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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 성스러운 이야기 혹은 이갈리아 예수 - 전고운 감독 ‘소공녀’

 
 
1.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가사도우미라는 일. 그저 몸으로 하는 일이다. 인간이 원초적으로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가를 암시한다. 더 중요한 의미는 노동하는 의미와 더불어 인간은 자기 짐을 누구에게 전가하지 않고 스스로 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여성의 향기가 느껴지는 영화다. 여성의 시각에서 남성은 스스로를 속박하는 짐승이다. 남성은 폭력적이고, 일방적이고, 권력적이고, 주도적이다. 한솔(안재홍)은 미소(이솜)가 힘든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항상 자책한다. “내가 거지니까 너도 거지인 거야.”이 대사는 여자가 남자의 부속물일 때만 비로소 성립된다. 여자와 남자가 동등하다면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그와 같은 말을 남자들은 수시로 한다. 남자들은 여자와 상의 않고 항상 자기 주도적으로 여자를 배려해주고 싶어한다. 때로 그것이 지나치면 폭력적으로 표현되기조차 한다. 남자들은 그 폭력도 다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리화한다. 남성이 여성을 대하는 생각은 한 마디로 소유다. 반면에 여성을 대변하는 미소의 생각은 공유적이다. 그녀는 여자든 남자든 공유하는데 있어서는 구별이 없다고 본다. 남자후배 한대용의 집에 있다가 온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했던 미소와 달리 질투심에 불탄 한솔의 반응은 극명하게 대립된다. 이 영화는 여자와 남자가 어떻게 다른 지를 보여주며 이 사회가 여성주체를 이해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불편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 영화는 여성시각의 세계관을 잘 표출해 낸다. 

미소는 한솔과 헤어지면서 흐느낀다. 그 이전 한번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남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 장면은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이 영화의 가장 뭉클한 장면중 하나다. 강인한 그녀에게도 체온이 필요했던 것이다. 처음 장면부터 그녀는 이 점을 분명히 한다. 따뜻한 봄까지 섹스를 미루자는 그 말은 코믹하지만 뼈가 있는 말이다. 그녀는 돈도 명예도 그 어떤 것도 필요치 않다. 그녀의 생존력은 강하다. 하지만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삶을 따뜻하게 해줄 체온이었던 것이다. 그 체온이 있어야 섹스든 뭐든 할 수 있고, 고독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한솔을 배신자라 말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동반자란 누가 누구를 위해 희생하는 게 아니라 같이 걸어가는 사람이란 뜻이다. 한솔은 남녀가 같이 있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돈을 벌러 떠나는 것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옆에 있다구 (좋을게 뭐야)”라고 말하고 있지만 화면은 그 다음 대사를 들려주거나 보여주지 않는다. 그건 남자의 위선이고 힘든 여자를 더 힘들게 만드는 거란 걸 감독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일을 기약하며 한솔이 길을 떠난 것을 미소는 이해하지 못한다. 가난해도 같이 있어주는 것이 돈 보다도 더 큰 힘이 되어준다는 걸 또한 남자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물질의 노예보다 하루의 위안이 더 낫다. 그래서 그녀는 서민들의 스트레스를 가장 값싼 가격에 풀어버리는 담배와 그 값으로 최고의 부르조아적인 정신적 여유를 즐기는 고급 위스키를 선택 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그 속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미소가 제안하는 것은 지금까지 한국의 그 어떤 지식인도 제시하지 않았음직한 신선하고도 주체적인 명제임이 분명하다. 더구나 여성의 시각에서. 발칙하며 향기롭다. 그 명제가 한국사회가 그간 근대 백년간 정신없이 질주하며 물질의 바다속에서 빠뜨려버린 진주같은 인간적 가치임을 <소공녀>는 애써 역설한다. 

  
▲ 성공을 위해 이기적으로 변한 여자
 
2.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영화에 의하면 우리 사회는 두 가지 이분법으로 구조화되어 있고, 그건 사회적 통념이 인물에 의해 형상화된 알레고리 구조라 볼 수 있다. 각박/인정, 물질/정신, 관습/일탈, 정착/유목, 획일/개성, 노예/주인, 세상/나, 변함/불변, 과거/현재, 현실/꿈, 남성/여성, 가정/독신, 속박/자유. 이 왼쪽 항에 여섯 명의 인물이 포진하고 있고 반대항에 미소의 가치가 위치한다. 그녀의 독특한 매력인 담배와 비싼 위스키는 바로 이 이분법의 자유롭고 개성적이며 탈관습적인,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정신에 해당할 것이다. 또한 여섯 명의 인물은 우리 사회가 사람을 가두고 옥죄고 고통스럽게 하는 삶의 조건들에 각각 동일시될 것이다. 

최문영, 베이스. 쉬는 시간에 영양제 맞는다. 그만큼 악랄하게 성공을 향해 뛰고 있다. 같이 잠 못잔다는 핑계로 미소를 거절한다. 그녀는 회사에서 성공하려는 생각에 미소를 지울 수밖에 없다. 미소가 보고 싶었다고 하자 문영은 여전하네,라고 답한다. 그녀의 간단한 말 속에는 성공을 위해 그녀가 구겨버린 그들의 복잡한 과거가 숨겨져 있다.  

정현정, 키보드. 가난한 집으로 시집갔고 능력 없는 남편 밑에서 주부의 일에 찌들어 산다. 여성을 인정해 주지 않는 전형적인 가부장제 가정.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남편으로 인해 가사일에만 치어서 아예 꿈을 꿀 시간 조차 없이 사는 주부. 

한대용. 드럼. 물질을 결혼과 행복의 조건으로 알고 있다가 스스로 묶여버린 존재. 190만원을 월급으로 받지만 100만원씩 20년을 집 대출금으로 갚아야 한다. 스스로 선택한 물질의 굴레속에 갇혀 있는 슬픈 청춘.  

  
▲ 여자를 편하게는 해줘도 이해하지는 못하는 남자
 
김록이, 보컬. 그는 미소를 여자가 아닌 집안의 구성물로, 부모를 위한 효도상품쯤으로 생각하는 마쵸적 전형. 역시 자신만의 생각이고 여자를 그 생각에 맞추는 식이다. 여성을 주체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전통과 관습의 벽이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이 벽을 허물기란 정말 힘들다. 여성을 도구나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남성중심, 권위중심의)행복한 우리 집’에 미소는 편입되길 거부한다. 우리 사회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여성이 사회에서 아무리 성공한다 해도 여성에게 불리한게 사실이다. 미소는 일방적으로 말하는 선배에게 말한다. “집이 없어도 내게 생각과 취향이 있다는 걸 알아달라”

최정미, 기타. 가난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희생하고 부자집으로 시집간 케이스. 사랑이라곤 없다. 부를 대물림 하기 위해 자식부양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재벌가에 숨죽여 지낼 뿐이다. 부를 놓칠 수 없어 노예처럼 사는 여자. 정미는 가난을 극복하는 것은 부자가 되는 것 이라고 복수하듯 살아가며 미소를 자신의 인생관에 견주어 염치 없는 인간이라고 나무란다. 

민지. 자신의 불행이 자신의 탓이라고 믿는 여자. 자신이 헤프고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고 그렇게 벌을 받는거라고 생각한다. 미소는 헤픈 것이 무슨 문제인가라며 그녀를 위로해준다. 민지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건 자신이 돈을 버는 수단이 부끄럽고 최하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도 대학을 나왔고 몸 파는 일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소는 청소하다가 파묻혀 있던 민지의 대학졸업사진을 우연히 발견하곤 먼지를 털어 세워놓는다. 이 장면은 이미지로만 전개되는 영화적 서사의 전형이다. 대학졸업장이 이 땅의 여자로서 불리한 삶의 조건을 변화시켜주는 요소로 작용하는 않는다는 절망의 언어로 전달된다. 여자로서 그 이상의 다른 수단과 방법도 없는 입장에서 생존을 위해 취할 수 있는 행동을 미소는 긍정한다. 누구나 그런 상황에선 그렇게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민지만이 죄의식을 갖을 필요는 없단 뜻이다. 그건 예수가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준 논리와 같다. 이 영화는 전체적인 구조에서 예수의 행적을 모방한다. 

자신의 소신과 생각을 말하면서 미소는 어느덧 예수의 말과 행동처럼 변해 간다. 미소는 민지의 헐벗은 다리에 자신의 옷을 벗어 따뜻하게 덮어준다. 밥을 먹었느냐는 미소의 말에 민지는 감동의 울음을 터트린다. ‘가라.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는 예수의 말 한마디에 감동한 이스라엘 창녀의 느낌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이러한 설정이 감독의 의식이든 아니든 상관 없다. 이 부분은 그렇게 읽히고 그래서 감동적이다. 서울의 한 복판 현재 시점에도 예수가 살아 걸어 다닌다는 것을 영화속에서 만난다. 분명 놀라운 멧세지다. 예수는 이 세상에 하늘의 멧세지를 가져왔고, 감독은 오늘 다시  다른 방식으로 전달한다. 그건 산상수훈의 멧세지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 나라가 저의 것임이요.’ 예수는 길만 돌다가 죽었다. 미소도 길을 전전하다 혼자 남겨진다. 그 둘은 다 집이 없다.    

  
▲ 일상에 지쳐 꿈을 아예 잃어버린 여자
 
3. 집, 최소의 조건

<소공녀>의 의역 영문 ‘microhabitat’는 ‘미소(微少) 서식지(棲息地)’를 말한다. 최소한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미소는 그렇게 살아간다. 그녀 이름 미소는 그래서 ‘smile’도 되지만 ‘micro’도 된다. 미소, 미세, 최소 다 된다. 오히려 적정이 맞을 것이다. 법정스님이 말한 무소유. 소유하지 않는 게 아니라 적게 소유하는 것. 최소한만 소유하는 것. 데이빗 소로우가 월든 호수가에 통나무집 짓고 자경자급하면서 살던 관념. 자급경제다. 그런 이들에게 맞는 미래는 공유경제일 것이다. 그래서 미소는 친한 사람들, 과거 낙원에서 같이 살던 사람들을 찾아 공유의 손을 내밀었던 거다. 미소는 그들은 하나같이 타락해서 더 이상 낙원생활 같은 것은 그리워 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고, 불행해진 그들을 구원해줄 멧세지를 하나씩 남기고 세상을 떠나 홀로 살게 된다. 그들의 과거 밴드는 이상향이다. <골든 슬럼버>에서도 밴드가 등장한다. 그건 잃어버린 이상향이다. 미소가 주장하는 바는 꿈을 잃어버린 인간은 살 의미가 없다는 것과 같다. 

4. 이갈리아판 예수의 구원서사

그녀는 옛날이 그리워 집에서 나온 이후 친구들의 집을 전전한다. 집에 얹혀 지내는 것을 유람이라고 표현한다. 한국고전영화에 비슷한 서사구조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와룡선생 상경기>(김용덕, 1962)다. 시골에 사는 초등학교 은사 와룡선생이 서울에서 출세해 사는 제자들을 방문한다. 하지만 결말은 못난 제자들의 비뚤어진 모습을 보면서 다시 시골로 내려 간다는 얘기다. 그것은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이야기>(1953)에서 연유한다. 시골에 있는 부모가 동경에 사는 자식집에 와 있지만 불편해 하는 자식들 때문에 다시 시골로 내려 간다는 씁쓸한 이야기다. 오즈는 이미 <외아들>(1936)이라는 초기 작에서부터 서울로 와서 살기 어려운 상황에 관심을 표명한바 있다. 하지만 단지 서사가 아니라 주제의 측면에서는 파졸리니의 <테오레마>(1968)나 그것을 모방한 하길종의 <화분>(1972), 모리타 요시미츠의 <가족게임>(1983) 등이 유사하게 느껴진다. 그들의 공통분모는 메시아주의며 구원의식이다. 가정교사가 가정에 들어와서 그 가정의 물질적 삶을 정신적인 가치관으로 변화시키고 떠나간다. 남의 집이란 이 세상이고 가정교사는 물질자본주의 세상에 들어온 예수를 은유한다. 이 영화들은  예수의 구원 모티프를 근거로 하고 있다. 인류는 타락했고 예수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지상에 왔고 박해를 받다 죽고 부활한다는 서사이다. 예수는 죽음으로써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행위를 하였으며 자신을 통해 사람들을 하느님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미소는 처음부터 인류를 위해 희생을 계획했던 예수가 아니다. 하지만 미소는 자신의 착한 심성과 세상의 몰이해로 말미암아 예수서사의 주인공과 결과적으로 일치하게 된다. 그녀는 본의 아니게 예수의 길을 걷게 된다. 그녀는 타락한 세상에 물든 동료들의 고통을 보면서 하나 하나 그들을 위로하고 결국 자신도 냉혹한 자본주의 사회를 힘들게 살아가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친구에게 받아온 쌀이 들고오면서 봉투에 난 구멍으로 다 땅에 떨어진다. 비둘기들이 주워먹는다. 그건 마치 같이 먹고 살자는 의미처럼 들린다. 자신도 모르게 쌀이 빠져나가 비둘기를 먹여살리는 일이 미소의 운명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미소는 남을 먼저 걱정해 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주부인 현정을 위해 반찬을 만들어 주고 떠난다. 그녀는 어느 곳에도 갈 곳이 없지만 항상 갈곳이 많다고 상대를 안심 시킨다. 그녀가 마지막에 도달한 곳은 자기만의 공간이다. 그곳은 죽은 예수가 부활하여 도달한 하느님의 공간이고, 그녀 자신이 곧 하느님이었던 것이다. 동학(東學)의 인내천(人乃天), 즉 하늘이 사람이라는 이치를 깨닫게 된다.

그녀의 삶은 행복하지만 물질적으로는 희생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녀는 몸 파는 여성 민지를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을 보면 저는 기뻐요.” 미소는 남의 행복을 기꺼이 즐거워 해주는 사람이다. 그녀의 삶의 방식은 좋아하는 일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남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삶이다. 

그녀가 집을 순례하면서 사들고 가는 계란의 상징성은 무엇일까? 계란은 마치 그녀의 복음처럼 느껴진다. 멧세지다. 그녀는 천국의 메시지를 갖고 지상에 내려온 것이다. 각 집안 마다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들은 계란을 먹으며 자신들을 위로해주고 떠난 예수, 미소를 떠올린다. 민지는 계란과 같은 의미의 닭백숙을 먹으며 미소가 만든 최후의 만찬을 즐긴다. 한솔과 헤어질때도 스켓치북을 선물한다. 그건 한솔의 잃어버린 꿈이다. 미소는 누구에게든 희망을 선사하며 그걸 포기하지 말라고 말한다. 

  
 
미소는 일곱 명의 사람들과 만난다. 그건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일주일과 같은 구조다.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일하고 일요일 하루를 쉰다. 마지막 안식일처럼 안배되는 것이 애인 한솔이다. 민지는 그 직전에 그녀의 일자리가 끊어지는 최후의 만찬에 동참하고, 마지막 만나는 한솔마저 2년이라는 긴 세월을 남기며 떠남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모든 여정을 ‘완성한다’. 그녀는 혼자만의 고독속에 남겨진다. 상징적 죽음인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고개를 숙이며 ‘다 이루었다’고 한 대목이 그곳일 것이다. 미소는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홀로 카페에서 눈을 맞이한다. 눈은 하늘이 그녀에게 내리는 황홀한 보답이다. 그녀의 흰 머리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의 흰색과 일치한다. 그녀의 영광스런 죽음이다. 하늘에서 예수에게 보낸 하느님의 음성. “너는 내가 사랑하고 기뻐하는 나의 아들이다.” 영화에서 남성적 성경서사전통은 여성서사로 바뀌어 이갈리아판이 된다. 어머니 하느님이 말한다. ‘너는 내가 사랑하고 기뻐하는 나의 딸이다.’ 

  
▲ 불행한 인간들에게 구원의 멧세지를 보내는 이갈리아 예수, 미소
 
그녀는 그 순간에도 자신을 박대하고 슬프게 했던 사랑하는 형제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그녀는 도시의 유혹적인 불빛을 뒤로 한 채 한 개의 불빛으로 타오르는 고독하면서도 옹골찬 모습으로 ‘부활한다’. 어느 시점에서부턴지 감독은 미소의 존재를 보여주지 않는다. 장례식에 모인 다섯 명의 제자들(?). 장례식(생명의 소멸)에서 청첩장(생명의 잉태)이 오가고, 죽음과 부활의 이치는 인간의 도심숲속을 배회한다. 미소가 항상 계란을 사갖고 갔던 의미는 어쩌면 생명과 그 부활을 믿게 하려는 신비한 섭리였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알에서 시작하니까. 그들은 오지 않고 보이지 않는 미소라는 스승(?)에 대해 이야기 하며 참회하고 반성한다.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 각자가 그들의 스승을 버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통절히 반성하는 중이다. 미소는 그들에게 더 이상 임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들에게 참되게 살아갈 희망을 안겨주고 영원히 사라졌다. 마치 이천년 전의 예수처럼. 그녀는 실체 없는 담론과 유령 같은 존재로, 부활하여 도시속을 떠돌아 다닌다. 그녀는 백발이 되었고 얼굴은 보이지 않은채 위스키 한잔 값이 1200원에서 4000원으로 오를 때까지의 긴 시간을 살아 있다. 그녀의 모습은 황량한 사막같은 아파트 단지 한 켠 한강 고수부지에 타오르는 빛으로 존재한다. 우리들 마음속 한 점 성령의 빛처럼. 언젠가 바닥에 떨어진 쌀을 주어먹던 비둘기의 존재들처럼. 미소가 떨어트린 쌀들을 주어먹던. 

글·정재형
영화평론가이며 동국대 교수이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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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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