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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섭] <코코> ― 멕시코 문화에 대한 따뜻한 오마주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코코 Coco>(2017)는 멕시코 문화에 대한 오마주로 가득 차 있다. 2013년에 시작해서 매우 오랜 기간을 준비한 이 작품이 멕시코의 모렐리아 국제 영화제(Morelia International Film Festival)에서 첫 상영됐다는 사실은 멕시코와의 생래적인 친연성을 가늠하게 한다. 

스페인에 정복당하기 이전의 멕시코는 아스테카 제국과 마야 제국이 공존하던 곳이었다. 찬란한 문명을 구가하던 이 지역 원주민들의 삶은 정복자들에 의해 능멸되며 문화의 토대가 되는 세 가지를 강요당했다. 종교와 언어, 혈통이 그것이다. 유럽 가톨릭의 보루였던 스페인을 통해, 가족의 연대와 화합을 중시하는 전통은 그렇게 멕시코에 뿌리내리게 된다. 

  
 
<코코>는 가족이데올로기의 테두리를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살아 있는 이들의 세계에서나 죽은 자들의 세상에서나 모두 인물들은 가족 단위로 움직인다. 전체 스토리의 중심에 가족이 있고, 그들의 연대는 견고하다. 엑토르(Héctor)가 가족에게서 추방되어 잊힘이라는 형벌을 받는 것은 음악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족을 배신했기 때문이었다. 리베라 가문의 사람들이 음악을 멀리하게 된 것도 그것이 가족을 저버릴 정도로 강력한 배반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가족은 음악보다 소중할 뿐 아니라, 다른 그 무엇과도 비교불가능하다. 또 그 안에는 사랑을 기반으로 한 무한 능력이 잠재돼 있다. 그래서 음악(기타)으로 인한 미겔(Miguel)-미구엘이 아니다-의 저주를 풀 수 있는 것은 가족의 축복뿐이다. 

그들에게 가족은 대체 불가능한 절대 가치이기에 가족의 화합과 영속을 위협하는 모든 요소들은 경계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남은 이들은 신발 끈을 묶듯 결속을 다짐하기 위해 신발 사업을 시작한다. 그것도 가내수공업으로. 마지막에 가족을 떠나 죽은 자가 된 엑토르는 맨발이지만, 후에 가족을 되찾은 그가 끈 달린 구두를 신고 있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유의미하다. 

  
 
영화가 시작되고 픽사의 룩소 주니어가 관객을 바라보며 ‘이제 당신들 차례야.’라는 메시지를 주면, 우리는 본격적인 영화의 세계에 들어간다. 맨 처음 보이는 것은 셈파수칠(cempasúchil)이라는 꽃잎들이 만든 작은 길. 금송화 또는 금장화로 번역되는 이 낯선 꽃은 관객의 시선을 사자(死者)를 추모하는 제단으로 안내한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간 제단의 연기는 중국의 전지 공예와 유사한 멕시코의 전통공예인 ‘파펠 피카도(papel picado)’로 연결된다. 파펠 피카도에 ‘코코’라는 제목이 비춰지면, 미겔의 내레이션이 시작된다. 그리고 프리퀄 같은 가족의 전사(前史)가 시작된다. 

전체적인 시간 배경은 멕시코의 ‘죽은 자들의 날(el día de los muertos)’. 우리의 제사처럼, 자손들이 죽은 조상들을 초대하여 기념하는 이 날은 멕시코를 대표하는 전통 축제이다. 사자(死者)들은 후손들이 마련해 놓은 제단에 와서 음식을 먹는데, 이들을 제단으로 인도하는 것도, 그 제단을 장식하는 것도 바로 죽은 자의 꽃인 셈파수칠이다. 여러 축제에 사용되는 파펠 피카도 역시 ‘죽은 자들의 날’의 대표적인 장식물. 멕시코 관객이나 미국의 히스패닉들은 영화의 처음부터 세심하게 준비된 멕시코 문화의 성찬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미국적인 기업 중 하나인 픽사의 애니메이션 앞에 경계를 풀게 된다. 

  
 
음악이 금지된 집에서 나와 음악으로 가득 찬 거리를 지나 광장으로 나가는 미겔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그 짧은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화적 요소들을 전시한다. 영혼들을 인도하는 영혼의 동물인 알레브리헤(alebrije)들과 해골 모양의 장식들, 파펠 피카도, 그리고 거리에서 마주치는 마리아치(mariachi: 거리의 악사들) 등이 그것이다.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관객들은 이 짧은 동선을 통해 보여지는 문화적 요소들에 편안함을 느낀다. 더욱이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스의 동상이 서 있는 중심 광장은 멕시코 음악을 상징하는 마리아치 광장이고, 마을 이름은 음악인들의 후원자로 알려진 성녀 체칠리아의 스페인 버전인 산타 세실리아(Santa Cecilia)이다. 

‘죽은 자들의 날’ 역시 고대 아스테카 여신에게 바쳐진 축제였다. 죽은 자들과 살아 있는 자들이 만나는 이 전통 축제에 셈파수칠로 연결된 금빛 다리가 놓여진다. 그리고 주인공 미겔은 두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된다. 그리고 그에게 그런 역할을 부여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가족이 경계하는 음악(기타)이다. 그는 죽은 자의 물건을 훔쳤기 때문이 아니라, 가족의 근간을 뒤흔들 잠재력이 있는 기타에 접근했기 때문에 저주 받았을 것이다. 그가 훔친 기타는 본디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스의 것이 아니라, 엑토르의 것이기 때문이다. 엑토르는 음악, 혹은 그 기타 때문에 가족을 저버렸었다. 

엑토르가 결국 가족으로부터 용서 받는 것은 그가 가족에게로 돌아오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가족보다 음악을 사랑함으로써 잊혔지만, 이후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그래서 사후에는 가족을 희생시킨 음악을 오히려 저버리며 참회의 길을 걸어왔다. 그 결과, 그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선악의 세계에서 궁극적으로 선에 속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스가 권선징악의 대상이 된 것은, 생전(生前)에도 사후(死後)에도 가족보다 음악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죽어서도 자신의 삶과 그 속에서 이루어진 결정들을 후회하지 않았고, 친구를 독살한 것도 뉘우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가족도 없는 사람이었다. 

  
 
다른 한편, 엑토르가 기억되는 건, 그가 코코(가족)를 기억하며 그녀에게 ‘기억’을 노래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가장 아메리카 원주민의 모습에 가까운 코코는 아버지를 기억함으로써 그를 구원한다. 코코(Coco)라는 이름이 ‘도움’이나 ‘구제’를 의미하는 소코로(Socorro)의 애칭임을 간과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할에 부합되는 이름이다. 

<코코>는 멕시코 또는 라틴아메리카의 가부장적 전통과 거리를 두는 작품이기도 하다. 무책임한 가장(家長)이 가족을 버리고 떠난 후, 집안을 이끌어 가는 것은 여자의 몫이다. 그래서 제단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것도 가문(가족)을 지켜온 여인들의 사진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라틴아메리카의 전통적인 마초(macho)처럼 가족 구성원들에 군림하지 않고, 그들을 돌보아왔다. 그리고 그 전통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멜다(Imelda)와 코코(Coco), 엘레나(Elena)로 계승되는 리베라 가문의 여성중심주의는 멕시코 페미니즘의 아이콘인 프리다 칼로(Frida Kahlo)를 문화의 상징적인 존재로 등극시킨다. 

그녀의 남편인 멕시코 국민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를 등장시키지 않고, 그의 성(姓)만을 주인공 가문에 사용한 것은 의도적인 것이리라. <코코>에 가장 많이 등장하고 부각되는 멕시코 문화의 상징은 프리다 칼로이기 때문이다. 스크린에서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어트리뷰트(atribute)인 원숭이와 해골을 통해 존재를 증명한다. 그리고 또 다른 그녀의 마스코트인 쏠로(Xolo) 종 개는 단테라는 이름으로 주인공 미겔의 알레브리헤가 되어 그를 영혼의 세계로 인도한다. 털이 없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쏠로 견(犬)은 멕시코를 원산지로 하는 것으로 가장 멕시코적인 동물 중 하나이다. (이 개의 이름을 단테라고 지은 것은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지옥(죽은 자들의 세계)으로 갔던 단테의 『신곡』에 대한 오마주일 것이다.) 

마마 이멜다의 알레브리헤인 페피타 역시 멕시코를 상징하는 독수리의 날개를 한 재규어이다.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두 동물들을 조합해 환상의 반열에 들어 올린 것이다. 멕시코 국기에 그려진 독수리가 하늘을 날아, 위기에 처한 주인공 소년을 구하고 내러티브를 해피엔딩으로 이끌어 가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이 영화가 특별히 겨냥하고 있는 소구 대상에게는 대단히 긍정적으로 기능했을 것이다. 

  
 
모든 성우들에 유명 라티노를 기용한 <코코>에는 이 밖에도 더 많은 멕시코 문화 코드들이 잠재돼 있다. 장면 장면에 포진돼 있는 멕시코 출신의 유명 레슬러와 배우, 가수 등은 이들을 ‘기억’하는 이들만이 볼 수 있는 비밀 코드들이다. 그러나 이들을 볼 수 없는 타문화권의 관객들도 음악과 애니메이션이 주는 훌륭한 시청각성으로 인해 이 작품에 낮은 평점을 주기는 어렵다. 다만, 멕시코와의 국경 장벽을 운운하며, 이민자들을 ‘위대한 미국’ 재건을 위협하는 잠재적 범죄자들로 보는 미국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이 영화가 지니고 있는 멕시코 문화-더 나아가서는 라틴아메리카 문화-에 대한 존중은 그 상업적 의도를 초월해 훈훈하다. 그래서 과연 영화가 정치보다 낫다는 생각은 확신으로 굳어진다. 



* 사진 출처: 네이버 - 영화 - 코코 - 포토

글: 정동섭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연구자. 현 전북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서울대 교류교수,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 초빙교수, 전북대 인문학연구소장 역임. 『돈 후안: 치명적인 유혹의 대명사』, 『20세기 스페인 시의 이해』등의 저서와 『바람의 그림자』, 『돈 후안 테노리오』, 『스페인 영화사』등의 번역서가 있음.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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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05-08

조회수6,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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