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내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신비한 정동에 그들이 스스로 답해가는 과정을 전시한다. 이 느리고 심오한 여정 속에서 우리는 타자가 하나의 사건으로 틈입하는 경과를 음미하게 된다. 흥미로운 건, 엔예디가 결정적인 장면일수록 언어를 지우거나 최소화하는 연출을 시도한다는 점이다. 삶의 가장 비의적인 것, 라캉이 말한 ‘실재’와 같은 대상은 언어의 집에 가둘 수 없는 순간으로 온다. 이처럼 <우리는>의 의미심장한 쇼트들은 직관에 의해 의식될 뿐, 논리화가 불가능한 ‘그것’, 말하고 나면 거기로부터 미끄러지는 잉여를 남기는 어느 한 지점을 겨냥한다. 

좀 더 살갑게 비유하면, <우리는>은 다른 각도로 유사한 파동을 그려온 엔드레와 마리어의 삶이 인상적으로 맞부딪치는 순간을 향해 육박해가는 영화다. 주지하다시피, 같은 상의 두 파동이 중첩될 때, 때론 파장이 줄어들어 결국 한 선으로 소멸되는 기적적 사태에 이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영화 후반 그들이 나눈 섹스는 다른 양상으로 권태로운 고독을 건너 온 그들이 신비한 합일의 경지에 이른 것을 시각화한다. 어쩌면 그 경지는 (타자에 대한) 자각과 (타자 앞에서 발견되는) 현존을 통해 소멸간섭(destructive interference)의 상태에 들어서는 ‘관계맺음’의 기적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언어도, 열락의 흔적도 없는 섹스이지만, 우리는 그들의 포개어진 몸 어딘가로 고이고 있는 정동을 읽어내게 된다. 결국 <우리는>은 “논리는 수단, 심리는 목적이다”라는 벨라 발라즈 유명한 명제를 ‘서사는 수단, 정동은 목적이다’로 미세하게 비트는 영화다. 이즈음에서 <우리는>의 영문제목이 ‘On Body and Soul’이라는 사실, 곧 매우 거대한 의미망을 가진 두 단어의 단순 나열이란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사실상 <우리는>의 이미지는 꿈의 공유에서 출발해 시선의 접촉, 이해와 오해의 반복, 받아들임에 대한 결단, 만짐, 현실에서 꿈의 재전유로 전환되는 그들을 시각화한다. 철학적 기획에 가까운 이러한 이미지텔링은 독해를 각오한 자들의 직관을 예민하게 다듬는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엔예디가 내준 이 신비한 과제를 영화 속 ‘정동’의 흐름을 좇아 연대기적으로 풀어내 보고자 한다.
 
  
 

홀로서기, 혹은 깨임

오프닝 씬은 눈 내리는 숲속 풍경을 잡아낸다. 그곳의 고요를 깨뜨리는 움직임은 두 마리의 사슴이 만들어낸다. 수사슴이 천천히 앞서가고 암사슴이 조용히 뒤따라간다. 그러다가 문득 암사슴이 발걸음을 멈추자 수사슴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 암사슴을 살포시 쓰다듬는다. 그 순간 암사슴이 잠시 주저한다. 이번엔 수사슴이 암사슴의 등에 자기 얼굴을 깊숙이 포갠다. 그러자 이번에는 암사슴이 원래 가려던 방향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기고 수사슴이 그 뒤를 밟는다. 프레임 밖으로 그들이 사라지자, 스크린 안엔 수직으로 솟은 나무들로 빽빽한 겨울 숲만 남겨진다. 이때 눈으로 덮여가는 적막의 시간이 어떤 언어보다 강렬하게 우리의 감각을 깨우는 게 느껴진다. 영화를 다 보고난 상황에서 말하면, 이 씬은 영화 전체의 맥락에 대한 요약이다. 엔드레(수사슴)와 마리어(암사슴) 사이를 흐르는 정동을 수사적 화법으로 풀어내는 이미지인 셈이다.

그렇다면, 수사슴과 암사슴이 하나의 방향을 획득해가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최초의 마주침’은 어떻게 오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오프닝 타이틀 이후의 몽타주 씬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연속되는 쇼트는 도축장과 그곳 사람들의 면면을 보여준다. 도축장에 들어선 소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햇볕을 쬐는 쇼트가 지나간 후, 도축장 청소부 할머니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쬔다. 엔드레도 사무실 창문을 열고 낮의 햇살을 받아들인다. 그때 마리어는 쇼윈도에 어른거리는 빛살을 돌아본다. 이 일련의 씬 안에는 어떤 징후가 있고, 지향이 있다. 이를테면, 그 씬엔 평범한 일상의 어둠을 밀어내는 신비로운 빛이 ‘무엇’에 대한 흔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곁엔 광원을 향해 자신의 얼굴을 정향한 존재들이 있다. 여기서의 ‘빛’ 이미지를 하나의 상징으로 수용한다면, 의식의 깨임을 지향하는 우리네 삶의 태도를 읽어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매우 과감하게 빛을 다루는 이 영화에서 어둠은 어떤 권태로운 고독의 상태처럼 대비된다. 이때의 고독은 레비나스의 용어로 음미할 때 더욱 선명해진다. 그에 따르면, 존재에 대한 존재자의 지배가 가능하려면 먼저 고독이 있어야 한다. 고독은 타자가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특별한 상태가 아니다. 자기 동일성의 세계 내에 갇혀 지내는 까닭에 존재론적 사건이 부재한 데서 발생하는 평범한 불행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고독을 “시간의 부재”라고 말한다. 존재자에게 어떤 혁명적 전환이 일어나기 이전의 상태, 의식의 암전과 같은 상태가 바로 고독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은 자기 고독의 무게를 깨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나 없는 내 인생’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이 기입된 영화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환은 극적인 제스처없이 천천히 다가온다. 실제로 이 영화는 지극히 정적인 영화다. 카메라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엔드레와 마리어도 도축장의 소처럼 차분한 뉘앙스로 존재한다. 실제로 두 주인공은 어느 얌전한 초식동물처럼 느리게 움직이거나 정물처럼 가만히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때문에 인물의 행위나 대사보다도 투명한 창에 어른거리는 빛과 사물의 그림자, 결정적으로는 무표정한 얼굴을 서성이는 빛살들이 이 영화의 미세한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장면들은 엔예디가 스크린 위로 투사될 수 없는 것을 투사하려고 했음을 역설한다. 그것은 바로 두 인물의 관계 사이를 나고 드는 ‘정동’과 그것의 지향이다. 영화 초반엔 ‘광원의 밝기-인물의 내적 상태’, ‘광원의 위치-피사체의 움직임 간의 관계’를 읽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논리적 독해는 지속적으로 무력화됐다. 다만 두 주인공이 혼자만의 공간에서 ‘눈부신’ 밝음과 ‘침침한’ 어둠 사이를 오가는 동안 그들 육체의 물질성과 영혼의 초월성 사이의 관계가 불가해한 질문으로 왔다. ‘빛살들의 미세한 역동성’이라는 표현은 이 지점에서 더 부연될 필요가 있다. 여러 쇼트에서 두 주인공은 투명한 창문, 냉장고의 투명문 등을 사이에 두고 저편에 존재한다. 미묘한 느낌을 지속적으로 산란하는 투명한 유리 표면은 외부 세계의 환영이 스멀거리는 곳이다. 그들만의 어둠에 유폐되어 온 두 사람은 그 투명창 저편에서 그들 자신에게서조차 불투명했던 삶을 우리에게 들킨다. 이런 쇼트들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투명한 상태로, 의식 가능한 대상으로 나아가길 원하는 그들의 지향을 환기시킨다. 

레비나스는 고독으로부터의 깨침, 자기 상황에 대한 인식을 ‘홀로서기’라는 표현으로 묘사한다. 이는 고독의 극복이라기보다는 자기 직시를 통한 고독의 자가 해명, 어쩌면 고독의 완성이다. 엔드레와 마리어는 전혀 다른 삶의 태도로 살아왔지만, 서로의 존재를 확인해가는 과정에서 ‘홀로서기’의 단계로 나아간다. 그들은 서로를 통과하면서 자신의 현재를 점검할 가능성을 얻는다. 영화 초반부로 돌아가면, 도축장에 신입품질관리원으로 들어온 마리어의 평범하지 않은 모습이 반복적으로 부각된다. 주변의 직원들은 그녀의 부족한 사회성과 행동 특성을 비웃으며 그녀의 ‘차이’를 비정상성으로 분류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엔드레는 처음부터 다른 직원들과는 조금 다른 태도로 그녀를 대한다. 그의 그런 태도가 단지 사무적인 동기였는지, 몸에 밴 최소한의 배려였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중요한 건, 그가 직원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그녀에게 먼저 다가갔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가 그녀와 말을 섞은 첫 날, 엔드레는 그녀의 무례함을 경험한다. 말을 붙이기 위해 직원 식당 메뉴에 관한 이야기를 편하게 풀어내다가 엔드레는 자신이 죽만 먹는 이유를 추측해보라고 말한다. 그때 마리어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쪽 팔이 불구라서 유동식이 먹기 편하겠죠”라고 대답한다. 이 무례함은 사회성의 결여, 곧 자기만의 세계에 유폐된 채 살아온 그녀의 세월을 짐작케 한다. 

이후 엔드레는 마리어가 도축장의 소들에 죄다 B등급만 매긴다는 소식을 듣는다. 직장 내에서 그녀의 ‘비정상성’에 대한 소문은 그런 사실들에 의지해 퍼져간다. 그러나 엔드레는 다시 그녀를 찾아가 대화를 시도한다. 엔드레는 이곳의 소가 꽤 괜찮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때 그녀는 소들의 지방이 평균보다 2, 3밀리 정도 많다고 지적한다. 자기가 정한 규정에 따르면 그 세미한 차이는 B 등급의 이유가 된다는 말도 덧붙인다. 이 에피소드 역시 평균적인 세계에 대한 인식, 타인과의 공존에 대한 입장, 사회와의 융화를 위한 태도가 소거된 그녀의 상태를 적확하게 증언한다. 엔드레는 지금 절대적 외재성의 표지를 가진 기이한 타자에게 접근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엔드레는 다른 직원들처럼 그녀를 비정상적 인물로 주변화하지 않는다. 그는 매번 ‘이상하다’는 판단이 내려진 그녀를 먼저 찾아간다. 도축장의 모든 소에 B등급만 매기는 마리어의 기이한 ‘차이’가 확인된 날 밤, 그들이 꾼 꿈도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각각 수사슴, 암사슴이 되어 눈 내리는 숲속에서 조용히 눈을 맞는다. 그들이 서로를 쳐다보는 것은 아니다. 다만 비슷한 자세로 나란히 앉아 한 방향을 바라본다. 이때 주목해야 할 것은, 사슴이 된 그들의 등 위로 살포시 떨어지는 눈송이들이다. 이 촉각적 이미지는 권태로운 고독에 잠겨 살아온 그들의 삶에 작은 깨침의 계기가 주어질 수 있으리란 암시가 아닐까.

이 씬 이후, 도축장에 입사하기 위해 엔드레 앞에서 면접을 보는 남자가 등장한다. 은근한 자신감을 숨기지 않는 그에게 엔드레가 건넨 말은 조금 이상하다. 여기서 도축하고 가공하는 동물들에게 불쌍한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 것이란 말이 다소간 의외라고 느껴지지 않는가. 그런 판단을 하게 된 건, 그의 무표정한 얼굴과 그 아래를 지나는 감정 사이의 괴리가 감지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이 일상화 된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그가 지향하던 ‘빛’의 한 속성은 ‘연민’이 아니었을까. 동일한 방식으로 그는 마리어의 불편한 ‘차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이렇게 바꿔 물을 수도 있겠다. 자신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한 그녀이지만, 어떤 권태로운 고독 속에 제 영혼을 방치해 온 자신의 흔적을 그녀의 얼굴에서 읽어내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는 마리어를 신입으로 뽑은 인사 담당자와의 통화 도중 “그쪽에서 누굴 보내든 괜찮아요”라고 말한다. 불편한 사람이라는 것과 별개로 그녀를 용인하려는 최소한의 태도가 그 말 속에 있다. 

엔드레가 인사담당자와 전화통화를 한 날 밤, 꿈속 사슴들은 시냇물이 흐르는 겨울 숲에서 함께 물을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시작한다. 현실적으로는, 그들 사이에 의미를 부여할 만한 관계가 형성된 게 아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이미지텔링은 그들의 마주침 안에 어떤 ‘연결’의 계기가 잠재되기 시작했다는 선언과도 같다. 그들이 서로의 닫힌 세계에 유의미한 사건으로 틈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나 없는 내 인생’을 벗어나 권태로운 고독에 함몰되어 온 자기 생을 직관하기 시작한다.
 
  
 

마주서기, 혹은 바라봄

작은 깨침의 계기가 주어진 후, 그들은 마주서서 서로를 바라보는 단계로 나아간다. 이 ‘나아감’을 해명하기 위해 일종의 맥거핀처럼 틈입한 사건의 전후를 살펴야 한다. 영화 초중반, 도축장에서 신중하게 관리되어야 할 교미가루가 누군가에 의해 빼돌려졌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경찰이 도축장 직원들을 전수 조사하기 시작하고 급기야 범인을 잡기 위해 정신과 상담사까지 투입된다. 정신과 상담사는 내담자의 최근 꿈을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이 사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도축장의 관리자 겪인 엔드레도, 신입에 불과한 마리어도 예외없이 내담자가 된다. 

그런데 이 상담 과정에서 엔드레와 마리아는 서로의 시선을 정확히 마주보게 된다. 그들이 매일 같은 꿈을 꾸고 있으며, 꿈속에서 각각 수사슴, 암사슴이 되어 교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상담사는 엔드레와 마리어와의 일대일 상담에서 동일한 꿈 이야기를 듣고 두 사람이 자신을 놀리기 위해 상담 내용을 미리 설계했다고 믿는다. 그도 그럴 것이, 꿈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쉽게 받아들이긴 어렵다. 이 지점에서 우린 교미가루라는 소재, 그리고 그것의 실종이 야기한 소동이 일종의 서사적 트릭에 국한되는 게 아님을 알게 된다. 
 우선적으로, 교미가루란 번식을 목적으로 한 육체적 관계를 상상하게 하는 형이하학적 소재다. 원형적 이미지, 무의식의 심층에서 우리가 연결될 수 있다는 신념이나 영혼의 초월적 교류에 대한 믿음과는 거리가 먼 소재다. 그런데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가장 신비한 형이상학적 섹스를 향해 갈 그들의 행보에 대한 복선이라고.    

상담사 앞에 함께 불려간 엔드레와 마리어가 같은 꿈을 공유 중이란 점을 선명하게 확인받은 장면 이후의 씬은 좀 더 해명을 요한다. 어둑해지는 시간, 마리어가 기차역 플랫폼에 미동도 않고 서 있다. 이번에도 엔드레가 먼저 다가가 그녀에게 말을 건다. “참 희한한 우연이죠?”, “어쨌든 괜히 이런 일로 어색해질 필요 없잖아요. 우린 성인이잖아요?”라며 엔드레가 그들 사이의 어색함을 달랜다. 리버스 앵글 쇼트에서 그녀도 이 상황의 흥미로움에 동의한다. 그때 우리는 마리어가 여자의 몸과 소녀의 자아를 동시에 가진 존재였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되고 엔드레의 ‘다가옴’에 이제야 마음을 열기 시작했음을 추측할 수 있게 된다. 이 씬은 그들의 표정에 같은 성격의 미소가 내비치는 첫 번째 순간이다. 비의적으로 흘러가는 정동이 감정신호로 잡히는 거의 최초의 장면인 것이다. 

다음 쇼트에서 그들은 같은 방향으로 플랫폼에 나란히 선다. 그때 기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온다. 거기서 순간적으로 영상이 커팅되지만, 이후 그들이 그 기차를 타고 동일한 지점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는 추측을 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이로써 두 사람의 배경에서 신비하게 저물어가던 하늘, 곧 신비한 코발트블루 빛깔의 하늘은 ‘우울감’보다도 ‘희망’의 표지로 윤색된다. 그날 밤 그들이 각자의 집에서 꾼 꿈은 이 순간의 내밀한 재현처럼 느껴진다. 작은 연못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오래 건네다 보는 수사슴과 암사슴의 이미지에서 최초의 ‘마주서기’, 혹은 ‘바라봄’을 경험한 두 주인공의 현재가 읽히는 것이다. 

이후 그들은 지난 밤 꿈을 종이에 적어 서로 확인하며 서로의 거리를 좁혀가는 여정에 동승한다. 그렇게 그들이 낮과 밤, 현실과 꿈을 함께 순환하기 시작하자, 우리는 그들 내면을 덥히는 정동의 존재와 그것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상황을 만질 수 있게 된다. 이 ‘끌어당김’을 이해하기 위해 사라 아메드가 쓴 「행복의 대상」의 한 구절을 음미해도 좋을 것이다. 

‘좋은 방식으로’ 정동된다는 것은 무언가를 좋은 것으로 간주하는 정향(orientation)을 포함한다. 정향들은 대상들의 근접성을 기입할 뿐 아니라, 신체에 근접하는 것을 형태 짓는다. 그래서 행복은 현상학적 의미에서 지향적(대상으로 향해 있다)일뿐더러, 또한 정동적(대상과 접촉한다)이라고 기술할 수 있다. 이런 주장들을 취합하면, 행복은 우리가 접촉하게 되는 대상으로 향하는 정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문대로, 그들은 꿈과 현실에서 만남을 반복하는 중, 서로에게 정향된다. 이때부터 우리는 그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화학반응이 특별한 행복으로 귀결될 것이란 기대로 기울게 된다. 대상과의 거리를 전제한 자아의 방어적 망설임이 접촉을 허용하는 적극적 지향으로 전환되는 순간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이 탁월한 영화인 까닭은 그러한 형이상학적 관계맺음의 경과를 설명할 때에도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데 있다. 여기서 <우리는>의 클로즈업 쇼트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마주서기’를 전후해서 엔드레와 마리어에게 파생된 무의식적 정동은 그들 클로즈업 쇼트에서 세밀하게 포착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의 클로즈업은 ‘거기 어떤 감정이 있음’을 증언하는 시선으로 삽입된다. 예를 들어 엔드레가 B등급만 매기는 마리어를 찾아가 대화를 나눌 때, 그의 정서적 긴장을 표면화하는 건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그의 손가락이다. 카메라는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그의 손이 어떤 주저를 드러내는 순간을 당겨 잡는다. 이와 유사한 쇼트들은 매우 많다. 마리어를 앞에 두고 지루함을 느낀 정신 상담사의 내면도 그녀 손가락의 반복적인 움직임으로 감지된다. 캄캄한 밤, 자기만의 공간에 불을 켜고 빨래를 하는 마리어 손의 움직임, 빨래 건조대에 빨래를 넌 후 빨래집게를 가지런히 꽂는 엔드레 손의 움직임 등도 오랜 습관처럼 내려앉은 그들의 외로움과 적막감을 단번에 표출한다.  
 
여기서 ‘마주서기’의 과정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는 것도 언급해야 한다. 꿈을 공유하다가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기 시작한 어느 날, 마리어는 동료와 점심을 먹고 있는 엔드레에게 다가가 “나는 당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한다. 그가 그녀에게 품은 오해를 씻어내기 위한 의도였지만, 그런 류의 고백을 전하기엔 굉장히 어색한 타이밍이었다. 그래서 그 고백 이후 그와 그녀는 좁히기 벅찬 ‘차이’를 서로에게서 느낀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사랑을 향해 가는 과정 배면에서 무엇인가 어긋나 왔고, 그 틈새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그날 밤, 그들은 각자의 집에서 잠들지 못한다. 그때 그들의 내면을 지나치는 정동도 클로즈업으로 포착된다. 부연하면, 세미한 빛이 어른거리는 천정의 전구, 가스불 위에서 조용히 달궈지는 주전자, 오븐 안에서 일정한 속도로 회전하는 컵이 몽타주되는 사이사이에, 그 사물들과 은유적 관계라 생각되는 그들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그런데 이 클로즈업의 최종적인 목적이 그들의 얼굴, 그 자체가 아닐 수 있다는 판단에 힘이 실린다. 완연한 어둠을 묻힌 그들의 얼굴 위로 창틈을 넘어온 빛. 곧 언어화될 수 없는 움직임으로 약동하는 빛이 자기 존재를 웅변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이미지야말로 그들 내면을 간섭하고 있는 정동의 시각적 수사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벨라 발라즈의 다음과 같은 통찰은 수정이 불필요하다. “클로즈업은 종종 외양의 표면 밑에서 실제로 진행되는 것에 대한 극적 폭로가 되기도 한다.”

‘마주서기’, 혹은 ‘바라봄’의 단계에서 그들은 한동안 더 나아가지 못한다. 둘 중 누군가의 결단이 필요한 그 무렵 엔드레의 집에서 그들이 함께 잠을 자기로 한다. 같은 공간에 나란히 누워 그들이 공유해 온 꿈속으로 함께 진입하려는 요량이었다. 그러나 커튼을 지나 쏟아져 들어오는 심야의 불빛에 그들은 다시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카드놀이를 시작한다. 그녀는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완벽한 기억력을 고백하고 편집증적 강박에 억눌린 생활을 숨기지 않는다. 그때 카메라는 그녀가 조심스럽게, 혹은 부끄럽게 자기 두 손을 부비는 것을 클로즈업한다. 클로즈업이 “제스처의 성질”까지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던 벨라 발라즈의 다른 설명도 그 장면에서 긍정된다. 여기서 글의 흐름을 다소 벗어나더라도 엔예디 영화의 형식적 성격을 좀 더 풀어내보고자 한다.

사실 정동을 담아내는 클로즈업에 관해서는 왕가위의 영화들이, 특히 <화양연화>가 가장 멀리까지 나아갔다고 믿는다. 허공을 떠다니는 긴장까지 태우던 담배연기, 머뭇거림을 대신하던 커피잔, 무료하게 흘러가는 인생을 감각시키던 벽시계, 당장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의 존재를 귀띔하던 전화 수화기, 택시 뒷좌석에서 더 유의미한 접촉을 기다리던 손목 등 <화양연화>의 어떤 클로즈업 쇼트에선 사물과 신체의 일부가 스스로의 감정선을 보여주지 않던가. 그런 쇼트 사이로 초 모완(양조위 분)의 얼굴 옆모습과 수 리첸(장만옥 분)의 목선이 클로즈업 될 때, 우리는 이 영화의 정동을 기적적으로 대면하게 된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 하나. 엔예디가 <우리는>에 대한 인터뷰를 하던 중 <화양연화>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그 인터뷰를 접하고서야 빛과 음영을 예민하게 다루며 건조한 피사체에 어떤 감정의 형식을 부여하던 <우리는>의 카메라를 이해하게 됐다. 예컨대 침대 아래, 쇼파 아래에 위치한 카메라가 인물의 발목과 벗겨진 신발을 바라볼 때 고이는 느낌은, 당장은 정적지만, 곧이어 어떤 역동성을 내보인다. 

다시 <우리는>에 대한 애초의 논지로 되돌아가 ‘마주서기’와 ‘바라봄’의 단계에 대한 판단을 요약적으로 마무리하기로 한다. 이 단계에 이르러 영화는 좀 더 언어를 닫고, 그들 내면에 점증하는 정동의 크기와 방향을 확인시킨다. 그러나 그들 관계의 여정은 그 다음 단계의 존재를 분명히 암시한다. 이는 잠재태와 현실태 사이에서, 정동과 의식 사이에서 방황하는 두 사람을  더 선명하게 이어주고 싶은 우리 열망의 지향에 부응한다.    
 
  
 

에로스, 혹은 만짐

그들은 서로의 내밀한 영역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중에 오해와 이해 사이를 숨 가쁘게 오간다. 이를테면 엔드레는 마리어에 대한 감정이 조금씩 커져가던 중 도축장에 새로 입사한 산도르란 젊은 사내를 의식하게 된다. 그때 엔드레는 마리어의 휴대폰 번호를 묻는다. 이 요청 앞에서 마리어는 휴대폰이 없다고 말한다. 엔드레는 곧바로 부담주려 했던 건 아니었다고 호감을 섞어 건넨 자기 언어를 거둬들인다. “나 그런 사람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거절감에서 솟은 상처가 매만져진다. 그런데 그녀는 정말로 휴대폰이 없어 개인 연락처가 없는 사람, 그러니까 세계와의 소통없이도 그녀 스스로 괜찮았던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 다음 꿈속 씬은 엔예디가 선보이는 심미적 연출의 한 극점을 확인시킨다. 연못을 들여다보는 암사슴이 있고, 겨울바람에 쓸리는 연못이 있다. 바람이 일으킨 엷은 파문을 이기지 못하는 연못의 표면에서 암사슴의 얼굴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더니 그를 둘러싼 겨울 숲, 곧 그들만의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때 암사슴이 고개를 든다. 그런데 연못 저편에서 자신의 시선을 되돌려주던 수사슴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다행스럽게도 이후 두 사람은 그 사소한 오해를 조용히 극복한다. 그러나 다른 오해가 이해의 자리를 밀어내 버린다. 엔드레의 집에서 함께 잠들고자 했던 그들은 불면의 밤을 맞이하게 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카드놀이를 하던 중 마리어는 엔드레에게 자신의 문제적 상태와 그에 대한 속내를 투명하게 보여준다. 엔드레 역시 타인을 향한 감정을 거둬들여 온 지난날을 그녀에게 털어놓는다. 그런 어떤 순간에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팔을 잡으려 한다. 그런데 그 순간 엔드레의 대사(“당신을 믿어요”)가 무색해질 만큼 그녀는 정색하며 그 사소한 스킨십을 강하게 거절한다. 그는 다시 그녀를 오해하기 시작한다. 엔드레는 타인과의 스킨십을 극도로 꺼리는 그녀의 결벽증을, 어떤 깊이를 가진 ‘차이’를 아직 모르는 상태다. 

그때부터 그녀는 오로지 그를 위해 자신의 현격한 ‘차이’를 소거하기 위한 열정에 투신한다. 감자오믈렛을 쥐어보는 그녀의 손, 잔디밭에서 포옹과 키스를 나누는 연인을 지켜보는 그녀의 눈, 평소 듣지 않던 음악을 연습하는 그녀의 귀는 마리어의 내면을 옥죄는 날선 결별의 공포를 짐작케 한다. 마리어의 그 공포는 꿈속에서 겨울 숲을 내달려 달아나는 수사슴의 이미지로 전환되기도 한다. 중요한 건, 그녀가 엔드레에게 안긴 오해의 근원적인 이유를 극복하려는 연습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검은 맹수 인형을 침대로 가져와 자기 몸 곳곳을 인형의 앞발로 비벼보기까지 한다. 그러나 엔드레가 없는 자리에서 행해진 마리어의 이러한 노력은 기대했던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그는 “좋은 친구”로 남자며 그녀와의 간격을 좀 더 벌리려 한다. 그렇게 엔드레는 의미없이 TV 채널을 돌려보다 잠드는 혼자만의 세계로 되돌아가려 한다.  

그러나 엔드레에 의해 자기 세계 바깥으로 처음 나온 그녀는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한다. 어쩌면 그녀의 반복적인 강박행동은 프로이트가 말한 ‘포르트-다(fort-da)’ 놀이와 같은 성격이었는지도 모른다. 자기가 세운 규칙, 안전하다고 믿는 상상적 세계로부터 분리되지 않기 위한 혼자만의 상징화 게임이었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이제 거울단계를 지났다는 점이고, 욕망하는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결핍을 채워줄 것으로 믿어진 대상을 향한 직진과 그 대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후진, 그리고 양자 사이의 반복뿐이다. 비극적이게도 마리어는 너무 극단적인 후진을 택하고, 그 방식을 자살로 정한다. 그녀가 자기 욕실에서 손목을 그은 후 도착한 이미지는 건조한 시선의 카메라가 스케치하던 도축장 씬의 몇몇 장면들을 연상시킨다.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가기 직전의 그녀 얼굴, 욕실 바닥에 흥건하게 고여 가는 피 등은 그렇게 슬픈 기시감과 함께 온다.

그런데 <우리는>은 너무 늦지 않은 순간에 틈입한 전화벨소리를 통해 반전의 계기를 전한다. 그녀를 비정상성으로 치부했던 주변인들로부터 그녀 죽음에 어떤 ‘등급’이 매겨지기 전, 그녀는 자신을 향한 그의 뜨거운 언어를 전화 수화기 너머로 듣게 된다. 그날 밤, 표면적으론 교미라는 말이 연상되는 섹스가 성사된다. 클라이맥스에 등장한 섹스씬이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그들의 표정은 무감각하다. 사랑의 밀어도 없고, 쾌락의 제스처도 없으며, 격렬한 움직임도 없다. 그들이 섹스를 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깨우는 건 평소보다 조금 가빠진 숨소리뿐이다. 

그러나 포개어진 그들의 몸 아래로 흐르는 정동에 주목해 본다면, 이 섹스는 교미라는 말의 가장 대척점에 놓인다. 비유적으로 말하건대, 그들이 섭식한 교미가루가 있다면, 그것은 환대의 윤리일 것이다. 다시 말해, ‘차이’를 ‘차이’로 남겨두고서도 포개어질 수 있다는 믿음이 그 신비한 정동의 뿌리가 된다. 이 섹스는 얼어붙은 겨울 숲을 가로지르며 흐르던 뜻밖의 시냇물과 눈 덮인 산 한가운데에 존재하던 얼지 않은 연못처럼 신비하다. 반투명한 커튼을 투과해 들어온 심야의 미세한 빛, 그러니까 영화가 진행되는 중 이들의 영혼을 정향시켰던 그 빛도 그들의 포개어진 몸과 그들의 얼굴을 신비롭게 매만진다. 이때 우리는 엔예디가 이미지로 빚어낸 정동의 현상학, ‘관계맺음’의 형이상학이 방점에 다가가는 풍경을 보게 된다. 

이 섹스 씬의 절경은 섹스가 다 끝난 직후에 온다고 단언할 수 있다. 먼저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이 섹스가 왼쪽 팔을 쓸 수 없는 사람들 간의 소통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엔드레의 왼손은 장애를 입어 가늘어졌고, 마리어의 왼손은 자살의 흔적을 안은 채 붕대에 감겨 있다. 그런데 그들이 포개어지자, 엔드레의 불편한 왼손 아래에 마리어의 평범한 오른손이 위치하게 된다. 엔드레의 왼손이 마리어의 오른손을 도울 수 있고 마리어의 왼손이 엔드레의 오른손을 보호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섹스가 끝난 후 마리어는 자신의 오른손을 뻗어 침대 밖으로 힘없이 늘어진 엔드레의 왼손을 조용히 끌어올려 준다. 그러니까 마리어는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숨길 원했던 타자의 손을 돕는다. 만약 이 야윈 엔드레의 왼손을 권태로운 고독 속에 유폐되어 온 엔드레의 삶 전체에 대한 제유로 본다면, 이 장면은 의미론적 기적의 순간이 된다. 그러니까 이 ‘만짐’의 클로즈업 쇼트는 첫 만남에서 무례한 언어로 그에게 상처를 입혔던 기억, 그러고도 엔드레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몰랐던 과거에 대한 마리어의 진심어린 입장이 아닐까.

레비나스는 “사랑이 감동스러운 것은 넘어설 수 없는 이원성이 존재자들 사이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지금 엔드레와 마리어는 서로를 소유하는 게임을 하는 게 아니다. 두 사람의 섹스엔 ‘소유’와 ‘지배’, ‘장악’의 제스처가 없다. “타인의 타자성”과의 신비한 관계맺음, 혹은 그의 타자성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받아들이려는 열망과 그 안에 깃든 환대의 윤리만이 있을 뿐이다. 요약하면 그들의 낯선 섹스는, 자살을 위해 손목을 그은 여자와 한쪽 팔을 오래도록 쓸 수 없었던 남자가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서로의 정동을 섞는 행위로 이해된다. 철학적 의미로 촉각되는 ‘만짐’을 통해 서로의 실존을 위무하는 초월적 자기실현의 사건이라 해도 좋겠다. 그래서 레비나스의 통찰에 기대어 그들의 섹스를 이해하면, 접촉에서 접촉 이상의 차원으로 넘어가려는 순간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만짐(애무)’을 “거머쥘 수 없는 것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말한 이유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의 형이상학

알랭 바디우는 욕구 충족으로서 만족을 행복과 구분하여 ‘유사 행복’이라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섹스를 통해 언어가 배제된 환대의 경지에 다다른 엔드레와 마리어가 얻은 ‘그것’은 무엇인가. “욕구의 만족 너머에 있는” 거기는 어디인가. 바디우는 “주체가 될 능력이 있다고 밝혀진 한 개별자에게 행복은 주체의 도래”라고 말한다. “행복은 내재적 예외로서 나타나는 주체의 정동”이며 “개별적 욕구와 달리, 어떤 공유된 차원을 이야기할 수 있는 가치”라고도 말한다. 나는 그들이 섹스를 통해 그 순간에 이르렀다고 믿는다. 생쥐스트의 식견을 인용하며 바디우가 상정한 ‘정동’과 ‘행복’의 관계도 그 순간에 명료하게 이해된다. 행복이란 변화를 받아들여 지금 우리가 무감각하게 젖어있는 삶의 정향(아마도 ‘고독’의 상태)과는 다른 삶이 가능함을 확신할 때 마주하게 되는 정동인 것이다. 그리하여 엔드레와 마리어는 <우리는>의 종결부에 이르러 사슴이면서 인간이고, 빛이면서 어둠이고, 무엇보다 ‘차이’이면서 ‘같음’이 된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의 삶을 환대함으로써 자기 삶을 전유하는 데 성공하고, 꿈의 현실에의 틈입을 허용하며 다른 미래를 지향하는 데 성공한다. 이제 그들은 서로에게, 또 그들 세계에서 유일한 존재가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의 마지막 쇼트는 “완전한 행복은 무한에 대한 유한한 향유”라던 바디우의 선언을 이미지로 완성한다. 바로 그 앞 씬에서 그들은 첫 섹스 이후의 아침을 함께 맞는다. 그들은 여느 연인처럼, 혹은 부부처럼 간소하게 차려진 식탁 앞에서 얼굴을 마주한다. 약간의 사족처럼 삽입된 감도 없지 않지만, 이 씬은 존재의 명분을 가진다. 주목할 부분은, 그녀의 결벽증적 행동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그의 조심스러운 표정이 완전히 달라진 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그 아침은 지극히 현실적인 풍경으로 도착한다. 변화가 느껴지는 게 있다면 그들의 서로를 향한 표정이다. 다른 삶의 가능성 앞에 선 두 사람만의 ‘행복’이 그들의 표정 위에 기입되어 있다. 그러다가 그들은 지난 밤 같은 침대에서 잤음에도 어떤 꿈도 꾸지 않았음을 자각한다. 

바로 그 때 <우리는>의 영화적 뉘앙스를 차별화했던 겨울 숲 이미지를 다시 대면하게 된다. 지금 나는 <우리는>의 마지막 쇼트, 최종 도착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다. 흥미로운 건, 그 프레임 안에 사슴들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부재’는 그들의 ‘떠나고 없음’을 시각적으로 증언한다. 그들의 영혼이 지난 밤 포개어진 정동이 가리키는 길로, 환대를 통해 정향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 것이다. 서사적 논리를 덧보태면, 이제 꿈속에서 사슴이 되지 않더라도 그들은 서로를 환대함으로 인해 열린 어떤 세계를 획득한 것이다. 바로 그 순간 화면이 강한 빛에 물들어가며 환해진다. 추위를 수직으로 분할하는 빽빽한 나무들과 눈 덮인 둔덕, 반쯤 얼어붙은 시냇물의 윤곽이 그렇게 지워진다. 불편한 주저와 불완전한 결단, 성급한 오해와 왜곡된 이해 사이를 묘사하던 시각적 수사들, 안정적으로 기의에 가닿지 못하고 미끄러지던 초현실적 기표들도 그렇게 불필요해진다. 여기까지 왔다면, 당신도 이데아가 신의 사고이지만, 사랑은 이데아에 선재한다고 말한 막스 뮐러의 형이상학적 사랑론을 다시 읽고 싶어질지 모르겠다. 

<우리는>은 투자자를 찾지 못해 엔예디가 18년 만에 만든 작품이다. 최근 헝가리 영화를 떠올릴 때, 세계적 거장으로 인정받는 벨라 타르와 그의 조감독 출신인 라즐로 네메스 정도만을 기억하는 내게 이 정보는 지극한 슬픔이다. 심지어 그녀의 새로운 영화들을 마주할 물리적 시간조차 많지 않아 보인다(그녀는 이미 벨라 타르와 동갑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이 ‘2017년의 발견’ 정도로 언급되며 추억의 자리로 물러가는 게 너무 아쉽다. 이 영화를 당신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나는 평론가가 지켜야 할 냉정한 입장을 약간 벗어난 게 맞다. 바라건대, 정서(emotion)라는 용어를 초과해 저 너머에 머물고자 하는 나의 이 ‘정동’이 전해졌길 기대한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 안숭범

영화평론가. 한신대학교 인문콘텐츠학부 교수, 시인.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문화콘텐츠 기획 및 인문학적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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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곡숙

등록일2018-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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