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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그 ‘섬’에 가고 싶다 ―영화 <비치>(2000)에 관하여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최선의 의도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하나의 지옥, 그의 동포를 위해
준비하는 그런 지옥을 만들 뿐이다.”―카를 포퍼


1. 인트로: 이상향을 향한 인간의 꿈


<트레인스 포팅>(1996)으로 등장한 대니 보일(Danny Boyle) 감독은 <비치>(2000), <28일 후>(2002), <슬럼독 밀리어네어>(2008), <127시간>(2010)등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젊은이들의 감성에 접근하기 쉬운 주제들과 독특한 소재의 작품에 사회성을 가미하여 호평을 받고 있는 감독이다. 이 가운데 <비치>는 영국 작가 알렉스 갈랜드(Alex Garland)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 한 것으로, 사람들이 언제나 꿈꾸고 갈망해 온 파라다이스나 유토피아에 대해 시사점을 제공해 주고 있는 영화다.

 

  
 

인류의 ‘이상향’에 대한 상상은 오랜 역사를 가지는 만큼 널리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다. 각 민족마다 전래되어 내려오는 설화에서 뿐만 아니라, 철학이나 예술 그리고 최근 사회공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을 멈추지 못했다. 그렇게 누구나 꿈꾸지만 아무도 그곳을 이루지 못했고, 인류 ‘역사’에서 한 번도 출현한 적이 없는 사회, 유토피아는 그것이 불가능한 만큼 더욱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어쩌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동경하고 원망(願望)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불가능을 꿈꾸는 것이 인간의 속성 아니던가! 사람들이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상상한다는 것은 현실이 대체로 결여태와 부정태의 모습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이상향에 대한 꿈은 지금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 사람들이 보다 더 나은 ‘삶-의-형태들’을 포기하지 않고 모색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류 역사상 전해지는 대표적인 이상 사회는 크게 네 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가 영국 민중시 「코카인의 나라」에서 이름을 따온 ‘코카인(Cockaygne)’이다. 이곳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소망이 없고 충족되지 않는 욕망이 없다. ‘소망의 나무’가 있어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고, ‘젊음의 샘’이 있어 누구나 늙지 않고 살 수 있다. 땅에는 곡식과 과일이 풍성하고, 곳곳에 젖과 꿀, 포도주가 강물처럼 흘러, 아무도 노동을 할 필요가 없다. 또한 누구나 제한 없이 자유롭게 성을 즐길 수도 있다. 코카인이란 한마디로 무한한 물질적 풍요와 끝없는 쾌락이 어떠한 수고나 노력의 대가 없이도 주어지는 일종의 환락적 이상사회인 것이다. 마약의 일종인 코카인이라는 명칭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두 번째는 ‘아르카디아(Arcadia)’다. 이곳은 지상의 낙원으로서 자연환경은 코카인과 유사하다. 그러나 무절제한 욕망과 쾌락을 추구하는 코카인과 달리 인간의 욕망이 자연적으로 조화롭게 절제되어 있고, 노동을 하긴 하지만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보람과 기쁨으로 여기는 곳이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지만 평안과 안식으로 받아들이는 곳이다.


세 번째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년왕국(Millenium)’이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구성된 곳에서 최후의 심판까지 1000년을 지속되는 이 나라는 신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들이 성인들과 순교자들과 함께 사는 곳이다. 신이 다스릴 이 왕국은 땀과 눈물이 없다는 점에서 코카인이나 아르카디아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나, 기존의 인간 사회와는 전혀 다른 질서와 새로운 인간의 시작이라는 점이 다르다.


마지막으로 ‘유토피아(Utopia)’다. 그리스어에서 ‘U’는 ‘좋은 곳eu’이라는 뜻과 ‘없는 곳ou’이라는 뜻을 동시에 갖는다. 그러므로 유토피아는 ‘좋은 곳’을 뜻하기도 하면서 ‘없는 곳’을 뜻하기도 한다. 이곳은 앞선 다른 사회들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거나 신에 의해 이루어진 것과 달리 인간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이상사회다. 즉 인간의 이성에 의해 각종 사회제도를 개선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이상사회다.(1)


이 가운데 영화 <비치>에는 코카인과 아르카디아 그리고 유토피아에 대한 생각이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 따라서 우리는 낙원(파라다이스)과 유토피아를 생각해 보는 관점에서 영화 <비치>를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는 이상 사회, 또는 낙원을 갈망하는 젊은이의 낭만적인 모험과 사회학적 통찰이 잘 버무려져 있다. 19세기 이전의 서구 유럽에는 유토피아 사회에 관해 저술한 책들(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프랜시스 베이컨의 『신아틀란티스』 등)이 많았다면, 20세기부터는 계몽적 합리성의 폐해에 대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을 표출하는 경향이 강해져 왔다. 이런 맥락에서 <비치>는 유토피아가 왜 불가능한 것인지 보여주면서도, 여전히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의 원초적 소망을 대리 충족시켜 주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고, “그 섬에 가고 싶다”면, 대니 보일의 <비치>는 사람들이 모르는 섬, 몰라야만 가능한 해변,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불가능한 낙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제 이 영화를 따라서 유토피아에 대한 추구와 그 붕괴(혹은 부재)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2. 지구를 ‘여행/관광’하는 기술


영화 <비치>는 주인공 리처드(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리처드는 좀 더 위험한 것을 찾아 태국 ‘방콕’에 온 미국인 관광객이다. 그는 “열여덟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와 호텔 수영장에서 헐리우드 영화나 즐기는” 평범한 여행자는 아니다. 그는 “남들은 아름답고 자극적인 것을 찾아다니는 동안 무언가 좀 더 위험한 것을 찾아다닌다”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독사 피’를 마셔보지 않겠느냐는 호객꾼의 제안에 그는 고개를 가로 저어 보지만 “다른 미국인들처럼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느냐?”는 말에 독사의 피를 마시러 간다. 독사의 피 자체에 호기심이 생겼다기보다는, 수많은 미국 관광객들처럼 여겨지는 게 싫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여느 관광객들처럼 되는 게 싫다는 뜻이다. 리처드는 그 자신도 관광을 와 있으면서도 다른 관광객들을 혐오한다.


호텔에서 스펙터클적 영상이나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리처드는 이렇게 말한다. “관광객들 중에는 한심한 사람들이 많다. 아늑한 호텔에서 고작 TV나 보자고 수천 마일을 날아왔단 말인가, 기껏 저러자고 여행을 왔다는 말인가?” 바닷가에 누워 마사지를 받는 서양인 관광객들을 징그러운 벌레 보듯 하는 리처드, 그는 자신의 출신과 배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위험을 찾아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으로 자신의 여행자적 정체성을 삼는다. 그러나 무언가를 경험하고 그 실체를 파악하여 그것을 내 것, 나의 경험으로 만들려는 관광객의 욕심이 리처드에게는 분명히 도사리고 있다.


그래도 리처드는 다른 관광객들과는 다르다. 비일상적인 것, 위험하지만 낯선 것을 찾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그는 익스트림을 맛보기 위해 혈안이 된 아드레날린 중독자일 뿐인가? 그가 다른 나라에 온 것은 일상과는 다른 그 무엇을 찾기 위해서다. 사실 위험 그 자체가 그의 목표는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리처드는 해변을 찾아내자마자 다시 권태로워졌을 것이며, 금세 그곳을 떠나려 했을 것이다. 위험은 ‘다른 것’을 찾는 과정에서 마주치게 되는 요소일 뿐이다. 바깥, 다른 곳과 ‘너머’를 탐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만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어떤 경계들을 넘보며, 위험과 스릴로 자신을 몰아가게 되는 이유다.


더불어 리처드가 얻고자 한 것은 새로운 구경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 일상적인 것과는 다른 감각과 경험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을 찾고 있다. 그것은 지금 그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다른 세계, 관광객들이 없는, 지금 여기와는 다른 사회 관계망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찾아내고 싶은 갈망이 있다는 것과 같다. 리처드가 원하는 ‘경험’이란 구경의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열망이다. 비록 그 자신이 그 점을 뚜렷이 의식하지는 못하고 있다할지라도 말이다. 사실, 관광으로 그치는 여행도 그러한 열망으로부터 비롯된 실패한 여행일 것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감각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몰라서 관광으로 그것을 대리하게 되고, 근대 시스템과 자본주의는 이러한 욕망을 포획해 관광 상품으로 우리를 쓸어넣기 일쑤다.


낯선 것을 찾는다는 것은, 이국적인 것을 찾는다는 것이고, 위험한 것을 찾는다는 뜻이다. 매력적이자 위험한 것, 따라서 그가 위험을 즐긴다는 것은 이국적인 것(엑조티카)이자 아름다운 것(에로티카)을 찾아다니는 젊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는 모든 여행객들의 바람이 아니던가. 여행지의 환경과 경험이 자신이 떠나온 일상적 환경과 완벽하게 똑같다면 구태여 왜 여행을 떠나겠는가? 그러나 이는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 시대에 진정한 의미의 여행을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행 대신 관광이, 모험 대신 구경이 그 자리를 대체해 버렸고, 우리에게 관광과 구경을 즐기라(사라!)고 강제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시대에 의미 있는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관광이고 어떤 것이 여행인지 구분할 줄 알아야 하리라.


라틴어 모험(adventura)이라는 말은 원래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을 뜻했다고 하지만, 우리 시대에 이르러 모험이라는 말은 통상 누군가가 우리에게 판매할 목적으로 만든 특별한 경험을 뜻하게 되었다. 오늘날 그 어느 시대보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하지만 그들은 여행자가 아니다. 여행수단의 발전으로 여행에 드는 비용이 낮아졌고, 더욱 먼 곳으로의 여행은 수월해졌다. 그러나 요즘 여행의 경험들은 얄팍하고, 인위적이며, 산만하다는 것이 다니엘 부어스틴의 지적이다.


진짜 여행이란 건강과 생명의 위협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으며, 출발했던 곳으로 같은 모습으로는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것이어야 했다. 여행이란 시작되면서부터 여행자의 신체와 사유에 다양한 벡터들을 끌어들이게 마련이고, 따라서 여행이 진행되어 감에 따라 여행자의 시선과 관점은 바뀌게 된다. 따라서 여행을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면 여행은 출발한 상태 그대로 돌아올 수가 없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에게 여행은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으므로 그 여행은 실패한 셈이 된다.(2) 따라서 여행에서 마주치게 되는 우발성과 위험을 겪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관광일 뿐이고 하나의 구경이 되고 만다.


영어 단어인 ‘여행(travel)’은 원래 고통을 뜻하는 트라베일(travail)이었다가 나중에는 여행, 트래블(travel)이 되었다. 본래의 여행이란 뭔가 고통스럽고, 노동이 필요하고 골치 아픈 일을 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와 대비되는 하나의 단어가 생겨났는데, 그것은 관광객(tourist)이란 단어였다. 영어 사전은 관광객이란 단어를 “즐거운 여행을 하는 사람” 혹은 “특히 즐기기 위한 여행을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행자는 일을 하는 사람이고 관광객은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다. 여행자는 모험과 경험을 열정적으로 추구한다. 반면에 관광객은 수동적이고 즐거운 일만 일어나기를 기대하며 구경거리를 보러(sight-seeing) 다닌다. 여행자들은 능동적이었지만 현대 여행자들은 수동적이며 본래의 여행은 과격한 스포츠였지만, 오늘날 여행은 구경하는 스포츠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여행자(traveler)는 감소했고 관광객(tourist)은 증가했다.(3) 그렇다, 우리 시대의 여행이란 진정한 의미의 여행이 아니라 관광, 그것도 관광 상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듯 관광(객)이 되어 버린 여행(자들)에 염증을 느끼는 리처드에게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다.(여행자들에게는 언제나 사건이 일어난다.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다.) 하릴없이 호텔방에 누워 있던 그에게 한 명의 광인이 나타난다. “세상을 더럽히는 돼지들과 기생충들 다 죽어버려라”면서 ‘대피(Daffy)’가 등장하는 것이다. 대피는 옆 방의 창 너머로 리처드에게 대마초를 권하며, ‘그 비치the Beach’가 얼마나 황홀하고 아름다운 곳인지 횡설수설, 인간들이 얼마나 기생충 같은 존재인지, 열정에 가득 차 꿈꾸는 듯한 어조와 과격한 혐오감을 번갈아 표현하며 말한다. 대피가 말하는 ‘그 해변’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섬 안에 있으며, 병풍처럼 암벽으로 둘러싸인 섬의 중앙에 마치 호수처럼 아름답고 아늑한 해변이 펼쳐진 곳이다. 그 해변의 존재는 비밀에 부쳐져 있고, 그래서 사람들은 알지 못하며,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다.

 

  
 

다음날 리처드는 대피가 그려준 그 ‘해변’의 지도를 건네받게 되지만, 대피는 자기 방에서 손목을 긋고 처참하게 자살해 버린 뒤였다. 태국 경찰로부터 간단한 조사를 받고 나온 그는 이제 옆방의 프랑스 관광객 커플인 에티엔(Etienne)과 프랑소아즈(Francoise)에게 그 섬을 찾아가자고 제의한다. 프랑소아즈 커플은 동행을 수락하고 이제 그들은 낙원을 찾아 모험을 함께 하는 일행이 된다. 리처드가 에티엔과 프랑소아즈에게 해변을 찾아가자고 제안하는 동기는 명확치 않다. 지도에 그려진 섬을 찾는 모험을 하고 싶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 복도에서 마주쳤던 프랑소아즈에게 매력을 느꼈고, 어떤 식으로든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암시되고 있다. 섬을 찾아 그들과 동행하는 리처드는 계속해서 프랑소아즈를 훔쳐보며, 그녀를 매력적으로 느낀다.


여러 교통수단을 번갈아 타고 그들은 지도에 그려진 섬 가까이 접근한다. 해변과 가까운 섬에서 하루 묵던 중 옆 방갈로의 ‘새미 일행’이 리처드에게 감추어졌다는 섬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런 곳이 있다면 꼭 찾아가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리처드는 자신들이 그곳을 찾아가는 중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대신 그 다음날 ‘그 해변’의 지도를 한 장 그려 그들의 문틈으로 밀어 넣어 주고는 섬을 찾아 떠난다.


그들 셋은 헤엄을 쳐 어렵사리 그 섬에 도착한다. 그 섬의 밀림 지역을 통과한 후 대마초가 지천으로 널려진 곳을 발견해 환호작약하던 그들은 곧 그 대마초 밭이 자연적인 소산물이 아니라, 태국의 갱들이 기르고 관리하는 구역임을 알게 된다. 가까스로 그들로부터 피한 리처드 일행은 또 다른 장애물인 폭포에 도달해 갈등하지만, 용감하게 혹은 무모하게 뛰어내려 결국 그들이 찾고자 갈망했던 낙원인 ‘그 해변 the Beach’에 도달한다.

 

3. 낙원의 조건들: 금지와 욕망


어렵사리 찾아내 도착한 섬의 ‘해변’은 대피의 말처럼 뛰어난 경치를 갖춘, 낙원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곳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낙원은 멋진 풍광으로만 구성될 수 없다. 생각해 보면, 그런 것이다. 만일 낙원이 진짜 낙원이 될 수 있으려면 풍경과 기후, 자연적 조건 외에도 그곳을 낙원으로 받아들이며 향유해 줄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낙원에는, 혹은 낙원에도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니, 낙원이야말로 사람이 모여 있어야 낙원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그 낙원 같은 섬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리처드처럼 무언가 낯선 것과 새로운 곳을 열망해 그곳을 찾아낸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가 있었던 것이다. 섬 해변의 공동체 사람들은 세계 여러 나라의 사람과 인종들로 구성된 코스모폴리탄, 리버럴한 사람들이었고, 평화적으로 지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특징은 무엇보다 선별된 소수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선별되었다 함은 일반 관광객들과 달리 위험과 모험을 무릅쓰고 그곳에 왔다는 점에서 낙원에 대한 강한 열망을 소유한 사람이거나 낙원을 위해 위험의 문턱도 넘어설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증명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좋은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공통의 기호(嗜好)와 취향이 형성되어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며, 그런 만큼 새로운 스타일의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는 가능성도 높다. 폭포에서 아래로 뛰어내린 그들을 구경하고 있던 ‘키티’가 리처드 일행을 해변의 공동체로 안내한다. 리처드는 에티엔과 프랑소아즈와 함께, 섬의 지도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는 조건으로 해변 공동체의 일원으로 편입된다. 해변 공동체의 리더인 ‘살’(Sal)이 대피가 그려 준 지도를 불태우며 리처드 일행을 승낙하자, 모두들 환영한다. 리처드 일행도 기꺼이 그 해변 공동체의 생활, 낙원에서의 나날에 동참한다.


이곳의 사람들은 빨래하고, 집도 짓고 정원을 가꾸는 노동도 하기는 하지만, 대체로 함께 어울려 여러 가지 놀이를 하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는 것으로 보인다. 식사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물고기를 잡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 즐거운 놀이가 될 수 있는 것이 해변의 특징이다. 그들은 가족처럼 지내고 있으며, 구경하고 떠나 버리는 여행객 집단이 아니라 눌러앉아 자유롭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는 정착민들이다. 자급자족하며 가끔씩 문명 세계로 나가, 길렀던 대마초를 팔아 필요한 물품이나 식량들을 구입해 온다. 모두가 화목하고 나날이 즐거우며 아무런 문제도 없다. 단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리처드는 말한다. “모든 것이 진실로 낙원다웠다. 단 하나만 제외하고……. 욕망은 욕망이라는 것. 태양도 조수의 물살도 식힐 수 없는 게 욕망이다.” 리처드는 프랑소아즈를 목 마른 눈길로 바라보며 그녀를 욕망한다. 그러나 그녀는 에티엔의 여자다. 키티는 프랑소아즈가 프랑스 여자인데다, 에티엔의 여자 친구이므로 해변이나 즐기고 잡념은 그만두라고 충고하지만, 욕망이란 본디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낙원에서도 ‘번뇌’가 있다. 그것은 ‘욕망’ 때문이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해 보자. 리처드는 프랑스와즈를 원하나 금지가 그것을 가로막고 있다. 무언가를 금지하기 때문에 욕망이 생겨나는 것인지, 금지 때문에 욕망하게 되는 것인지는 설명하기 어려운 바, 금지와 욕망은 상황에 따라 그 모습과 자리를 바꾼다. 금지가 욕망을 더 부추기고, 금지된 대상을 더욱 크게 보이게 하는 것도 분명하며, 욕망이 강할수록 더 많은 금지의 표지들과 마주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섬 공동체의 제도가 하나 있음을 알게 된다. 해변 공동체의 커플 제도가 그것인데, 이들이 아무리 대마초를 담배 피우듯 하며 섬 안에서 자유를 구가하고 있더라도, 한 사람과만 연인관계를 맺는다는 섬 밖의 일부일처제 관습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리처드 뿐만 아니라 섬의 리더 ‘살’과 그녀의 남자친구 ‘벅스’와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하지만 공동체의 규약이 이 뿐만은 아니다. 그 어떤 이상적인 공동체도 사회를 이루고 있는 한, 개인의 자유로운 욕망을 제약하는 제도가 있게 마련이다. 사람이 모이면 사회가 되고 사회는 어떤 식으로든 규약성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원시 사회에서도 각 문화권마다 특정한 ‘금지’들이 있었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그 금지들을 법과 제도가 대치한다. 따라서 금지란 곧 법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경험하려면 금지와 법을 위반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것이란, 기존 사회의 틀 안에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법이나 금기를 위반하는 것,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 때 위험은 두 곳에서 찾아온다. 하나는 법 안의 사람들로부터 범법자로 규정되어 처벌될 수 있는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법 밖에 있는 또 다른 이들이 무법적으로 나를 위해하려 들 수 있는 위험성이다. 이들이 해변을 찾아올 때 대마초 재배지에서 맞닥뜨렸던 위험은 후자에 속한다.
대마초를 경작하는 집단은 법의 감시를 피해 불법적으로 대마초를 재배하고 있다. 만일 그들의 대마초 재배 사실이 폭로될 위기에 처한다면, 그들이 법적으로 대응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곧 해변 공동체의 안위가 외부로부터 위협을 받는다는 것이며 이 공동체가 외부와의 관계망 속에서 존립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 공동체의 생명은 비밀”이라는 ‘살’의 말에 따르자면, 비밀이 이 낙원의 기본 존립 요건인데, 섬의 존재가 비밀에 붙여졌다는 것, 외부인들에게 비밀일 때에만 그곳이 존립 가능하므로 그 공동체와 외부의 관계는 ‘비-관계’(관계-아님)가 아니라 ‘무-관계’(관계-없음)라는 관계를 가진다.


더 충격적인 것은, 무엇보다 이러한 사실이 낙원이라는 공동체가 논리적으로 성립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낙원의 조건은 무제한의 자유이므로, 법의 바깥에 존립해야 자유로울 수 있는 공동체가 성립가능한데, 공동체 내부에서 법이 생겨나고, 공동체의 유지에 법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외부 사회와 법의 바깥에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들 낙원을 가장 위협하는 요소가 된다.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은 그곳이 더 이상 낙원일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런 점에서 해변 공동체와 그 섬에서 대마초를 경작하는 집단 사이에는 의외로 공통점이 많다. 둘 다 일반인에게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비밀 공동체라는 점, 그와 더불어 법의 밖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다. 법 바깥에 위치하는 일탈자 무리라는 점에서 둘은 닮았고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당분간 서로 허용하고 묵인하면서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해변 공동체가 법 밖에 있다는 점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 안에서 공동체 내부의 최소 규칙만 노출되어 그렇게 보일 뿐이다. 예를 들어 그들은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이 부상을 당하자, 섬의 위치를 노출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공동체 밖으로 내버린다. 이것이 현실 사회의 어떤 법조항의 위반인가는 중요치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성과 인륜성에 위배되는 짓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법조항을 위반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다. 또 하나는 이들 공동체가 법조항들이나 법의 구속을 피해 서로 돕고 협력하여 살기 좋은 곳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누리려는 사람들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것을 누리기 위해 가장 끔찍한 일을 저질러야만 하는 배리(背理). 따라서 이들의 낙원 공동체는 애초부터 모순 위에 성립되어 있으며, 이미 논리적으로 파탄이 나 있는 데도 그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해변의 날들을 즐거워한다. 이 영화는 역설적이게도 법과 제도가 철저한 곳이 유토피아가 아니라 인간의 휴머니티, 인간성과 도덕성이 상실된 곳은 진정한 의미의 낙원이 될 수 없음을 드러내 주고 만다. 그렇다면 흥미롭다. 인간성을 정의하고, 도덕성을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적 억압의 대표적인 장치들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운아 리처드도 에티엔의 양보로 인해 프랑소아즈와 커플을 이룬다. 산호초로 아름다운 바닷가에 별빛이 내린 밤, 리처드는 프랑소아즈와 환상적인 로맨스를 즐기며, 상어와 싸워 죽이는 데도 성공하여 영웅적인 모험담을 들려 주는 등 리처드에게 황홀한 나날들이 펼쳐진다. “한동안 우리의 행복은 꿈만 같았다.” 한편 해변 공동체의 창립멤버이자 여성리더 ‘살’은 리처드가 프랑소아즈를 바라보는 눈길과 비슷한 눈매로 ‘리처드’에 대해 탐심을 품는다.


그러던 중 밖에서 식량을 구입해 와야만 하게 되자, ‘살’은 리처드를 지명하여 둘은 섬의 외부로 식량을 구하러 나간다. 리처드는 섬의 사람들이 외부에서 구입해 오기를 희망하는 물품들을 받아 적는다. “치약, 칫솔, 아스피린, 진통제, 탐폰, 건전지, 콘돔, 보드카, 초컬릿, 비누, 소고기 카레, 데일리 텔레그라프, 휴지, 자스민 차, 호랑이 기름, 입술기름, 차나무 오일, 표백제, 헤어컨디셔너, 스킨컨디셔너, 단 음식, (대마초를 피우기 위한) 담배말이 종이, 샤프론, 발한 억제제, 클린징 크림, 일회용 카메라 등등. 낙원에서도 문명의 발명품은 필요했던 것일까? 그들의 필요를 외부에서 구입해 온다는 것은 낙원이 독립적으로 유지되지 못하고 외부의 생산 메커니즘에 의존해야만 한다는 뜻이며 따라서 그들 생활의 원시성은 더 큰 즐거움을 위해 문명의 작은 필요를 참고 있었을 뿐이다. 이것은 이 공동체가 섬의 바깥 사회와 완전히 무관할 수 없고, 또 완벽히 고립되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회도 완벽하게 고립될 수 없으며, 고립되었다는 것은 안전하다는 뜻이 아니라 도리어 위험하다는 뜻, 그럴 경우 공동체가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들다는 뜻이다.


에어컨과 차가운 맥주가 그리웠던 리처드는 그러나 도시에 나가자마자 금세 관광지의 무질서와 환락에 환멸을 느끼며 섬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런데 물품을 구입하던 리처드는 ‘살’과 함께 있던 중 해변을 찾아내기 전에 지도를 그려 넘겨 주었던 ‘새미’ 일행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에게 섬의 위치를 알려주었다는 것을 ‘살’에게 들키고 만다. 그러나 ‘살’은 섬의 존재를 노출시켰다는 사실을 묵인해 주는 댓가로 리처드와 성관계를 맺자고 거래를 제안한다. 하루바삐 섬으로 돌아가고 싶던 리처드에게는 달리 거부할 수 없는 제의였고, 둘은 그렇게 하룻밤을 지내고 섬으로 돌아온다. 리처드는 “그것은 거래였다. 섹스의 댓가로 ‘살’은 누구한테도 지도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살의 연애관이 엿보이는 바, 섬에 있는 ‘벅스’는 자신의 남자친구이며 파트너이고, 리처드와는 섹스만 한 사이일 뿐이라고 둘의 관계를 정의한다. 사랑의 감정과 성관계의 철저한 분리. 그들이 섬에서 향락을 누리는 사람이라는 걸 생각해 볼 때 납득이 가지 않는 성과 사랑의 분리주의는 아니다. 살은 리처드에게 “잠을 자둬, 아침에 또 할지도 모르니까”라며 돌아눕는다. 이런 식이라면, 상대를 나의 즐거움을 위해 이용하고, 상대의 기분이나 인격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말이다. 섬의 리더인 여자의 도덕성이 이러한데 이 섬의 공동체십이 제대로 작동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법 외부의 공동체 안에서 또 출현하는 법의 위반. 적어도 이 섬의 기초는 그 구성원의 인격이나 도덕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섬 공동체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이 섬의 공동체가 기초하고 있는 몇 가지 초석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첫째는 외부인들에게 그 공동체가 비밀에 부쳐져 있다는 것이다. 비밀유지라고 하는 규칙, 외부로부터 그곳을 보호하는 것은 물론, 비밀을 공유했다는 사실이 그들을 하나의 동아리로 결속해주는 역할을 한다. 익히 알다시피 비밀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는 강한 결속력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밀성은 낙원의 구성 요건적 관점에서 아이러니다. 낙원에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바로 그 사람들로부터 숨겨져 있어야 하며, 사람이 오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금지되어 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그곳을 유지하기 위해 외부인의 침입을 막는 것, 그를 위해 섬의 존재를 비밀로 유지하려는 것은 결국 타자를 배제하는 일이다. 자신들만의 고유성을 배타성을 통해 유지하려는 셈인데, 배타성은 이미 낙원의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이기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자도 내다 버리는 것이다. 환자를 내다 버리는 이 잔혹함. 그것은 낙원의 유지를 위한 냉혹함이며 그런 곳은 더 이상 낙원일 수 없다. 그러므로 이들이 은밀히 누리는 것은 자기들의 특권, 비밀장소를 누린다는 특권의식이다. 다른 이들과 스스로를 구별하고 분리시켜 특권층이 되(려)는 심리와 한 치도 다를 바 없다.


이들은 인간들과 사회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신들만의 낙원에 머무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며, 생존에 대한 욕구와 필요(wants and needs)에 목말라 있고, 남녀 간에 뒤엉킨 욕망들, 항상 자연적 위험으로부터 노출되어 있으며, 외부인들로부터 발각될 위험, 새로운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와 비밀유지가 폭로될 위험, 옆 마약재배 집단과의 문제 등 언제나 긴장 속에 놓여 있다. 이런 공동체가 낙원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비밀로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휴양지일 뿐이며 언젠가 탄로나 일반인에게 주목받게 될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감춰진 관광지일 뿐이다. 미국의 사회운동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Helena Norberg-Hodge) 여사의 『오래된 미래』가 출판되자 티베트의 ‘라다크’ 마을이 (순례지의 외관을 띤) 또 다른 관광지가 되어 버렸듯이 말이다.(4)

 

4. 벌거벗은 생명: 주권자와 전체주의


이미 보았듯, 이들의 해변은 소수의 무리가 스스로를 눈 속여 만들어낸 또 다른 휴양지였을 뿐, 진정한 낙원은 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그 사실을 그들 모두에게 드러내주기 위해 하나의 작은 사건이 일어난다. 물고기 사냥을 하던 스웨덴인 일행 중 두 사람이 상어에 다리를 물려 심하게 다친다. 심한 부상을 입은 ‘스텐’이 곧바로 죽어버리자, 그들은 스텐을 매장해 주고 애도하며, 잠시 동안 우울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곧바로 놀이와 쾌락으로 돌아간다. 아무도 그의 죽음을 진정으로 애도하는 이는 없는 것 같다. 부상을 당한 나머지 한 사람 ‘크리스토’는 고통에 울부짖는다. 그러나 치료가 쉽지 않다. 그를 외부로 데리고 나가려 하니 섬의 정체가 비밀에 부쳐지기 어렵고, 의사를 데리고 오려 해도 섬의 위치가 탄로 나게 된다. 크리스토는 그들 숙소에서 고통에 울부짖으며 방치되는데, 고통을 바라보기 싫어하는 그들은 결국 크리스토를 숙소와 해변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숲속에 내다 버린다. 죽음, 고통, 죽어가는 사람을 보는 사람들의 공포, 그리고 추방. 그것은 인간 실존의 비의지적인 것들로부터 도망치려는 비겁한 행동이다. 살아 있으며 상처로 고통받아 울부짖는 인간 생명체를 공동체 밖으로 추방하는 것과 살인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이로써 이들 공동체의 속성이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그들은 상호 존중하는 평화로운 공동체 구성원들 같았지만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하고 자신들의 쾌락을 누리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서슴지 않고 실행하는 것이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을 누리기 위해 멀리 남의 나라까지 와 비밀의 섬에서 시간을 보내며 즐기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장기간의 관광객일 뿐, 그 어떤 새로운 공동체 구성원도 아님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숲속으로 버림받은 크리스토의 곁을 지키는 건 에티엔 혼자일 뿐, 아무도 그의 안위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그를 바깥으로 내다 버리고, 그를 잊고, 놀이와 쾌락으로 돌아가 비치 발리볼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악몽을 잊을 수 없는 리처드는 다시금 대피의 자살에 관한 꿈을 꾼다.


그러던 중 리처드가 그려준 지도를 가지고 그 섬으로 들어오려는 새미 일행들이 섬에서 관측된다. 사람들이 자꾸 들어오게 되면 섬 안의 대마초 경작 갱들이 이 섬의 공동체를 허락하면서 내세웠던 “더 이상의 사람은 안 된다”는 조건을 어기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이들 공동체의 안위는 스스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더 강력한 힘을 지닌 다른 공동체의 암묵적 용인에 의해 겨우 유지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로 인해 리처드는 ‘살’로부터 공동체에서 추방된다. 섬을 찾아서 바다를 건너오려는 그들을 감시하고 그들이 도착하면 지도를 압수하라는 임무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은 지도자에 의한 임의적 추방이다. 추방이라기보다는 ‘내다 버림’이다. 이 공동체에서는 끝없이 ‘벌거벗은 생명들’이 발생한다. 부상당해 버림받은 크리스토, 섬의 비밀유지 규칙을 준수하지 못해 공동체 밖으로 밀려난 ‘리처드’ 등등. 벌거벗은 생명들, 배제된 상태로 포함되어 있는 존재들, 포함되어 있지만 모두가 잠재적으로 배제된 존재들.


이제 리처드는 공동체의 무리로부터 떨어져 혼자서 야외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그것을 ‘언덕 위의 생활’이라고 부른다. 설상가상 ‘살’과의 동침을 알게 된 프랑소아즈마저 그를 찾아와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며 절교를 선언한다. ‘살’이 리처드와의 성관계를 폭로하고, 공동체 구성원으로부터 그를 고립시킨 것이다. 이제 혼자가 된 리처드는 대마초 경작 갱들의 뒤를 밟으며 혼자만의 게임을 즐긴다. 마치 컴퓨터 게임처럼 홀로 상상의 놀이로 그들을 뒤쫓는 게임. 여기서 리처드가 몰두해 오던 또 하나의 세계가 드러난다. 새로운 경험을 원하던 리처드가 게임보이였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 게임이야말로 현실과는 다른 가상의 현실감을 제공해 주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영화에 대마초와 게임보이가 병치되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마초와 게임은 둘 다 강력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곳의 현실감을 없애주고 특정의 다른 세계로 몰입하게 해주는 기제들이다.


그는 외따로 떨어진 이 상황을 게임으로 파악하고 급기야 이 모든 상황과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며 그 모든 고리에는 ‘대피’라는 한 사람이 도사리고 있다고 파악한다. 리처드는 피칠로 가득한 대피의 호텔방에서 대피와 함께 섬으로 건너오려는 관광객들을 향해 기관총을 무차별 난사하는 망상을 한다. 리처드의 상상 속에서 대피와 리처드는 또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 이들 둘이 짝패인 이유는 그 해변이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것, 그 유토피아의 허구성과 불가능성을 안 사람이라는 것 때문이다. 즉 유토피아의 불가능성을 공유하는 상상 속의 공동체인 셈이다. 리처드는 추방되고 나서야 비로소 대피의 광증과 절망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낙원 구성의 가장 중요한 조건인 사람들이 기실은 기생충이자, 암이며, 돼지 같은 족속일 뿐임을 알게 된 ‘대피’는 사람들을 혐오하고, 욕하며 끝내 자기 자신을 삭제해 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단지 섬으로부터 추방된 대피에 대한 뒤늦은 공감이 아니라 대피가 알았던 그것, 이 섬과 해변 사람들의 실체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토록 혐오했던 관광객 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가 바이러스이자 암이고 돼지 같은 족속이라는 것, 섬 사람들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으며, 아니 그들보다 더욱 선별된 이기주의적 집단의 구성원일 뿐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은 섬의 외부인(관광객, 다리를 다친 크리스토, 그리고 공동체 바깥의 리처드)들에 대해서는 매우 차갑고 냉혹한 사람들일 뿐이었다. 결국 대피가 리처드에게 알려준 진실이란 그토록 혐오하던 그들이 바로 너라는 것, 다름 아닌 내가 그 관광객 무리의 일원이자 지구 공동체에 암처럼 기생하는 존재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리처드는 갱들의 뒤를 쫓아다니며 그들이 잠든 틈을 타 소총을 탈취하여 그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어 보기도 하며, 그들의 머리수건을 풀어내 자기 머리에 두르는 등, 대피처럼 서서히 광인이 되어 간다. 자신을 혐오하는 것이자, 자기 꿈의 환멸과 조우하는 시간, 유토피아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논리적 딜레마에 갇혀 버린 채 미쳐가는 것. 한편, 뗏목을 만들어 섬에 도착한 새미 일행은 대마초 밭을 발견해 춤추며 환호성을 지르다가 그만 갱들에게 발각되어 그들 네 명 모두 무참히 죽고 만다. 이제 섬은 낙원이 아니라 순식간에 학살과 무법의 천지로 돌변한다. 이제 섬의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해변 공동체의 6주년을 기념하는 날 밤,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 그들 무리는 무질서한 모습으로 환락에 탐닉하는 관광지의 관광객들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들 공동체에게로 갱들이 총을 쏘아대며 찾아온다. 섬을 떠나라며 위협하는 갱들에게 ‘살’은 이곳이 우리의 안식처이자 집이기 때문에 못 떠난다고 맞선다. ‘살’이 리처드가 지도를 복사해 퍼뜨렸음을 모두에게 폭로하자 갱의 두목은 권총에 한 발의 탄알을 채운 뒤, 리처드를 처형하라고 ‘살’에게 권총을 건네준다. ‘살’은 공동체의 몰락 위기 앞에서 리처드에게 총을 겨누고는 끝내 방아쇠를 당긴다. 그러나 그 총은 비어 있는 총이었다. 리처드는 총구 앞에서 기괴한 폭소를 터뜨리고, ‘살’은 당황한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떨며 숙소를 떠나 버린다. 그 아름답던 해변 공동체는 이로써 산산이 흩어져 버리게 되었다. 살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낙원은 붕괴한다. 아니, 이미 붕괴했던 공동체의 구조가 드러난다. 더 나아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낙원의 환상이 찢겨져 나간다. 그 순간 그곳은 지옥이다. 외관과 허울 속에서 아름답던 유토피아의 추악한 실체가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순간.


리처드는 총에 맞지도 않았는데, ‘살’이 그를 쏜 것만으로도 공동체는 왜 몰락하는가? 공동체 유지를 위해서라면 그들 중 누구라도 바로 그처럼 일시에 제거당할 수 있다는 것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들 공동체는 그들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공동체 유지를 위한 구성요소였을 뿐임을 알게 된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모임이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전체를 위해 개인들이 존재하게 되는 상황, 그것의 이름을 역사는 ‘전체주의’라고 부른다. 해변 공동체라는 형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누구라도 처형될 수 있다는 것. 그 어떤 사회보다 자유롭고 평화로워 보였던 그들 사회의 본질은, 기실 그 어떤 사회보다 끔찍했던 전체주의 사회였다. 그곳이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였고, 낙원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 사회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은 더욱 끔찍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끔찍한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 역시 이런 원리 위에 존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공동체가 몰락한 것은 갱들 때문이 아니다. 이들 공동체가 매우 자기기만적인 착각 상태였을 뿐임을, 그들이 팔자 좋은 관광객에 불과했음을 알려주었을 뿐이다. 그들은 빈 총으로 그들 공동체가 얼마나 허약한 조건 위에서 자신들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는가를 보여준 것뿐이다. 여기서 기묘한 역전이 발생한다. 대마초를 키워 팔아 가족들에게 돈을 보낸다는 갱 우두머리의 일장 설교에서 낙원의 구성원들과 갱들의 자리가 바뀌기 때문이다. 갱들은 열심히 일을 하는 노동자이고 가장의 모습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이들은 전체주의 사회의 구성원들이자 그 사회의 본질을 통찰하지 못한 채 가상 낙원에서 자기기만적 쾌락에만 열중하던 “돼지이자 암적인 존재들”이었을 뿐이다. 이는 리처드가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려고 하는 ‘살’에게 퍼붓는 대사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이것은 밖으로 추방당한 크리스토와도 다르고, 학살 당한 네 명의 경우와도 달라. 이건 모든 사람이 보게 돼. 방아쇠를 당기면 진짜 끝장이야. 진짜 비밀이 뭔지 모두 보게 될 거야.”


여기서 리처드가 말하는 “진짜 비밀”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 공동체가 비밀의 공동체로 존재하기 위해서 그들 모두를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Homo Sacer) 상태로 만들어 두고 있다는 것, 다음번 희생자가 내가 아니라고 안도하기에는 구성원으로서 나의 존재 위상이 근본적으로 벌거벗은 상태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폭력적인 지도자 ‘살’의 몰락이자 해변 공동체의 몰락이다. 여기서 ‘살’은 지도자이기는 하지만 통치하지는 않는 상징적인 존재, 혹은 공동체의 창립멤버로서의 작은 권리만을 누렸던 것으로 보였던 것이 실상이 아니라는 점이 확연해진다. 새로운 사람의 공동체 편입을 결정하고, 외부로 함께 나갈 동반자를 지명하며, 추방을 명령하고, 공동체를 위해 누군가에게 총을 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 역사는 그런 사람을 총통(Führer)이나 독재자라고 불렀다. 전체주의 사회란 바로 전체 구성원이 그 지도자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이다. 그리고 다른 누구라도 공동체 바깥으로 추방할 수 있는 생사여탈권을 가진 사람 그 사람만이 주권자이고 나머지는 모두 벌거벗은 생명이다.


섬을 건너 사회로 돌아가는 그들 무리는 좋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아니라 한 무리의 보트 피플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섬을 빠져나가는 난민들의 형상, 그들은 낙원이라는 판타지 안에 거주하다 재난을 만나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자들의 형상이다. 이들은 그토록 위험한 섬에서 그토록 안락한 시간을 보내왔던 것이다. 섬을 떠나는 그들 무리의 뒤로 비치는 섬의 풍경은 이제 악몽처럼 보이고, 기괴한 암벽들의 나열 혹은 동굴처럼 어둡고 음침하며 무서운 자연 환경으로만 보인다.

 

5. 에필로그: 시간 속의 공동체


영화가 끝났다. 마지막 남은 에필로그 장면은 미국으로 돌아와 일상에 복귀한 리처드를 보여주며 몇 마디의 독백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이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펼쳐진다. 인터넷 카페에 들어와 낯선 타인들의 무리 속에서 E메일을 확인하던 리처드는 ‘fs’라는 발신자가 보내온 ‘비치 라이프’라는 제목의 첨부된 파일을 발견하고는 놀라움에 그것을 클릭한다. 섬 사람들의 즐겁고 행복했던 한 장의 사진이 펼쳐진다. 해변에서 함께 즐거워하며 행복했던 사람들이 모습이 담겨 있는 사진. 그 사진 하단에는 프랑수아즈의 이름이 필체로 쓰여져 있다. 좋았던 순간을 함께 누렸던 프랑소아즈로부터 보내진 것이었다. 이것이 이 영화의 엔딩 씬이자 백미라고 보아야 한다.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라고 말했던 사람은 누구였던가! 그 끔찍했던 허위적 공동생활, 그러나 그것은 다시 아름답게 보인다. 흘러가버린 시간은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가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너머’의 이상향이라면, 지나가 버린 시절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저 뒤편의 시간대이고 지금의 현실이 아니라는 점에서 둘은 모두 아름답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참된 낙원이란 일단 잃어버린 낙원이기 때문이다.”(5) 낙원은 사라지고 사진 한 장만이 남았지만, 낙원은 바로 그 사진 속에 있다.

 

  
 

성숙해진 리처드는 말한다. “나는 낙원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믿지만 찾는다고 발견되는 곳이 아님을 안다. 실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낙원이라고 느끼는 그곳이 바로 낙원이다. 만약 그런 순간을 만난다면 그 순간은 영원히 기억된다.”라고. 리처드는 알게 된 것이다. 낙원이란 어떤 공간적 장소도 아니며, 어떤 공동체도 아니고, 어떤 짜릿한 경험을 안겨다 줄 수 있는 모험이나 경험이 아니라는 것을……. 그렇다면 리처드의 이 말은 그저 개인이 그렇게 낙원을 느끼면 그곳이 낙원이라는 흔한 격언 한 구절로 이 모든 이야기를 끝맺으려는 것일까? 그럴 수는 없다. 그것은 그의 짧은 말 속에 암시적으로 숨겨져 있다. 다시 질문해 보자. 그렇다면 리처드가 찾아 헤매었던 파라다이스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는 새로운 여행을 떠나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을 수 있는 공동체를 찾아내야 하는 것일까? 영화를 충분히 따라온 관객들이라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다. 낙원은 끝내 펼쳐진 한 장의 사진 속에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나가 버린 순간,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했고, 그것을 알지도 못했지만 즐거웠던 그 한순간, 시간 속에만 존재했던 공동체, 그리고 지금도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프랑소아즈와 리처드가 나누었던 평행우주론의 이야기나, 별을 찍던 날 밤의 망원경 속 그들의 모습이 중요해진다. 어딘가 존재할지도 모르는 다른 지구 행성 속에 또 다른 나. 그것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 순간을 함께 지냈다. 그들이 공간적으로 찾아내려던 공동체는 이제 시간 속으로 옮겨졌다. 유토피아가 좋은 곳이지만 없는 곳이라면, 과거는 지금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운 것이라는 점에서 유토피아와 조건이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흘러가 버린 시간은 모두 소용없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오로지 기억 속에서만 애타게 회상될 수 있을 뿐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인간은 아직 시간에 대해 정의할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가 버린 시간이 여전히 존재한다(잠재적 공존)는 주장을 입증하지 못한다.


인류가 아직도 풀지 못한 과제인 ‘시간’에 관해 논할만한 역량이 필자에게는 없고, 베르그송의 ‘순수지속’에 관해서도 알지 못한다.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상기, 더불어 프루스트를 설명하는 일은 지금 이곳에서 다룰 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다만 이렇게 정리하도록 하자. 지나가 버린 것이 단지 지금 물리적으로 감촉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없는 것이라면, 그의 존재론은 지극히 물질적인 것이라는 점, 그리고 현재라는 시간이란 고작 아직 오지 않은 시간과 이미 흘러가 버린 시간 속 찰나일 뿐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과거 역시 사라지고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 말이다. 그것이 한때 있었다는 것을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때 내가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 만큼은 그 누구도 지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 지난 과거가 현재에 현전하며, 미래가 오늘에 이루어지듯이 시간의 역설은 아직 우리의 이해 밖에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마치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이 그렇듯이……. 

 

 

(1) 김용규,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웅진, 2006, pp. 213~215에서 요약적으로 인용.
(2) 이진경 외 지음,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문학과 경계사, 2002, p.18 요약적 인용.
(3)다니엘 부어스틴, 정태철 옮김, 』이미지와 환상』, 사계절, 2004, pp.121~170 요약적 인용.
(4) 사정이 이러한데, 우리들이 책과 TV에서 보게 되는 원시의 순수성을 가진 것처럼 소개되는 마을과 공동체들이 미디어에서 소개 받는 그대로일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할 것이다. 만일 그 마을이 그대로 유지되기를 원한다면 그곳에 가지 말거나 혹은 알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영화 <비치>의 촬영지였던 태국의 피피 섬도 영화 때문에 더욱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고, 지금은 리처드가 혐오했던 그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명소가 되었다. <비치>를 본 후 이곳을 찾아가려는 사람이 있다면, 실제의 피피 섬에서 영화 속 풍광을 기대하는 일은 몹시 위험하다는 것을 일러둔다. 실제의 섬과 영화 속 섬의 차이에서 환멸 그 자체를 맛볼 작정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본 낙원의 이미지를 현실에서 구경하려다가 영화 속에서 보았던 낙원 이미지의 ‘부재’를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이 영화의 주제를 직접 체험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음도 알려둔다.
(5) 마르셀 프루스트, 김창석 옮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권, 국일미디어, 1998, p.255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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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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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손시내의 시네마 크리티크] 모종의 가족들, <유전>을 보고 떠올린 <45년 후>와 <도쿄 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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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97,280
70[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무의미의 의미, 실존적 부도덕 인간의 부활 - 요르고스 란디모스 감독 <킬링 디어>

서성희

2018.10.096,969
69[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차이의 효과, 혹은 홍상수의 여자: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클레어의 카메라>

서성희

2018.10.096,219
68[이호의 시네마 크리티크] 백범을 만드는 힘과 배치들 ― 영화 <대장 김창수>

서성희

2018.10.096,898
67[최재훈의 시네마 크리티크] 가면의 쌩얼 - <프랭크>

서성희

2018.10.096,749
66[서곡숙의 시네마 크리티크] <비포 선라이즈> ― 관계에 대한 성찰의 여정과 사랑의 서막

서성희

2018.10.096,318
65[이수향의 시네마 크리티크] 만들어진 가족과 도둑맞은 가족-영화 <어느 가족>

서성희

2018.10.097,572
64[장석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산책하는 침략자, Before We Vanish> - 외계인의 지구침략을 가정한 언어공포물

서성희

2018.10.096,621
63[정동섭의 시네마 크리티크]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 ― 비루한 세상에 맞선 철학

서성희

2018.10.095,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