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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섭의 시네마 크리티크]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 ― 비루한 세상에 맞선 철학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찌하여 그대는 더 오래 살려 하는가?
그 또한 불행 속에서 지나가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라져 버릴 것을. 
-루크레티우스(Lucretius)- 


1. 외로운 철학

인류 역사의 긴 시간 동안 세상을 호령했던 지혜의 숭고한 왕좌, 철학의 지위는 흔들린 지 이미 오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헤겔과 칸트 등 거대 담론으로 일반인들을 주눅 들게 하던 철학의 거성(巨星)들이 명멸한 후, 여러 철학자는 새로운 철학적 사유를 모색했다. 철학은 이제 기존의 지위와 효과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거대 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에 대해 전혀 새로운 철학적 시선을 보내준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철학이 진리를 탐구하고 그것에 대한 일정한 틀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제 철학은 진리를 확정 짓고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러한 문제들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철학자들은 질문한다.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살아갈 이유가 있는가? 월터 교수(샘 워터스톤)가 마지막 강의 시간에 환기하는 이러한 질문들은 소중하지만, 이 세상은 그런 것들을 공기처럼 무시하고 있다. 가장 극렬한 형태의 문제 제기는 소피(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대사를 통해 전달된다. “사람들이 점점 더 잔인해지는 것 같아요.” 부의 축적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 사람들이 돈과 일에 집착하며 통장 잔고를 축적해 나가는 과정에 혈안이 돼 있는 것을 그녀는 ‘자만’과 ‘어리석음’으로 요약한다. 그리고 그 자기 파멸적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는 뉴욕의 한복판에서 예비 철학자 소피는 견딜 수 없이 외롭다. 대다수 속물들과 맞서고 싸워도 보지만 외로움만 확인할 뿐이다. 그래서 차라리 고독을 피해 그 속물들과 섞이고도 싶어 했다. 그러나 그녀의 타고난 심성과 성품은 그녀의 의지를 좌절시켰다. 그래서 그녀는 “저는 이 세상에 맞지 않아요(I am not for this world).”라고 결론을 내리고, 자신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는 자해를 시작했다. 어쩌면 그녀의 미래는 마약중독자인 조(Joe)의 현재가 될지도 모른다. 

2. 옴니버스라는 파편들 

옴니버스식 구성으로 된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는 많은 인물이 비슷한 비중의 역할로 등장한다. 소피가 이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평범하다. 인물들 모두가 월터 교수를 중심으로 균질적인 무게의 인연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제기하는 문제는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구성한다. “세상은 왜 그리 비열하죠? 왜 그렇게 무심할까요? 왜 그렇게 이기적이죠?” 

  
 
이 영화의 원제목은 <무감각증 Anesthesia>이다. 이 작품은 철학적 문제 제기에 무심한 또는 무감각한 인간 군상들을 파편적으로 묘사해 나간다. 정작 중요한 문제들을 외면한 채, 사소한 일들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래서 하나의 몸통을 이루지 못하고 한 사람 한 사람 떨어져서 외롭게 존재한다. 그리고 옴니버스라는 형식은 이러한 분열과 고립을 훌륭하게 반영한다. 

아버지 월터 교수와는 달리 아들 아담(팀 블레이크 넬슨)의 삶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아내는 난소암에 걸렸다. 고압적인 아내는 아담뿐 아니라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남매까지도 힘들게 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각자의 로맨스와 대마초로 삶을 위로받는다. 

샘(코리 스톨)과 사라(그레첸 몰)의 가정은 파탄 직전. 이들의 불행한 현재는 ‘결혼은 반드시 환멸을 일으킨다.’는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의 명제를 입증해 내고 있다. 남편은 아무런 생각도 계획도 없이 아이들을 낳고 부모가 된 걸 후회하고 있다. 자식 교육에 열정을 쏟아부어 남편과의 거리를 보상받으려는 사라이지만, 맨해튼이든 뉴욕 근교이든 그녀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온갖 음해와 악의로 무장한 적대적 환경이다. 

  
 
친구인 제프리와 조는 비슷한 환경을 가졌던 두 소년의 극단적인 현재를 보여준다. 대형 로펌의 고액 연봉 변호사가 된 제프리는 물질적 풍요로움의 절정에 있다. 흑인인 그는 인종차별의 미국에서 백인 여인의 욕망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승리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조의 현주소는 다양한 전과를 지닌 마약 중독자. 아마도 그는 콜롬비아 대학의 예비 철학도 소피처럼 잔인한 세상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조의 사망 소식을 접한 제프리가 자동차에서 내려 구토를 하는 장면은 그가 상징하는 천박하고 실용적인 성공에 대한 가벼운 디스일까? 

3. 신(神)의 단순성

철학이 부재한 이 비루한 도시에서 월터 교수는 30년 이상 철학을 가르쳐 왔다. 프로이트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생명의 존재는 불안과 고통으로 확인된다. 쇼펜하우어가 주장한 대로, 우리는 결코 지속적인 행복이나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 고통받으며 사느니 살지 않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에로스에게 홀려 헛된 욕망을 갈구하다가 번식까지” 하고 마는 인간들. 인간은 이렇게 후대에 고통을 고스란히 물려준다. 그래서 월터 교수는 쇼펜하우어의 시각을 인용하며 말한다. “사랑하고 번식하는 일이 어찌 보면 사악한 행위라 할 수 있죠. 이렇게 형편없는 세상에 자식을 내맡기잖아요. 이렇게 잔인한 짓이 또 어딨어요?” (그의 말을 들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 그래도 거긴 미국이잖아...) 

  
 
힘겨워하는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혹은 대단히 많다. 그가 마지막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했던 마지막 조언은 “서로 타인이 되지 맙시다. 서로에게 배운 것들을 모른 척하지도 맙시다. 그게 더 중요하죠.”였다. 고통스러운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실존주의적 존재가 생존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식, 또는 유일하게 의미 있는 행동 양식. 그래서 그는 히스패닉 꽃가게 주인에게 다정했다. 소녀들을 돕기 위해 용기를 냈다. 배고픈 흑인에게 먹을 것을 사주었다. 절망에 빠진 여대생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리고 특히, 아내에게 금요일마다 수국(水菊)을 선물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반경에 들어오는 모든 이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능력이 있는 한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아들 아담도 아버지에게 자신의 중요한 문제를 상의한다. 그는 자기가 영위하는 행복한 삶의 비결을 “우유를 꾸준히 마신다거나 아내에게 매주 꽃을 사주면 되겠지. 지금까지 쭉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걸세.”라고 요약한다. 그의 일상은 흔들림 없는 친절과 소소한 행복으로 충만한 것이었다. 

  
 
교양으로 무장한 채 지적인 작가가 될 수도 있었을 조는 겪어야 할 고통을 극복해 내지 못한 사람이었다. 절도와 폭력 전과에 마약중독인 그는 마약과 음식에 대한 본능에 몸부림치다 월터 교수를 만난다. 그에게 음식을 사주는 주인공은 “다음에 또 만나게 되면, 그때도 똑같이 해줄 걸세. 여건만 된다면.”이라고 부드럽고 친절하게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조는 오래전에 읽었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를 기억한다. ‘신의 단순성(Simplicity of the Divine)’이라고 속삭인다. 최고선(最高善)이자 완전성(完全性)인 신은 다른 모습일 수 없다. 불변하고 영원하다. 그래서 단순하다. ‘신의 단순성’은 영화가 가지고 있는 형식의 (복잡한) 파편화에 맞선다. 고통 속에 분절된 인간 군상의 대척점에 있는 월터 교수. 조는 그에게서 신성(神性)을 발견한 것일까? 

4. 양배추를 심고 있을 때 찾아오는 죽음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보다 포용적인 시선으로 보면, 그것은 인간의 탄생과 함께 예고된 것이기도 하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Michel de Montaigne: 1533~1592)는 철학을 하는 것은 죽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월터 교수는 이러한 철학의 과제에 충실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당당하게, 혹은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려고 했던 것처럼 보인다. 영화 초반에 칼에 찔려 기운을 잃어가던 그가 샘의 귀에 속삭였던 말. 관객이 들을 수 없었던 그 몽테뉴의 말은 아내 마샤(글렌 클로즈)에게 전달된다. 

양배추를 심고 있을 때 죽음이 날 찾아오길 바란다. 죽음에 무심한 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을 때 (I want death to find me planting my cabbages, but careless of death, and still more of my unfinished garden). 

죽을 때까지 인생의 의무를 다하고, 운명이 정해놓은 죽음을 두려움 없이, 무심하게 맞이하라는 몽테뉴 철학이 이 한 문장-영어로는 한 문장이다-에 농축돼 있다. 월터 교수는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에게 금요일마다 수국을 선물하는 행위를 통해 관객들은 그가 얼마나 삶을 사랑하는지, 소소한 행복을 소중히 생각하는지를 이해한다. 더욱이 수국의 꽃말은 ‘진심’이다. 아내에게 매 금요일 진심을, 진실한 사랑을 전달하다니... 그는 어쩌면 조의 고백처럼 신(神)의 경지에 오른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런 월터 교수와의 스쳐 가는 인연으로 인해, 진심의 위기를 겪고 있는 샘은 그래서 가정으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몽테뉴의 말을 최후로 남긴 것은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맞서는 지혜를 아내에게 기억시키고자 함이었으리라. 이미 함께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을 아내에게 몽테뉴를 상기시킨 것은 자신의 죽음이 가져올 슬픔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너무 가슴 아파하지 말라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결국 그것은 다시 사랑으로의 회귀였다. 그 누구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월터 교수는 이제 그 따스함으로 아내를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죽음은 조에게도 그에게도 삶이 주는 최대의 ‘호의’일지 모르므로. 
악(惡)으로서의 세상에 동의하며 쇼펜하우어를 존경했던 월터 교수는 세상에 맞서는 철학적 해결에 있어서는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의 ‘군중은 거짓(The Crowd is Untruth)’이라는 명제의 토대 위에 있었다. 도저히 소통이 불가하다는 군중의 불평을 ‘그릇된 믿음’이라 주장하며, 월터 교수는 마지막 강의에서 인간의 상호연대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는 몽테뉴처럼 지혜롭게 죽음을 준비했다.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는 철학에 다가가는 영화이다. 관객들에게 철학의 매력과 효용성을 설득하는 작품이다. 초기 철학자들은 정지된 이미지들을 사용해 움직임을 지각하도록 하는 것은 기만이라며 영화를 비난했다. 그러나 영화는 이렇게 그 철학을 껴안고 있다. 도대체 영화가 할 수 없는 것이란 무엇일까? 


* 사진 출처: 네이버 - 영화 –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 - 포토

글: 정동섭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연구자. 현 전북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돈 후안: 치명적인 유혹의 대명사』, 『20세기 스페인 시의 이해』, 『영화로 보는 라틴아메리카』등의 저서와 『바람의 그림자』, 『돈 후안 테노리오』, 『스페인 영화사』등의 번역서가 있음.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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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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