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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 찬란한 응전의 시간들 - 지연(遲延)과 비약(飛躍)을 잇는 배우 윤여정론

1. 

한때, ‘이상한 애’로 불리던 배우가 있었다. 다소 감정적으로 읽힐 수 있는 이 비유가 껄끄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의 데뷔작 속 작은 몸의 광기를 떠올린다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표현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약 50여년이 흐른 지금, 현재까지 연기와 함께하고 있는 이 배우의 이름 앞에는 ‘파격’이나 ‘일탈’이라는 수식어가 아직도 따라붙었다. 이 표현들이 그가 데뷔하던 당시 들었던 ‘이상하다’라는 표현을 어느 정도 수용하는 것이라면 그는 꽤나 오랫동안 보편의 범주를 벗어난 이로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 있다. 이 긴 시간 동안 그가 범주 밖에 놓인 이로 꾸준히 표현되어 왔다는 것, 신기한 일이다.  

물론 이상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배우의 첫 이미지는 그 무엇보다 깊이 각인되는 것이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약 50년을 한 길을 걷고 있는 이에게 붙은 별칭 치고는 도드라지는 것이 사실이다. 1969년 창립한 극단 ‘산울림’의 창립 멤버, ‘전속’ 방송국을 옮긴 ‘탈랜트’, 이민 간다는 소문 때문에 ‘문공부’에 들어가 각서를 써야 했던, 한자로 이름이 병기되는 것이 당연한 때에 신문에 이름을 올리던 배우가, 극단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한국 연극계의 캐논이 되고, 특정 방송국에 소속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었으며, 다른 나라를 향하는 것에 허락이 필요치 않은, 한자를 모르는 것과 신문을 읽는 것이 아무런 상관이 없을 만큼의 시간이 지난 현재까지 그 ‘이상함’을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이 시간을 통과해 온 많은 이들이 ‘거장’이라거나 ‘산증인’, ‘전설’과 단어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가 이 역사를 뒤집어쓰지 않은 채 ‘이상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일 수밖에 없다.

배우 윤여정은 그랬다. 그때가 언제이든 윤여정은 ‘당대’가 원하는 스테레오 타입에 시선을 두지 않았고, 늘 월담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긴 시간 그가 가지고 있는 수식들은 그만의 것이었고, 그 누구도 그를 대체할 이가 없었다. 그가 영화 속에서 서 있던 곳은 혹은 서 있는 모습은 분명 어딘가 현실과 섞여들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이는 그가 자신의 과거를 말할 때 역시 비슷한 길을 걸어온 이들과는 전혀 다른 감각을 내민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가 회상하는 과거의 이야기들은 그땐 그랬던 무용담이라기 보단 지금 보니 합리적이지 않은 시스템으로 내려앉았고, 그 옛날의 필모그래피를 하나하나 훑으며 상대가 감탄할 때에도 잘 모르고 찍었던, 그리고 나도 예쁘고 잘나갔던 그때의 자랑거리로 장난스레 녹아들면 그뿐이었다. 과거를 밀어두며 나가는 힘, 윤여정은 그것으로 자신의 위치를 꼿꼿이 유지하며 이곳에 있다.

2. 

1970년대를 접어들면서 1960년대의 발랄했던 여대생들은 갑작스레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부유한 2층의 양옥집에서 ‘마마’, ‘파파’를 부르며 ‘보이 프렌드’와 함께 대학 캠퍼스를 누비던 이들은 잠시 잠깐의 호황을 누린 후 그렇게 사라져갔다. ‘청춘영화’라는 이름으로 4-5년의 특수(特需)를 누린 이 모습들은 사실 바라마지 않는, 혹은 서구의 어딘가를 지향점으로 삼은 채 일본을 경유했던 특수(特殊)한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일부러 환상으로 돌출시킨 여성들을 제외한다면 1960년대의 스크린 속 여성은 대체로 어머니였고, 여성의 역할은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 것처럼 비춰진 듯 했다. 그리고 1971년 <화녀>에서 시골에서 올라온 명자가 중산층 집의 식모로 들어가면서, 윤여정은 그렇게 스크린에 자신의 얼굴을 내밀었다.
 
  
▲ <화녀>(1971)
 
사실 <화녀>의 명자는 1960년, 유일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독특한 방식으로 중산층의 허구와 허영에의 탐닉을 보여주었던 김기영 감독의 <하녀>의 하녀(이은심)의 연장선에 있는 캐릭터였다. 김기영 감독은 비슷한 시기 밝고 민주적인 가정인 듯 그려졌던 중산층 가정을 내부적 균열을 가진 불완전한 사회로 그려냈고, 이는 1971년 <화녀>에 이르러 더욱 광기어린 모습으로 강화시켰다. 여기에 힘을 보탠 것은 물론 명자 역의 윤여정의 공이었다. 성숙한 듯 보였던 1960년 <하녀>의 하녀와는 다르게 <화녀>에서의 명자는 어딘가 시간을 지연시키면서 광기에 힘을 더했다. 명자는 입술을 깨물거나 머리를 배배꼬며 유아적인 모습으로 그가 1971년이라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새겨 넣고 있었다.

윤여정은 명자로 화(化)하면서 닭이나 쥐를 들고 그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것으로, 혹은 그것들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천진하게 넘기는 모습으로 섬뜩함을 발산해냈다. 한 집안의 가장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이 유아적인 모습은 명자의 과도한 순수함이 중산층이라는 실체를 알 수 없는 계층을 쌓아가는 데에 무엇이 소비되었고, 착취당했는지를 설명해내고 있었다. 깡마른 작은 체구가 거기에 신빙성을 더한 것은 물론이다. 자신이 일하는 주인집 남성에게 강간을 당한 후 명자는 조금씩 느려진 말투로, 부인의 말을 교묘하게 어기면서 곁눈질로 그를 살피는 순간들로 자신의 몸이 꺼져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명자가 부인이 보는 앞에서 주인 남성을 끌고 가며 입술을 깨물며 웃을 때 느껴지는 섬뜩함은 처음 그가 서울에 도착해 고가를 올려다보며 입을 딱 벌렸던 그때의 순수함이 어떻게 짓밟혔는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윤여정은 이렇게 순간 순간 포착되는 얼굴들에 시간적 퇴행을 새겨 넣으면서 한 시대의 급진적인 폭죽 터뜨리기가 무엇을 상실시켰는지를 명징하게 느낄 수 있도록 했다. 
 
  
▲ <충녀>(1972)
 
그의 몸에서 읽어낼 수 있는 시간은 이렇듯 더디게 흐르거나 갑작스레 지나치며 상처를 입히거나 파헤치는 것처럼 보였다. 이후 <충녀>(1971)에서 역시 같은 이름으로 등장한 윤여정은 도무지 넘어설 수 없는 시간으로 인해 고통 받는 이의 모습을 그려낸다. <충녀>는 윤여정으로 인해 그 표면에 흐르고 있는 뒤틀린 젠더적 욕망을 넘어 애초에 물리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세대적 상처를 드러냈고, 이 사이에서 상처받은 젊은 여성의 몰락을 그려낼 수 있었다. 명자는 ‘청춘은 기성세대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라는 것을 알고 있던 여고생이었지만, 그는 첩의 자식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돈을 벌어야만 하는 의무를 떠안는다. 공부를 하지 않던 오빠는 그저 대학을 가겠다고만 우기고, 어머니는 아들이 대학을 가지 않는다면 자살하겠다며 명자를 내몬다. 그저 ‘기성세대’들이 세워놓은 가치관 속에서 명자는 호스티스로 나서고, 명자는 처녀성을 사겠다는 남성이나 발기부전의 남성들을 만난다.

코를 찡긋거리며 자신의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도무지 이 세계를 넘어설 수 없는 명자의 해탈과 맞물려 보인다. 남편의 ‘남성’을 치유하겠다며 집안에 명자를 들인 부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규칙들로 명자를 옭아매며, 명자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은 부모와 어떠한 합일도 이르지 못한다. 그 사이에 놓인 명자의 작은 육체, 끄는 듯하면서도 나른한 목소리는 좁혀지지 않은 시간 사이를 불안하게 부유하는 세대적 절망을 드러낸다. 자신들이 세워놓은 질서에 따라 갓 사회로 나선 명자를 이리저리 채며 사용하는 그들의 잔인함은 명자가 붉은 조명을 받으며 계단 위에 서 있는 가냘픈 자태를 드러낼 때, 쥐와 한 공간에 놓일 때, 아이에 대한 집착으로 표정이 급변할 때 명징하게 포착된다. 윤여정의 몸은 이렇게 1970년대를 들어서며 가시화되기 시작한 계층과 세대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었다. 물론 그 모습은 전에 없는 것들이었다.

3.

윤여정이 비슷한 연배의 배우들과는 전혀 다른 배우의 위치를 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맡았던 가장 많은 역할이 ‘엄마’였다는 것은 그가 표현해 낸 이 무수한 엄마들이 그만큼 돌출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할 테다. 우리가 기대하는 그 먼 허상과 같은 엄마의 모습을 윤여정은 나름의 방식으로 털어내면서 나이가 부여하는 피할 수 없는 배우의 협소함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그가 맡아온 엄마들은 자신의 손으로 범죄자를 죽이거나(<에미>(1985)), 아들과 며느리 앞에서 섹스를 말하는 노년의 어머니였으며(<바람난 가족>(2003)), 그 분께서 자신의 딸을 품어주셨다며 그 대가를 요구했고(<그때 그 사람들>(2005)), 돈과 권력을 앞세워 남성을 탐하는 엄마이기도 했다(<돈의 맛>(2012)). 이 모든 엄마들은 바로 그 시기의 현재가 (아니 앞으로도) 절대 포착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이들이었지만, 윤여정은 그것을 기어이, 그것도 매우 적확한 방식으로 드러내고야 말았다.

  
▲ <에미>(1985)
 
고급 가전제품이 잘 갖추어진 화려한 이층집, 화분에 물을 주고 토스트를 구우며 피워 문 담배, 잘나가는 방송작가, 늘 딸을 학교에 태워다 주며 일상적으로 몰고 다니는 빨간 승용차, 이혼 후 만난 남자친구. 이 모든 것은 영화 <에미>의 홍여사가 가진 것들이었다. 가난한 청년들의 이야기(<바람불어 좋은 날>(1980))로 열린 1980년대가 가난의 재현과 그로 인한 우울, 혹은 오리엔탈리즘을 위시한 토속 에로티시즘을 강조하던 사이에서 <에미>의 윤여정은 홍여사가 가진 모든 것들이 마치 처음부터 주어진 것을 누리는 이처럼 꼿꼿한 자세로 도시에 녹아들어 있었다. 이 사이를 누비며 만들어졌을 차갑고도 이성적인 감각들은 홍여사가 자신의 딸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는 그 순간부터 딸을 찾고 결국 딸을 미치게 한 이들을 찾아 응징하기 까지를 지탱하는 중심축이 된다.

윤여정은 딸의 실종을 인지한 순간에도, 실종 신고를 받고 온 경찰들이 납득할 수 없는 말을 할 때에도 눈물을 흘리거나 감정적으로 호소하지 않는 것으로 홍여사의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혹시 모를 일을 생각하며 집창촌을 찾았을 때조차 홍여사는 눈에 고인 눈물을 흘려보내지 않으며, 만신창이가 된 딸을 찾았을 때에도 눈물보다는 내가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딸을 찾아냈다는 사실을 되뇌고 또 되뇌는 광기를 선택한다. 홍여사는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딸이 집 밖에서 겪었던 일들을 잊고 새로 태어나야 한다며 강요하는데, 이는 늘 딸의 뒤만을 쫓는 그의 눈으로 공포에 가깝게 표현된다. <에미>에서 보여준 윤여정의 엄마는 자식에 대한 절절함을 눈물로 호소하거나 자책하며 차라리 아이를 떠나버리는 어머니들과는 전혀 다른 결을 빚어내고 있었다. 윤여정은 <에미>의 홍여사가 단 한 방울의 눈물도 보이지 않는 이로 표현함으로써 그가 결국 딸을 성폭행 한 이들을 찾아 차례차례 살해하는 것을 감정적인 복수라기보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친 이들에 대한 응징으로 보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 <돈의 맛>(2012)
 
사회적으로 주어진 역할에 마땅히 그러할 것이라 부여되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많고 또 견고하다. <바람난 가족>에서 홍병한이 아들과 며느리 앞에서 섹스 이야기를 꺼냈을 때, 아들(황정민)은 불편하면서도 어이없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며느리(문소리)는 놀라면서도 재밌다는 듯 호기심을 띄우는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윤여정은 누군가는 낯 뜨겁다 감출 일들을 너무도 담담하게, 그리고 굳이 그들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은 채 천정을 바라보며 툭 내뱉는 무심함으로 별것 아닌 일로 만들어버린다. 그의 무심함은 지금 이 나이에 남사스럽다라고 말할 것을 지금 이 나이까지 남 신경 쓸 것 없다는 말로 전환시키면서 엄마의 연애가 눈치 볼 것도 그렇다고 감출 것도 없을 일이라는 점을 설명해낸다. 이는 <돈의 맛>에서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누군가에게 엄마라 불리는 이이지만 그에게 이 호칭은 돈과 권력을 지닌 이가 가질 수 있는 여러 호칭 중 하나일 뿐이다. 오히려 <돈의 맛>에서 윤여정이 드러내는 것은 돈과 권력을 지닌 ‘남’성이 ‘여’성을 범하는 것과 역시 돈과 권력을 지닌 ‘여’성이 ‘남’성을 범하는 것은 차이가 없다는 식의 성(性)으로의 귀결이다. 윤여정은 주저함 없이 뻗어내는 손길과 몸짓으로 이를 충분히 표현해낸다. 별 다른 온도가 담기지 않은 그의 몸짓들은 이렇게 그가 가지고 있었을 역할에 대한 고정성을 지워냈다.

4. 

물론 윤여정은 노선 바깥에 존재하는 인물만을 그려내지는 않았다. 그는 헌신적인 누군가의 아내이거나(<장수상회>(2015)), 도무지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자식들이 복작거리는 좁은 집에서 잘 먹기라고 하라며 쉴 새 없이 고기를 굽는 어머니이기도 했으며(<고령화가족>(2013)), 분노에 찬 조카에게 위안의 방법을 알려주는 수녀이기도 했다(<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모습들이 윤여정의 인물들로 각인되기에는 너무도 흐릿한 인상을 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예상할 수 있는, 그러니까 여타의 인물을 위해 도구처럼 놓인 기능적 인물들은 윤여정만이 드러낼 수 있는 장점을 무화시켜버리면서 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게 한다. 이 흐릿한 시간들을 지나면서 윤여정이 선택한 것은 오히려 자신의 시간을 빠르게 당겨버리는 것이었고, 그것은 전혀 의외가 아니었지만 의외성을 발하는 흥미로운 순간을 만들어낸다. 

  
▲ <계춘할망>(2015)
 
최근 윤여정은 할머니로 불리는 역할들로 자신을 스크린의 중심에 세웠다. 70세를 넘어선 배우가 할머니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예상가능한 일일 테지만 윤여정이었기에 그의 선택은 의외성을 빚어내었다. 그가 그려낼 할머니에 대한 기대, 그것은 윤여정의 연기의 순간들을 주목하게 했고 그의 이미지가 아닌 연기에 대한 세밀한 관찰로 이어지도록 만들었다. 윤여정이 <계춘할망>(2015)에서 그려낸 계춘의 모습은 그가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계춘은 구부정한 몸과 흐트러진 머리로, 기미가 잔뜩 앉은 얼굴로 우리를 맞았다. 제주에서 살며 물질로 고생하며 조금씩 쌓아 만들어갔을 이 계춘의 모습은 전혀 다른 시간을 윤여정 보다 먼저 살았을 이의 것이었다. 

계춘은 어릴 적 잃어버린 자신의 손녀가 집으로 돌아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그에게 모든 정성을 쏟는다. 그가 자신의 친손녀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짐작했으면서도 그는 손녀의 손을 놓지 않는다. 결국 자신이 손녀라 믿었던 이까지 떠났을 때, 계춘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던 모든 희망을 놓은 채 정신까지 놓아버린다. 계춘이 무표정한 시선으로 그물을 끌며 시장을 배회할 때, 언제 정돈했는지 모를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는 머리카락과 아무렇게나 걸친 옷들, 초점 없는 눈길이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계춘이 윤여정이었기 때문이다. 엉망이 되어버린 계춘의 모습은 계춘을 연기하고 있는 윤여정과 모든 것을 잃어버린 계춘을 동시에 지시하고 있었고, 우리는 계춘에게 이입하면서 윤여정의 시간을 새삼스레 경험할 수 있었다.

  
▲ <죽여주는 여자>(2016)
 
이렇게 자신의 나이를 과할만큼 실감하게 만드는 역할을 표현해냈던 윤여정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까지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윤여정이 박카스 할머니로 분(扮)했던 영화 <죽여주는 여자>(2016)는 사실 설정에서 많은 난점이 보이는 영화이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홀로 지내온 노년의 남성들이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혹은 친구의 죽음을 돕기 위해 굳이 노년의 성매매 여성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유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죽음을 이 여인의 손에 맡긴 채 무책임하게 죽어가고 결국 소영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던 일로 누명을 쓴 채 체포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윤여정은 죽음을 바라마지않는 노년에 대한 동질과 공포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죽음 앞에 선 이들에 대한 연민, 죽음을 돕는 이의 공포,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에서의 담담함은 그가 오랜 시간을 보내왔음을 문득 깨닫게 해 준다. 

<그것만이 내 세상>(2017)의 중심은 갑작스레 형제가 되어버린 두 아들의 이야기이지만, 이 영화에서 자신의 삶의 시간과 싸우고 있는 것은 그들의 어머니 인숙이다. 인숙은 자폐증을 앓고 있는 작은 아들과 함께 살면서 어릴 적 본의 아니게 버릴 수밖에 없었던 큰아들을 우연히 만나 집으로 들인다. 죄책감으로 아들을 쉽게 대하지 못하는 인숙의 애잔함은 그가 죽음을 숨긴 채 죽음과 싸워야 하는 순간 극대화 된다. 사실 인숙의 죽음은 두 형제를 더욱 끈끈하게 만들어주기 위한 이야기 장치라 할 수 있을 텐데, 윤여정은 서서히 꺼져가는 인숙의 모습과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들에 대한 애틋함으로 큰 아들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순간들을 쉽게 작위적인 것으로 내려놓지 않게 한다. 차마 큰 아들을 오랫동안 바라보지 못하는 어색함, 자폐증을 앓는 아들만을 쫓다가 큰아들을 의식하며 급히 거두어들이는 눈길 등은 그가 병석에서 죽어가며 아들들을 바라볼 때, 그의 얼굴이 쪼그라들어 있을 때 더욱 많은 감정의 말들을 상기하게 한다.  

5.
  
▲ <여배우들>(2009)
 
리얼리티와 픽션을 오가던 영화 <여배우들>(2009)에서 윤여정은 “(1971년 TV드라마) <장희빈>에서 무슨 역할 하셨어요?”라는 후배의 질문에 장난스레 주먹을 꼭 쥐어 보이며 대답한다. “<장희빈>에 장희빈 했다!” 그리고 그는 이어 말한다. “이제는 <장희빈>에 내가 무슨 무수린가 뭐 그러니까, 몰라도 괜찮아.” 선배 배우에 대한 예우를 지키지 못했다거나, 배우로서 연기의 역사를 알지 못했다는 식의 숙연함은 이 대화에서 필요치 않다. “죄송해요.” 라고 말하는 후배 배우의 말은 웃음과 함께 하고, “모를 수 있지.”라는 대답 역시 리액션을 거부당한 코미디언의 민망함처럼 웃음으로 정리된다. 이 대화를 함께 지켜보던 배우들에게도 역시 긴장은 없다. 여기에 그들이 박장대소 할 수 있는 자유가 있고, 유머러스한 대답을 툭툭 내뱉는 이 ‘노배우’의 어깨를 쥐며, 그에게 기대며, 손을 잡는 일을 어려워하지 않을 여유가 있다. 이는 그가 지나온 그 세월이 아닌 현재를 쥔 배우라는 것을 보여준다. 윤여정은 늘 그 시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새로 정하며 자신의 배우성(性)을 쌓아가고 있다. 늘 기대되는 그의 모든 순간들을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하고 싶다.

<화녀>(1971)
<충녀>(1972)
<에미>(1985)
<바람난 가족>(2003)
<그때 그 사람들>(2005)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
<여배우들>(2009)
<돈의 맛>(2012)
<계춘할망>(2015)
<죽여주는 여자>(2016)
<그것만이 내 세상>(2017)

사진출처: 다음 영화, 네이버 영화

글: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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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05-08

조회수5,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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